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의 용처





히말라야에 갔어

카트만두를 거쳤지

암염을 캤어, 소금을 만들었지

하얀 모노리스에 팍팍 뿌렸더니

쓰레기 청소하기 힘드네, 설날인데. 


히말라야 소금 맛을 보았지 

짠 맛은 있어도 분홍이야

쓴 맛은 전혀 없어요

요리에 쓰기 아깝군요, 이런 고급 소금. 


프랑스에 다녀왔어, 조문하러

118세 수녀님이 가셨거든 

하느님 왜 절 잊으셨나요, 하고 

기도하시던 분인데 드디어 소원 성취. 


그러니까 상문살을 쫓아주세요. 

내 몸도, 아이 몸도, 옷장도, 냉장고도

소금을 뿌려요, 팍팍,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뿌리니 염전이 따로 없네. 

 

귀신도, 액운도 소독되는 거 맞죠?

설마, 이러다가 절여지는 걸까요?

젓갈처럼, 배추처럼, 급기야 적장의

모가지처럼? 그대 이름은 NaCl, 

염화나트륨, 참 용하기 그지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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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하지 않아서 






오늘

빗물이 눈물로 바뀐다. 

얼떨결에 길을 잘못 들었던 봄은 자취를 감추고 다시

엄혹한 겨울이 온다, 제대로. 무섭다. 

저 찰나의 온기는 기적의 오류였던가.


11시 반 <나눔국수>는 

포스기 옆에 플라스틱 손잡이 잔을

올려두고 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세상에서 제일 달고 맛있는 커피는

홀짝홀짝 마시는 스타카토 믹스 커피.

모락모락 커피 향과 종이컵의 조화. 


나는 방광 가득 오줌을 고아 둔 채, 

창자 가득 찌꺼기를 괄약근으로 틀어 막은 채 

귀갓길에 오른다. 알다시피, 무섭다.

똥오줌의 역사는 우리의 존엄과 품격을 떨어뜨린다. 

모름지기 성장이란 똥오줌 참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라지. 


과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왜.

당해야지 끝나는 건가, 이 복수는. 


기어코 묵직한 진눈깨비가 나를 후려치고 

내 앞으로 걸어가는 작달막한 여자는 뉘신지,  

등은 큼직한 가방, 한 손은 우산, 한 손은 스마트폰, 

뚜벅뚜벅, 칸트의 산책을 실현한다. 

방광과 창자를 비워낸 듯한 무심한 직립 보행 부러워라, 아뿔싸!

가방 속에는 든 것은 내가 먹을 짬뽕과 탕수육이었구나.

그 철학적 산책은 그렇다면 삶의 심부름이었나. 


오늘

삶이 맛있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절실하지 않아서 

(2023.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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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반전




지난 가을 

연회색 돌바닥 위에 톡 떨어져 있던 나방,  

잿빛 날개 사이로 보이는 빨강이 너무 예뻤다.

생명 활동의 끝은 응당 죽음,

성충이 되어 한껏 날다가 자연 멈춤, 아름다웠다.


올 겨울

중국산 꽃매미는 날기보다는  점프를 합니다. 

빨간색이 너무 징그럽죠? 요 녀석들은 발견 즉시

잡아 죽이세요, 밟아 죽이세요, 약을 뿌리세요. 

떼지어 수액을 빨아 먹는 놈들,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뒷산 참나무는 무사하답니다,

바퀴와 사슴벌레가 많거든요.


그 꽃매미 개체는

12년 차 인간 개체에게 맞아 죽은 것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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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기적, 검은 구원






1. 


빨간 우체통 지나 야트막한 계단 올라

도서관, 사랑하는 우리 학교 도서관 

서고 앞, 전화기 없는, 빨간 전화 부스

큼직한 체경은 사라지고 하얀 벽만 무심하네.


숫자와 알파벳, 보르헤스와 에코의 미로

현기로워라, 돌고 돌아 또 제자리

발자크와 디킨스와 도킨스의 시간

아, 셋 다 이름이 세 글자군요! 


