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음-분신과 아이

 

 

 

 

소설에서 닮음-분신 테마는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우선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에게서 닮음을 보거나(창조하거나) 그런 식으로 닮은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것. 고딕 소설이나 낭만주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몇몇 인물 쌍은 주인공-분신의 가장 심화된 버전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환상 문법의 진화와 맞물려 그 입지를 넓혀간 것인데, 정신분열증 같은 질환의 결과 있지도 않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호프만이나 포의 환상소설, 그리고 역시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한 챕터(이반 카라마조프와 악마’)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런 병리적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닮음-분신만큼 인간 욕망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주제도 없지 싶다. ‘변신의 경우 애초의 나의 존재를 깡그리 지워야 하는(, 한 번은 죽어야 하는) 희생이 요구되는 반면 분신은 그런 희생 없이 갱생과 부활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이 아이이다. ‘이되 아닌, ‘보다 크고 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 소설의 원형이 모험소설과 더불어 성장소설과 가족소설임을 고려한다면 아이는 소설 장르의 생존과 연결된 문제이다.

 

 

 

 

 

 

 

 

 

 

 

 

 

이십대 때 쓴 나의 중단편에는 분신이 곧잘 날것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워낙에는 넘어 섦을 표방하지만 실은 모방 욕망을 더 노정한 꼴이 된 젊은 작가 특유의 치기어린 만용의 산물이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쓴 박사논문은 숫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 분신과 분신 테마를 다각도에서 다루었고 비슷한 시기에 쓴 경장편(<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2003)은 큰 틀에 있어 /의 유체이탈과 같은 자아분열증적 대화의 기록이다. 첫 장편(<고양이의 이중생활>, 2009)에서는 주인공들의 내적 분열과 이중생활외에 아이(‘딸기’)의 형상에도 적잖이 공을 들였다. 한데 실제 삶 속에서 아이의 출현은 어떠했던가. “정녕 변증법대신에 -생명이 도래했다.”(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역자해설.) 이 당혹스러운 만남을 내 나름으로 파악한 삶의 큰 흐름 속에 위치시킨 단편이 우연론과 인과론(<문장웹진>, 2013)이다.

 

 

 

 

 

 

 

 

 

 

 

 

 

 

 

 

닮음다름의 역동성을 구현하기 위해 대놓고 여자아이를 바랐던 나의 기대를 무심히 배반하며 아이는 남자아이로 태어났으며, 이목구비와 함께 한 번씩 경기(驚氣)를 하는 불운한 체질(혹은 질환)은 나를 닮았다. 딱히 항간전제의 부작용은 아닌 것 같지만, 평균적인 성장 속도를 무던히 관망만 하더니 21개월을 넘긴 지금에야 간신히 한두 발짝을 떼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손을 잡아주어야만 걸음마 비슷한 모양이 된다. 역시나 그나마도 이내 피로감을 느끼고 주저앉기 일쑤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되는 과정이 이토록 험난할 줄이야!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만히 있어도 좋은데 굳이 왜 움직여야 하나, 기면 되는데 굳이 왜 걸어야 하나, 라는 식의 달관과 초월의 태도이다. 길쭉한 아이가 몸도 잘 못 가누고 비틀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딱한 표정을 감추기도 하고 더러는 어디가 아프냐, 병원은 가봤냐고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말하는 속도도 만만치 않다. 간혹 간단한 낱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대체로 표현하고 싶은 의사가 별로 없는 것 같고 굳이 그러고 싶은 의사는 손짓이나 표정이나 소리로 얼추 만족되는 모양이다. 이 도저한 느림과묵’, 심지어 침묵에 덧붙여 띵함을 두고서 외할머니는 제 어미를 일원어치도 안 닮았다라고 말한다.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 아이와 나의 관계는 또 어떻게 자라날까.

