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를 보면 이 러시아의 대문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십분 만족되는 듯싶다. 넓은 이마와 움푹 꺼진 퀭한 두 눈은 곧 광활하고도 깊은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서양인답지 않게 툭 불거진 광대뼈 역시 어딘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고동색의 무성한 턱수염 속에서는 이성의 광기와 영성의 은총이 영원토록 사투를 벌이는 것 같다. 끝으로, 어딘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한 저 시선의 끝은 어디일까? 그의 소설을 들추는 수밖에 없다. 우선 전기를 간략히 보자.

 

(바실리 페로프, <도..키>

 

소설가로서의 무게에 비하면 생활인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다전공에 따라 공무원(무관)이 되었으나 이내 싫증을 냈다.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고 그 순간 가난은 그의 실존이 되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된 셈이다. 뿐더러 간질병이 평생 그를 쫓아다녔다. 도박벽 역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문학 속에서 승화작용을 거친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고뇌하는 인텔리겐치아에 관한 소설이다. 그 고통이 너무도 크기에 그들은 간질발작이나 도박의 절정과 같은 찰나적인 황홀경을 꿈꾼다. 그들의 목표는 늘 유토피아 건설이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대 때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드나들며 푸리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서적을 읽고 새로운 사회 체제의 가능성을 논하곤 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애초 각본에 따라 사형 집행 당일 총이 발사되기 직전, ‘사형극이 극적으로 중단된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8년간 유형살이를 한다.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에 슬라브주의자가 돼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좌익이나 우익이냐, 무신론자냐 광신도냐, 가 아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보다 소중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최고 소설로 손꼽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하 <카라마조프>) 역시 궁극적으론 삶에 바치는 찬가라고 할 수 있겠다.

 

2. 아비를 죽이다 - 친부살해의 테마

 

19세기 후반 스코토프리고니예프스크 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세 아들을 얻었다. 첫 부인 소생의 드미트리(28)는 퇴역 중위인데, 난폭한 면이 있으나 타고나길 마음씨가 착하다.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이반(24)은 이지적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자연과학도이다. 역시나 두 번째 부인 소생인 알료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얌전한 청년으로서 어머니의 광신에 가까운 신심을 물려받아 수도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밖에, 암암리에 표도르의 자식으로 통하는 스메르쟈코프가 있는데, 하인 겸 요리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를 빼면 모든 아들이 아비에게 버림받고 타인의 품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한데 세 아들이 갑자기 아비의 집을 찾아온다. 대체 왜? <카라마조프>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단 문제는 이다. 드미트리는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어머니가 자기 앞으로 남긴 유산을 받아내고자 한다. 물론 표도르가 돈을 내줄 리 없다. 그 와중에 드미트리는 표도르가 오랫동안 눈독을 들인, 그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그루셴카에게 반하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겉보기엔 제법 점잖은 이반이 드미트리의 약혼녀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한다. 결국, 아비와 아들이 돈과 여자 때문에 다투고 배다른 두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기괴한 신경전을 벌이는 형국이 된다.

 

 

 

 

 

 

 

 

 

 

 

 

 

 

 

 

이렇듯 <카라마조프>는 그 상상력의 측면에서 거의 신화에 가깝다.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고 아비의 여자를 탐한다, 라니. 그 거칠고 적나라한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시쳇말로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아들이 아비의 집에 쳐들어와 아비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짓밟고 쌍욕을 퍼붓는 장면을 보라. 이 소설이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빨리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 오이디푸스 신화 자체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측면과 작가의 직설적인 화법. 물론 추리 소설적인 장치(“누가 표도르를 죽였는가?”)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소설적 흥미의 저변에 깔린 것은 죄와 벌, 자유와 양심, 신의 존재와 그 가치 등 대단히 철학적인 물음이다.

