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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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이면서 몸을 파는 여자로 그를 만났다는 사실이 차츰 가슴을 찢어놓기 시작할 때쯤, 그가 내게 고백해온 것이 바로 '타잔'이라는 사실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놀라움보다 속으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원죄'를 가졌듯, 그에게도 감춰온 '원죄'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96쪽

내가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에 나는 살맛을 느꼈다. ㅁ시에 내려와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남편과 정우는 습관적 삶에 빠져 있었고, 내가 어떻게 정성을 쏟든 정체된 그들의 습관에 더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아니 그들만이 빠져드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제, 나까지 변화라곤 없는 그들의 수렁 속으로 끌고 가는 형국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물론 정우를 픽업해 학원으로 데려가는 일도, 남편의 저녁밥상을 차리는 일도 게을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삶을 의무감에 의한 습관에 더 강력히 복종시키는 일에 불과했다.-102쪽

아예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외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단계, 그 너머의 또 다른 특수한 곳에 존재했다. 아이를 위해 외국에 저택을 마련한 부모도 있었고, 특별 과외를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유학 간 아이들이 특별히 받는 과외는 주로 승마나 골프 같은 과목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이 '성골'이라고 믿었고, '귀족'으로 성장했다. 귀족으로 성장해 돌아오면, 부모들이 가진 재산이나 기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공부해 외고, 서울대를 나온 가난한 집 수재들이 그들의 고용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정우처럼 가진 것 없는 집 아이들은 그들 귀족의 명을 받고 그들의 재산을 더 불리는 전사로 키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부의 세습적 구조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깊어졌다. 그리고 그런 구조는 전선조차 뚜렷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계적이었기 때문에, 뿌리치거나 깨부술 방도가 전무했다. 뿌리치면 실패자로 세상 끝으로 밀려나야 했고, 깨부수려 하면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니,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귀족의 전사가 되는 길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129쪽

정우는 때마침 이불을 발로 차내며 뽀드득뽀드득 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예전엔 보지 못했던 습관이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가 이를 갈면서 걸어가야 할 벼랑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몸을 팔면서까지 부추기고 내몰아온,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이로 난 광포하고 가파른 벼랑길이었다. 패배하면 죽는다, 라고 말해온 것이 나였고, 아비가 갔던 길을 답습하면 안 된다, 라고 채찍질해온 것이 나였다.
나는 그애가 오로지 전사가 되기를 바랐다.
지어미의 자리를 다 버리면서까지 내가 '비즈니스'에서 얻은 수익으로 사고자 한 것도, 생각하면 그 광포한 전사의 길로 아이를 내몰기 위한 가죽 채찍 같은 것에 불과했다. 전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선은 이미 침대 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그 어미의 가죽 채찍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세습되는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직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136쪽

겉으로는, 10대에 이미 헌 신발처럼 팽개쳐버렸던 사랑의 로망을 뒤늦게 찾아 지닌 듯했으나 그녀는 기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가 청년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돈을 앞세워 새로운 명품을 사려고 하는 것에 불과했다. 자동차와 옷과 장신구가 지루하니까 '청년'을 돈으로 사서 명품의 서랍장에 담으려고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형태의 '비즈니스'에 나름대로의 낭만성을 보탠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잠시 동안의 동정심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동정심은커녕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믿는 새로운 '명품'으로부터 어서 빨리 버림받기를 차라리 나는 바랐다.-154쪽

이상한 것은, 허헛, 하는 사람들의 표정 속엔, 농담을 가장하고 있긴 했으나 '타잔'에 대해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뛰어난 '비즈니스맨'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숭상의 눈빛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소외받고 사는 가난한 사람은 물론,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자영업자나 월급쟁이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 '타잔'을 분명 그리워했을 뿐 아니라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실패했거나 전망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타잔은 실패한 그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이상한 현상이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좀도둑들조차 자신을 가리켜 '타잔'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러므로 비즈니스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평가를 누구나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195쪽

