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로 만든 집은 내부도 전부 과자와 빵과 아이스크림으로 되어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벼이삭으로 만들어진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양탄자의 털 사이로 까칠까칠한 혓바닥을 놀려댔다. 거기에는 손톱보다 더 작은 새끼 쥐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고양이의 몸뚱어리는 먹음직스러운 떡 덩어리였다. 온 몸을 뒤덮은 오색찬란한 털은 팥고물, 노란 콩고물, 흰 콩고물, 계피가루, 깻가루로 되어 있었다. 쫑긋 솟은 귀는 얇게 빚은 인절미를 빠닥빠닥하게 말려놓은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가 박힌 푸른 두 눈은 아무래도 푸딩이었다. 둥글게 만 꼬리도 젤리가 틀림없었다. 은학이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아무리 떡이라도 움직이는 이상, 고양이 모양을 한 떡이 아니라 떡 모양을 한 고양이였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음식이 아니었다. 고양이 모양의 떡은 먹고 싶지만 떡 모양의 고양이는 왠지 먹기 싫었다. 먹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집의 내부는 영 수수께끼였다. 얼음으로 된 벽 한가운데에 벽난로가 커다랗게 붙어, 아니 뚫려 있었다. 그 안에선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하드아이스크림을 박아 만든 벽이 어떻게 저 불길에 녹아내리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 옆에 붙박여 있는 오븐은 은학이의 공포를 자극했다. 태형이 역시도 첫눈에 그것을 알아보곤 온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븐 옆에 걸린 커다란 거울 속에 무시무시한 상이 어리었다. 튼튼한 삼발이 사이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그 위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얹혀 있었다. 뚜껑도 없어서, 뭔가 걸쭉하고 칙칙한 색깔의 액체가 그대로 보였다. 그 속에 정확히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느릿느릿하게 기포가 올라왔다. 태형이와 은학이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거울 속의 상도 무서웠지만 진짜 가마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내아이들과는 달리 소영이는 신이 나서 날뛰었다.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젊고 예쁜 여자가 미소를 보내자, 소영이는 안락의자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것은 몰랑몰랑한 카스텔라였다. 그 앞에는 목조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다리가 전부 닭다리였다. 과자로 만든 집에 고기까지 있다니! 소영이는 책상다리를, 아니 닭다리를 뜯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에 소영이는 홀딱 반해버렸다. 또 다른 책상 다리도 소영이 입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뜯긴 자리에는 곧 새 다리가 돋았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쯤 먹었으면 허기가 조금은 가셔야 되고 그러면 할머니 먹을 걸 챙겨야 되는데, 아무리 먹어도 배는 전혀 차질 않았다.

 

오빠는 왜 안 먹어? 태형이 너는 또 뭐야? 누나라며? 근데 왜 안 먹어?”

소영이는 책상 다리 두 개를 양손으로 힘껏 뜯어내어, 둘에게 건네주었다. 은학이와 태형이는 엉겁결에 뜯겨진 자리에 살점이 너덜거리는 닭다리를 손에 든 채 눈알만 굴렸다. 급기야 태형이가 벽 거울을 가리키며 울음을 터뜨렸다. 거울 속의 장작불이 더욱더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거울이 제가 알아서 가마솥 안을 확대해주었다. 걸쭉하고 칙칙한 물속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한 아이는 얼굴을 동동 띄운 채 팔을 휘젓고 있었고, 또 다른 아이는 거꾸로 처박힌 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또 어떤 아이는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만 물 위로 내놓고 있었다. 공포와 고통에 전 표정이 아니라면 그냥 물놀이를 하는 것쯤으로 보였을 거다. 수면 위로 기분 나쁜 기포가 꿈틀대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거울 너머 어디선가에 시작된 열과 김 때문에 거울 표면이 희뿌예졌다.

 

우아, 선생님, 저건 뭐야?”

소영이가 이렇게 물었지만, 아가씨는 태형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

태형이는 사색이 되어 은학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은학이는 태형이를 달래며 말했다.

걱정 마, 사람이 어떻게 거울 속으로 들어가겠어?”

글쎄, 한 번 보여줄까?”

 

예쁜 아가씨는 해맑게 깔깔대며 거울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손이 우그러지듯 거울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예쁜 아가씨의 몸 자체가 거실로부터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눈을 깜박 감았다 다시 떠 보니, 예쁜 아가씨는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작아져 가마솥에 풍덩 빠져버렸다. 가마솥이 장작불과 뒤섞이며 녹아내렸다. 불길이 더 붉게, 더 거세게 타올랐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얇은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친 아이들의 팔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과자로 만든 집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 ~!”

우아, 고양이만 살았다!”

소영이는 냉큼 고양이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보다 더 빨리, 더 날쌔게 달아나버렸다.

어라, 떡이 아니네.”

은학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저건 동네에서,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정색과 노란색이 무질서하게 얼룩덜룩 뒤섞인 도둑고양이에 지나지 않았다. 태형이는 아직도 눈물을 훔치며 훌쩍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들은 자기들이 울창한 숲 한가운데 공터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과자로 만든 집에 처음 들어갈 때처럼 별로 어둡지 않았다. 아이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

 

다음 주 월요일, 소영이는 학교에 가자마자 자기 반 아이들에게 마녀와 과자로 만든 집 얘기를 늘어놓았다. 아이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우리 선생님 마녀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폭로에 아이들은 아유를 퍼부었다.

에잇, 난 또 뭐라고. 바보랑 상대하지 마.”

바보라는 말에 소영이는 금방 발끈했다. 저도 모르게 뽀얗고 커다란 앞니가 드러났다.

, 저 바보 또 이빨 세운다.”

아이들은 실실대며 놀려댔지만, 은학이의 그림자가 상기되어 이내 수그러들었다.

 

1교시를 마치자마자 소영이는 특수반 교실로 뛰어갔다. 은학이를 보자마자 아까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오빠, 왜 애들이 아무도 재미있어 하지 않아?”

그야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니까.”

정말?”

, 우리 선생님은 원래 마녀야. 싸리 빗자루 대신 고양이 얼굴을 한 개를 타고 다닌다는 게 좀 특이하지.”

그럼 어떤 마법을 부릴 줄 알아? 나는 아직도 한 번도 못 봤는데.”

아무도 못 봤어. 선생님은 마법을 절대 쓰지 않아. 그래서 애들도 심드렁해진 거야.”

소영이는 잠깐 말이 없다가 또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과자로 만든 집은 아무도 모르는 얘기잖아.”

그럼 그냥 우리끼리만 알면 되는 거야. , 또 애들이랑 싸웠니?”

