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소송>에 관한 14매짜리 원고를 보낸 다음, 바쁜(혹은 그런 척 하는, 그런데 척, 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기도 하는) 일상의 와중에 주저리주저리 잡담을 써본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이렇게 시작되는 당혹스러운 소설. 한때는 <심판>이었다. <실종자>(<아메리카>), <성>과 함께 '고독 삼부작'이라 불린다.(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이건 너무나 고독한(!) 소설이다. 뭐랄까. 이걸 쓰는 작가가 얼마나 고독했을지, 그 고독이 거듭,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독한 원의 고독한 중심"(!) 고독뿐이냐.

 

이런 구토도 있다. 이 사법기관의 내부도 그 외부만큼이나 역겨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추측은 옳은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답답했다.”(92) 그리하여,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는 힘겹게 건물을 빠져나가며 배멀미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마어마한 구토(!)이다. 복도가 좌우로 흔들리고, 파도소리가 들리고 물이 덮쳐올 것 같다. 그러다 마침내 벽이 갈라지면서 바람이 들어온다. 드디어 탈출! 흡사 <큐브>의 한 장면 같다.

 

과연 탈출이냐. 힘겨운 탈출 끝에 마주한 바깥 세계(일상!)야말로 더 심한 욕지기를 불러일으킨다면...? 적어도, 이 경이로운 소설의 결말, 마지막 부분은 정녕 '개 같은 실존'을 그야말로 카프카식으로(달리 표현할 수가 없고나!) 보여준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쫙 펼쳤다. /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

 

진정한 희극은, 칼날이 목전에 왔는데도 '희망'이라는 괴물의 꼬리를 붙잡아보려는(그것도 너무 무성의하고 부실하게?!!) K의 태도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인 것을. 그렇기에 더더욱, 대성당, 법원 소속 신부 앞에서 무죄를 역설하는 K의 절규가 안타깝게 들린다. 안타까우면서도, 다시금, 또 웃긴다!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농담의 검은 밑바닥"이 보일 것 같단 말이지.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264)

 

이 지점에서 정녕 웃어야 하는데, 쉽지 않고나.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다들 즐거워했단다. 실제로 <체포>는 좀 많이 웃긴다. <첫 심리>, <태형리>도 그렇고, 나는 그놈의 숙부(카를-알베르트, 이름도 왔다가 갔다 한다)가 왜 그리 웃기냐. 그의 호들갑은, 말하자면, 무척 조건화돼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건화된 웃음을 웃어줘야 할 의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기기도 하다. 웃음에도 의무가 있다니, 원. 횡설수설.

 

강조하건대, 이건 잡설이라... 언젠가 다시금 <성> 안으로 깊이 침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흠, 그 역시 새로운 패배(!)로 이어질 터. 이런 정황을 꼬집는 같은 신부의 말. 도무지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성담'인 <법 앞에서>('기만'!)에 붙어 나오는 말이다.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심지어 문지기야말로 기만을 당한 자라는 의견까지 있어요.”(273)

 

 

절망! 절망하기에, 또 쓴다. 하필, 지금 내가 바쁜 건, 아니, 바쁜 척 하는 건, 나보코프의 <절망>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니, 이 역시 운율이 맞는다. 운율은 맞는데, 글의 아귀는 왜 이리 맞냐. 영원히 짜이지 못하는 엉성한 플롯,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음모처럼. 에라잇.  

 

보지 못해 유감인데, 오손 웰스가 만든 <소송>의 한 장면. 앤서니 퍼킨스가 K역을 맡았다. 그럼, 오손 웰스는? 변호사 홀트 박사 역이라 한다. 보아하니, <첫 심리> 장면인 듯. 

 

 

 나보코프의 <처형장으로의 초대>와 비슷. 나보코프의 작품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법 설득력 있다, 나보코프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뭐, 여하튼, 나의 취향은, 아무래도 타고난 천재에 가까운 나보코프 보다야, 소설 쓰느라 죽도록 고생하고 그 핑계 대고서 장가도 못 간(혹은 안 간) 카프카 쪽이다. 실은 <소송>도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사건(아닌 사건-_-;;)이 제법 자극이 됐던 듯하다. 겸사겸사, 펠리체 바우어의 남성스러운(?) 외모란. 카프카의 취향의 독특함을 증명해준다 ㅎㅎ

 

카프카가 도...키를 좋아한 것도 제법 유명하다. 특히 격찬한 건, 당근, <카라마조프.> 이거 번역한 건 (<죄와 벌> 번역과 더불어) 내가 삼십대에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이다, 진짜로.