 

특히 <카라마조프>에서 친부살해는 일차적 의미의 범죄(아비를 죽이다)를 넘어 정치적 혁명(-차르를 죽이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반항과 무신론(신을 죽이다)을 아우른다. 실제로 이 소설이 쓰일 무렵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표방한 급진파 쪽에서 각종 테러가 일어났고 황제(알렉산드르 2) 시해 시도도 있었다. <카라마조프>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극우파 작가의 우려와 불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젊은 날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에 목말라 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편력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단순한 찬반’(Pro et Contra)에 그칠 리는 없지 않겠는가. (계속~)

 

-- <신동아>

 

 

 

고전을 영화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백치>. 므이시킨의  전기에 작가 도..키의 사형 직전의 체험을 은근슬쩍 집어넣었죠. 소개 없이도 누가 누구인지 보이죠? 로고진 -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 므이시킨 - 아글라야, 입니다. 물론, '번안' 영화라 일본 이름이었지만 -_-;; 

로고진 역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그리고 나스타시야 역에 참 잘 어울렸던 하라 세츠코입니다. 주로 구로사와 아키라보다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많이 나오긴 하는데요... 정윤희처럼, 감격스러운 미모입니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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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직접 번역하신 분이 바로 푸른괭이님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후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 '두세달의 추운 겨울' 동안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 바로 <까라마조프 형제들>이었답니다. 대략 32년쯤 전에 읽었었지만 아직도 소설 속 장면들이 눈에 선하네요. 나중에 언젠가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꼭 푸른괭이님의 번역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오래 전에 제가 남겨뒀던 기록도 덧붙여봅니다.
* * *





푸른괭이 2013-01-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다시 읽어보시면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라끼찐에 대한 인상이 강하셨나 봐요? "경박한 재줏꾼"이라는 말도 딱 맞는 것 같네요...^^;
 

*

 

토요일 오후, 특수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명동만두분식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물만두, 찐만두, 군만두, 만둣국 등 온갖 만두가 다 있었다. 심지어 떡볶이와 라볶이에 튀긴 만두를 넣은 만두 볶이도 있었다. 콩나물을 넣은, 매콤하고도 달콤한 쫄면도 아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오늘도 아이들은 만두 접시를 눈앞에 두고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군만두 하나를 남겨놓고서 소영이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굴까? 돈 많은 사람? 힘 센 사람?”

아름이가 만두 볶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키는 크고 얼굴은 조그맣고 무진장 예쁜 사람!”

아니야! 배가 무진장 커서 하루에 네 끼, 다섯 끼, 아니 열 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야. 세상에는 맛있는 게 정말 많거든.”

그건 맞아.”

은학이가 소박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아름이가 얼른 대꾸했다.

, 그럼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아저씨는 배 크잖아?”

아무리 배가 커도 하루에 열 끼는 못 먹어, 헤헤.”

이 말에 아름이는 소영이가 남긴 군만두를 냉큼 집었다.

 

그 때 태형이가 명동만두분식 앞을 지나갔다. 아름이가 식당이 떠나갈 새라 큰 소리로 외쳤다.

, 꽃남!”

태형이는 흠칫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섰다. 6학년이 되면서 마냥 계집애처럼 예쁘장하고 귀엽던 태형이는 서서히 사내다운 틀을 갖추어갔다. 누구의 눈에나 예비 미남으로 보일 법한 이목구비였다.

은학이와 소영이가 꽃남을 보기 위해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뒤로 돌렸다. 둘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태형이었구나! 뭐해? 같이 먹자! 얼른 들어와!”

심지어 소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 순간, 태형이 머릿속에선 누나, 미워!” “형도 미워!”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들이 미웠다. 그들과 함께 했던 바보로서의 시간이 미웠다. 특수반에 가지 않아도 된 이후로 태형이는 이들을 슬슬 피했다. 그것은 한 번 부서지거나 뽑힌 이빨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절대 다시 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과 거의 비슷했다.

학원 가야 돼요.”

잠깐 머뭇거리다 나온 말이 반말이 아니어서 태형이 스스로도 어색했다.

학원? 무슨 학원? 너 이제 학원도 다녀? 에잇, 아무리 그래도 군만두 먹을 시간도 없어?”