아버지가 돼본 적이 없는, 그래서 이 나라에서 부모 노릇하는 것이 어떤 오욕과 질곡을 견뎌야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젊은 형사였다. 실패의 대를 물리는 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라는 사실에 대해 나는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싼값으로 여자의 몸을 사려는 사람들일수록 몸을 판 여자에게 더 가혹하게 군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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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눈물 외전
김진만.김현철 글,사진 / MBC C&I(MBC프로덕션) / 2010년 4월
절판


그들만의 언어가 사라진 부족이 그들만의 전통과 철학을 지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브라질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 역사를 보더라도 원주민의 전통적 삶의 소멸을 담보로 대체되었던 것은 빈곤과 소외였다. 자본이 힘인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곤층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말을 배운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향할 것이다. 그만큼 도시의 유혹은 강렬하다.
아마도 그들은 변화의 회오리에 말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존을 가지려는 자들의 끈질긴 추구는 삐융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작은 자의가 아니었지만 그 책임은 온전히 원주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55쪽

비행기에서 내려 조에족의 추장을 찾았다. 하지만 조에족에겐 추장이 없었다. 사실, 아마존 부족 중 상당수는 추장이 없다고 한다.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 생활이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그들과 교류를 시작하게 되면서 부족의 대표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추장이 생겼다. 백인과의 협약이나 계약 등을 위해서 백인 쪽에서 먼저 부족의 대표 선출을 요구한 것이다. 조에족은 미접촉 부족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를 보기 위해서 이틀이나 걸어온 부족민들도 있었다. 그들을 촬영하러 갔지만 정작 관찰을 당하는 건 우리였다. 조에족은 우리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행이다.-163쪽

사냥을 하는 것만큼 음식을 나누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도록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인도 어린아이도 배제되지 않는다.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여기서는 한국처럼 은퇴 이후의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닌은 자리에 없는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며 모두를 위해 고기를 나눴다. -180쪽

우리 촬영 팀이 무엇을 하든 조에족 아이들이 늘 따라다녔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다른 부족민들은 티셔츠를 달라, 신발을 달라는 등 이것저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탐내기도 했다. 심지어 조연출 정민이의 등산화가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조에족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부채를 빌려 가서 서로들 펴보기도 하고 부쳐보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꼭 돌려준다. 필요 없는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183쪽

바로가 사냥을 통해 가족을 먹인다면 와후는 늘 곁에서 가족을 돌보며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가족을 지켜주는 와후가 있기에 바로는 며칠씩 사냥에 열중할 수 있다. 원시의 거친 삶은 일처다부, 일부다처, 다부다처를 필요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부족의 생존과 유지에 필요한 지혜의 산물이다.-186쪽

1,500만 년 전,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남아메리카 판과 나스카 판이 충돌하면서 안데스 산맥이 형성되었다. 이 산맥이 태평양으로 흐르던 물길을 끊어 아마존 유역은 고립되고 만다. 그때 고립된 것은 아마존 강만이 아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보뚜도 태평양으로부터 고립되었다. 그 이후로 분홍 돌고래는 아마존 강을 누비게 된 것이다.
게다가 보뚜는 독특한 분홍빛을 띠고 있지만 어떨 땐 카멜레온처럼 빛이 변하기도 했다. 물 밖으로 몸을 내밀 땐 흰색과 회색이 섞인 빛을 띠기도 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아마도 물과 햇볕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209쪽

우리는 더 빠르게 살려고만 한다. 아마존의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속에 사는 생물들 역시 모두 같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빠르고 포악해야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 그 정글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원시를 슬로스에서 봤다.
원시의 속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했다. 빠르게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빠르고 잔인하고 거대한 동물들이 살아가는 아마존, 이곳에서 슬로스는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었다.-227쪽

목장을 가장 많이 가진 마토그로스 주지사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이들이 못 먹고 교육받지 못할 때는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지금은 우리가 나무를 한 그루만 베어도 시끄럽게 군다."
이분법적으로 보면 자연과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파괴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살아남기 위한 고통의 몸부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목장주들의 갈등 또한 쉽게 풀릴 만한 숙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248쪽