 

 

 

 

 

 

 

 

 

 

 

 

 

 

 

 

 

둘의 소설 세계가 너무 다르니(혹은 달라 보이니), 처음엔 놀랄 법도 하다. 도..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카프카는 어쨌거나 '학문적인'(!) 작가다. 그럼에도 좋아한 건 좋아한 건데, 작가마다 다 자기만의 조그만 모퉁이(!)가 있는 듯하다. 그 모퉁이가 그토록 수치스러웠던 것이냐. 왜 원고를 불태우라고 했나. 자기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고골은 눈물을 흘리며(!!) 직접 불태웠는데... 흠. 흠. 흠. 레핀의 그림 속 고골은, 그러나, 은근히 희극적으로 보인단 말이지. 내가 꼬롬한건가..? 아니아니, 진정한 고뇌는 왠지 저럴 것 같단 말씀.

 

 

 

 

아무튼. 어느 날 생각했는데, 카프카는 정녕 불멸(!)의 욕구가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심드렁(!)의 포즈(포스, 인가?) 밑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야망의 덩어리. '단식'의 형식 속에 포함된 '포식'의 욕구. 웃음-광대의 내부에 도사린 비극의 무게.

 

주저리주저리.  어느 순간 왕창 어긋난 인생(=시간)의 돌쩌귀가 다시 맞춰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 그럼, 어긋남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씀. 자, 그럼, 다시 <절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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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는 앞발로 뼈다귀의 한쪽을 누르고 이빨로 뼈다귀 끝을 아작아작 씹었다.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입과 턱 안은 전부 날카로운 이빨로 덮여 있었다. 돌멩이보다 더 딱딱한 뼈다귀도 누리의 이빨에는 여지없이 부서졌다. 뼈다귀가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누리는 그 단면을 혓바닥으로 할짝할짝 핥았다. 단면은 울퉁불퉁한 초콜릿색이어서, 소영이 눈에는 꼭 초콜릿 바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소영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글라스 아줌마가 열무를 가득 껴안고 비닐하우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맞은편, 낮은 담장 아래로 할머니 하나가 시커멓고 커다란 봉지를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덩치가 유치원생만큼 작았지만 등은 참 꼿꼿했다. 머리카락도 거의 새지 않고 풍성했다. 이목구비도, 표정도 또렷했다. 그 뒤를 따라 족발 집 아줌마가 달려오며 소리를 질러댔다.

할머니, 할머니! 또 어딜 가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귀를 먹었는지 묵묵부답, 계속 제 갈 길을 갔다. 족발 집 아줌마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아니, 또 남의 집 대문 앞에 갖다 놓으려고 그러죠? 세상에, 무슨 저런 염치가 다 있어!”

선글라스 아줌마가 그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래요?”

, 글쎄, 자기 집 쓰레기를 저렇게 남의 집에 떡하니 갖다놓는다니까요. 누구는 돈이 남아돌아서 쓰레기봉투를 따로 산대요? 우리 집 대문 옆에 두고 가려는 걸 딱 봤지 뭐예요.”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영이는 누리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러니까 더 화나죠! 저어기 구청 근처에 재활원 있죠? 그 원장 어머니예요.”

우아, 할머니, 정말 작은데 참 잘 걷는다! 짐도 무거운데 참 잘 걷는다!”

소영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족발 아줌마는 소영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1시간은 족히 되는 길인데 쓰레기를 버리려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거예요. 어휴, 저 봐, 이번에는 정말 혼쭐을 내줘야지.”

할머니는 저 멀리 전봇대 옆에 쓰레기 봉지를 얌전히 내려놓는 중이었다. 족발 아줌마는 비탈길을 거의 뛰다시피 걸어 내려갔다. 둘이 실랑이 하는 장면이 보였다. 할머니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족발 아줌마는 할머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할머니는 꿋꿋했다. 족발 아줌마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이만하면 충분히 꾸중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유유히 걸음을 떼 놓았다. 족발 아줌마도 제 풀에 지쳐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으로 등이 굽은 할아버지가 폐지가 담긴 짐수레를 힘겹게 끌며 지나갔다.

 

아줌마, 재활원이 뭐야?”

이모라고 부르라니까.”

에이, 알았어. 이모, 재활원이 뭐야?”

괴물들이 사는 데야.”

? 세상에 괴물이 어디 있어? , 선글라스 아저씨다!”