 

소영이의 물음에 태형이는 말을 얼버무리며 얼른 사라졌다. 만두 한 접시에 열광하는 저들이 왠지 촌스럽게 여겨졌다. 인생의 목표를 겨우 군만두 하나에 두는 것은 한심한 일이었다. 태형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것이다. 당장 섬을 떠나지는 못해도, 이 지긋지긋한 섬마을을 벗어나 시내로 가려면 일분일초도 허비해서는 안 됐다. 누나에 대한 기억은 사라진 자리는 이제 세 살이 된 여동생이 대신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병신처럼 일만 하고서도 늘 남한테 굽실거리며 살았다. 태형이는 자기가 이 가난한 집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어렴풋이 의식했다. 이 책임감으로 자신의 야망을, 또 자기중심적이고 야박한 삶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명동만두분식을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다 시큰둥했다. 그때 신임교장이 분식점 안으로 들어섰다.

, 너희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만두 먹고 막 집에 가는 길입니다.”

은학이는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허, 이 녀석들이! 밥은 집에서 먹어야지! 부모님이 기다실 거 아니냐?”

어라, 언니, 이 할아버지 아까 그 꽃남하고 똑같은 소리 하네.”

요 녀석,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얼른 집에 가지 못해!”

교장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고함을 쳤다. 은학이는 얼른 아름이를 들춰 업었다. 그러곤 소영이 손을 잡고 잽싸게 달아났다. 아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소리를 질렀다.

 

교장은 식당의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최근 들어 교장은 회식이 아니더라도 외식을 하는 일이 잦았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아내는 봉사활동, 종교 활동, 문화생활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다. 여성호르몬이 중단되면서 안주인은 그야말로 주인이 되어 살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소비활동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했다. 그 바람에 교장은 집에서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그런데도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것은 노년으로 접어든 암컷과 수컷의 당연한 권력 관계 탓이었다. 그나마 아직은 월급이라도 적잖이 벌어다주지만, 곧 닥칠 연금생활에서 최소한의 존엄성이라도 보장받으려면 지금부터 안주인에게 잘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교장은 이 굴욕적인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곁들어 그는 분식을 좋아했다. 이는 근검절약을 좌우명으로 매사에 궁상을 떠는 교장의 취미이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고 살아왔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그에게 길바닥의 불량식품을 몰래 사먹는 것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그 버릇이 말하자면 이렇게 나타났다. , 교직원들과 학생들 앞에서 늘 근엄하고 진중한 모습이던 그가 다름 아닌 학교 근처의 분식점에서 이렇게 조촐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절대 연출처럼 보이면 안 됐다. 그저 겉보기에 권위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진정 서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하지만 모두에게 마음껏 과시해야 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섬마을 최고의 초등학교 교장의 지위에 오른 자가 허접한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그런데 이 장면의 목격자가 하필 저 바보들이었다니.

 

혀를 차며 그는 메뉴를 하나하나 정성껏 읽었다. 그러곤 평소와 다름없이 떡볶이와 찐만두 한 접시, 얼큰한 속풀이 라면, 야채김밥 한 줄을 시켰다. 음식을 먹으면서 분이네 분식점과 훈이네 분식점을 오가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맛있는 것은 이 음식이 아니라, 심지어 서민인 양 뻐길 수조차 있을 만큼 관대해진(그는 그러노라고 믿었다) 자신의 여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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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현실과 조작 현실 사이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974220일 수요일, 여성 카니발 전날 밤, 어느 도시에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자가 저녁 645분경 누군가가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나흘 후, 드라마틱하게 - 사실 그렇게 표현해야만 한다.(중략) - 사건이 전개된 이후, 일요일 저녁 거의 비슷한 시간에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녁 74분경에 - 그녀는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는 마침 사적인 이유가 아닌 직무상의 이유로 아랍 족장으로 분장을 하고 있던 참이다. 그녀는 놀란 뫼딩에게 조서를 작성하라며 진술한다. 자신이 낮 12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으며, 뫼딩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를 데려갈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녀 자신은 12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체포해 주길 부탁하며, “사랑하는 루트비히가 있는 그곳에 자신도 기꺼이 있고 싶노라고 말한다.(11-12)

 