 

 

 

 

 

 

 

 

 

 

 

 

 

 

 

환경결정론과 에밀 졸라 식 자연주의는 많은 진실을 담고 있지만 유물론과 인과론을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한 온갖 학설을 동원해도 유전자’, 즉 닮음을 향한 인간의 끌림이 오롯이 설명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모성의 신화의 허위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나는 목표치가 낮아서인지 오히려 내 안의 모성에 놀란다. 아무도 아이에게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지를 묻지 않은 만큼 출생 자체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식의 칸트의 말도 수긍된다. 아이는 정녕 운명처럼 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흐름의 상징 같기도 하다. 그것에 맞서는 것 같지만, 그런 줄 믿지만 실은 그것에 휩쓸려가는 상황. 분신-아이를 만드는 순간 가 시작되고 가 곧 이다. 아이(동시에 아비-어미), 죄받을일을 두고 문학도 철학도 다 할 말이 많다. 어느 아버지아들을 향해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이성복, 꽃 피는 아버지)라는 참 시적인 말을 던지기도 했다. 소설의 말이 가닿을 수 있는 극점은 어디일까.

 

 

(대산문화. <글밭단상> 2013년 여름호.)

 

-- 리뷰 성격이 아닌 그냥 글(?)을 쓸 지면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차에, 저 청탁이 들어와서, '단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엄청나게(!) 많이 썼는데(특히, 분신 관련 얘기들, 레비나스를 비롯한 학자들의 '아이'에 관한 견해들) 결국 다 잘라내고 위의 모양새가 됐다. 겸사겸사, 아이 사진을 한 번 올려본다.

 

 

 

 

이랬던 아이가 이렇게 커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있었는데(이거야말로 나를 닮았다) 점점 힘이 빠지더니 이런 얼굴..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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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 2013-06-1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교수님 저 은정이에요!! 글은 늘 눈팅만 하다가 애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서 댓글을 남기네요. 찡그린 애기 사진이 웬지 정말로 선생님 이미지와 오버랩이 되는 이유는...^^;;
밑에 사진은 최근인가봐요. 많이 컸네요~ 얼굴도 뽀얗고 정말 예뻐요. 훈남이 될 조짐이!!^^
'느림'과 '침묵'이라... 애기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친해질까요? 하핫

푸른괭이 2013-06-24 09:07   좋아요 0 | URL
^^;;

이익훈 2014-09-1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돌아앉은 쉼표'라는 연극을 찾다가 네이버가 비슷한 곳 찾아준 대로 이 블로그에 왔습니다- 아 그런데 이 분이시구나, 반갑습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급성녹내장으로 실명위기 어쩌구까지 갈 때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들렸던 서점에서 샀던 책이 작가님의 책이었어요- 1998년도의 일이군요- 다행스럽게 저는 시력을 바로 찾았는데 잊고 있던 기억이 우연한 블로그 방문으로...- 강의도 하시는군요, 그사이 결혼도 하시고 번역도 하셨군요- 옛날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지는군요- 신림사거리, 음악학원... 그 정도가 기억나는데...요... 죄와벌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번역이 좋으면 아주 신나서 번역이 안 좋으면 때찌 하러 오겠습니다, 워낙 읽은 속도가 느려서 한참 후에 올거에요ㅋ- 작가님 소설 읽으러 가끔 들르겠습니다- 항상 좋은 작업 좋은 강의 많이 하십시오^^*

이익훈 2014-09-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가워 인사 먼저 하고... 윗글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의 분신이라... 생각도 안 해보고 직관력으로만 글을 읽던 사람이라 분석이 전혀 없는 맹한 사람인데... 분석적으로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이가 건강하게 잘 크고 늦은만큼 누구보다 더 '에렉투스'한 아이가 되리라 기도할게요ㅎ - 아주 잘 생겼어요 작가님보다ㅎ
 

 

 

끝으로 사족을 달자면, 이 글은 ‘10’의 나이와 학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딱히 등단 년도가 같아서도 아니고) 스승이나 선배가 아니라 문우 비스름한 존재로 여겨온 한 소설가에 대해 또 다른 한 소설가가 쓴 글이다. 언젠가는 비슷한 지점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이상한 오기와 끈기로 무장한(혹은 해제한?) 그의 뒤태를 보며 시새움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 심지어 문학에 대한 예의이다.