소영이는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그럼, 그래야지. 폭력은 아주 나쁜 거야.”

은학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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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는 1학년 1반에 배정됐다. 담임교사는 열 살이나 먹은 이 늦깎이 초등학생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주일쯤 지나자 소영이가 이른바 바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때부터는 어른에게 반말을 한다며 꾸짖는 일도 없었다. 소영이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바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주일이나 허비했으니 말이다. 소영이는 곧장 특수반에 보내졌다. 아무래도 특수반교사는 머리가 좋은 것 같았다. 적어도 첫 눈에 소영이가 바보라는 걸 알았다. 나아가, 소영이가 정신지체나 발달장애가 아니라 축적된 학습 결핍과 그로 인한 학습 능력의 현저한 저하로 판단된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이 말에 상당히 위안을 얻었고, 기쁜 마음으로 서류에 서명했다.

 

특수반은 다른 교실과는 달리 별채 건물에 있었다. 도르래가 달린 우물 바로 옆이었다. 특수반 아이들은 소영이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이었다. 은학이는 재작년에도, 또 작년에도 6학년이었는데 올해도 6학년이었다. 은학이의 아버지가 은학이를 중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얻어맞는 일만 더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눈에는 아들이 세상에 갓 나왔을 때의 모습, 2킬로가 간신히 넘는 미숙아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껴안는 것도 조심스러울 만큼 작은 아내를 대할 때보다 더 애틋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실 은학이는 거의 이 섬을 통틀어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또한, 수시로 아이들의 주먹질과 놀림을 당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없는 비폭력주의자에 평화주의자였다. 한 번은 모래밭에서 혼자 모래 장난에 몰두하고 있는 은학이에게 아이들이 콜라 캔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은학이의 머리나 어디 몸에 맞았다면 괜찮았을 것을(이런 일은 허다했다), 하필 그것이 이제 막 쌓아 올린 모래성을 무너뜨려버렸다. 은학이는 순식간에 온 몸이 화석처럼 굳는 것 같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모래밭을 막 달렸다. 그러곤 괴성을 지르며 운동장 끝에 있던 쓰레기통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단번에 박살나면서 쓰레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고도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은학이는 발로 쓰레기를 짓밟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본 뒤로 아무도 은학이를 건드리지 않게 됐다. 저만한 괴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을 가만히 놔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역시 바보라서 그런가봐.”라며 쑥덕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학교 측에서도 은학이를 계속 받아주었다. 가뜩이나 학생 수가 적은 학교였다. 주로 승진을 염두에 두고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장과 교감도 길어야 2, 3년 주기로 바뀌었다. 더러 내년에는 저 녀석을 꼭 중학교에 보내야겠다며 단단히 벼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내년이 왔을 때는 그 자신이 우물이 있는 학교를, 때론 아예 섬을 떠나버렸다.

 

일반 교사들과 직원들은 은학이를 총애했다. 거친 일, 특히 물건을 나르는 일을 늘 도맡아하는 아이였던 탓이다. 무엇보다도 이 만년 6학년생의 아버지가 바로 우체부였다. 그는 고군분투하며 학교를 오가는 모든 우편물을 담당했다. 섬 중앙의 교육청으로 가는 중요 문서는 죄다 우체부의 손을 거쳤다. 그가 없으면 아직도 소설가의 꿈을 접지 못한 어느 중년 교사는 해마다 연말이면 신춘문예에 응모를 할 수 없었다. 또 꽃 편지지에 편지 쓰는 낙으로 사는 한 늙은 남자교사는 머나먼 육지에 남겨둔 가족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었다.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인터넷 쇼핑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즐기는 신임 여교사도 우체부를 소중히 여겼다. 우체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은학이는 몇 년째 모래장난을 즐길 수 있었다.

 

은학이 옆에는 지난봄에 입학한 태형이가 있었다. 태형이는 키도 작고 몸도 성냥개비처럼 가늘었다. 얼굴도 뽀얀 것이 꼭 계집애 같았다. 샘이 많고 아기자기한 물건을 모으는 데도 열심이었다. 6학년인 은학이가 구구단을 외우자 자기에게도 구구단을 가르쳐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특수교사는 더하기와 빼기를 한 다음에야 구구단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열심히 타일렀다. 그러자 태형이는 사내아이들처럼 반항하기보단 혼자 책상 위에 엎드려 훌쩍거렸다. “선생님, 미워요!” “, 미워!” 불만이 있을 때마다 태형이가 늘 내뱉는 말이었다.

 

공작 시간에도 태형이는 만용을 부렸다. 별 접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종이학과 개구리를 접고 싶어 했다. 아무리 접었다 펴고 또 폈다 접어도 종이학이나 개구리가 탄생하지 않으면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꼭 껴안은 채 훌쩍댔다. 특수교사는 남은 종이로 종이컵 인형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믐달, 초승달, 반달, 보름달이 태형이의 종이컵 위에 예쁘게 붙었다. 태형이는 끝내 종이학이나 개구리가 되지 못한 종이 뭉치를 그 종이컵 속에 소중히 담아 간직했다.

 

그렇게 선물을 많이, 많이 모아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이 태형이의 꿈이었다. 다름 아니라, 재작년 봄에 싸리 꽃을 꺾어 온다며 집을 나갔다가 영영 사라져버린 누나였다. “선생님, 마녀잖아요? 우리 누나 보러 가요, ?” “, 우리 누나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나랑 같이 가 줄 거야?” 하지만 특수교사도, 은학이도 난감해했고, 나중에는 아예 얘기를 피하려 했다. 오직 소영이만 관심을 보였다.

어쩌면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는지도 몰라.”

우아,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누나는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

당연하지, 거기서 왔는걸!”

소영이는 으스대며 구덩이 오막살이와 다슬기 할매의 대궐 얘기를 늘어놓았다. 태형이 눈에는 소영이 누나가 무척 대단해 보였다. 뭍으로 떠나는 사람은 있어도, 뭍에서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던 것이다.

 

이제 태형이는 소영이를 붙잡고 누나를 찾으러가자고 졸랐다. 소영이는 슬슬 겁이 났다. 누군가가 자기한테 매달리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꼬리를 내렸고, 태형이는 그때마다 누나, 미워!”라며 눈물을 훌쩍였다. 결국 소영이는 나뭇잎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면 꼭 함께 그 누나를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까마득히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곧 다가왔다.

누나, 교문 옆에 단풍나무 봤어? 빨개졌지? 우리 누나 찾으러 가줄 거지? 약속 안 지키면 진짜 미워할 거야.”

에잇! 유치하긴 정말! 그래, 가자!”