자연은 인간이 원하는 만큼 끝없이 내줄 수 있는 화수분이 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도 쓰나미 같은 소비를 멈추지 못하는 건 개개인의 욕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을 부추기고 주입시키는 인간 사회의 견고하고 영악한 시스템 탓이다. 무엇이든 소유하지 못하면 죽거나 망하거나 미치거나......-253쪽

자라와 마을 사람들은 어획철이 되면 함께 강으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 물고기를 잡아서 올린 수입은 마을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빼고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다. 그러다 보니 빈부 격차 따위 이 마을엔 없다. 도시에서의 가난은 빈곤한 생활 외에 상대적 박탈감까지 덤으로 주기 마련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란 얼마나 아픔이 많은가. 그런 격차도 박탈감도 없는 이곳 마을에선 이웃을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차갑지 않다.-273쪽

다비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식들은,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숲과 식물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제 자식과 당신의 자식이 앞으로 살아가려면 자연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세상, 땅, 숲의 마음에 따라 백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개발, 정치, 바이러스가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의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대가는 당신들이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식들은 악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마존이 어떠한 곳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 메시지입니다. 당신들은 이것을 한국에 알려주세요."-289쪽

조에 부족 내에서 아직까지 살인 사건은 보고된 적이 없다고 후나이 사람이 말했다. 조에 부족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분노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눈빛이 깨끗하다. 그건 역설적으로 문명의 맛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우린 지금 문명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음 때문에 타인을 죽이기도 하는, 일상의 다툼에서조차 자신의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분노가 얼마나 크기에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앗을 수 있단 말인가. 문명을 누리는 대가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마존의 두려움을 보러 갔었다. 아마존은 아마존이 가진 두려움이 우리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고, 심지어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큰 두려움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었다.-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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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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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사십칠 일간 계속되었다. 이십 일째부터 신병들이 투입되었는데, 칠 일 이상 살아 있으면 고참병이 되었다. 대원이 다섯 명 남은 중대장에게 연대장은 고지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돌격하라우!"
시화평 전투는 쌍방이 모두 손실을 돌보지 않고, 죽음으로써 삶을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죽음을 갚는 무한소모전이었는데, 그 전략적 득실관계는 지금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유해발굴단장 강중령은 전사戰史에 썼다.-150쪽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속의 먼 뿌리 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뜨거운 습기에 흔들려서 산맥의 사면은 살아 있는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내렸고 나무들의 숨이 산의 숨에 포개졌다.
소나기는 산맥의 먼 끝자락부터 훑으며 다가왔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안으로 눌려 있던 숲의 날숨이 비가 그치면 골짜기에 가득 차서 바람에 실려왔다. 비가 그친 한낮에 어린 벚나무 숲의 바람은 가늘고 달았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내리쪼이면, 잎이 넓은 떡갈나무숲의 바닥에는 빛들이 덩어리로 뭉쳐서 훝어져 있었고, 뭉쳐진 빛들의 조각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그림자 사이를 떠다녔다.-177쪽

아이들에게도, 그들 나이의 고유한 더러움이 있다. 어른에게서 옮겨온 더러움도 있을 테지만, 아이들에게 자생적인 더러움이 있는 것이다. 그 더러움은 원색적이고 본래적인 것이어서 어른들의 더러움보다 훨씬 더 가여웠다.
(...)
-너네 집 몇평이니?
-우리 집 서른네 평이야.
-뭐? 우리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더 높은데, 왜 너네 집이 더 커?
-너네 아빠는 높아도 돈은 못 버니까 너네 집이 작은 거야.
-우리 아빠한테 일러서, 너네 아빠 혼내줄 거야. 너네 집도 뺏을 거야.-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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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제12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 창비시선 310
송경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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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경찰서에서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탐앤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
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일년치 통화 기록 정도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 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10쪽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16쪽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

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는 음울했다
벼락 맞은 나무처럼 쓰러져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눈물바람으로 남북을 오갔다
수천명의 목을 자른 한 자본가는 수천 마리 소떼를 몰고 가
영웅이 되었다 그때마다 거리에서 부딪쳤던
곤봉의 세월이 허리를 끊으며 떠오르곤 했다

3년째 천막농성을 하다 구속당한
전자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안부와 무관하게
양장 고운 『체 게바라 평전』은 불티나게 팔렸다
8․15 사면복권증을 받아온 한 선배는
넌지시 매문을 물어왔다

"기획출판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데……"
-32쪽

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

(...)
구로3동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곳이었다고, 비 오는 날이면
구종점 마루에 장화를 든 아낙과 아이들이 줄줄이 서서
공단에서 돌아오는 아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삼성래미안 아파트가 서 있지만
얼마 전까지도 닭장집이 있던 곳
사는 곳 어디냐 하면 에둘러 말해야 했던 곳
(...)