 

90년대를 포함하여 그를 만난 건 다섯 번도 안 되지 싶은데, 가장 최근의 만남은 2010년에서 20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어느 날, 모 전철역에서였다.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그 우연에, 정영문은 정영문의 소설(그때 <작위>를 연재 중이었다) 속에서 막, 또 마지못해 기어 나온 것 같은 표정과 몰골을 한 채 허공으로 퍼지는 맛깔스러운 담배 연기 같은, 한층 더 길쭉해지고 느슨해진 것 같은 몸뚱어리를 곤혹스러워하며 엉거주춤, 어영부영 전화번호를 물었다. 아니, 말을 한 건 아니고 실어증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런 뜻을 전하는 어슴푸레하고 희끄무레한 손짓과 몸짓을 보였다. 만남이랄 수도 없는 짧은 스침이었지만,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이 너무도 여전하여 신명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병”(<작위>, 95)을 계속 앓길, 그리하여 우리 문학에 건강한 전범과 더불어 불온한 전위가 두루 넘쳐나길 바란다.

 

4. 다시, 소수적인 문학

 

서슬 퍼런 비평(비평은 일정 부분 그래야 한다)과 근엄한 학문(이 역시 황혼녘에야 날갯짓을 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속성이다)의 눈으로 보면, 각종 엄친아와 비교하면 현재 우리의 문학은 모조리 다 시원찮을 수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실상이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과거바깥에서 전범을 찾고 ()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불쌍한 일, 심지어 좀 촌스러운 일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카프카처럼’, ‘이상처럼은 작가 개인의 인생을 놓고 봐도 하룻강아지 시절에나 낯붉힘 없이 할 수 있는 얘기이다. ‘-처럼이란 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 완전한 닮음(같음)은 불가능하다.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됨이 마땅하다. 물론 당대의 평가가 훗날 뒤집어진다는 식의 복수(復讎)’의 문학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학사는 오히려 당대의 베스트셀러(적어도 순위권)가 미래의 스테디셀러가 됨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예외적인 경우지, 현재의 무명이 미래의 불멸을 담보하지는 절대 않는다. 작가로서 자신의 그릇이 큰 대접은커녕 간장종지밖에 안 된다면 그것도 운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타협할 때 그 간장종지나마 잘 채울 수 있다. 요컨대 작가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거니와 이는 일국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리의 문학사도 제법 묵직해져서 전범-다수전위-소수의 계보를 따로 작성해볼 수도 있겠다. 한데 이광수나 염상섭, 이상이나 김동인을 놓고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가가 아니라고 투덜대는 건 역시나 좀 촌스럽고, 덧붙여 배은망덕한 패륜이다. 그런 아비-어미 밑에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우리는 그것이 오직 우리의 문학이란 이유만으로도 소중히 여길 의무가 있다. 그것이 문학사와 마주한 우리의 최소한의 덕목, 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쏟아지는 문학에 대해서도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문학이야말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우리밖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진정 소수적인 문학, 너무나 고독한문학이다.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제각기 소수적인 문학의 주체이다. 굳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만 소수의 다수 독자를 갖는 것보다 다수의 소수 독자를 갖는 것이 작가로서는 더 큰 행복일 수 있다. 최근에 우리 문학의 번역과 수출 관련 얘기가 많아졌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문학 바깥의 얘기이다. 문학 안에서의 논의는 훨씬 더 간단할 법하다. 어쨌거나 심판은 문학사의 몫이다. 무조건 열심히 쓰고 열심히 읽을 일이다. 그것이 장르 불문, 글쟁이의 실존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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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정영문과 이론적 서사

 

정영문의 서사를 편의상 이론적 서사라고 부르자. 그것은 인간이든 동식물이든 물건이든 특정 현상이든 아무튼 어떤 대상에 관한 이론 정립을 지향하며 방법론에 있어 정치한 논증이 아니라 자유 연상, 즉 철저히 은유적인 사유의 흐름을 따른다. 가령, 첫 번째 이야기에서 나체주의자 행세를 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옛 여자 친구의 현 남자 친구가 어제 마신 데킬라가 남아 있는 오줌을 용설란 묘목을 향해 내뿜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 그의 생식기, 나아가 인간 남자(수컷)의 생식기 일반에 관한 이론이 펼쳐진다.