정말로 선글라스 아저씨가 오르막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도 함께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조수 겸 견습생으로 선글라스 아저씨를 따라 다녔다. 선글라스 아줌마는 저녁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주가 올라왔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도 그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선글라스 내외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2층으로 올라온 소영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느덧 코를 고는 떡붕어 아저씨 옆에서 소영이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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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오늘 엄마 힘들다니까! 뼈다귀나 먹어, 얼른!”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선글라스 아줌마는 자기에게 달려들어 긴 혀로 얼굴을 핥아대는 누리를 선뜻 내치지 못했다. 누리는 뒷발로 땅을 짚고 앞발을 든 채 서 있었고, 그녀의 몸은 누리에게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 저 개 말입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선글라스 아줌마는 개를 떼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깡마른 젊은 아가씨가 보였다. 복덕방 아저씨도 옆에 있었다.

집 보러 온 사람입니다.”

우아, 개 정말 크다! 이리 와, 이리 와봐!”

소영이는 어린 계집애처럼 종종 걸음을 치며 누리를 향해 다가갔다. 겁을 먹기는커녕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너도 나를 좋아하리라는 확신에 찬 행복한 표정이었다. 누리는 눈꼬리가 축 처진 커다란 눈을 잠시 굴리더니 이내 아가씨를 맞이했다.

이거 골든 레트리버죠? 그것도 순종인 것 같은데요?”

떡붕어 아저씨가 선글라스 아줌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누추한 Y섬에, 또 이렇게 허름한 집에 족보도 좋은 영국산 개가 있는 것이 다소 의아했다. 더욱이, 날도 아직 훤하건만 술 냄새를 풍기는 중년 여자 옆에 붙은 맹인견이라니.

, 뭐 그런 거 맞아요.”

아줌마, 이거 여자애야, 남자애야?”

소영이의 질문에, 더 정확히 너무도 어린애 같은 몸짓과 표정에 선글라스 아줌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소영이와 떡붕어 아저씨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늠름하게 생겼어도 여자야. 전에 누리 주인이 교미 시키려고 저어기 포항에서 수컷을 한 마리 데려왔는데, 영 잘 안 됐어요. 얘도 영영 애를 못 낳을 거예요. 개는 주인을 닮는다잖아요?”

딱히 술기운이 돌아서는 아니고, 그저 습관적으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또 습관적으로, 눈앞의 이 얼빠진 처자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복덕방 아저씨는 손님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방은 겨우 두 칸이었고 큰 방 작은 방 할 것 없이 무척 작았다. 소영이는 벽에 손을 짚고 힘을 주었다. 그대로였다. 옷장 문을 열어보고 싶어도 옷장이랄 것이 없었다. 화장실은 마루 끝에 있었다. 방에 비하면 넓은 편이었지만 벽이 얇은 탓인지 한데 기운이 그대로 들어왔다. 조그만 창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맞은편 족발 가게 간판과 그 옆에 늘어선 가게, 그 뒤로 교회의 십자가가 보였다. 치렁대는 머리채 계단 따위는 물론 찾을 수 없었다. 마법의 성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날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새 집으로 들어왔다. 선글라스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도배를 하고 장판을 새로 깔았다. 세간을 사는 일은 선글라스 아줌마가 도와주었다. Y섬의 오붓한 집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방문만 열어도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크루즈호 떠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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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조지 오웰(1903-1950), <1984>(1949)

 

 

 

198444일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등 세 개의 거대 국가로 재편돼 있다. 소설의 배경인 오세아니아의 런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처럼 모든 것이 B.B., 즉 빅 브라더의 통제 하에 있다. 텔레스크린, 증오 주간, 영사(영국 사회주의), 승리맨션, 승리담배, 신어. 극히 단순화된 미래 사회를 움직이는 원칙은 당의 슬로건(“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암시하듯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부정, 이른바 이중사고’(‘현실 제어를 의미하기도 한다)이다. 진리부의 일원으로서 역사의 재편-날조에 종사하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대략 7년쯤 전부터 당과 빅 브라더에 반감을 품어왔는데, 그 표현이 일기 쓰기이다. 2부에서는 연애를 통해 저항한다. 줄리아는 당의 부패와 타락의 상징처럼 제시되고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는 일종의 전투”, “사랑의 행위이기 전에 당에 일격을 가하는 정치적 행동”(179)이다. 그들은 함께 형제단에 가입함으로써 체제 전복을 꾀하지만 그들에게 밀회 장소를 제공해 주었던 늙은 상점주인 채링턴, 정확히, 그렇게 위장해 있던 사상경찰에게 체포된다. 3부는 어둠이 없는 곳”(321), 즉 애정부에 갇힌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의 고문과 세뇌 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의 <1984>는 여러 모로 정치풍자적인 우화에 가깝다. 검은 콧수염을 기른 마흔 댓 살쯤의 잘 생긴 남자(빅 브라더)는 스탈린을, “인민의 적골드스타인은 외모(가느다란 염소수염과 어딘가 지적이면서도 비열해 보이는 얼굴), 유대인이라는 점과 일련의 전기적 사실에 있어 트로츠키를 연상시킨다.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두 번에 걸친 긴 대화(심문), 골드스타인의 책(<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 인용되는 문장은 소설이 아니라 선동적이고 교시적인 팸플릿에서 가져온 듯하다. 실제로 문학과 정치의 상관성은 <1984>, 나아가 조지 오웰의 문학을 받치고 있는 축이기도 하다.