 

*

 

금요일 오후, 특수반 아이들은 머나먼 길을 떠났다. 한사코 반대했던 은학이도 결국 따라 나섰다. 아니, 선두에 섰다. ‘어린 것을 단둘이만 보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세 아이가 막 운동장을 지나왔을 무렵, 뒤에서 특수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집에 가니?”

특수교사 옆에는 고양이 얼굴을 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느긋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뇨! 선생님, 우리는요, 아주, 아주 먼 길을,”

태형이가 옹알대기 시작하자 은학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선생님, 지금 우리가 집에 가느냐고 물으셨죠? , 그건 아닙니다.”

? 그럼 어딜 가는데?”

우리가 어딜 가느냐고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라, 선생님한테도 비밀이야? 에이, 그러지 말고 선생님한테 살짝 말해주면 안 돼?”

정 궁금하시면 네이버한테 물어보세요. 그럼, 이만! , 얘들아, 가자!”

특수교사는 피식 웃었다. 가봐야 결국 요 근처 바닷가가 아닐까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특수교사는 고양이 얼굴을 한 커다란 개의 등에 몸을 싣고 유유자작 집으로, 성으로 향했다.

 

특수교사의 짐작대로, 학교를 빠져나간 아이들은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해안도로는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곧 딴 세상이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길의 연속이었다. 오른쪽으론 뒤에 무엇이 있는지 통 알 길 없는 험준한 산들이, 왼쪽으론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은학이는 물과 도시락을 꺼냈다. 배를 채운 뒤 아이들은 또 걷기 시작했다. 해안도로를 등지고 산 속으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해안도로와 비슷한 아스팔트길이 나왔다. 아이들은 나란히 선 채 타박타박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이번에는 시멘트길이 나왔고 길이 좀 좁아졌다. 더 들어가자 신작로가 나왔다. 시멘트길보다 더 좁았고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어쩌다 한 대라도 지나가면 몇 분 동안 신작로에는 뽀얗게 먼지가 일었다. 아이들은 슬슬 지쳐갔다. 태형이는 투정을 부렸다.

 

누나, 얼마나 더 가야돼?”

너희 누나 집이 나올 때까지 가야지.”

우리 누나 집이 어디야? 바다는 언제 건너 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누나가 찾아준다고 했잖아?”

네가 말을 안 해줬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 이런 바보들이 다 있나! 위치를 모르면 출발하기 전에 네이버에게 물어봤어야지! 너희들을 믿은 내 잘못이다!”

 

은학이는 진심으로 자책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묵념이라도, 묵상이라도 하는 듯했다. 분위기가 숙연하고도 침울해졌다. 드디어 은학이가 고개를 들고 전투적인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작로 옆쪽, 산속으로 꼬불꼬불하고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은학이는 이제야 영감을 얻은 양 소리쳤다.

저쪽이다! 얘들아, 가자!”

소영이와 태형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다시 씩씩한 행군이 시작됐다. 은학이를 앞세운 채 나머지 두 아이가 따라 붙은 모양새가 꼭 짜리몽땅한 줄줄이 사탕 같았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맨 뒤에 섰던 태형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사라지고 없었다.

! 큰일 났다!”

은학이도 덜컥 겁이 났다. 태형이의 말을 듣고 뒤를 보니 얼룩덜룩하고 울창한 숲 높이를, 또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벽이 돼 있었다. 그때 소영이가 감탄을 내질렀다.

우아! 저거 좀 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과자로 만든 집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아몬드 초콜릿 볼, 초콜릿 아이스크림, 참깨 크래커, 과일 드롭스 캔디, 버터 쿠키, 생크림 케이크, 고구마 케이크, 치즈 케이크, 슈크림 빵, 감자 크로켓, 호밀 빵 샌드위치. 휘황찬란하고 먹음직스러운 과자를 보자 군침이 고였다. 태형이는 입맛을 쪽쪽 다셨다.

얘들아, 안 돼! 선생님이 읽어준 동화 생각 안 나? 과자로 만든 집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은학이는 목청껏 외쳤지만 제일 먼저 달음박질을 시작한 것도 은학이였다.

 

과자로 만든 집의 문과 벽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사탕이었다. 아이들은 사탕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빨강색에서는 딸기 맛이, 연녹색에서는 풋사과 맛이, 주황색에서는 귤 맛이, 초록색은 멜론 맛이 났다. 노란색은 망고 사탕이었다. 아이들은 뭔가 달콤하고 향긋한 망고 맛에 반해버렸다. 벽과 문을, 또 문의 손잡이를 아무리 핥아먹어도 사탕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기둥을 이루고 있는 막대 과자 역시도 세 아이가 모두 달라붙어 뜯어 먹는데도 끄떡없었다.

 

갑자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예쁜 아가씨가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나왔다. 볼에서는 복숭아 과육 냄새가,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옥수수수염 냄새가 났다. 새카맣고 투명한 눈동자는 뜨거운 햇빛 아래서 농염하게 익은 오디와 비슷했다. 아가씨는 웃으며 앵두로 된 입술을 살짝 열었다. 풋풋한 향내가 퍼져 나왔다. 하얀 이빨은 개암나무 열매로 돼 있었다.

누나, 저 누나가 우리 누나야? 우리 누나는 조그만 아이였는데.”

바보! 우리 선생님이잖아?”

소영이가 핀잔을 주었다.

에이, 그럼 우리 누나는 어디 있어?”

태형이는 이제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조그맣던 누나가 저렇게 커버렸다는 것이 통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사태를 살피고 있던 은학이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저 아줌마는 우리 선생님도, 태형이 누나도 아니야! 얼른 가자, 얼른!”

오빠, 바보! 태형이도 바보야! 왜 선생님을 몰라 봐?”