-58쪽

생태학습

십수년, 주말농장 하나 없이
아이에게 모진 생태교육만 시켰다

광화문 시청앞에서
전경들이 파도처럼 쫓아오면
바다게들마냥 아무 구멍으로나
얼른 들어가야 한다는 학습

비정규노동자들이 올라간 고공농성장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새들처럼
하늘로 올라가 둥지도 틀 줄 알아야 한다는,
원숭이처럼 어디에라도 매달릴 줄 알아야 한다는 학습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못난이들의 집은 언제나
개미처럼 쉽게 헐릴 수 있다는 학습
쫓겨나지 않고 버티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학습

그래도 잡은 손만은 꼭 놓지 말고
가야 한다는 학습 그렇게 밟히고도
엉겅퀴처럼 다시 일어나 싸우는 질긴 목숨들도 있다는
-64쪽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72쪽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붕어빵아저씨 고(故) 이근재 선생님 영전에

(...)
500여 노점상들을 거리에서조차 몰아내기 위해
31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는 고양시청
30명도 채 되지 않는 양민들의 생존권을 빼앗기 위해
150명의 폭력배를 고용한 일산구청
저항하면 공무수행 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경찰
폭력배를 고용한 관공서를 경찰이 보호하며
서민을 향한 사제 폭력이 공무로 수행되는 나라
(...)

-78쪽

너희는 고립되었다-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에 부쳐

가난한 인력시장에서
불법으로 언제든 살 수 있는 64만원짜리 싼 기계들이 있었다
1년만 쓰다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 기계들
그 기계들도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고
발개지는 볼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여덟 시간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벌어주는 희한한 기계들이었다
임대사용료가 터무니없이 싸고
사용 후 재처리 비용도 필요없었다
너희는 이 희한한 임대업에 맛 들여
일상 라인에는 파견직을 못 끄게 되어 있음에도
무려 200여대의 기계를 불법으로 빼곡이 들여놓았다
사장의 입이 기쁨에 찢어질 때,
기계들의 손발은 부르텄고 가랑이는 찢어졌다
-81쪽

도저히 참지 못해, 그들이
싸디싼 비정규기계가 아닌
하자 없는 정규사람임을 외쳤을 때
너희는 본보기로 수십대의 기계를 대책 없이 내다버렸다
불법으로 쫓겨날 수 없다고
일손을 멈추고 공장을 점거하자
너희는 용역깡패들을 채용했다
무섭지 않으냐고, 겁나지 않으냐고
허리를 부숴놓겠다고 위협했다

그것이 빛 때문일까 싶어 전기를 끊었고
수도를 끊었고, 밥 주던 것을 끊었다
숨소리 하나라도 새나갈까
철문 사이사이를 틈 하나 없이 꽁꽁 메웠다
혹 그것이 꿈 때문일까 싶어
그들의 미래에 22억원에 달하는 가압류 딱지를 붙였고
그것이 혹 총명한 지도부 몇 때문인가 싶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수억짜리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지만
너희는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
-82쪽

이 냉동고를 열어라

불에 그슬린 그대로
150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
얼어붙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다

까닭도 알 수 없다
죽인 자도 알 수 없다
새벽나절이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토끼처럼 몰이를 당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쓰레기처럼 태워졌다
그들은 양민이었지만 적군처럼 살해당했다

평지에선 살 곳이 없어 망루를 짓고 올랐다
35년째 세를 얻어 식당을 하던 일흔둘 할아버지가
25년, 30년 뒷골목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할머니가
책대여점을 하던 마흔의 어미가
24시간 편의점을 하던 아내가
반찬가게, 커피가게를 하던 고운 손이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절박하다고
호소의 망루를 지었다