 

 

 

 

 

 

 

 

 

 

 

 

 

 

인도 주재 영국 공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버마(미얀마)의 경찰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해 분노하면서 제국의 식민지 경찰 에릭 아서 블레어는 작가 조지 오웰로 다시 태어난다. 그가 1930년대에 쓴 책들(<런던과 파리의 따라지 인생>, <위건 부두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은 대도시의 슬럼가, 탄광 지대, 전쟁터 등 민중속으로, 또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 보도하려는 소명감을 여실히 보여준다여전히 모더니즘의 영향력이 막강한 때였음에도 그는 전통적 리얼리즘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고수하며 르포르타주(다큐멘터리)와 순수 문학의 경계를 오가는 소설을 썼다. 기록문학의 대가가 <동물농장>, <1984>와 같은 알레고리로 옮아간 것은 당연해 보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나이 다섯 아니면 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나중 커서 작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나는 왜 쓰는가)로 시작하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그가 작가가 되려는 네 가지 동기 중 가장 강조하는 것도 정치적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을 말한다. 고로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1984>를 쓰기 전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먀친의 <우리들>(1923)에 대한 짧은 평(자유와 행복)을 남겼다. 그가 지적하듯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가 시작되기 전에 쓰인 소설이다. 형식주의 이론의 대두와 맞물려 다양한 문체와 형식 실험이 행해지는 가운데 자먀친은 SF소설에서 나올 법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도스토예프스키(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던진 화두를 소설화한다. 건물은 유리벽으로 돼 있고 인간은 알파벳과 숫자로 환원되고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는 “2x2=4”, 즉 수학과 이성의 논리에 따라 엄밀하게 측정, 계산된다. 단일제국의 우주선 축조에 참여하는 엔지니어 D-503의 일기(수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반역을 시도했던 주인공이 일종의 로보토미 수술을 받고서 제국의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주의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마모돼 가는 개인의 실존을 포착한 걸작의 닫힌 구조를 <1984>도 반복한다.

 

 

 

 

 

 

 

 

 

 

 

 

 

 

 

1, 윈스턴 스미스의 일기에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31),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이다.”(114)와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3, 철저한 재교육이 끝난 뒤 그는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쓴다. 소위 쥐 고문을 받은 뒤에는 빅 브라더를 향한 증오도 사라진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투쟁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417) 묵시록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결말이다. 여기에 덧붙인 부록: 신어의 원리는 인간의 의식 구조의 형성과 변화에 언어-문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스레 환기시킨다.

 

-- <책앤>

 

