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 신의 존재와 권능을 증명하는 악마, 정치권력에 맞서는 문학 권력: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930년대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의 수도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가 수행원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그의 앞에서 악마의 존재를, 나아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베를리오즈는 이른바 참수형을 선고받고 전차에 목이 잘려 죽는다. 이어, 악마들은 바리에테[버라이어티] 극장 관계자들을 혼내줌과 동시에 한 판 마술쇼를 벌여 모스크바 시민들의 허영과 속악을 폭로한다. 대체로 이들의 활약상(폭로와 응징!)을 통해 당시 소비에트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탈린 공포 정치와 무자비한 숙청(아파트 주민들의 증발), 급속한 근대화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한 주택난(악마조차 집 주인을 쫓아내고 새로 서류를 작성하지 않으면 묵을 아파트가 없다), 뇌물 수수와 각종 뒷거래(주택 위원장 니카노르의 수난), 지나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그리보예도프집에 들어가려면 악마라도 출입증이 필요하다) . 보다시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소설이지만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천착했던 여러 형이상학적 문제를 파헤친 철학 소설이기도 하다.

 

 

 

 

 

 

 

 

 

 

 

 

 

 

다시 소설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볼란드는 베를리오즈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제발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부탁하고 그것을 증명할 일곱 번째 증거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예언은 물론 실현되었다. 뿐더러 베를리오즈의 잘린 머리가 악마의 무도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또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신봉한 무신론의 원칙에 따라 (불멸 대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는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베를리오즈], 모든 일이 예언대로 실현됐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볼란드가 머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중략) 당신은 머리가 잘리면 사람의 삶은 그것으로 멈추고 그 사람은 재로 화하여 무()로 사라져버린다는 이론을 열띠게 전파해 왔지요. 저의 손님들 앞에서 - 하긴 이 손님들 자체가 반론의 증거가 되기는 합니다만 - 이분들 앞에서 당신의 이론은 확고하고 재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론이라는 건 다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 중에는 사람은 각자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론도 있지요. 그 이론도 실현될 겁니다! 당신은 무로 사라질 것이고, 저는 당신의 머리로 술잔을 만들게 되어 기쁠 겁니다. 존재를 위해 건배합시다!”(462-463)

 

이렇게 악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신에게서 출발하여 신에게로 귀결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사로 쓰인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의 말(“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입지요.”)은 여러 모로 선언적이다. 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에 도달하는 것, 악마의 존재를 눈앞에 직접 보여줌으로써 숨어 있는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절대선)과 악마(절대악)의 관계는 여기서,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을지라도, 영원한 공존과 동행의 운명을 타고난 원상과 그림자처럼 상보적이다. -예수의 사도 마태오(레비 마트베이)에게 볼란드가 하는 말을 보라.

 

넌 마치 그림자도 악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약간의 호의를 발휘해서 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 선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땅 위에 그림자가 사라진다면 이 땅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림자는 사물과 사람들 때문에 지는 것이다. 저기 내 장검 때문에 그림자가 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나무나 살아 있는 동물 때문에도 생기지. 벌거벗은 세상을 즐기려는 네 환상 때문에 나무와 동물들을 모두 없애고 지구의 껍데기를 전부 벗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너는 바보다.”(604)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거장은 대체 무엇일까. 그는 이름도 없을뿐더러(그저 거장-M’일 뿐이다!) 전기적인 사항도 최소화되어 있다. 좀 과장하면, 작가의 분신으로서 오직 문학과 작가의 소명을 얘기하기 위해 존재한달까. 특히 그가 우여곡절 끝에 불태워버린 원고(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부활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원고는 불타지 않아요.”(486) 볼란드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문학의 불멸을 위해서는, 실상 극히 소비에트적인 화법인바, 작가 권력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스탈린의 애매한 비호-폭력아래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던 불가코프에게 이것은 무척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랬기에 그는 거장을 통해 자신이 역사와 시대 앞에서 범한 죄(‘비겁함’)를 예슈아(예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처형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에게 투영한다. 나아가 거장이 빌라도를 만월의 고통, 즉 불면과 편두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듯, 불가코프는 거장에게 은 아닐지언정 최후의 안식처를 선사한다. 평안이야말로 병마에 시달리며 당시로서는 출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써나간 불가코프가 스스로에게 내민 위안의 손길이었을 터이다.

