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밤돌에게선 드문드문 연락이 왔다. 한데 그날에 무슨 규칙이 있지도 않았다. 이를 테면 부모 중 하나의 생일, 어버이날, 결혼기념일, 심지어 엉뚱하게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제삿날 등과 같은 특별한 날을 골라 전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화 내용에 이렇다 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전화해서 수화기를 든 채 묵묵히 있다가 생뚱하게 안부를 묻거나 작별인사를 하곤 끊었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싸가지 없는 자식들과 세상의 모든 성스러운 부모들의 관계와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 아들은 싸가지 없음의 정도가 좀 심하여,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P시를 경유할 일이 있을 때도 그랬다.

 

그가 집에 전화를 한 날 중 하루는 P시의 여관에서 밤을 보낸 날이었다. 그때 그는 깊은 계곡으로 강 낚시를 갔다 오는 길이었고, 여독을 풀기 위해 아가씨 하나를 불렀더랬다. 부모의 집으로 다이얼을 돌린 그 순간은 그의 하룻밤 정사가 절찬리에 막 진행 중일 때였다. 하필이면 그때 부모의 존재가 너무나 그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떨림을 노부부는 전화선 너머로 또렷이 감지했다. 그리고 이제 곧 아들이 돌아온 탕자의 모습으로 귀향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들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믿음은 시간 속에 파묻힌 화석이 됐다.

 

그 사이에 밤돌의 동생들은 다 시집 장가를 갔고 노부부에겐 다섯 명의 손자손녀가 생겼다. 어느덧 칠순도 과거의 나이가 되고 팔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축해놓은 돈과 연금이 있었기 때문에 노부부는 이제 그냥 그대로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딱 하나,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이유를 찾자면 바로 밤돌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지금 밤돌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정작 이렇게 되자 노부부는 아이고, 내가 이제 눈을 감겠다!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는 말 따위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아이고, 이 썩을 놈아! 그래, 어미아비 버리고 섬에서 혼자 사니 좋냐? 그것도 장남이란 놈이! 에라이, 이 후레자식 같은 놈!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냐, ?”

보시다시피, 아버지는 밤돌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구질구질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쥐어 패기 시작했다. 아들과의 해후 덕분에 갑자기 회춘해버렸는지, 힘까지 불끈 솟는 모양이었다. 그는 실로 힘이 셌지만 아들의 근육으로 중무장한 몸 방패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체로 이 부자는 다들 기골이 장대했다. 그 힘을 그냥 눌러두는 것도 고통이었던 지라, 아버지는 이참에 몸도 풀 겸 아주 작정을 하고 아들을 손봐주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이것을 일종의 숙제로 생각하여 간지러움과 성가심을 참아주었다.

 

이 일이 끝나자 어머니의 성화가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새끼, 보석 같은 내 아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살이 쪽 빠졌네. 세상에, 이마에 이 주름하며 새치까지! 폭삭 늙었구나, 폭삭. 네가 절대 늙을 얼굴이 아닌데,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어서 가자! 이 엄마가 우리 밤돌이한테 맛있는 거 해줄 게. 뭐 먹고 싶니? 광어 회? 해삼이나 멍게는 어떠냐? 아휴, 내 정신 좀 봐! 회는 질리도록 먹을 텐데, 그럼 갈비찜을 해주랴?”

노부부에게선 바로 어제집을 나간 아들을 맞이하며 부산을 떨었다.

 

떡붕어 아저씨, 아니 밤돌의 기분은 그랬다. 노숙자와 노인 무리에서 부모를 알아본 첫 순간, 내부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잡티 없는 감격이나 반가움,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주기적인 발작처럼 맛보는 죄책감, 애써 만들어준 생명을 곱게 키워가지 못했다는 회한 등등. 감정은 늘 연속적이고 뒤범벅이라 뭐라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격정의 파고가 지나자 해묵은 구토감이 밀려왔다. 병아리 시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다 늙은 병아리를 앞에 두고 세트로 설쳐대는 촌닭 같은 부모의 모습에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고향집까지 가고야 말았다.