돌아온 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였고
너무나도 신속한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었다
여섯 명이 죽고 십여 명이 다치고
또 십수명이 구속되었다
이웃이 이웃을 죽였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96쪽

그렇게 여섯 명이 죽고도
이 사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수의 시민들이 차벽과 연행에 맞서
추운 겨울부터 더운 초여름까지
어두운 거리에서 쫓기며 항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 역시 수배되거나, 체포되거나, 소환당했다
용산참사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용산참사를 추모하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하루 이틀 날짜가 쌓여 다섯 달이 되었다
하,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다섯 달이 되었다
하, 죽어서도 무슨 죄를 그리 지어
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날이 다섯 달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용산에서 아직도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열린 사회라고 한다 억울한 죽음들이
다섯 달째 차가운 냉동고에 감금당해 있는데
살 만한 사회라고 한다
-97쪽

150일째 우리 모두의 양심이
차가운 냉동고에 억류당해 있다
150일째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차가운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
150일째 이 사회의 역사가
차가운 냉동고에 얼어붙어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용기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권리가 묶여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미래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모두의 소망인
평등과 평화와 사랑의 염원이 주리 틀려 있다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
제발 이 냉동고를 열어라
우리의 참담한 오늘을
우리의 꽉 막힌 내일을
얼어붙은 이 시대를
열어라 이 냉동고를
-98쪽

너는 누구에게 물어보았니-MB에게 묻는다

(...)
그렇게 무너뜨리고 싶으면
노동자 농민 서민 도시빈민 실업자 비정규직들의 아픔 위에 도도히 선
저 흉악한 자본의 탐욕이나 무너뜨리렴
그렇게 뚫고 싶은 게 많으면
반백년 원한으로 막아선 저 분단의 철벽이나 뚫어주렴
그렇게 성장하고 싶으면 이제 그만 미국의 품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오렴
신자유주의 착취와 소외, 폭력의 세계화 대열에서 벗어나
씩씩하게 독립해보지 않으련
더 많은 평화를 흐르게 하는 역사의 대운하라면
더 많은 평등을 실어나르는 사랑과 인내와 연대의 대운하라면
그 누가 말리겠니
그 누구든 작은 손이나마
뜰 삽으로 내밀지 않겠니
-104쪽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학생이 아니다
졸업한 지 오래됐다
당신은 노동자다 주민이다
시민이다 국민이다 아버지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남편이고
학부모며 집주인이다
환자가 아니고 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모두다
아침이면 건강쎈터로 달려가 호흡을 측정하고
저녁이면 영어강습을 받으러 나간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구조조정엔 찬성하지만
임금인상투쟁엔 머리띠 묶고 참석한다
집주인이기에 쓰레기매각장 건립엔 반대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과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
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FTA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
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 남성으로
원조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
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 나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반대하지만
북한에 보내는 쌀은 상호주의에 어긋나고
미군은 절대 철수하면 안 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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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품절


사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친교의 기본 조건이다. '친구'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companion에서 com은 '함께', pan은 '빵'을 의미한다. 그래서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이 바로 '친구'인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을 필두로, 문학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는 친교나 연대의식을 상징할 때가 많다. -23쪽

오래 전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했겠지만, 어쩌면 눈물은 사랑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어린왕자(1943)를 쓴 생텍쥐페리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부"라고 했다.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눈물을 찾아 마음의 부자가 된다면 이 찬란한 봄에 맞는 부활의 아침이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53쪽

보통은 '사과'하면 빨간 동그라미에 꼭지 한 개 달린 것을 떠올리는데, 한 입 베어 먹은 반쪽 사과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남과 '다르게' 생각한 재미있는 발상이다.
'다르게 생각하라'(...)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보다 조금 더 창의적으로, 한 번쯤 다른 방향으로,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한 집단에서 이질감, 소외감, 부조화를 불러일으키고 소위 '왕따' 당할 수 있는 요인도 되므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말도 된다.
다양성을 기초로 시작한 나라니만큼,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할 뿐 아니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권장하는 것은 아마도 미국이 미국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일 것이다. 다른 모습, 다른 문화,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다름' 속에서 통일성을 찾으며 변화의 기조로 삼는 것이다.-108쪽