 

, 다른 이들보다 세 배는 더 낭만적인 거장이여, 낮에는 반려자와 함께 꽃이 피기 시작한 벚나무 아래를 산책하고 저녁에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촛불 앞에서 거위 깃털로 글을 쓰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파우스트처럼 새로운 호문쿨루스를 빚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증류기 앞에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까? 저곳! 저기에 벌써 당신들의 집과 늙은 하인이 기다리고 있고, 촛불도 벌써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촛불은 곧 꺼질 겁니다, 이제 곧 새벽이 다가올 테니까요. 이 길로 가십시오, 거장, 이 길로!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떠날 때가 됐습니다.”(642-643)

 

 

-- <네이버캐스트>

 

 

-- 대학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작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처음 읽었을 때(당시는 번역도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진짜 깜.놀.했는데, 그 무렵엔 전체 형식에 일단 끌렸던 터라, 그런 식(즉, 두 텍스트가 시공을 초월하여 뫼비우스 띠처럼 뒤섞이는, 어떤 의미에선 무척 유치하지만 또한 무척 에로틱하다!)의 장편을 써보고 싶었고, 심지어 내 나름으로 뭘 썼던 기억도 있다. (쓰다 보니, '루저'의 한탄이냐, 뭐냐, 죄다 기억, 즉 과거지사의 나열이냐...쩝.) 좀 철들고 나서 그런 형식 자체가 정녕 '영혼의 형식'이었음을 알겠다.  그러니 소설의 어떤 형식도 실은, 모방을 불.허.한.다!

--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빚진 작품들이 많은데, 우선은 이것.

 

 

 

 

 

 

 

 

 

 

 

 

 

 

 

 

 

 

-- 그리고 이 참에 한 번 더 올려본다. 이 작가, 이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경(越境)의 시학과 미():

-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설국>(184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한 남자(시마무라)와 한 여자(고마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연애소설이다. 세 번에 걸친 만남은 모두 그가 도쿄를 떠나 눈의 고장’(‘설국’)으로 오면서 이루어진다. 첫 만남은 회상처럼 짧게 삽입되고 나머지 두 만남에서는 무용 선생의 아들(유키오)을 사이에 두고 고마코와 미묘한 연적이 된 처녀(요코)가 등장하면서 두 겹의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소설은 영화가 상영되는 고치 공장의 화재와 요코의 자살로 끝난다. 장기간에 걸쳐 발표한 여러 단편을 용해해 만들었다는 창작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설국>은 파편적인 장면들의 모자이크처럼 읽힌다. 무엇보다도 한량이나 다름없는 유부남과 게이샤의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사랑을 인간 존재의 한시성에 대한 인식을 담은 소설로 승화한 작가의 솜씨와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가령, 대개 눈[]과 함께 어우러져 포착되는 고마코에 관한 묘사를 보자.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44)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129) 은하수가 흐르는 가운데 게다를 신고 꽁꽁 언 눈[] 위를 달리는 고마코의 모습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관능적이고 농염한 고마코, 청순하고 순결한 요코 등 남성의 눈으로 포착된 두 여성은 그 자체로 미()의 육화이다. ‘게이샤라는 단어를 세계어 사전에 등록한 일본 문화의 특수성과 탐미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마코는 단순히 미적 대상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동기(童伎)로 도쿄에 팔려 갔고 자신을 기방에서 빼준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는 16개월 만에 사망한다. 시마무라가 도쿄로 떠난 다음에는 자기가 도쿄로 팔려 갈 때 배웅해준 유일한 사람인, 장결핵으로 죽어가는 유키오를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 사연이 많은 만큼이나 여백이 많은 탓인지 그녀의 사랑과 교태에는 어딘가 기법 같은, 즉 미학적인 구석이 있다. 덧붙여 그녀에게는 일기를 쓰는 흥미로운 습관이 있다. 유키오 얘기는 가장 오래된 일기 첫머리에 적혀 있고 시마무라와의 첫 만남도 날짜와 함께 기록돼 있는데, 이런 공책이 열권이나 된다. 자기가 읽은 소설의 제목과 저자,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도 간단히 적어둔다. 이를 두고 시마무라는 헛수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수고를 반복하는 눈[]의 게이샤를 찾아오는(혹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 남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고마코의 헛수고는 계속될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가 허무이다. 대체로 <설국>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는 어려서 부모, 누나, 조부모를 연이어 잃은 작가의 개인사, 나아가 20세기 전반(前半) 일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설의 처음으로 가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7) 󰡔설국󰡕은 연애소설이자 미에 관한 소설임과 동시에 월경(越境)에 관한 소설이다. ‘눈의 고장이 아름다운 것은 아주 드물게 언급되는(“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77)) 생활의 공간(도쿄)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상되는 우리의 소설이 있다.