이것이 소설의 초두에 제시된 사건의 전말이다. 화자의 관심은 220일 수요일에서 24일 일요일까지 45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추적, 해부하는 데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급기야 깡패 집단이 돼 버린 언론이 노골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애초 이 소설의 모델이었던, 사상적 경향성을 띤 한 지식인이 소설적 변용을 통해 그저 선량한 시민혹은 민간인으로 거듭난다. 카타리나 블룸은 평범하고 성실한 가정 관리사로서 평소 행실에 있어서도 새치름하고 뻣뻣하다고까지 알려져 있고, 지인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수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55)27세의 이혼녀이다. 그녀의 삶이 흔들린 것도 역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중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것, 따라서 말해지기 가장 곤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러 층위의 폭력에 노출된다.

 

 

 

 

 

 

 

 

 

 

 

 

 

 

 

사실 관계를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카타리나는 어느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 첫 눈에 반하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밤을 보낸다. 그날 새벽, 그가 쫓기는 몸임을 알게 되자, 거의 외우다시피 익혀온 우아한 강변한 삶아파트의 도면을 떠올려 그를 비밀 통로로 탈출시킨 다음, 평소 그녀에게 치근대온 한 신사(슈트로입레더)의 별장에 그를 숨긴다. 이로써 그녀는 처벌 받아 마땅한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수사와 언론 보도, 그로 인해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일련의 불쾌한 일에는 소름이 돋는다. 가령 황색 저널리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악랄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퇴트게스 기자를 보라. 이제 막 어려운 암 수술을 끝낸, 카타리나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모든 속임수 중에서 가장 간단한 속임수”, 즉 페인트 공으로 변장해 병실에 잠입한다.

 

그는 블룸 부인에게 사실들을 들이댔지만, 그녀가 괴텐을 전혀 몰랐던 탓에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자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107)

 

블룸 부인의 당혹감과 의구심이 기자의 윤문작업 끝에 카타리나의 행위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증언으로 바뀐다. 이렇듯 개인의 내밀한 삶이 조서와 보도 자료의 형식으로 환원되는 순간, 진실과 거짓, 실제 현실과 조작 현실 사이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밀실이 파괴된다. “맙소사, 그는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바로 그 남자였어요. 그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가 감방에서 나올 때까지 몇 년 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요.”(61) 그녀가 볼터스하임 부인 앞에서 했던 말이다. 실상 우리 중 누구도 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해 예컨대 그녀의 사랑 고백을 엿들을 권리는 없다. 더러 대상이 누구냐,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몹시 그러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가 암시하듯, 언론이란(적어도 특정언론은) 그 본질상 불가피하게무자비한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은근히 고발적인 팸플릿의 냄새를 풍긴다. “-라고 한다”, “-이 알려졌다라는 식의 문체는 조서와 신문을 연상시키며 화자가 얻은 정보의 출처 및 전달 방식 역시 경찰과 언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상당히 냉혹한 보고서이다. 퇴트게스 기자를 향해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는 그녀의 분노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 역시 폭력의 공범이 되는 셈이지만 이 역시 불가피한것이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보는 내내 무척 춥고 불쾌했어요. 하나 마나 한 대선이 돼버린, 그 때문에 더 추워진 연말, 이 소설과 이 영화와, 또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해준 한 정치가 등이 떠오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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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신입생 중에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가 있었다. 아름이는 개학 첫날부터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빈틈없이 짜인 시간표에서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이만한 먹잇감이 없었다. 심지어 소영이보다 더 중증에, 따라서 더 흥미로운 존재로 보였다.

 

아이들은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아름이를 괴롭혔다. 금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괴롭힘의 방식도 훨씬 더 정교했다. 호머 파베르의 후예임을 증명하듯 도구까지 준비한 다음 우물 뒤쪽으로 끌고 갔다. 왠지 그냥 쥐어 패는 것은 시시껄렁하고 싱겁다는 생각에 옷을 찢어가며 벗겨야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다. 가뜩이나 몸가짐이 거칠고 목소리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아름이가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지르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의식적으로 더 흥을 냈다. 한 아이는 아름이에게 마구 발길질을 하며 얼굴에 침을 퉤퉤 뱉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이어, 아이들은 아름이의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아름이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 되자 아름이의 다리 사이를 탐색하며 다음 행동을 준비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공포의 임계점을 모른 채 점점 더 위험한 쪽으로 치달았다. 그때 은학이가 시커먼 먹구름처럼 아이들 위로 드리워졌다. 아이들은 언제 그토록 용감하게 아름이를 괴롭혔냐는 듯 비굴할 정도로 오그라들었다. 아름이는 온 몸에 가시를 세우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는 또 뭐야?”