남을 칭찬한다는 것은 포용력, 자신감, 남에 대한 배려를 의미하지만,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숨 가쁘고 각박하게 살아왔다.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 토론법을 가르칠 때 강조하는 말 중 하나가 "당신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You have a point but......"이다. 즉 상대방의 논리를 분석, 부분적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다시 반론을 준비하는 짧은 휴지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더욱 더 평화롭고 건설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112쪽

난 할 수 있어와 난 할 수 있다고 생각해는 분명히 다르다. 어린아이에게 "할 수 있어"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를 구별해 가르치는 것이 어쩌면 미국적 사고방식의 근간인지 모른다. 주어진 상황이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애당초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실용주의 말이다.
흑인 여성으로 처음 미국의 일류 대학인 스미스칼리지 총장이 된 루스 시먼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성공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어려운 것(difficult)'과 '불가능한 것(impossible)'을 구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어려워도 가능해 보이는 일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승산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도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계획했습니다."
'하면 된다'라고 아무리 아우성쳐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둥근 새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라고 생각하는 지혜가 새롭다. 때로는 포기도 미덕이기 때문이다.-117쪽

내가 이제야 깨닫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 기적은 정말 일어난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교실은 노인의 발치라는 것. '하룻밤 사이의 성공은 보통 15년이 걸린다는 것. 어렸을 때 여름날 밤 아버지와 함께 동네를 걷던 추억은 일생의 지주가 된다는 것. 삶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더욱 빨리 사라진다는 것. 돈으로 인간의 품격을 살 수는 없다는 것.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이라는 것. 하느님도 여러 날 걸린 일을 우리는 하루 걸려 하려 든다는 것.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한이 된다는 것. 우리 모두는 다 산꼭대기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행복은 그 산을 올라갈 때라는 것......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든 진리를 삶을 다 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진정한 삶은 늘 해답이 뻔한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페페 신부님)-140쪽

잘사는 나라의 딕과 제인이 나비를 잡고 다람쥐를 쫓으며 꿈을 키울 때, 영희와 철수는 파리를 잡고 쥐를 잡으려고 쓰레기통 옆에 앉아 있었다. 잘사는 나라의 아이들이 펄펄 내리는 눈을 보고 썰매 타고 산타맞이 징글벨 노래를 할 때, 우리는 "펄펄 눈이 옵니다....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라고, 눈이 공짜로 내리는 떡가루이길 바라며 노래 불렀다.
그때 파리를 잡던 손기술, 오징어 다리를 쥐 꼬리로 만드는 창의성, 눈을 보고 떡가루를 상상하는 헝그리 정신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안정을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슬프게도 악착같이 살아온 우리의 정서와 양심은 많이 퇴화해버린 것 같다. -146쪽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폭풍의 언덕 제9장 중에서)

그는 나보다 더 나야. 내가 이 세상에서 겪은 지독한 고통들은 모두 히스클리프의 고통들이었어. 모든 것이 죽어 없어져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계속 존재하는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남아 있되, 그가 없어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겠지. 린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 속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그 아래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 바로 나 자신으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181쪽

엄마와 하느님(셸 실버스타인)

하느님이 손가락을 주셨는데 엄만 "포크를 사용해라"해요
하느님이 물웅덩이를 주셨는데 엄만 "물장구 튀기지 마라"하고요
하느님이 빗방울을 주셨는데 엄만 "비 맞으면 안 된다"해요
난 별로 똑똑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엄마가 틀리든 하느님이 틀리든 둘 중 하나예요.(부분)-229쪽

눈덩이(셸 실버스타인)

눈덩이 하나를 아주 멋지게 만들었어요.
애오나동물로 길들여서 함께 자려고요.
잠옷도 만들고 머리에 베개도 만들어주었어요.
그런데 어젯밤에 도망갔어요.
하지만 그러기 전에-침대에 오줌을 쌌네요.-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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