 

*

 

그것은 세월의 흐름을 완벽하게 빗겨간 영차원의 공간이었다. 특별히 더 추레하고 후줄근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딘가는 조금씩 변화를 주고 단장했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늙는데 집이 늙지 않는다는 것도 얄궂었다. 이 공간에는 떡붕어 아저씨는 없었다. 그저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가 어처구니없이 자기 집에 불시착해버린 중장년의 백수 김밤돌이 있을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혼자 환희에 들떠 결정한 대로 갈비찜을 내왔다. 사실 어제저녁에 양념을 해 재 둔 것이 있었다. 믹서에 간 양파와 배, , 단호박, 은행, 당근 등이 들어간 갈비찜은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밤 한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밤돌은 인상을 썼다. 지나치게 달고 또 지나치게 짰다. 갈비 하나를 뜯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밤돌은 졸지에 과거로 회귀했다.

엄마! 음식이 이게 뭐예요? 간도 안 맞아, 고기는 고무줄처럼 질겨, 어떻게 먹으라는 거예요?”

이 놈이 지금 어디서 반찬 투정이야? 내 입엔 딱 맞구먼. 간도 적절하고 잘근잘근 씹으니 육즙도 많이 나오고.”

옆에서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최근 그는 자식들의 돈을 자발적으로 갹출 받아 이빨을 왕창 새로 심었다. 그 비용은 실로 천문학적이었다. 어떻게든 뽕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질긴 음식에 열광하는 황당한 버릇이 생겼다. 음식의 간에 관한 한, 두 살 터울인 노부부가 공히 혓바닥이 맛이 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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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시는 섬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였다. 항구도시라는 이름은 바닷가와 부둣가에 있을 때만 실감났다. 무엇보다도 직장으로서는 T시와 다를 바 없었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버스와 자동차가 매연을 내뿜고 땅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평범한 지방 도시일 뿐이었다. 도심 번화가로 들어가면 갑갑하고 텁텁한 냄새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시민들은 적절히 촌스러웠지만 적절히 멋을 부렸고, 또 적절히 세련됐지만 적절히 촌닭 짓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빴고 하나같이 비루했다. 떡붕어 아저씨도 곧 그 일원이 되었다. 그의 업무, 만나는 사람들의 종류는 T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통장에 찍히는 입금액의 숫자를 높이기 위해 그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새로이 직장을 구한 것이 기적이었다.

 

일이 끝났을 때,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P, 기차역 근처 슬럼가로 갔다. 천연의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화려한 네온사인과 전깃불만이 반짝이는 곳, 그곳 깊숙이 박혀 있는 그 음습한 가게. 주인은 가게 한 구석의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단골손님을 보고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을 붙여보았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워낙 오랜만에 와서.”

그래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초점이 없는 멍한 두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인기척을 듣고서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10여 년 전 주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환시가 일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눈앞에 나타난 젊은 남자와 의자에 붙박여 있는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젊은 남자는 손님의 탐색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떡붕어 아저씨가 돈을 내놓자 그는 차분하게 돈을 셌다. 그러고는 또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무척 작은 금괴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금이 정말 금값입니다.”

구태여 이런 말까지 해줘야 되냐는 식의 표정이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가게를 나왔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기차역 광장이 보였다. 환한 낮이 시작됐다. 역사는 화려하고 투명한 수정궁이었다. 완만하게 뻗은 에스컬레이터가 묵묵히, 꾸준히 움직였고, 여행객들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 신사숙녀처럼 정적인 자세와 표정으로 그 위에 서 있었다. 기차역 광장의 풍경은 좀 더 생기로웠다. 곳곳에서 비둘기들이 종종 걸음을 치고 푸드덕거리며 저공비행을 시도했다. 의자나 벤치에는 노숙자들과 노인들이 한가롭게 봄의 오후를 즐겼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자리는 햇빛이 잘 드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시큼한 지린내와 삭막한 노린내가 코를 간질였다. 어느 것이 노숙자 냄새고 어느 것이 정갈한 노인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특이한 냄새들은 바닷바람에 실려 곧 허공중으로 흩어졌다. 그 냄새처럼 익숙한 한 마디가 실려 왔다.

 

밤돌아! 아이고, 내 새끼!”

이 사람이 노망이 들었나? 밤돌이가 어디 있어? 아이고! 밤돌이 이놈!”