 

 

 

 

 

 

 

 

 

 

 

 

 

 

 

 

 

 

김승옥이 스물세 살 때 쓴 무진기행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가 제약회사의 전무로의 승진을 앞두고 잠시 고향, 즉 안개의 고장인 무진’(霧津)에 와서 겪는 얘기를 담은 소설이다. 너무 날 것이어서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야생의 문장, 속되고도 어딘가 날이 선 관계(후배 박, 동기 조, 음악 선생 하인숙, 서울의 아내 과 장인, 옛 애인 ’) 등 비슷한 연배의 작가 이청준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소설 문법이 여전히 충격적이다. 과거의 처럼 서울을 꿈꾸는(“서울로 가고 싶어죽겠어요.”) 음악 선생 하인숙과 동침한 다음날, 빨리 상경하라는 내용이 담긴 아내의 전보를 앞에 두고 가 내놓는 타협안 역시 모방을 불허하는 명문장이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무진기행) 끝으로, 하인숙에게 쓴 사과의 편지를 그냥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는 가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 이 수치의 감각은 무엇인가.

 

순천에서 서울로 월경한 어느 불문학도가 단편 하나(생명연습)를 들고 문학사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가 이룩한 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의 동력은 아무래도 각종 속(), 속됨과 속물스러움에 대한 혐오, 궁극적으론 자기혐오였던 것 같다. 아무튼 풋풋한 미남 청년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 그리고 천재 작가라는 지당한 수식어와 함께 흑백 사진 속에 붙박인 박제가 되었고, 펜을 놓고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는 중년, 심지어 말을 놓고 슬어져가는 노년만 남았다. 미가 미인 것은 역시나 그것이 시간 앞에서 무력하기 때문, 찰나적이기 때문인가. 이 비극 앞에서 문학만이 우리의 위안이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읽는 무진기행이 고맙다.

 

-- <책앤> 6월호 게재 예정.

 

-- 간만에 여유를 부려본다. 혹은, <무진기행>을 다시 읽은 충격을 아직 다 소화하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감기도 일주일, 이주일 째 지속되고, 다 겸사겸사, 이다.    

-- <설국>에 대해 쓰기로 했지만(지면상 그래야 했지만) 쓰다 보니 <무진기행> 얘기가 더 많아졌고, 마음으론 앞의 것 다 지우고 뒷 얘기만 더 쓰고 싶어졌다. (잘 쓴 줄 알겠으나, 일본식 탐미주의는 역시 체질이 아니더라는...-_-;;)  

-- 전집을 갖다 놓고(혹은 그렇게 모아가면서) 읽은 여러 작가 중 하나가 김승옥. 뒤로 갈수록(길어질 수록) 힘이 빠지는 그의 소설에 절망했던 기억. 아니, 그보다는 그의 초기작을 읽고 감탄하면서 그 때문에 또한 절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물론 그때 나의 절망이 뭐, 얼마나 컸겠나, 그때는 나 역시 작가의 나이였으니, 시건방에 쩔었을 거다, 분명히. 지금 읽으니, 정녕 절망이더라. 천재란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인가 보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靑年)이었다.”)