그래, 소영이가 제일 똑똑하구나. 들어오렴.”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가며 손짓을 했다. 소영이는 통통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은학이와 태형이도 주춤하며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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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흘쯤 뒤 떡붕어 아저씨는 민물낚시를 떠났다. 소영이는 이번에는 떡붕어 아저씨의 말을 어기고 방 밖을 나갔다. 그러곤 성채를 반 바퀴 돌아 뒤쪽으로 갔다. 저 높이 성 꼭대기에 백발을 꼬아서 만든 굵은 밧줄이 계단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다. 소영이는 그 끄트머리를, 꼭 땋은 머리를 묶은 리본 같은 것을 한 번 잡아 당겼다. 허연 머리채가 성벽을 따라 굽실굽실 춤을 추었다. 갑자기 떡붕어 아저씨의 방, 아니 욕실 창문으로 튕겨나가 하늘을 날던 기억이 났다. 저도 모르게 머리채를 양손으로 붙잡고 첫 계단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보기와는 달리 넓고 평평한 땅에 닿은 것처럼 편안했다. 소영이는 천천히 머리채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구름이 몇 번이나 소영이의 등을 훑고 지나갔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한참을 차곡차곡 올라간 뒤 아래를 보니 연못이 조그맣고 파란 동그라미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위를 쳐다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창문만한 사각형의 구멍이 보였다. 소영이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창문에 다다랐다. 다락방보다 한참 더 높은 곳, 손을 뻗으면 하늘을 긁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높은 곳이었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창턱으로 발을 올린 다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발에 와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방 한가운데에 거대하고 물렁해 보이는 형체 하나가 있었다. 소영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어떤 할머니였다. 다만, 소영이의 할머니보다 훨씬 더 늙었고, 바싹 말랐던 할머니와는 달리 몹시 피둥피둥했다. 흡사 쭈글쭈글한 자루 속에 공기와 살을 잔뜩 집어넣어 부풀린 것 같았다. 사람은 늙을수록 마르고 쪼그라드는 줄만 알았는데, 늙으면서 더 커질 수 있다니 좀 놀라웠다. 할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디마저 살에 묻혀버린 손과 손가락 끝이, 또 검버섯으로 뒤덮인 얼굴의 주글주글한 주름들이 보일 듯 말 듯 파닥대고 있었다. 할머니는 경사가 완만한 안락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볼끈 잡아맨 복주머니처럼 생긴 입에는 투명한 뚜껑이 씌워져 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벽으로 이어졌다. 벽은 온통 기괴한 구멍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카락은 그 무수한 구멍을 한 오라기씩 통과하여 벽 너머로 드리워졌다. 할머니 곁에는 한 중년여자가 고도의 기술로 만든 인조인간처럼 서 있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와도 눈동자 한 번 돌리지 않고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할머니!”

소영이의 외침은 조용하고 넓은 방안에서 더 큰 메아리가 되어 소영이에게로 돌아왔다. 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소영이는 더 크게 외쳤다.

할머니 누구야? 밥은 먹을 줄 알아? 죽은 거야, 산 거야, ?”

그러자 뚱보 할머니의 입술이 달싹이며 무슨 말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음절로 나눌 수 없는 괴상한 소리였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야.”

갑자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지기였다.

함부로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 됐어. 저렇게 삶을 죽이면서, 죽음을 살면서 30년이 넘도록 누워 있는 거지. 저런 식이라면 불멸은 최악의 징벌이야.”

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정말! 아저씨 오뉴월에 불알이나 터져버려라!”

소영이는 다슬기 할매한테 들은 주문을 되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저 할머니는 누구야? 아저씨 아는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 그리고 주인이지.”

저 할머니가 여기 주인이야? 우아, 이 성이 전부 다 저 할머니 거라고? 에이, 나는 떡붕어 아저씨가 주인인 줄 알았네. 주인 아닌 사람은 매달 방세 내야 되는데, 에이, 좋지 않아!”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생각하며 실망감과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뚱보 할머니를 보니 금세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라, 저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방값은 어떻게 받아, ? , 아저씨가 대신 받는구나?”

문지기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너 그만 집에 가야겠다. 아빠가 찾잖아.”

, 나 아빠 없는데. 그래도 집에 갈래.”

 

소영이는 곧장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창턱은 아까와는 달리 턱없이 높았고 머리채 계단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소영이는 울음을 터뜨릴 기세로 문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소영이의 손을 잡고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걸었다. 계속 해서 칸막이가 나와, 눈 깜짝할 새에 그들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마지막 칸막이 앞에 이르렀다. 문지기가 돌출부를 누르자 칸막이가 쩍 벌어지면서 조그만 방이 생겼다. 문지기는 소영이를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자기는 바깥에 멍하니 서 있었다. 조그만 방은 소영이를 태운 채 급속도로 하강하다가 갑자기 털커덕 멈추어 섰다. 소영이는 낯익은 복도에 서 있었다.

 

소영이는 달려온 떡붕어 아저씨의 목을 감으며 안겼다.

아저씨, 나 때문에 방세 더 많이 내야 돼?”

?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 자살할 거야?”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말을 배웠어?”

구덩이 오막살이 살 때 맨 끝 방 아줌마랑 아저씨 죽었어. 방값 못 내서 죽었대. 사람들이 자살이라고 그랬어.”

어휴, 네가 없어도 방세는 내야 되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자살이란 아주 나쁜 말이니까 잊어버려.”

왜 나빠? 아저씨, 그런데 있잖아,”

소영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속으론 웃고 있어도, 또 울고 있어도 그의 얼굴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소영이 얘기를 들으며 떡붕어 아저씨는 민물고기를 다듬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닿을 때마다 물고기는 비명 한 번 못 지르는 한을 풀겠다는 듯 죽어라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발악을 해도 쉽게 죽지도 못했다. 내장이 완전히 제거되고 비늘이 싹 벗겨진 채 멍한 눈을 치켜뜨고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뱃속에 양파와 다진 마늘과 생강이 들어갔고, 그 몸통에는 골고루 소금이 뿌려졌다. 물고기는 그렇게 죽음과 삶의 처절한 경계를 오가야 했다. 뜨겁게 달궈진 전골냄비에 들어가자 펄펄 끓는 간장이 물고기의 온 몸을 파편으로 뒤덮었고, 물고기는 마지막으로 최후의, 또 최고의 비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가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잽싸게 뚜껑을 덮어버리자 천정까지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꼬꾸라졌다.

 

슬슬 보내야겠는걸.”

누구? 어딜?”

요 녀석, 이제 학교에 가야지.”

떡붕어 아저씨는 굳어버린 얼굴에 근심을 담아내고 싶었다.

 

*

 

화창한 초가을 아침이었다.

 

성을 나와 논밭을 따라 쭉 걷자 바다가 나왔다. 그 바닷가를 따라 또 쭉 걸어가니 큰 도로가 나왔다. 우체국, 약국, 은행, 대형 슈퍼마켓, 세탁소, 다방 등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몇 발짝을 떼자 교문이 소담하게 서 있었다. 넓은 운동장 너머로 고즈넉한 바다가 그보다 더 넓게 펼쳐졌다. 운동장의 오른쪽엔 등나무가 연보랏빛 꽃을 피웠고 밑에는 나무벤치가 단정하게 배열돼 있었다. 왼쪽에 나지막한 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원래는 외지에서 온 교사들을 위한 숙사였지만 아무도 살지 않아 그냥 버려졌다.