밤돌은 떡붕어 아저씨의 본명이었다. 그의 반생은 이 난감한 이름으로부터 도피하는 시간이었다. 첫 아이의 이름을 절대로 순수 한글로, 덧붙여 누구의 귀에나 쏙 들어오는 낱말조합으로 짓고자 했던 부모의 존재는 모종의 상징 같았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또 다시 밤돌의 시간이 도래했다.

 

밤돌의 부모는 평생 P시 바깥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주말마다 기차역 광장에 나오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처음에는 바로 어제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0년이 넘도록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그저 잠에서 깨면 눈을 뜨듯 자연스레 이곳으로 나왔다. 각각 절과 교회를 다녀온 뒤였다. 남편의 손에는 불경이, 아내의 손에는 붉은 장정의 성경이 들려 있었다.

 

한때는, 물론, 그들도 대한민국의 성실한 노동력이었다. 남편은 동네에서 조그만 병원을 경영했고, 아내는 P시 외곽에 있는 한 사립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은퇴는 예정된 죽음의 순간처럼 찾아왔다. 이와 더불어 정말로 예기치 못한 죽음의 선언이 있었다. 바로 아들의 가출, 아니 출가 선언이었다. 그 무렵 아들, 즉 밤돌은 한창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젊고 건강한 대한의 아들이었다. 그가 갑자기 장가가 아니라 낚시를 가겠다고 하자 부부는 껄껄 웃었다.

그래, 쉬는 법도 배워야지.”

하지만 아들이 말하는 낚시는 좀 달랐다.

아예 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어 밤돌은 자신의 결심을 간결하지만 단호하게 설명했다. 한참 뒤에야 부부는 아들의 터무니없는 진의를 깨닫곤 아연실색했다.

아니,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그럼에도 설마,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 설마가 정녕 사람을 잡았다. 다음날, 밤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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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으로 돌아온 떡붕어 아저씨는 풀썩 쓰러졌다. 몇날며칠 동안 열이 펄펄 나고 살갗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계속 헛소리를 하고 조금씩 정신이 들 때마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기침을 해댔다. 눈을 감은 상태로 몸을 반쯤 일으켜서는 정신없이 토사물을 게워내기도 했다. 개 독감이었다. 소영이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떡붕어 아저씨의 곁을 지키다가 결국 마녀를 찾아갔다.

 

마녀와 문지기는 의사를 불렀다. 무자비한 도시화와 산업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남은, 무릎이 귀를 덮을 정도로 늙은 시골의사였다. 그는 자기만큼 늙은 누렁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이 형편없는 시골의사는 떡붕어 아저씨의 환부(이건 몸 전체였는데)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의 오른쪽 엉덩이 한가운데에 활짝 핀 붉은 꽃처럼 열려 있는 선연한 상처를 발견했다. 거기서는 수십 마리의 구더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시골의사는 이제야 답을 알았다는 듯 근엄하게 입을 뗐다.

죽을병이오. 그냥 죽게 내버려둬요.”

이 말에, 지금껏 의식을 잃었던 떡붕어 아저씨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안 돼! 난 살고 싶어! 나를 구해줘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최후의 유언을 내뱉은 뒤 떡붕어 아저씨는 다시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의식이 꺼졌지만, 그 무뚝뚝하고 음울한 얼굴에는 단말마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 같은 주름이 생겨버렸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흔들어보다가 반응이 없자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으악! 우리 아저씨가 왜 죽어? 할아버지 의사잖아? 빨리 살려내란 말이야!”

하지만 귀가 다소 먹어, 어린 여자의 새된 소리에도 시골의사는 별 감흥 없이 자기 말만 되풀이했다.

어차피 죽을병, 약을 써도 소용이 없소.”

뭐야? 할아버지 돌팔이 의사야?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하란 말이야!”

소영이는 더 악에 받쳐, 저 애처로운 시골의사의 대머리를 주먹으로 쾅쾅 두들겼다. 그제야 시골의사는 자기가 어떤 환자, 어떤 보호자와 있는지 감이 왔다.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 골치 덩어리로부터 얼른 해방되기 위해 시골의사는 대번에 말을 바꾸었다.

, 그러고 보니 살 병이오.”

당연하지! 그러니까 빨리 낫게 하란 말이야!”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떡붕어 아저씨가 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힘없이, 가늘게 눈을 뜨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를 그만 죽게 내버려둬요. 한평생 잘 놀다 갑니다.”