 

 

내 머릿속에 항상 김승옥과 함께 떠오르는 작가는 이청준. 뭐, 이유는 둘의 소설 세계와 문학 인생이 어떤 평행선을 그린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 (천재형 vs. 장인형, 뭐 등등.) 덧붙여, 역시 오래 전 일인데,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의 빈소를 나오는 길에, 그 빈소를 찾아가는 <무진기행>의 작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역시 모종의 평행선.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운은 무척 길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 주위에 널려 있는, 가위질이 된 마분지를 집었다. 정은이는 탐탁지 않았지만 다정한 눈길에 이끌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종이상자가 만들어졌다. 그 사이에 아침에 배달된 빵이 하나씩 둘씩 바닥났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찬 기운이 확 들어왔다. 재활원 원장이었다. 그는 꼭 이맘때쯤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빵을 한 두 개씩 들고 갔다. 원장은 빵 안에 뭔가 내용물이 들어있는 것을, 가령 단팥빵, 슈크림 빵, 땅콩 크림 빵 같은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다녀간 날에는 소보로 빵과 달맞이 빵만 잔뜩 남았다. 어쩌다 일이 좀 한가할 때는 훔쳐간 빵 값을 내는 셈 치고 방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원장님, 소보로 밖에 안 남았어. 팥은 내가 먹고 슈크림은 희주가 먹고, , 진영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빵 먹으면 설사할지도 몰라.”

소영이의 말에도 불구하고 원장은 열심히 방 상자를 뒤적였다. 정말로 소보로 밖에 없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소영이는 열심히 종이상자의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얼마 뒤 또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확 들어왔다.

에이, 소보로 밖에 없다니까!”

소영이가 소리를 꽥 질렀다. 추워서였다.

이리로 앉으세요.”

떡붕어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인기척도 없이 방한가운데로 들어온 건 원장의 어머니였다.

, 할머니였구나. 소보로 먹을래?”

소영이는 마침 다 끝낸 종이상자를 내려놓고 노파에게 소보로 빵을 건넸다. 노파는 아무 말도 없이 빵을 손에 쥐고 조금 베먹었다. 하지만 곧 자기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는 것도 잊은 양 동작이 멎었다. 아이들은 노파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노파는 투명인간 같았다. 하지만 투명인간의 손에 들린 소보로만은 또렷이 보였다. 진영이가 달려들었다.

에비, 에비! 진영이는 빵 먹으면 안 돼! 아저씨, 이거 좀 선반 위에 올려줘. 할머니, 이거 우리가 만든 거다!”

소영이는 일곱 개의 상자를 차곡차곡 쌓았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더니 우르르 달려들어 상자를 허물었다. 소영이는 이제 상자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다시 마분지가 된 상자들을 떡붕어 아저씨가 선반 위에 갖다 올렸다. 그 동안에도 노파는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있었다.

할머니, 내가 아이들한테 재미있는 얘기 해주는 거 들을래? 얘들아, 옛날 얘기 해줄까? 옛날 옛적에 마법의 성이 하나 있었거든. 거기에는 이상한 문지기랑 이상한 마녀가 살았어. 문지기는 문지기였지만 문을 지키지 않았고, 마녀는 마녀였지만 마법을 쓰지 않았어. 문지기가 문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해. 문지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꿈꾸었거든. 그게 뭐냐고? 원래 문지기는 회사에 다녔어. 파이프를 만드는 회사였지. 거기서 문지기는 파이프를 관리했어. 한 번은,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파이프 개수를 세야 했어.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파이프가 엄청나게 쌓여 있는 거야. 파이프는 구멍의 크기에 따라 나뉘어져 있었어. 문지기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세야 했어. 그는 이미 개수를 센 파이프 위에 화이트를 콕콕 찍었어. 헷갈리면 안 되니까. 그런데 파이프 구멍을 계속 보고 있자니 머리가 핑핑 도는 거야. 구멍이 작은 파이프는 너무 작아서 자꾸 보다보니 속이 메스꺼워졌어. 구멍이 큰 파이프는 그 사이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 들어와,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어. 그래도 용케 그는 일을 끝냈지. 그가 센 파이프는 종류별로 몇 개였더라.”