다시, 야트막한 잿빛 계단 아래 

빨간 우체통, 귀엽지만 얄밉네요.  

아무도 안 쓰는데 너는 왜 여기 있니? 

아무도 안 찾는데 왜 기도 안 죽는 건데?


설원을 등지고 선혈처럼 빨간 실존,

행정관 앞 옛 풍경은 어땠지, 생각나?

묵묵부답 빨간 우체통을 뒤로 하고 

하얀 눈 위에 나 혼자 걸어간 검은 발자국.



2. 


띄엄띄엄,

큼직한 빨간 셔틀 버스를 탔고

앉아서 갔다. 가면서 생각했다. 


우리의 뇌는 이기적 유전자를 배반하고 

그것에 저항할 만큼 성장했다. 돌연변이라니, 

어떻든 운명을 결정할 유전 인자는 없다지 않는가.



3. 


아이의 두개골 틈새로 검은 피가 흐르고

빨간 수도꼭지 밑에서는 온수가 흐른다.

온수는 때와 피만 씻어주는 게 아니다.

영혼을 씻어준다. 손과 몸만 데워주는 게 아니다.

영혼을 데워준다. 세포와 신경을 속속들이 녹여

혼의 동사를 막아준다. 그리하여 이 시는 


원래 거룩한 온수 예찬이 될 것이었으나 -  


싯누런 뇌수와 검은 피를 씻어낸 아이는 다시

빨간 피를 쏟고, 그때마다 나는 생리혈을 흘리며

두통에 시달린다. 두통조차 나이가 드는지, 매달

빨간색이 너무 좋다. 빨간 스웨터 입은 비노쉬가 

너무나 예뻤던 영화는 나쁜 피였지. 따뜻한 물에 

검은 피, 나쁜 피, 더러운 피를 씻으며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 - 


빨간, 아주 새빨간 기적,

그리고 속 시커먼 구렁이 같은 검은 구원.

(2022. 12. 27.)


















* 레오 까락스 <나쁜 피> /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30주년판 서문. “... 우리는 다윈주의로부터 우리의 가치관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우리의 뇌는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항해서 배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이는 정도로까지 진화했다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피임 도구를 사용할 때 분명히 사실로 드러난다이것과 동일한 원리가 광범위한 규모로 작용할 수 있고또 작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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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처럼 무른 실존 






2003년 8월 아침


어디 농촌이나 어촌에서 막 상경했을까난곡이나 봉천동 달동네에서 탔을까.

가난이 줄줄 흐르는 바싹 마른 중년 여자광대뼈가 병색 가득한 낯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기세다.

못지않게 가난 냄새 풀풀 풍기는 옆자리 청년에게 말을 건다.

신촌 세브란스 가는 버스 맞쥬?”

청년이 살갑게 대해주자 말이 길어진다. 목소리와 몸짓이 모두 너무 크다. 못지않게 큰 눈은 '사팔뜨기'라는 비칭을 소환한다.

 

버스가 남영동을 지날 즈음 라디오에서 정몽헌 회장의 자살 뉴스가 반복된다.

정주영 아들이 왜 죽었대유?”

대북송금이니 뭐니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혀 하나만은 찰지게 맛깔나게 찬다

에유쯧쯧!”


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동정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우리의 두부처럼 무른 실존은

칼로 써는 것보다 손으로 뭉개는 게 더 쉽다. 


705A 파란 버스는 계속 달린다. 

중년과 청년도 달린다. 문제는 자살이 아니다. 


















천정환. <자살론>. 문학동네, 2020, 6-10

"그렇게따라서죽음 앞에 인간은 평등해진다... 자본가나 왕자에게조차 무한정 연민 받아 마땅할 풀꽃 같이 여린 삶이또는 두부같이 무른 실존이 있는 것인가누구나 돈이나 권력이나그보다 더한 권위나 관계를 다 무로 만들어도 좋을지기 힘든 제 몫의 삶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것인가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혀를 차며 동정할 권리를 가진 것인가. "(10) -> 저자의 의도와는 명백히 다르게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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