환자가 담담한 태도를 보이자 시골의사는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했다. 아니, 목숨을 경시하고 초탈한 척 구는 태도가 얄미웠다. 그는 예언자처럼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허허, 그야 물론 그렇지요. 어차피 살 병이니까 그냥 두면 그럭저럭 살다가 나중에 알아서 잘 죽어요.”

이렇게 말하며 시골의사는 환자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환자는 비장한 유언을 끝으로 장렬하게 무의식 속에 함몰한 뒤였다. 시골의사는 아주 오랜만에 부아가 치미는 걸 느꼈다. 때 아닌 폭풍우 속을 뚫고서 그야말로 죽을힘을 발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저놈의 환자는 쿨쿨 잠이나 자고 있다니!

 

그때 시골의사는 급습을 당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할아버지, 정말 나한테 맞아볼 테야, ?”

소영이는 당장 시골의사에게 달려들어 코를 콱 깨물어버렸다. 시골의사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의 귀가 소영이의 이빨 사이로 들어갔다. 시골의사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소영이는 그의 귀를 풀어주기는커녕 숫제 잘근잘근 씹어댔다. 갑자기 시골의사의 절망적인 비명이 구질구질한 푸념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 늙은이를 갖고 노는 거요? 이 늙은이가 불쌍하지도 않소? 내 평생 여기저기 왕진을 다니느라 인생을 다 써버리고, 오늘은 누렁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단 말이오! 이웃사람이 빌려준다는 걸 끝끝내 뿌리치고 다 죽어가는 누렁소를 이끌고 저 비바람을 헤치고 왔거늘! 돈이라도 많이 받는 줄 아쇼? 하지만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시골에서 의사 노릇을 하겠소?”

귀는 물론 눈마저 멀기 시작한 늙은 시골의사의 푸념은 날카로운 비명보다 더 애절했다. 소영이는 이빨에 힘을 풀었지만 계속 씩씩댔다.

,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할아버지 밖에 없는 줄 알아? 괜히 불쌍한 척 하지 마!”

 

이 말에 시골의사는 흠칫 놀라며 소영이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한창 물 오른 소녀인 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쭈그렁바가지 노파였다. 늙은 시골의사에겐 때 아닌 연민이 샘솟았다. 노망이 난 노모를 돌보는 장성한, 심지어 중년으로 접어든 아들이라니.

! 그렇구먼. 내 처방을 해주리다. 저 양반은 푹 꼬아 드시구려.”

시골의사는 코와 귀를 번갈아 만지며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개를 가리켰다. 그 녀석은 오늘도 변함없이 마녀의 현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시골의사 옆에 있던 마녀는 피식 웃었고 시골의사는 계속 주위를 살폈다. 복도 끝에서 그의 누렁소가 해슬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영감을 준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마녀에게 귀를 좀 빌려달라며 손짓을 했다. 시골의사는 계속 뭐라고 속닥대고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뭐야? 나한테 얘기해줘, 얼른!”

, 그럼 이 몸은 그만 퇴청하겠소.”

어라, 할아버지! 이 대머리야!”

소영이가 바짓가랑이를 잡을 틈도 없이 늙은 시골의사는 쏜살같이 방을 뛰어나가 버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 할 만큼 늙어버린 양반이건만, 저 순발력과 정력은 어디서 나오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속력이었다. 수레에 올라타자마자 그는 누렁소의 궁둥이를 탁 쳤다. 누렁소는 갑자기 말처럼 히힝 소리를 내며 복도 창문을 뚫고 나가버렸다.

 

저 할아버지 정말 의사 맞아?”

소영이가 마녀에게 물었다.

그럼 이 동네에서 소문난 명의인걸. 의료행위 경력이 수백 년은 되는 양반이야.”

완전히 바보 같은데?”

원래 사람이 경지에 이르면 바보와 차이가 없어지는 법이란다.”