 

운동장 옆을 따라 걸어가자 학교 건물이 나왔다. 그 옆으로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총 천연색을 뽐내고 있었다. 건물 바로 앞에는 조그만 꽃밭이 있었다. 그 예쁜 꽃들을 다 제압할 기세로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한 쪽 겨드랑이에 책보를 낀 어린소년의 대리석상 밑에는 이승복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문구도 보였다. 소년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엔 한 소녀의 대리석상이 있었다. 소녀는 긴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소곳이 앉아, 얌전하게 모아진 허벅지에 책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 옆으로 좀 더 가서 학교 건물을 끼고 돌면, 너무 많이 자라서 들국화처럼 돼 버린 쑥 틈새로 도르래가 달려 있는 우물이 나왔다. 우물 위에는 나무 지붕이 쳐져 있었다. 옆에 수돗가를 두고서도 아이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아이들이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도르래가 노래를 불렀고, 물통과 물이 우물 벽을 때리며 화음을 넣었다. 이곳이 소영이가 다닐 학교였다. 섬사람들이 우물이 있는 학교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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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가를 나온 떡붕어 아저씨는 P시의 여관에서 방을 빌렸다. 침대 시트가 싯누렇게 변색되고 이불 곳곳에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저것 살필 틈도 없이 뻗어버렸다. 사흘밤낮을 연이어 잔 뒤에는 동이 트기 전에 여관을 떠났다. 그리고 사흘밤낮을 P시의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면서 보냈다. 첫날 잡은 물고기는 죄다 회를 쳐서 먹었다. 근처 횟집에 파닥거리는 광어와 우럭을 주고 상추, 깻잎, 마늘, 초고추장, 쌈장에 소주까지 받아왔다. 단골거래처라 조개탕까지 덤으로 얻었다. 바닷가에 앉아 혼자 소주를 자작하며 살아 있는 물고기를 뜯어 먹는 이 순간은, 말하자면, 그가 누리는 일상의 행복의 극점이었다. T시에서의 고된 노동 뒤에는, 이렇듯, P시 바닷가에서의 만찬이 뒤따랐다.

둘째 날, 떡붕어 아저씨는 그날 잡은 물고기를 죄다 풀어주었다. 이 역시 그가 전업 강태공을 선언한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정한 나름대로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셋째 날, 그날 잡은 물고기를 담아놓은 어망을 보며 그는 망설였다. 원칙에 따라 풀어줄 것인가, 아니면 가져갈 것인가. 고개를 한 번 돌릴 때마다 쑥쑥 자라는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떡붕어 아저씨는 지난 5년간 고수해온 원칙을 수정했다. 어망 속의 물고기들은 다음날 오후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됐다. 어망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포로의 몸이라는 것도 모른 채 바다 속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날 밤 문득 여기서 전철을 타면 불과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부모님이 살고 있다는 것이 상기됐다. 그는 벌떡 일어나 전화를 걸었다. 머릿속에서는 까맣게 잊힌 숫자들이었지만 손가락은 용케도 기억을 해냈다. 신호음은 오래 지속되었다.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자정에 가까웠다. 그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아침, 떡붕어 아저씨는 어망을 한 번 살펴본 뒤 해장술을 한 잔 걸치고 백화점에 갔다. 35년 평생 첫 걸음이었다. 더군다나 여자 아이의 옷과 신발을 사기 위해서라니. 어리바리한 떡붕어 아저씨는 물건을 잔뜩 산 만큼이나 바가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백화점을 나왔다. 그 다음엔 아이스박스와 칼, 도마를 챙겨서 바닷가로 갔다. 어망 속의 물고기들은 천진난만하게 바다와의 마지막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차례차례로 내장과 아가미를 박탈당한 채 얼음 속에 생매장됐다. 떡붕어 아저씨는 아이스박스를 등에 지고 선물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배를 탔다. 비가 제법 내리고 파도도 제법 거셌지만 어느 시점부터 일 년의 절반을 배안에서 보낸 그였기에, 천하태평하게 곯아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지구를 하룻밤 새에 한 바퀴 다 돈 기분이었다.

 

*

 

소영이는 움푹 파인 구덩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떡붕어 아저씨가 나타났다. 흉악하고 묵직한 악몽에서 막 깨어나 환한 햇빛을 맞은 것처럼 소영이는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아저씨! 아저씨!”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영이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가 떡붕어 아저씨의 다리에 매달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기분이 묘했다. 제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의 가슴팍에도 닿지 못할 이 조그만 존재가 이번 여행 내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감지도, 빗지도 않은 머리카락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고무줄로 묶어놓은 꽁지머리는 썩은 참기름을 발라놓아 뭉쳐놓은 것 같았다. 이런 아이를 성 안에 혼자 방치해두었던 것이다.

소영아, 너 세수하는 법 몰라?”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살짝 떼놓으며 물었다.

얼굴이 간지러우면 가끔 해.”

어라, 이렇게 지저분한 숙녀가 다 있나. 양치질은?”

그게 뭐야?”

이는 닦냐고?”

이빨? 이빨을 왜 닦아? 이빨이 방바닥이야? 물 먹으면 다 깨끗해져. 이건 다 뭐야? 이리 내놔! 내가 다 검사할 거야.”

 

소영이의 눈엔 조금 전에 쏟아냈던 눈물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 눈은 호기심과 기쁨에 달떠 있었다. 선물 꾸러미가 풀어졌다. 갑자기 방한복판에 태양이라도 떨어진 듯 사위가 찬란해졌다.

우아, 이게 다 뭐야? 이거 다 내 거야, ?”

그래, 그건 다 네 건데, 방은 왜 이 모양이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소영이는 어느새 선물은 내팽개치고 떡붕어 아저씨 옆에 붙어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땅 속 구경, 하늘 비행, 방 키우는 놀이 등 소영이의 얘기는 두서도 없고 산만했다.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진 사건과 문지기의 등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아저씨, 문지기 아저씨는 생각이 많대.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래.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헛소리지. 그 친구는 아무 생각도 없어. 매일 부실한 장비로 괴물이나 때려잡는 주제에.”

 

떡붕어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그는 소영이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커다란 자루를 낑낑대며 끌고 왔다. 자루를 풀자 새카맣고 차진 흙이 나왔다. 양분도 많아,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자잘한 벌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 흙으로 구덩이를 메운 다음 다시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드디어, 떡붕어 아저씨가 시멘트를 갖고 옷장에서 나왔다. 구덩이는 금방 말끔하게 사라졌다. 스팀다리미로 힘껏 다림질을 하자 우그러졌던 장판도 바로 펴졌다.