은학이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어리둥절해했다. 그 표정이 나름대로 귀여웠는지 아름이는 긴장을 풀었다. 은학이가 자기를 구해줬다는 걸 깨닫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름이는 옷을 주워 입으며 조잘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뭐냐니까? 아저씨도 선생님이야? 그럼 또 나한테 야단칠 거야, ?”

급기야는 은학이를 쿡쿡 찌르고 꼬집기까지 했다. 언제 비명을 지르고 언제 엉엉 울었냐는 투였다.

잠깐만 좀 있어 봐, 목도리 둘러야지.”

은학이는 나뭇가지에 걸린 채 땅바닥으로 널브러져 있는 목도리를 집어 아름이의 목에 매주었다. 그 동안에도 아름이는 은학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다리를 들어 올려 어깨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큰 곰을 갖고 노는 토끼, 혹은 호랑이를 거느린 고양이 같았다. 꽤 정겨운 풍경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둘은 이내 단짝이 되었다.

 

아름이는 수업 시간에도 소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특수교사가 꾸지람을 하자 버럭 화를 냈다.

에이, 왜 자꾸 시비 걸어? 짜증 나!”

곧장 의자 위로 올라가 방방 뛰더니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죄다 뒤엎어버렸다. 순식간에 교실은 난장판이 됐다. 그때 은학이와 소영이가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름이가 마구 집어던진 물건 중 하나가 은학이의 머리를 툭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은학이는 미처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다가, 잠시 뒤 교실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올렸다. 헝겊으로 된 필통이었다. 그제야 은학이는 넋 나간 표정으로 넓적한 이마에 불퉁하게 생겨난 혹을 문질렀다. 아름이는 은학이의 모습에 깔깔대며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아저씨랑 언니는 뭐야? 왜 매일 같이 다녀?”

책상 위에 서 있던 아름이는 순식간에 은학이의 어깨에 매달렸다. 은학이는 아름이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얼른 팔을 뒤로 뻗어 아름이의 엉덩이를 받쳤다. 졸지에 은학이 등에 업힌 아름이는 은학이의 등과 머리에 자기 머리를 콩콩 박으며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아름아, 이제 그만 좀 내려오면 안 되냐?”

은학이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지만 이 꼬마 폭군은 막무가내였다. 특수교사까지 나서서 힘을 썼지만, 아름이는 손가락, 발가락을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만들어 은학이의 등에 더 찰싹 들러붙어버렸다. 그런데도 은학이는 감히 아름이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상대가 이 가학적인 놀이에 싫증을 내기만을 기다렸다.

아저씨, 나 저쪽!”

아름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교탁을 가리켰다. 은학이는 벙어리 삼룡이처럼 말없이 교탁으로 걸어가, 아름이가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등을 교탁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아름이를 두 팔로 껴안아 교실바닥에 내려주었다.

나 졸려, 잘 거야. 아저씨 엎드려봐!”

은학이는 이미 교실바닥에 엎드렸고 아름이는 그 등위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곯아떨어졌다. 교실 한 쪽에 조용히 앉아 뜨개질을 하던 보조교사가 기어코 터져버렸다.

저런, 저런 사탄이!”

심지어 성호마저 그었다. 뒤에는 연이어 아멘이 따라 나왔다. 특수교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 딱히 동조도,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은학이는 싸늘한 교실바닥에 배를 깐 채 거북이처럼 버티고 있었다. 평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순정파가 된 것이다.