  (....)

 

이어, 좀 봐달라는 듯 문을 열어놓은 채 벌이는 그들의 정사 얘기 이후 그녀와의 연애 시절이 회상되고 그 끝에 그녀의 젖꼭지 얘기, 나아가 젖꼭지 일반에 관한 이론이 나오고(<작위>, 20-21) 겸사겸사 과음을 한 그녀가 누구 집 대문 앞에서 설사를 한 일이 회상된다. 정영문식 연애와 사랑, 윤리와 도덕에 관한 의식이 은근한 따사로움과 유머러스함을 뽐내며 표현되는 대목이다. “그녀가 설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녀에게 치하를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로 나는 두고두고, 길에서 설사를 하는 누군가에게 포도나무 잎을 몇 장 따다 준 것이 내가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에게 베푼 가장 큰 선행 중 하나처럼 생각되었다.”(<작위>, 27) 이렇게 말의 세계로 진입한 포도나무 잎, 즉 포도에서 또 다른 사물이 말의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그 사물은 보다시피 일상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흥미로운 일화의 형식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런 경우일지라도 이내 특정 대상에 관한 쫀쫀한 이론으로 바뀐다. “방귀도 볼품 있는 엉덩이라야 어엿하게 뀔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것이 이치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얼마나 어엿하지 않은 방귀가 나오나 보려고 정색을 하고 방귀를 뀌려고 했지만 방귀는 나올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작위>, 62) 이렇게 운을 뗀 방귀-론에서 엉덩이-론이, 엉덩이-론에서 궁상-론이 나오는데, 어지간한 시나 아포리즘보다 더 리듬감이 있어 읽기에 무척 신명나는 대목이다.

 

나는 궁상을 떨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궁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어떤 이론 같은 것을 펼쳤다. / 가끔은 떨어줘야 하고, 가끔 떠는 것은 나쁘지 않은 궁상은 잘 떨면 재미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잘못 떨면 스스로도 면목 없게 될 위험이 있고, 곧잘 그 정도가 지나치기 쉽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몸에도 좋지 않을 수 있어 궁상을 떨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궁상의 문제 중 하나는 알맞은 정도로, 품위를 잃지 않고 잘 떨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궁상은 일종의 정신적인 형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카프카와 이상 같은 작가들이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상이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해 회충약을 복용했다고 했을 때 그는 궁상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궁상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한데 내 생각에는 궁상이 궁상으로서 돋보이려면 자의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을 떨어야 했다.(<작위>, 65)

 

물론 이런 부분이 많지는 않다. 그는 지금까지 소설을 써온 것도 [돌멩이를 굴러가게 하고 숫자를 셀 때와 같은] 그 이상한 오기와 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단히 보기 싫은 것들이었다.”(<작위>, 131)라고 썼거니와 이 대단히 보기 싫은 이상한 오기와 끈기가 항상 신명나는 미학적 성취로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 그 역시 너무나 따분하고 무료하여 권태와 분노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위>는 그동안 그가 쓴 소설 중 신명나는 부분이 가장 많을뿐더러 (<바셀린 붓다>심술궂은심사를 반영한 못된책이듯!) 자신의 신명을 독자와 공유하려는 갸륵한심사마저 표현된 착한책이다. 무대 의상 같은 재킷에 붉은색 계통의 체크무늬 바지(정말 난해한 패션이다!)를 입고 실직한 광대처럼 길을 걷는 의 모습에서는 그런 신명의 정수가 보인다. “그러자 나 자신이, 평생을 광대로 살아왔기에 앞으로도 광대로밖에는 살 수 없지만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광대 짓을 하지는 않고, 혼자 가끔 광대의 흉내의 내며 광대의 미소를 짓기도 할 광대 같이 느껴졌다.”(<작위>, 232-233)

 