우아, 아저씨 대단하다! 아저씨 마법사야? 저건 어떡해?”

소영이가 천정의 구멍을 가리켰다. 떡붕어 아저씨는 등을 곧추 세우고 천정을 바라봤다.

 

또다시 옷장 여행이 시작됐다. 이번에 옷장을 나왔을 때는 빈손이었지만 떡붕어 아저씨의 몸이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아저씨는 조금 전에 있던 구덩이 바로 곁의 에어컨을 번쩍 들어 구멍을 향해 옮겨갔다. 대충 얼개는 맞추었지만 안쪽의 선을 연결하느라 여간 낑낑대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거인처럼 커졌기 때문에, 어느덧 맺힌 땀방울이 자잘한 우박처럼 툭툭 떨어졌다. 우박이 차가운 만큼이나 그의 땀방울은 뜨거워, 소영이는 얼른 창가로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벽을 살짝 건드렸다. 순간, 그 쪽 벽이 뒤로 밀려나면서 방이 또 커져버렸다.

 

사고가 수습되자 떡붕어 아저씨는 커다래진 몸을 추스르며 옷장이 아닌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우박 같은 땀방울도 사라지고 몸도 원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 동안에도 소영이는 계속 아저씨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줄곧 싱크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스박스가 열렸다. 등 푸른 물고기들이 주둥이를 옆쪽을 돌린 채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푸른 몸통에서 은빛 광채가 났다. 하얀 원 안에 박힌 검은 원은 왠지 서글플 정도로 멍해보였다. 아직도 꿈틀대는 아가미 껍질도 왠지 애처로웠다.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놀리며 반쯤 살아 있는 물고기를 냉동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몇 마리는 냉장고에 들어갔고, 두 마리는 바로 도마 위에 올라갔다.

아저씨 쟤네들 안 불쌍해?”

요 녀석, 나중에 밥 먹을 때도 그 소리 하나 보자, 어디.”

떡붕어 아저씨는 곧바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영이는 방으로 들어왔다. 풀다 만 선물 꾸러미가 보이자, 뒷전으로 밀려났던 흥분이 되살아났다. 눈앞으로 칫솔, 솔빗, 머리 방울과 핀, 옷가지들, 양말 몇 켤레, 하얀 운동화와 감색 운동화가 와르르 쏟아졌다. 강바닥의 다슬기도, 흙속의 벌레도 아니고, 뭔가 물건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소영이는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프릴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와 감색의 멜빵 주름치마였다. 목이 긴, 위쪽에 꽃송이가 붙어 있는 양말도 신고 머리핀도 꽂았다. 거울에 비친 소영이에게는 더 이상 구덩이 오막살이의 소영이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소영이는 거울 앞에서 빙그르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거울 앞에 똑바로 섰을 때는, 그러나, 또 다시 얼굴에 하얀 마른버짐이 피고 덩어리진 머리카락 틈새에서 이와 서캐가 활보하는 그 소영이로 바뀌어 있었다. 소영이는 얼른 옷을 벗었다. 그때 아까까지는 없었던 하얀 종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빨간 구두였다. 애나멜 칠이 돼서 반짝반짝 윤이 났고 구두코는 동그랗고 발등과 발목 사이에 끈이 달려 있었다.

아저씨, 이것도 내 거야?”

떡붕어 아저씨가 잠깐 얼굴을 내밀어 힐끔 봤다. 아무래도 빨간 구두를 고르거나 산 기억은 없었다.

사은품으로 끼워 줬나? 발 맞으면 그냥 신어.”

무성의한 한마디와 함께 아저씨의 얼굴이 사라졌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빨간 구두에 발을 넣어보았다.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소영이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면서 몸을 좌우로 흔들어봤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신이 난 소영이는 춤이라도 출 기세로 제 자리에서 발걸음 뗐다. 그러자 정말로 춤이 시작됐다. 빨간 구두는 소영이의 마음을 한 발짝의 속도만큼 먼저 읽고서 온 방안을 오가며 멋진 왈츠를 추었다. 그러곤 제가 알아서 옷장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우아한 발레가 시작됐다. 다음 방에서는 라틴 댄스가, 그 다음 방에서는 밸리 댄스가, 그 다음 방에서는 재즈 댄스가, 그 다음 방에서는 봉산탈춤이, 그 다음 방에서는 테트리스 댄스가 펼쳐졌다. 저 멀리서 떡붕어 아저씨가 식칼을 든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수십 개의 옷장 문이 열렸다 닫히는 풍경이 한 편의 화려한 부채춤을 연상시켰다. 떡붕어 아저씨는 용수철이 달린 손을 길게 뻗어 소영이의 발목을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휴우, 아저씨가 내 발목을 자르는 줄 알았지, 뭐야.”

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영이가 말했다. 그제야 떡붕어 아저씨는 자기 손에 들린 식칼의 존재를 인지했다. 마침 무를 썰던 중이었다.

앞으론 구경만 하고 신지는 마.”

? 구두도 예쁘고 나도 신났는데.”

소영이의 발을 떠난 빨간 구두는 얌전하게, 다소곳이 하얀 종이 상자에 들어갔다. 내가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 듯 얌체같이 새침을 떨기도 했다.

 

저녁상이 차려졌다. 무와 고등어가 고춧가루와 간장 양념을 듬뿍 머금은 조림이었다. 우거지까지 들어가 있었다. 볕 좋은 데서 요령껏 잘 말리고 또 잘 삶아서 연하면서도 달달한 게 감칠맛이 났다. 고등어는 살점이 탱탱하고 씹는 맛이 쫄깃쫄깃했다. 잔칫날에나, 기껏해야 장날에나 운 좋게 한두 점 맛볼 수 있었던 자반고등어와는 천양지차였다. 하얀 살과 푸른 등껍질에 사이에 삼각 꼴로 길게 박혀 있는 고동색의 속살도 결에 따라 톡톡 갈라지는 맛이 독특했다. 고등어를 먹는 동안에는 아이스박스에 산 채로 쌓여 있다가 그 상태로 냉동실에 안치된 고등어의 모습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대신, 배가 반쯤 차오르자 구덩이 오막살이의 땅속에 묻혀 있을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니, 할머니와 살았던 시절의 습관이 되살아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내장 부분의 가시를 열심히 발라내 소영이의 밥그릇에 얹어 주었다.

나 그만 먹을래.”

왜 벌써 배불러? 그래도 그것만 먹어. 제일 맛있는 부분이야.”

제일 맛있는 데라서 남기는 거야.”

음식 남기면 못 써.”