정은이는 눈알을 굴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가람이는 철봉에 묶인 채 꾸벅꾸벅 졸았다. 진영이가 큰일을 보는 바람에 잠깐 이야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떡붕어 아저씨를 시킬 수가 없어 소영이가 직접 진영이를 욕실로 데려갔다. 기저귀에 묻은 똥이 질지 않아 안심이 됐다. 또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동안 떡붕어 아저씨는 방을 닦고 세탁기를 돌렸다. 소영이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더러운 세상, 한 판 붙어보자

- 발자크, <고리오 영감>

 

 

 

 

세계문학사는 발자크를 소설의 교과서로 정의했다. 근대, 자본주의, 대도시, 속물들, 야망에 찬 청년, 전혀 미화되지 않은 날 것의 삶. 이 모든 것이 <고리오 영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장황하게 묘사되는 보케르 부인의 고급 하숙집의 풍경은 마냥 비루한, 하지만 그렇기에 진실한 우리 삶의 축소판 같다.

 

끝으로, 그곳에는 시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가난이 있다. 더 이를 데 없이 궁핍하고 넝마 같은 가난이 도사리고 있다. 그 가난은 진흙이 묻지 않았다 해도 얼룩이 지고, 구멍이나 누더기가 없더라도 곧 썩어 넘어질 지경이었다.(14)

 

이 하숙집에 고리오 영감, 보트랭(자크 콜랭), 빅토린 타페이유, ‘할멈노처녀 미쇼노 양, 으젠느 드 라스티냐크 등 일곱 명의 하숙인이 산다. 이들 중 라스티냐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법대생이다.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 우리의 청년들이 그러했듯, 그가 가진 것이라곤 머리와 야망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그를 끌어당기는 것은 두툼한 법전이 가득 찬 도서관이 아니라 현란한 세속적 불빛이 번득이는 파리의 사교계이다. 그곳을 드나들던 그는 고리오 영감의 작은딸인 델핀 드 뉘싱겐의 연인이 된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도식적 틀에서 부각되는 것은, 그러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연애가 아니다. <고리오 영감>의 관심사는 첫째, 라스티냐크의 눈을 통해 포착한 인간 본연의 속물스러움을, 둘째, 그 속물스러운 세계와 마주하여 그가 겪는 내적인 운동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고리오 영감은 두 딸의 행복을 위해 제분업으로 모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마지막 남은 은그릇마저 부수어서 내다 판다. 작가의 비유를 빌자면 개의 성격에서 볼 수 있는 숭고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부성애가 곧 그의 실존이다. 하지만 두 딸은 아비를 자기 집에 들이지도 않고 돈이 필요할 때만(가령, 무도회에 필요한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아비를 찾는다. 아비가 졸도하여 생사를 헤매고 있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뿐더러 장례비도 대주지 않는다. 이 고리오 부녀의 얘기는 라스티냐크의 눈에 비친 파리 풍속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세상은 시적인 데라곤 하나도 없이 시종일관 속되고 치사하다. 여기서 라스티냐크의 목표는 단 하나,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알쏭달쏭한 세상이라는 책을 정복하고 출세하는 것뿐이다. 보트랭은 그 나름의 처세술을 설파하며 청년을 길들인다.

 

자네는 보세앙 사촌 집에 가서 사치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이미 맡았네. 자네는 고리오 영감 딸인 레스토 부인 집에 가서 파리 여성의 냄새를 맡았어. 그날 자네는 이마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적어서 돌아왔네. 그 단어란 <출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브라보! ()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147-148)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이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민한다. 그의 분류법에 따라 복종(귀찮다), 투쟁(불확실하다), 반항(불가능하다)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고리오 영감의 무덤에 묻은 뒤 등불이 빛나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

 

그 대결의 첫 행동은 아비의 죽음을 나 몰라라했던 뉘싱겐 부인 댁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스티냐크는 체포되는 순간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았던 도형수 보트랭의 방식(반항) 대신에 복종이나 투쟁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어떻든 이로써 순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연, 이 소설의 결말은 언제 봐도 불편한 구석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초점을 라스티냐크에 맞춘 탓이다.