아무래도 정영문의 소설은 영원토록 낯선 문체에도 불구하고 말보다는 사물의 세계에 더 가까이 가 있던, 그러려는 투지를 보인 카프카보다는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말의 지랄을 보여주는 베케트를 더 닮았다. 나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었다.”(<작위>, 242) 정영문의 이 말에 졸렬한 악의는 물론 없어 보이지만 대단히 보기 싫은 이상한 오기와 끈기는 아주 잘 보인다. 자의식 과잉이나 과잉된 자의식은 소설을 저질의 서사(일기)로 퇴화시키지만 그것에 대한 미학적인 유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나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보여주듯 고품격의 서사를 낳는다. <작위>가 그 증거인데, 난해해서가 아니라 워낙에 특이해서 그의 소설은 진정 소수적인 문학, 그래서 소중한 문학이다.

 

3-3. 소설 바깥의 소설가 정영문

 

잇따른 문학상 수상을 전후하여 공개된, 그의 소설 못지않게 소설적인 인터뷰 글을 토대로 대략 한 줄 전기를 구성해보자. 1965년 경남 함양군에서 쉰다섯의 아버지의 실수로 태어난 그는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들어가고 간신히졸업을 한 다음에는 미술사를 공부하러 프랑스에 가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기꺼이포기하고 쉰 살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번역으로 생계를 꾸리며 노예처럼소설을 써왔다. 대학에 입학한 해, 김천에서 통일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청년 정영문에 관한 묘사도 재미있다. ‘상경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고전적인 근대소설에서 최근 우리문학의 루저 문학이나 정크 문학(그 이전의 칙릿 문학도 포함)에 이르기까지 각종 소설의 기저에 깔린 상승이 아니라 하강’, 말하자면 패배’(카프카)전락’(카뮈)의 동선을 보여준다. 물론 이 역시 <작위>의 의 광대 복장처럼 가면이자 포즈일 수 있다. 그러나 살 속까지 파고든 가면은 이미 그 사람의 얼굴이고 몸뚱어리에 붙어버린 포즈는 이미 그의 실존이다. 그리고 소설가의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그의 소설의 일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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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1. 소수적인 문학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론에서 사용한 소수적인(mineure) 문학이라는 개념은 물론 카프카가 처한 언어적 정황과 관련된 것이다. “소수적인 문학이란 소수적인 언어로 된 문학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언어 안에서 만들어진 소수자의 문학으로서 고도로 탈영토화된 언어, 정치성과 집합성을 특징으로 한다(들뢰즈/가타리, 44-46). 카프카의 경우 체코어, 독일어, 유대어 등 세 개의 언어-문화가 만나고 어긋나면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는 지점이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K’()의 실존적 고독과 소외, 그리고 카프카 특유의 분석적이고 건조한 문체(‘문서체’)의 진앙도 여기이다. 그럼에도 소수적인 문학의 핵심은 생래적이고 객관적인 정황에 있지 않다. “소수적이지 않은 위대한 문학이나 혁명적 문학은 없다. 모든 거장적인 문학을 증오하는 것.”(들뢰즈/가타리, 67)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 그것이 단일하며 다수적이거나 다수적이었다고 해도 를 소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자기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처럼 되는 것”(같은 곳)이다.

 

 

 

 

 

 

 

 

 

 

 

 

 

 