우리 할머니도 먹어야 살아.”

떡붕어 아저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고 짜증마저 배어나왔다.

소영아, 할머니 죽었다고 했잖아!”

맞아, 할머니 죽었어. 그래서 구덩이에 묻혔어. 하지만 할머니도 먹어야 살아.”

어휴, 아예 매일 제사를 지내라, 제사를.”

제사? 그게 뭐야?”

그건 내일 얘기해줄 테니까, 얼른 이나 닦자. 칫솔 갖고 와.”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 뒤에 무릎을 굽히고 섰다. 그리고 소영이의 오른손을 같이 잡은 채로 양치질 하는 법을 가르쳤다. 소영이는 처음엔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지만 금방 싫증을 냈다. 떡붕어 아저씨는 양치지질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온갖 불길한 결과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가 썩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이빨이 어떻게 썩어? 사과야? 이빨은 썩지 않아.”

소영이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이렇게 닦지 않아도 이는 충분히 하얗고 음식물이 잇새에 끼지도 않았다. 이가 시리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잇몸이 붓거나 곪아 터진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 일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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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천정에서 불어 내려와 방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소영이는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연못이 쏘아 올린 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얀 연꽃과 붉은 연꽃마저 하늘 위로 쏘아, 구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갑자기 연꽃이 터지면서 꽃잎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방바닥이 흔들리고 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소영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천정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구멍 어디에서 시커멓고 두툼한 줄이 내려왔고 거기에는 뭔지 모를 물건이 앙상한 골조의 형태로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줄은 징그러운 구렁이처럼 꿈틀대며 허공에서 요사스럽게 움직여댔고, 앙상한 물체는 고문이라도 당하는 양 처참하게 낑낑댔다. 덩달아 짙은 회색의 먼지덩어리가 솜처럼 뭉텅뭉텅 떨어졌다. 소영이는 어리둥절해하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가 벨 눌러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고, 절대 밖에 나가지도 말고!” 떡붕어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지만 소영이는 이미 복도로 나와 있었다.

 

복도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비쳐왔다. 불빛이 점점 더 커지는가 싶더니 한 남자가 불빛을 등에 지고 섰다. 그는 슬리퍼 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나긋나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으악! 아저씨 뭐야?!”

하지만 상대방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멍했다. 그저 가로 지름이 넓은 타원형의 두 눈만이 잃어버린 초점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불안한 기색 없이 고요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현관 안으로 발을 들여 놨다. 소영이는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마냥 남자의 허벅지에 달라붙어 그를 꼬집고 물어뜯고 두들겨 팼다. 그제야 상대방은 반응을 보였다.

그만 좀 하면 안 되겠니? 아프잖아.”

아저씨 뭔지 말해! 사람이야, 귀신이야?”

나는 문지기야.”

그는 나긋나긋한 고양이 걸음을 자랑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답지 않게 가느다란 몸과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꼭 바람에 팔랑이는 나뭇잎 같았다.

 

방 안을 보자 문지기는 얼음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한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점검을 빙자하여 사태를 관망했다. 에어컨이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멎었다. 땅바닥에 닿지도, 고로 박살이 나지도 않았다. 그건 오직 배수관이 순간적으로 천정과 벽 사이의 돌출부에 찍혀 고정된 덕분이었다. 여기서 문지기는 질문을 던졌다. 저 비좁은 틈새에 어떻게 돌출부가 있을 수 있지? 저렇게 허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에어컨을 붙들고 있을까? 그나저나 저게 언제 생겼지? 문지기는 이 성에서 태어나 성과 함께 자라났으며, 이 성의 영원한 문지기였다. 오늘 발견한 성의 새로운 구조에 그는 상당히 달떴다. 그리고 이 하찮은 사실이 대단한 의미라도 지니는 양 오랫동안 상념에 잠겼다. 그 시간은 허망하게 뚫려 버린 거대하고 시커먼 심연에 경의를 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드디어 문지기가 몸을 움직였다. 지금껏 쳐들고 있던 고개를 다시 내리자 목뼈가 뻐근해왔다. 그는 목을 앞뒤, 좌우로 천천히 숙였다 펴더니 방을 나갔다. 지금껏 옆에서 계속 떠들던 소영이는 숫제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어디 가? 그냥 가면 어떡해? 뼈다귀들이 울잖아! 뱀도 싫단 말이야! 에이, 나 여기 싫어! 구덩이 오막살이로 돌아갈래!”

 

한참 뒤에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의자와 펜치, 빈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의자를 사고가 난 지점 밑에 갖다 놓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고개를 두 손을 뻗으며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 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에어컨 덩어리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리는 운석을 맞은 양 움푹 파였고 그 주위로 에어컨의 파편이 흩뿌려졌다. 문지기는 조용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운석 자국을 오랫동안 바라본 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부서지고 토막 난 잔해를 봉지에 주워 담았다. 그러다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언뜻 그의 손끝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불꽃이 인 것도 같았다.

 

으악, 아저씨 왜 이래? 아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

소영이는 문지기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겨드랑이를 깨물었다. 그래도 문지기는 죽은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영이는 문지기의 배 위로 올라가 콩콩 뜀박질을 시작했다. 처음 발바닥에 닿은 것은 물렁하고 보드라운 쿠션이었지만 발을 뗐다가 다시 붙이자 딱딱하고 가느다란 뼈다귀의 감촉이 느껴졌다. 소영이는 문지기의 배에서 다시 내려왔다. 이제는 발바닥을 간질이고 사타구니를 깨물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소영이는 주먹을 꽉 쥐고 씩씩대다가 홧김에 사타구니 사이의 둔덕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문지기는 회생한 좀비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괜찮아? 뭐야 손바닥이 왜 이리 시커매?”

소영이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문지기는 예의 그 초점 없는 눈을 전선 토막에 고정시켰다. 이미 죽어버린 전선에 전류가 남아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공포의 잔영 때문에 문지기는 섣불리 거기에 손을 대지 못했다. 손바닥을 뒤덮은 검은 색이 그에겐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아저씨 뭐해? 뼈다귀 시체를 치우란 말이야, 빨리! 빨리! 저 천정 구멍은 또 어떡해?”

문지기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역시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마도 이 말을 하기가 무척이나 아깝다는 듯 조용조용, 조심스러웠다.

이 아저씨는 말이야, 생각이 아주, 아주 많단다. 너무, 너무 많아서 문제야.”

어라,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또 시련이 시작됐다. 소영이가 아무리 안달복달해도 문지기는 유유자작하게 느릿느릿 방을 나갔다. 소영이는 종종 걸음을 치며 문지기의 뒤를 좇아갔다. 이미 복도를 절반 이상 지나왔다. 복도의 끝이 아득히 먼 불빛 속으로 함몰하는 중이었다.