 

마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골 의사가 다녀간 후 떡붕어 아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병마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할 만큼 앓아누웠던 것도 성과가 있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었던 지방이 싹 빠져버린 덕분에 떡붕어 아저씨는 생활의 감각을 되찾았다. 다시 금괴를 사기 위해, 그만한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P시로 떠났다.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소영이는 눈물을 감추며 그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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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여름, 엄마 말대로 <훈이네 복덕방>의 노부부는 거의 동시에 죽었다. 먼저 마지막 숨을 내쉰 건 할아버지였다. 골목 어귀 낡은 검정 소파의 한 귀퉁이를 할머니 혼자 지킨 시간은 일주일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할머니는 말과 표정을 되찾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한 번은 음식을 만들겠다며 하루 종일 부엌에서 부산을 떨었다. 예의 그 큰 손이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미역국을 잔뜩 끓인 다음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국그릇에 하나하나 담았다. 손놀림이 서툴러 온 집안이 미역국 천지가 됐다. 마룻바닥을 뒤덮은 미역을 닦아내다가 며느리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훈이네 복덕방> 2층은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 뒤에 할머니는 목숨을 놓았다. 부산의 낮 기온이 30도를 훨씬 웃도는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훈이네 복덕방>은 청도에 있는 선산에 묻혔다. 시신은 화장을 할 것이며 유골함은 반드시 목재를 쓸 것이며 또 봉분도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오래 된 나무 밑에 묻어달라는 것이 정신을 놓기 전 그들의 유언이었다.

 

지난 추석에 내가 집에 내려갔을 때 <훈이네 복덕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젊은 남자가 아예 그곳을 임대한 것이었다. 그는 <미래 공인중개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표: 정원섭>이라는 말까지 당당히 붙었다. 몇 발짝을 떼놓기가 무섭게 공인중개소가 넘쳐났지만 그는 자신만만했다. 사실 우리 동네도 조만간 재개발 물살에 휩쓸리게 될 테니 영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훈이네 복덕방>은 없어졌지만 골목 어귀의 검정 소파만은 그대로 있었다. 뜻밖에 그곳을 지키고 있는 건 엄마였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환영이 겹쳐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 뭐 할라고 거 앉아 있노?”

니 마중 나왔다 아이가. 백서방은?”

저 밑에 마트에 잠깐 들른다고.”

그래, 그래. 세상 참 좋아졌제, 진수야. 서울역에서 기차 탔다고 전화한 게 언젠데 벌써 이래 왔네. 백지 차 몰고 올 필요도 없는 기라.”

형우네는?”

처가 갔다 아이가.”

형우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 희은이 엄마는 잘 지내나?”

올케의 안부를 묻자 엄마는 말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세상에 그만큼 똑똑한 며느리가 없다라는 칭찬이었지만 슬슬 흉을 보기 시작했다. 입이 짧아서 마른 명태같이 빼빼 말랐다는 둥, 어른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다는 둥, 시답잖은 일에도 고집을 부린다는 둥. 나는 맞장구를 쳐주다가 요즘 시부모랑 같이 살아주는 것 자체가 무조건 고마운 거라며 엄마를 타일렀다. 졸지에, 며느리 때리는 시어머니를 말리는 손위시누이 역할을 맡자니 민망해졌다.

소파 이거는 왜 안 치웠는고?”

고마 이래 오가는 사람들 쉬라고 그냥 뒀겠지. 근데 진수야, 훈이네 복덕방 노인들이 저래 정신을 놓았어도, 신통방통하제, 아침이면 딱 7시 반에 일어나고 9시에 귀신같이 복덕방 문 열고 안 했나. 노상 둘이 손 꼭 붙잡고 다니고.”

이 대목에서 엄마는 갑자기 거의 들릴 듯 말 듯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근데 마지막엔 결국 간병인을 썼다 아이가. 저 집 며느리 그리 효부라도 나중에는 노상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더만. 사실 구구절절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옆에 사람도 할 짓이 아니었던 기라. 장례식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 나이 앞에 장사 없고 긴 병에 효자 없는 기라. 아무리 그래도 요즘 세상에 병원 안 가고 제 집에서 죽기가 쉽나, 어데?”

말을 쉬며 한숨을 내쉴 때는 눅눅한 감정이 섞여 나왔다. 행여나 자기에게 그런 일이 생겨도 병원에 갖다 버리지는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제 집에 있어서 그런지 저 노인들 고마 자는 잠에 곱게 죽었다 아이가. 너거 아빠랑 나도 저래 죽어야 될 긴데.”