단일 민족에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적 지향점을 타진할 때 소수적인 문학은 제법 유용한 개념으로 보인다. ‘세계문학지역문학’(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이 요청될 만큼 여러 언어권 간의 경계가 흐려졌으며 문단의 구조는 기존의 작가/비평/출판(시장) 권력에 덧붙여 대학(문예창작학과) 권력까지 가세해 무척 복잡해졌다. 이와는 별개로 여전히 좋은 문학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장이 기술 논리와 경제 논리에 따라 급속도로 재편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이 새삼 강조되면서 소수적인 문학의 입지가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가 정영문의 문학적인 성취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이 역시 문학 권력들의 흐름의 산물이지만!) 반가운 건 이 때문이다. 다수적인-소수적인 문학은 주류-비주류, 중심-주변처럼 극히 상대적인, 고로 정치적인 개념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엄연히 구분되는데, 둘의 생산적인 공생 관계의 예를 19세기 러시아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다수-규범의 문학과 소수-전위의 문학: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정녕 톨스토이의 소설이 소설-서사시인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소설-비극이다. 전자의 소설에서는 세기의 영웅인 나폴레옹조차 한 명의 등장인물로, 더욱이 꼰질꼰질하고 촌스러운 출세주의자로 전락하는(<전쟁과 평화>) 반면, 후자의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의 누추한 하숙방에 틀어박힌 채 나폴레옹을 꿈꾸다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괴상한 법학도마저 오이디푸스 못지않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죄와 벌>). 요컨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었음에도 그들이 살았던 러시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 다름과 다름의 공존이 두 작가를 공히 불멸케 하고 러시아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루카치의 소설론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혁신성을 지적하는 것으로(루카치, 205-206) 끝나는데, 톨스토이가 전범의 계보를 완성한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위의 계보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사의 심판이 사실상 종료된 문학, 더군다나 의 문학 얘기이다. 지금 생성 중인 문학, 더군다나 /우리의 문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다시금 톨스토이를 겨냥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자면, 본질상 혼돈과 무질서이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다(<미성년>).

 

 

 

 

 

 

 

 

 

 

 

 

 

 

 

 

3. 정영문의 이론적 서사와 <어떤 작위의 세계>

 

3-1. 말과 사물 사이 - 말의 말

 

이제 우리 문학의 전위의 계보도 두둑해졌는데 정영문은 그 끄트머리에 있을 법하다. 2000년대 이후 그가 써낸 책의 목차만 봐도 중성적인 낱말이 오히려 생경하게 여겨질 만큼 정영문스럽다.

  (...) 

현재로선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최고작인 <작위>에서 정영문스러움은 더 공고해진 느낌이다. 일종의 서문에서 그는 이 소설을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이미 전형적인 번역 투(더욱이 윤문을 거치지 않은!)의 문장, 각종 지시 형용사와 대명사에 대한 강박적인 거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인바, 사소한 변주를 동반한 동어반복, 불성실하고 무성의하고 심드렁한 문체 등이 눈에 익다. 다만, 말들의 틈새가 훨씬 더 촘촘, 아니, “쫀쫀”(<달에 홀린 광대>, 33)해졌으며 작가의 감각 기관에 포착된 객관적인 사물과 대상은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작위>, 7)려 있다. 이는 작가의 관심사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에 있기 때문, 말의 말, 소설의 소설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작위>, 270)임을, 굳이 괄호까지 사용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앞서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부제로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7)를 지적했는데,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뜬구름에 좀 더 재미를 느낀 듯하다. 그 이유인즉,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작위>, 270)이다.

 