그건 비밀이야.”

함몰하기 직전, 문지기는 이런 답을 남겼다. 이번에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보물을 꺼내 보여주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문지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소영이는 투덜대며 방으로 돌아왔다. 떡붕어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

 

소영이를 성에 남겨둔 채 떡붕어 아저씨는 지루한 여행을 감행했다. 섬을 벗어나, 소영이와 함께 밟았던 선착장에 도착했다. 일렁이는 바다를 보자 손끝이 찌릿하고 손발이 저려왔다. 곧 온 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신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욕망을 억누르고서 의연히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다. 상상 속의 그는 미지의 적수를 향해 낚싯대를 던져놓고 한판 승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 속의 그는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1125, 떡붕어 아저씨는 T역에 도착했다. 땅덩어리가 널찍하고도 둥그렇게 파인 분지였다. 첫 발을 떼놓을 때부터 우울해졌다. 어느 새 그는 환골탈태하여, 말쑥한 직장인 내지는 관록이 좀 쌓인 젊은 사업가 차림이었다. 텁수룩한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고 손에는 서류 가방과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졸라맨 넥타이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고 양복에 갇힌 몸은 갑갑증을 호소해왔다. 사방팔방 어딜 보나 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대신 나른하고 촌스러우면서도 부산스러운 소도시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이 들진 않았다. 역사로 들어선 그는 조그만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그의 단골 메뉴는 시원한 우동 국물과, 유독 어묵에만 고추장 양념을 한 김밥이었다. 동시에 이것이 그가 T시에 머무는 동안 사심 없이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피비린내 나는 접전을 앞두고 여유롭게 치루는 만찬은 황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 시작됐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무수히 많은, 하지만 형식적인 말이 오가고 무수히 많은 서류에 도장이 찍혔다. 그동안 T시는 점점 더 더워졌다. 닭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해 집단적으로 폐사했고, 기왕지사 죽을 날을 세고 있던 노인들의 명줄이 마침 올 여름에 탁탁 끊겨버렸다. 이제 막 태어난 것들, 절찬리에 삶의 향연을 즐기고 있는 것들, 삶의 황혼을 맞보기 시작한 것들 모두 푹푹 찌고 활활 타는 무더위 속에서 허덕였다. 버스와 택시조차도 짜증나는 열기를 온 몸으로 뿜어냈다. 덕택에 도로는 온통 갑갑하고 불만스러운 매연으로 가득 찼다. 떡붕어 아저씨는 T시의 거리를, 사무실과 매장을, 학교와 연구소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 흐름에 따라 보이지 않는 돈이 역시나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그의 계좌에 정착했다. 그 동안 수많은 냉수와 수많은 냉커피와 냉홍차가 그의 몸을 거쳐 땀으로 증발했다. 땀이 다 빠져버리자 이제 피가 공기와 부딪쳐 산화됐다. 공기는 그와 같은 인간들, 동물들, 곤충들의 땀과 피에 절어, 혓바닥을 축 늘어뜨리며 헉헉거렸다. 그의 몸속에는 필요 이상의 당분과 염분이 수북이 쌓였다. 반대로, 수분과 혈액은 거의 다 빠져 나가버렸다. 몸의 인내력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는 다시 T역에 와 있었다.

 

이미 해는 넘어갔지만 잔혹하게 데워진 지표면은 식을 생각을 안 했다. 공기도 여전히 텁텁하고 눅눅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횡단보도를 건너 역사를 향해 걸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불과 1분 사이에 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그 몸으로 그는 기차에 올랐다.

 

P역에 도착했을 때는 도시의 불빛이 어둠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막 노숙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얼굴은 시뻘건 구릿빛이었고 몸뚱어리는 둔하다 못해 슬퍼 보일 만큼 두툼했으며 행색은 몹시 초라했다. 무엇보다도 불가피하게 강요된 노동 이후에, 그 특유의 고약한 제취가 더욱더 고약해졌다.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면서 피했다. 그는 무뚝뚝하고 음울한 얼굴을 한 채 밤 시장으로 갔다.

 

어둠이 자욱이 내린 가운데, P시 슬럼가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붕어빵과 호떡, 혹은 떡볶이와 어묵, 혹은 순대와 닭발, 돼지국밥과 수육을 파는 곳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밖에 갓 태어난 아이를 파는 곳, 살아 있는 동물을 파는 곳, 죽은 동물의 고기를 파는 곳, 젊고 건강한 남자의 노동력을 파는 곳, 젊고 예쁜 여자의 몸을 파는 곳, 나이와 성별과 신선도가 등급별로 나눠진 장기를 파는 곳, 마음에 들지 않는 헌 몸 틀을 대체할 새로운 몸 틀을 파는 곳 등 이곳의 밤거리는 꽤나 다채로웠다. 그곳에는 그가 매년 두 번씩 들르는 단골 가게가 있었다. 금괴를 사고파는, 평범하고 건전한 곳이었다.

 

주인이 그를 맞으며 눈인사를 했다. 그는 떡붕어 아저씨가 내민 지폐 뭉치를 오랫동안 세고 또 살폈다. 돋보기는 물론이고 현미경까지 동원되었다. 위조 여부가 확인된 뒤에도 거쳐야 되는 과정이 있었다. 주인은 지폐 뭉치를 들고서 특수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폐들은 지문감식까지 거쳤다. 마침내, 밖으로 나온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칼부림이 좀 심했던 모양이지요?”

평생 동안 검이나 창을 두들겨 온 일급 장인의 표정과 어조였다. 떡붕어 아저씨 역시 졸지에 검술사로, 창술사로 바뀌었다.

딱히 유별날 것도 없지요. 늘 그렇잖습니까.”

아시다시피 요즘 어디나 기운이 좋질 않습니다. 다슬기 할매가 죽었습니다. 구덩이 오막살이도 그대로 묻혀 버렸지요. 그 아이는 어떻습니까? 정신도 성치 않은 여자아이를 돌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주인은 음흉하게 눈을 찡긋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값을 쳐 주시지요.”

주인도 잡담을 계속할 마음을 접었다.

 

그는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가게로 나온 그의 손에는 가짜 비단으로 싼 크고 굵은 금괴가 들려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지난번보다 무게가 적었다. 하지만 군말은 하지 않았다. 금괴의 무게는 그가 넘긴 지폐의 무게에 비례했고, 나날이 불어나고 있는 그의 체중에도 비례했다. 이 속도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T시를 오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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