 

아름이의 모습을 보자 소영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혼자서 높임말을 연습해보았다. 혓바닥이 미끈미끈하고 입에 낯선 음식을 문 것처럼 어색했다. 왠지 씹을수록 더 이상한 맛이 나서 절대로 삼켜지지 않는, 결국엔 잘근잘근 씹은 채로 뱉어내고 마는 그런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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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문학과 솔제니친: 일상의 공포를 어찌할 것인가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솔제니친이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조용히 안착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와 수용소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는 망명국인 미국에서 보냈다. 1994,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그의 말년은 제법 길고도 고요했다. 어떻든 90년에 걸친 그의 생애는 20세기 러시아, 즉 소련의 흥망성쇠와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1945, 솔제니친은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불온한정치사상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소위 수용소 인생의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이 개인적 불행이 역사의 보편적 체험과 만나는 순간, 작가로서의 그의 운명은 새옹지마처럼 바뀌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저항 작가 혹은 반체제 작가라는 말이 붙었으며 그의 소설은 수용소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것도 많은 부분 정치와 문학의 역학 관계 덕분이다. 말하자면 솔제니친은 스탈린 때문에 수용소 인생을 살았지만(그럼에도 대단히 장수했다!) 작가로서는 불멸이라는 최고의 수혜를 입은 셈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854’)9104반의 죄수이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정리된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208)

 

원래 제목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이 주는 감동과 미학적 효과는 더 크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10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08) ‘운수 좋은 날의 반전이랄까.

 

슈호프가 수용소에 온 것은 독일군의 포로, 고로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 아무 이유도 없거나 귀걸이, 코걸이 식의 억지 이유이다. 사정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침례교도인 어린 알료쉬카는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반장 추린은 아버지가 부농이라서, 영화감독 체자리는 불온한 영화를 찍어서 등이 체포 이유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부조리나 가시적이고 때론 선정적인 폭력이 아니라 그 일차적인 폭력 뒤에 찾아오는, 일상이 돼 버린 만성적인 폭력이다. 가령 슈호프는 더 이상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또 수용소 밖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과 이곳뿐이다. 어떻게 하면 영창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체자리가 피우는 저 담배를 한 모금이라도 얻어 피울 수 있을까. 이런 슈호프가 정작 벽돌을 쌓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그야말로 노동의 화신이 된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철근을 용접하러 가는 녀석들이며, 수리공장 건물에 마루를 얹으려고 가는 죄수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113)

 

소비에트 사회의 이상인 긍정적 주인공(영웅)’이란 노동과의 합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 일말의 회의도 없이 오직 생산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당시 소비에트 체제의 불합리한 운용의 희생양인 슈호프가 이런 소비에트적 인간(Homo Sovieticus)의 이상에 근접해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수용소 군도>)

 

 

고발문학 혹은 폭로문학이 선전문학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솔제니친의 문학은 지난 세기 내도록 그렇게 정치적 격랑에 따라 평가돼 왔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놀라운 것은 수용소 공간이 실존적 정황의 은유로 읽힌다는 점이다. 수용소 안은 수용소 바깥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단조롭다. 오히려 숙청의 공포에 벌벌 떨어야 했던 수용소 바깥이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이반 데니소비치󰡕 속의 수용소는 일상의 공간에 가깝다.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일상의 공포가 더 무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니까.

 

슈호프는 행여나 하고 희뿌연 온도계의 유리관을 힐끔 곁눈질해 본다. 만약, 수은주가 영하 사십일 도를 넘어서면 작업장으로 끌려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수은주가 사십 도까지 내려가기는 좀 힘들 것 같다.(15)

 

역시 오늘 날씨는 겨우(!) 영하 27.5밖에 되지 않는다. 등교할 수밖에, 혹은 출근할 수밖에!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 네이버캐스트

 

-- 오늘 분량의 장편소설을 올리다가 이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날씨도 정말 춥고요. 

솔제니친은 많이 읽지도 못했고(무엇보다도, <수용소 군도>를 완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ㅠ.ㅠ) 그러지도 않겠으나... 여하튼 참 소박하고 착한 작가, 진정한 노동자-소비에트-의 영웅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아이러니이고... 흠. 아래 사진은 88세의 솔제니친과, 다시 (당연히!) 대통령이 된 푸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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