이렇게 아무런 핵심이 없고 이 핵심 없음이 곧 핵심인 세계가 나타났는데, 정영문은 그것을 완벽한 작위의 세계’, 심지어 이상한 무위의 세계라고 부른다.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무위의 허구의 세계이기도 했다.”(<작위>, 190) 이런 허망한 세계에 관한 집요한 말장난이 한 편의 소설이 됐다. 그것에 대한 각종 해석이 초라하고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의 소설 자체가 하나의 소설론인 까닭이다. 그것도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식의 기치를 내걸거나 기존의 소설론이나 서사학과의 대결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닌 심드렁하고 시건방진(!) 소설인 까닭이다. 그뿐인가. 소위 난해한 소설의 대명사인 정영문에게는 그 나름의 완벽한 알리바이도 있다. ,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에 허무와 불모의 세계관이 돋보임과 동시에 잘 짜인 서사 구조를 갖춘 중단편 소설이 적지 않다. 할아버지(아버지)의 성묘를 떠났다가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혹은 제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연극적인 대화와 괴상한 작태가 인상적인 부자(父子) 이야기를 그린 달에 홀린 광대(<달에 홀린 광대>)라든가 남의 집에 침입해 기껏 마실 것과 치질약과 네 곡의 연주”(<목신의 어떤 오후>, 39)만 요구한 어린 강도 커플의 난감한얘기를 액자식으로 들려주는 브라운 부인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자기만의 검은 이야기 사슬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정영문은 보이지 않는 균열파괴적인 충동의 극단으로 치닫더니 급기야는 핏기 없는 독백(‘하품을 곁들인!) ‘중얼거림을 택한 형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무력한 상태의 궁극의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을 뿐인 것 같아. 앞으로 글을 쓴다 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겠지.”(<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156.) 사물과 말 사이의 간극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과 마땅히 그럴 필요도 없다는 체념 뒤에 나왔을 법한 글쓰기는 칸트 식으로 말해 지극히 무목적인, 따라서 지극히 미학적인 행위에 가까워진다. 그 표현이 <바셀린 붓다>이다. 장은커녕 문단조차 잘 나누어놓지 않고 아무데나 되는대로 마구 읽으라는(혹은 굳이 그렇게도 읽지 말라는) 식의 이 소설은 베케트의 <몰로이>에 대한 오마주인 것 같으나 그 작태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실은 그것의 캐리커처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생각하다는 술어로 연결된 치명적인 문장 하나가 15쪽에 걸쳐 이어진다.

 

나는 일상의 다양한 모습과 차원들에 대해 생각했는데,() 자신이 생선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지금까지 먹은 생선의 숫자는 얼마나 될지에 대해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생선을 먹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한다는 생각을 하고,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삶이 언젠가 이후로 사실주의와의 길고도 험하며 지루하고도 즐거운, 전면적인 싸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제초제를 위스키로 착각해 커피로 넣으려 했던 화가에 대해 생각하며(이쯤에서 그만할까? - 이것은 화자가 내는 목소리이다. 그만할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더 할 수도 있고, 더 하고 싶은 걸 이것은 좀더 장난스러운 작가의 목소리다) () 역시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하루들로 이루어진, 이런 식으로 그 목록을 끝없이 작성하고, 그 목록들에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일상들의 순간들 혹은 시간들이 있었다.(<바셀린 붓다>, 60-74.)

 

거미의 항문에서 줄줄 나와 엮어지는 거미줄에 싱싱한 먹이가 걸려들듯(혹은 그러지 않듯) 말들이 사물들을 붙잡을 때가 있는데, 대략 그 순간에 정영문식 서사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다. 그것의 재미는 어쩌면 그가 배척하는 일련의 재미없는 서사(“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작위>, 94))을 향한 유쾌한 야유에서 시작된다. 이어, 자신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 말로 하는 놀이,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작위>, 95)을 써나가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소설의 숙명이기도 했던 의미와 논리의 과잉에 맞서 점점 더 비워지는 의미, 점점 더 무너지는 논리를 선보이는 소설이 태어난다.

 

(계속)

 

-- <세계의문학>, 2013년, 여름호

 

- 주요 계간지에 지면을 얻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지난 겨울, <창비>에 실은 촌평도 그렇거니와! - 그러니까 영도 다리 밑 점쟁이 말대로 사십부터는 인생이 피려나 보다! ^^;; ) 완죤 감격, 그쪽의 기획 의도에 맞추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좀 길었음에도,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간 쓰고 싶은 얘기를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_-;;) 최대한 요령껏(?) 풀어보려고 했다. 언제든 지면이 주어지는 대로 우리 소설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공.부.가 체질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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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끝낸 다음날, 그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어. 감기에 걸렸거든. 하지만 감기가 나은 다음에도 회사에는 가지 않았어. 하루 종일 자기 방에 누워 있었던 거지. 두 눈을 뜬 채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던 거야. 몸을 옆으로 돌리면 벽이 보였지. 그의 방 벽지는 무늬가 하나도 없는, 그냥 상아색 벽지였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무슨 그림을 그려보기에 딱 좋았어.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그림도 떠올리지 않았어. 그래도, 아니 그래서 더 좋았던 거야. 누워 있다 지치면 몸을 엎드렸어. 코가 살짝 방바닥에 닿았겠지? 이건 좀 불편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을 내리깔았지. 그러곤 나뭇결과 비슷한 모양의 장판 무늬를 살펴보았지.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겨 왔어. 그러면 그냥 그대로 자는 거야. 다시 눈을 뜨면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이런 상황이 그는 제법 마음에 들었던 거야.”