 

 

 

 

 

 

 

 

 

 

 

 

실상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은 고리오 영감이나 라스티냐크 같은 어떤 구체적인 개인도, 파리라는 근대적인 공간도 아니다. 훗날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을 모조리 아우르는 제목으로 생각한 인간 희극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이 웃긴 인간 세상이 곧 주인공이다. 발자크 자신도 평생을 그야말로 웃긴 속물로 살았다. 그러나 어떤 속물도 자기 안의 속물스러움과 세상의 속물스러움을 이토록 깊이 꿰뚫어보지 못했고 또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소설적 진실이 하나 더 있다. 세상이 더럽고 비루할수록 그 세상과 한 판 붙어볼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 설령 그 역시 라스티냐크의 경우처럼 속물스러운 타협의 형태가 될지라도, 그것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어떤 진정성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그런 것 같은데 아닌가?) 하나 올려 본다.

발자크의 소설은 언제나 지루했고, 지금 읽어도 지루하다. 처음 읽은 건 혜원사판이었지 싶은데 <골짜기의 백합>. 지루한 연애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주기적으로 읽게 되는 그의 소설들은(<고리오 영감>, <잃어버린 환상>, <나귀 가죽> 등등) 대체로 다 그렇다. 그럼에도(!)  계속 읽는 것은, 저 글의 맨 처음에 썼듯, 그의 소설이 아무리 봐도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교과서가 재미있는 거 봤나. 교과서는 항상 지루하다! 그 지루함을 견디다 보면 더러 재미있는 대목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본들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한데, 지루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들이 의외로(?) 전기가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가 대표적. 발자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것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 덧붙여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형상(즉, 진정한 소설쟁이!)처럼 보이는, 로뎅이 조각한 발자크. 한데 마땅한 이미지가 왜 이리 없냐. 언제가 프랑스 가면 꼭 봐야지...  

 

- 저 동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볼쇼이 극장 맞은편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발자크와 마르크스(더 정확히 엥겔스)도 뭐, 붙이자면, 못 붙일 건 없다.) 돌에 새겨진 문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여름에는 좋았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진 날, 저거 또 보러 갔다가 얼어죽을 뻔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아줌마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지만 빛나의 팔을 붙잡은 손만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아줌마가 오는 날이면 일감이 절반 이상 줄었다. 하지만 정은이는 아무도 자기를 예뻐해 주지 않는다며 혼자 훌쩍댔고, 진영이는 배탈이 나서 아침을 굶어야 했다. 가람이는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저씨, 가람이 좀 찾아봐. 날이 추우니까 분명히 건물 안에 있을 거야.”

떡붕어 아저씨를 내보낸 다음 소영이는 아줌마한테 또 한 소리했다.

아줌마가 빛나랑만 놀면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슬프겠어?”

슬프긴, 뭐가 슬퍼. 내가 뭘 어쩐다고.”

아줌마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며 빛나의 뒤틀린 두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빛나는 입을 벌린 채 웃고 있었다.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아줌마는 손수건으로 빛나의 침을 닦아주고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사람 말을 거의 못 알아듣는 빛나였지만 아줌마의 손길과 눈짓에는 늘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저렇게 꼭 붙어서 서로 배시시 웃고 있는 아줌마와 빛나는 누가 봐도 닮은꼴이었다. 빛나의 눈 사이가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또 입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붕어빵이었다. 몸집도 그랬다. 둘 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골반 뼈가 두툼하고 큼직했고 덩치도 남산만 했다. 당직을 하는 날이면 아줌마는 빛나를 꼭 안고 잤다. 아줌마가 빛나를 편애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원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불가피한 이유에서 그냥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가람이를 관리실 옆쪽에 세워둔 봉고차의 뒷좌석에서 발견했다. 가람이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 마침 퇴근하는 아줌마와 마주쳤다.

추운데 조심해서 가세요.”

아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걸음을 뗐다.

 

방안이 훈훈했다. 소영이 주위로 아이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조각상처럼 모여 있었다. 소영이는 아이들 앞에서 종이상자를 접고 있었다. 정은이는 소영이 옆에 바싹 붙어 소영이의 볼과 손, 팔에 계속 뽀뽀를 해댔다.

언니, 뽀뽀! 언니, 그 오빠는 언제 또 와?”

그 오빠는 이제 오지 않아. 이 아저씨랑 놀아.”

정은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쳐다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못 생겼어. 시커멓고 뚱뚱해.”

그래도 종이상자는 접을 수 있는데, 가르쳐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