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의 복권 







비를 맞았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엊그제 참수된 플라타너스 밑동은 또 다시 잎사귀를 낳았다. 


비를 맞았다

존재의 참을 만한 축축함에 로또를 샀다 

오십 평생 처음이오, 자동 다섯 장이오, 현금 오천 원이오.  


오늘은 비를 맞았고

로또는 항상 맞았고 우리는 

바빌론 강가에 주저 앉아 엉엉 울며 또 다시 바벨 탑을 쌓아 올렸다. 


일부터 사십오까지 공포와 희망을 

'카프카'라는 이름의 성스러운 화장실에 가두니

오, 영롱하도다, 바알 신의 목소리여!


너의 삶은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운명이란 내가 던지는 질문일 뿐, 답은 너희가 찾는 것.


비를 맞았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목수국은 큼직한 머리통을 땅 깊숙이 처박았다.  


한 번 뿐인 것은 아예 없는 것, 그래야만 한다니, 

그 한 번마저 반복되고 그 반복마저 영원하다니, 

영원 회귀는 곧 영원 불귀, 너무 가벼워 웃을 수밖에.


오늘도 비를 맞았고

로또는 항상 맞았고

운명의 영원한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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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모기의 책 사랑  





오늘은 심리적 금요일

그러나 실제적 월요일


밤이 깊어져, 밤이 길어져

열 두 시, 뭐가 문제야, 모기가

문제지, 일 날까 두려워, 그냥 일내자.

알란가 몰라, 우리 집 모기는 책 사랑꾼이라네. 

읽지는 않고 꽂아만 두는 두툼한 책들, 

구비 좀먹는 책만 보면 사족을 못 써요. 

존재 시간 자본 광기 감시 처벌 농담 무의식

전체주의 코스모스 사피엔스 총균쇠, 거미줄에  

앉는 법은 절대 없어, 거미줄에 앉는 건 까막눈

집거미일 뿐, 영특한 우리 모기는 책에만 앉는다네. 


오늘은 심리적 금요일,

그리고 실제적 금요일


내 사랑 모기의 책 사랑 어찌나 갸륵한지, 매일이 

심리적 금요일, 매일이 꽃날, 저 병신이 해맑고 지랄이야. 

책은 나 대신 모기가 사랑해주고 나는 모기를 죽여주네.

나는 죽여주는 여자야, 호호, Killer Queen! 

무덤 속 흐루시초프와 케네디마저 서로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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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아무튼 





접속사 없이 글을 쓰기가 힘들다. 특히 아무튼. 이 낱말은 논리와 인과의 결여를 정당화한다. 아무튼을 지양하자. 숫제 추방하자. 아무튼, 변신의 한 양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줌마-되기, 할머니-되기, 중환자-되기, 벌레-되기, 시신-되기, 신-되기. 변신은 배신이다. 배신은 배반. 배반은 배변을 닮았다. 배변 역시 배반. 아까 입속에 집어넣은 향긋한 음식이 구린내 나는 변으로 변신하여 지금 항문 밖으로 빠져나온다. 변신을 꿈꾸다 배신을 하니 배변을 본다. 변화를 꾀하다가 변고를 당하는 격이다, 아무튼.


시골집 언덕에서 머윗대를 뚝뚝 끊어 왔다. 무릎 하나를 세워두고 방바닥에 퍼질고 앉아,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 머윗대 껍질을 무던히, 심드렁하니 벗겼다. 풀 물이 손톱 밑 살에 스미도록 이런 자세로 이런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이 참 자연스러웠다. 이런 나를 완상하며 그 자연스러움에 녹아드는 또 다른 나 역시 참 자연스러웠다. 스스로 자, 그럴 연. 개고기를 먹을 때는 불에 그을려야 제 맛이라니. 자연이란 스스로, 그런 것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할래요, 그것도 하고 싶을 때만 할래요,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어요, 아예 하지 않을래요. 그런다고 해서 제가 유달리 까다로운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덜 하고 싶은 일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지요. 아침 잠이 많아서 관직은 싫고 항일은 몸이 고단할 것 같고 친일은 마음이 고단할 것 같고. 아무튼 그래도 뭘 하긴 해야 한단 말이죠.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나는 이렇게 쓸모 없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아니, 인간. 자연과 인간은 변신과 배신과 배변과 변화와 변고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싶군요.


내 이름은 빨강, 네 이름은 파랑, 얘 이름은 노랑, 쟤 이름은 초록, 걔 이름은 검정. 자연의 색깔은 무한이지만, 색깔의 이름은 유한하다. 모든 것을 섞었더니 검정이 되었다가 갑자기 하양이 되었다. 빨강 파랑 노랑 주홍 초록, 아무튼. 대명사도 유한하고 접속사도 유한하다. 접속사를 지양하자, 숫제 추방하자. 특히 아무튼을 때려잡자. 무의미의 의미, 무논리의 논리, 부조리의 조리. 아무튼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그런데 내가 이런 말들을 왜 쓰고 있지?

심심해서? 그럴 리가.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청년·가족·인간·미남…새로운 이름을 찾아서 | 중앙일보 (joongang.co.kr)


<미.션.> 김희성 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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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와 염장 






염가의 책 한 권을 사

염기 알카리를 배우고

염려에 사로잡히자

염력이 생겨서 별안간

염불을 외우며 차분히

염병할 내 팔자를 염색하다가

염세에 빠져 느닷없이

염소로 둔갑하는가 싶더니 

염습의 대상이 되다, 급기야. 


마땅히 염원할 것도 없고

염장을 지르는 놈도 없고

염좌될 팔다리도 없고 

염전 노예 될 리도 없으니 

염주를 매만질 일도

염치를 알아야 할  일도

염통에 털 날 일도 없으니

염증조차 생기지 않더라, 얼씨구.  


앗,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염라 대왕의 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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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처럼 일한답니다 




 

쉿, 촌놈으로서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소는 소가 된 게으름뱅이처럼 일하지 않습니다.

소는 일도 잘 하지만 꾀도 잘 부린단 말입니다.

소의 게으름에는 일리가 적어도 둘 이상 있고 

소는 소로서 진리를 알기에 부림 당하지 않지요. 


눈은 맑고 큼직해, 속눈썹은 촘촘히 길어,  

엉덩이 두 짝은 태평양 대서양처럼 넓어,  

긴 꼬리를 휘둘러 등짝의 쇠파리도 때려 잡는 영물인걸요. 


끔벅끔벅, 철썩철썩, 우물우물, 음매음매, 

영차영차, 느릿느릿, 어기적어기적, 오늘도

심드렁하니 풀밭에 앉아 게워낸 풀을 또

씹어 삼키는 이 루틴, 참으로 영험하지 않습니까!  

이 되새김질은 너무나 권태로워 궁극에는 시가 되었답니다.  


지나간 날들을 가난이라 여기며 

오늘도 저는 소처럼 일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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