 

에이, 그럼 밥도 먹지 않아?”

 

지금껏 얘기에 열중했던 정은이가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짓말이야! 밥 안 먹고 어떻게 살아?”

 

.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문지기는 하루 종일 밖에도 나가지 않고 방만 지켰어. 첫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잠을 잤으니까. 다음날은 방에서 뒹굴며 만화책을 읽었어. 그러니까 이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만화책을 읽었잖아? 다음날은 그간 굶주린 배에 음식물을 가득 집어넣었어. 너무 오랜만에 과식을 하는 바람에 소화제까지 먹어야 했어. 어쨌거나 그날도 밥을 먹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그 다음날은 밖으로 나가 반나절 동안 섬을 돌아다녔어. 구석구석 다 돌아봤어.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왔던 길을 또 오락가락했지. 집에 들어온 뒤에는 퍼즐조각을 흩어놓고 맞추기 시작했어. 한데 그는 퍼즐은 정말 젬병이었거든. 한참을 붙들고 있었지만 절반도 맞추지 못했어. 이게 그는 참 마음에 들었어. 빨리 끝나 버리면 새로 할 걸 찾아야 되잖아? 그러니까 바로 이게 문제야. 어쨌거나 그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그는 깨달았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잠깐이라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떡붕어 아저씨는 마른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지금껏 졸고 있던 가람이가 깨어났다. 대신 정은이가 졸기 시작했다. 희주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옆에 누운 빛나의 다리를 긁고 있었다.

 

마녀는?”

 

잠결에 정은이는 이렇게 내뱉고는 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마녀는 문지기와는 달리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늘 바빴지. 하지만 왠지 마녀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마녀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서 선생님 놀이를 했어. 모래 장난을 좋아하는 은학이와 세상이 전부 미웠던 태형이와 몹시 시끄러운 아름이를 데리고 말이야. 마녀는 선생님 놀이를 할 때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어. 그냥 아이들과 놀았을 뿐이야. 동화를 들려주고, 종이를 접고, 숫자를 세보고 그렇게. 집에 오면 마녀는 주부 놀이를 즐겼어.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심지어 농사도 지었지. 하지만 뭔가 이상했어. 문지기와는 부부 사이였지만, 그래서 같은 성에 살았지만, 그들은 어딘가 부부 같지 않았거든. 아참, 마녀는 또 동화 작가이기도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동화를 종이에다 직접 쓴 적은 없었으니, 이것도 얄궂지 뭐야. 어떤 한 아이를 위해 꾸준히 동화를 쓰는 것도 같았는데, 어쨌거나 마녀는 분명히 아이가 생기길 바랐어. 하지만 있던 아이는 사라졌고, 없던 아이는 생겨나지 않았어. 마녀는 제법 슬펐을 거야. 그래도, 아니, 그래서 마녀는 동화를 썼지. 동화는 절대 써지는 법이 없었어. 그저 항상 동화를 생각하고 또 말하고. 그걸로 끝이었어. 그러다가 마녀는 죽을 때가 됐어.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 마녀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때도 마녀는 마법을 쓰지 않았어. 마법만 쓰면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한사코 마법을 쓰지 않으려 했어. 무엇을 위해서 마법을 아껴뒀던 것일까? 혹시 마법을 한 번이나 두 번 밖에 쓸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법을 한 번 쓰면 그 대신 눈이나 손이나 뭐 그런 걸 내줘야 됐던 걸까? 설마 마법을 쓸 줄 몰랐던 건데 계속 거짓말을 했던 걸까?”

 

소영이의 말에 대꾸를 해주는 아이는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한 자리에 붙박인 듯 앉아 있었다.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저녁식사였다. 소영이도 일어나 음식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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