-- 바깥의 기운과는 별개로, 아니면, 그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여하튼 무척 우울하다, 라고 쓰고 보니, 딱히 그렇게 우울할 것도 없네요, 쩝. '우울'에 관한 문장을 쓰는 순간, 우울이 졸지에 희화되는 느낌..-_-;; 뭐,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읽은 <1984>, 정치 알레고리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놀랐습니다. 국내 독자에게 인지도는 낮지만 자먀틴(-찐)의 <우리(들)>가 문학적 관점에서는 훨씬 더 뛰어난 소설인 것 같은데, 취향의 문제일까요....? ^^;;  남들 다 재미있어 하는 (<1984>에서 시작된) 하루키의 소설은 또 왜 그리 지루할까요...ㅠ.ㅠ 아무래도 <상실의 시대>가 제일 재미있었던 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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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누리는 아래층 사람이 돌보았다. 환갑이 다 된 남자와 사십대 중반의 여자로 혼인 신고를 하고 같이 산 지 십년이 넘은 부부였다. 남자는 밤에도, 또 방안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눈 하나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여자는 두 눈이 다 멀쩡했지만 남편과 보조를 맞추느라 옅은 색이 들어간 안경을 썼다. 해서, 그들은 선글라스 부부라고 불렸다. 선글라스 아저씨로 말할 것 같으면 한창 때는 공장에서 꽤 알아주는 일꾼이었지만 중년 고비에 정리 해고의 쓴맛을 맛보았다. 이혼보다 더 큰 시련이었다. 그 후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함께 술장사를 시작했으나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부부가 공히 술을 너무 좋아했던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은 조그만 족발가게를 열었다. 남자도 여자도 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가게 이름은 곰탱이 족발이었다. 가게는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대문만 열어도 곧장 보이는 곳에 있었다. 술집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오직 족발만 팔고자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금방 허물어지고 어느새 술이 등장했다. 술안주는 많을수록 좋아, 선글라스 내외는 집안의 식탁을 통째로 가게로 옮겨왔다. 솔직히 그들의 족발은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선글라스 아저씨의 족발 써는 솜씨도 서툴러, 뼈다귀에는 늘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래도 부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족발 가게라서 배달 주문도 적지 않았고, 가게 안에도 늘 서너 명의 중년들, 노년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비좁은 동네라 늘 그놈이 그놈이었고, 새로운 뉴스거리도 마땅히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족발을 뜯을 때는 뭐든 할 얘기가 있었고 함께 낄낄댈 건수가 있었다. 문제는 그 손님들 속에 주인 내외도 끼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족발과 소주를 앞에 두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 탓이었다. 족발을 파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마시며 함께 놀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족발 가게는 밤늦도록 열려 있었지만 주인 내외는 땡전 한 푼 저축하지 못했고, 혹은 그러지 않았고, 밤마다 술에 전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족발 가게 문을 여는 시간도 조금씩 더 늦추어졌다. 그러던 것이 아예 안 열리는 날도 생겼다. 두 내외는 전날 마신 술독을 빼내느라 방안에서 뒹굴었다. 결국, ‘곰탱이 족발곰탱이라는 이름에 딱 걸맞은 사람에게 팔렸다.

 

곰탱이 족발의 새 주인은 젊어서부터 족발만 만들어 팔아온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인이 다 그렇듯, 그는 서비스를 포함한 각종 장식은 다 빼고 오직 족발, 상추와 깻잎, 마늘, 새우젓, 쌈장, 콩나물국만 내놓았다. 곰탱이 아저씨의 족발 써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두툼한 손으로 족발의 장딴지 부분을 받치고, 역시나 두툼한 손으로 여유만만하게 뼈마디 부분에 칼날을 갖다 댄 뒤 가뿐하게 살점들을 도려냈다. 그것들은 접시나 스티로폼 접시의 가두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살이 싹 발려나간 다리뼈는 접시 한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이제 그야말로 발 부분의 마디를 손과 때론 칼의 힘을 빌려 쪼개는 일이 시작됐다. 간혹 마디가 너무도 세게 맞물린 녀석을 상대할 때는 힘을 주느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하지만 그의 힘과 요령을 당해낼 돼지 뼈는 없었다. ‘곰탱이 족발은 나날이 번성했다. 서너 명만 앉아 있어도 충분해 보였던 가게가 이제는 늘 사람들로 북적댔다. 문전성시라는 말이 실감났다. 중년과 노년은 물론이거니와 젊은 사람들도 곧잘 이 집을 찾았다. 그 손님들 중에는 선글라스 부부도 있었다.

 

선글라스 부부는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아니, 일감이 매일 있지도 않았으니 사흘 살이, 나흘 살이라고 해야겠다. 더러 일주일씩 일이 쭉 있기도 했다. 새 집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벽지를 발라주고 장판을 깔아주는 일, 고장 난 수도관, 하수관, 변기를 뚫거나 부품을 새로 갈아주는 일 등이었다. 그때마다 선글라스 아저씨는 창고에 쟁여 놓은 공구를 챙겨 들고 나갔다. 그만 해도 부부가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월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식비와 생활비는 딱 버는 만큼만 썼다. 때문에 선글라스 아줌마는 구태여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집과 텃밭을 오가며 살았다. 남편이 일을 나가고 없는 날에는 누리를 붙들고 놀았다. 간간히 곰탱이 족발에 들러 먹고 남은 돼지 다리뼈를 가져와 누리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누리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엄마’, 남편을 아빠라고 불렀는데, 굳이 이 말을 알아들어서는 아니겠지만 누리는 그들 부부에게 낯가림이 없었다. 이렇듯 누가 봐도 아래층 사람들이야말로 이 집의 새 주인으로 적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그들의 꿈은 그저 까다롭지 않은 주인이 들어와 지금 전세금 그대로 살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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