우리 좀 편하게 둘이 한 날 한 시에 죽든가.”

나도 진담이었지만 엄마도 역정을 내지도 않고 진지하게 응수했다.

그래 딱 죽으면 좀 좋겠나? 근데, 진수야, 아는 안 낳을 기가?”

큰사위 기다린다는 핑계 대고 엄마는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나도 그냥 엄마 옆에 앉아버렸다. 그간 비가 와도 몇 번은 왔을 텐데 누구 손을 탔는지 소파는 무척 깨끗했다.

낳고 나면 니 때문에 내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고 원망할 거 같은데.”

아이고, 한 번 낳아 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아한테 더 못 해줘서 니를 원망하면 모를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아야제. 삼신 할매 노하면 큰일 난다. 피임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안 듣고.”

사위가 나타나자 엄마는 금방 입을 닫아버렸다. 남편이 소파에 대해 묻자 엄마는 나한테 했던 얘기를 반복했다.

, 그럼, 저도 한 번.”

남편은 그러고서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가을햇살이 따사로웠다. 적어도 마음만은 우리도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햇볕을 받으며 뛰노는 아이들 같았다. 집 안에서 큰딸 내외를 기다리다 지친 아빠가 급기야 골목 어귀로 나왔다. 때마침 반대쪽에선 해수 부부, 그리고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될 그들의 아들의 모습도 얼핏 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승호 왔어요!”

녀석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는지, 쌀쌀맞기로 소문 난 <뭉치슈퍼>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까지 히죽 웃을 정도였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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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해수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해수의 남편도 형우처럼 말하자면 가업을 이어받은 젊은 사업가였다. 하지만 얼추 같은 동네에 있는 가게라도 <영진선루프><성득상회>와 급이 달랐다. 해수의 월급은 <영진선루프> 사장의 수입에 비하면 고급 레스토랑 음식의 팁에 불과했다. 물론 그래도 해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나이가 들면 어린이집을 차리는 것이 해수의 꿈이었다.

 

그렇게 우리 애를 태우던 형우도 서른을 좀 넘긴 뒤에 제 짝을 만나 장가를 들었다. 올케는 형우보다는 제법 어렸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허영심이라곤 없는 여자였다. 하긴 안 그랬다면 시장바닥에서 막일을 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진 않았을 거다. 형우 내외는 <훈이네 복덕방>의 작은아들처럼 결혼식 거의 직후에 아이를 낳았다. 형우처럼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 쌍꺼풀이 깊고 애 엄마를 닮아 얼굴이 뽀얀 딸아이였다. 88년에 전세로 들어온 집을 나중에 아빠가 완전히 샀기 때문에 이 집은 형우의 집이 될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시장 일을 슬슬 접고 손자 보는 재미로 살았다. 아래층에 사는 형우 내외는 오래 전 엄마와 아빠가 그랬듯 새벽같이 일어나 별을 보며 시장에 나가고 또 별을 보며 집에 돌아왔다. 결혼 전엔 걸핏하면 농땡이를 치던 형우도 이젠 아이까지 생긴 터라 악착같이 일에만 매달렸다. 물론, 젊은 날의 아빠처럼 주기적으로 술을 마셔 마누라 속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역시나 젊은 날의 아빠처럼 술을 마신 다음날에도 머리통이 깨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시장에 나갔다. 아옹다옹, 옥신각신 하는 와중에 그들의 아이는 무럭무럭 커갔다.

 

*

 

서른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해수의 눈에 <훈이네 복덕방>은 참 새삼스러워 보였다. 앙다문 입술처럼 굳게 닫힌 미닫이 유리문 너머로 낡은 소파, 낡은 탁자, 낡은 난로가 보였다. 난로 위의 싯누런 주전자도 군데군데가 우그러져 주글주글했다. 복덕방의 유리문 위에 붙여진 종잇장들에서는 왠지 오래 묵힌, 벌레마저 쓸기 시작한 폐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낯익어, 오히려 작년인가에 고용한 젊은 직원의 모습이 낯설어보였다.

 

해수는 골목 안쪽으로 발길을 꺾었다. 오늘도 낡은 검정 소파가 보였다. 어김없이 거기엔 <훈이네 복덕방>의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이제는 노부부 없는 검정 소파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노부부는 모두 말이 없었고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겉표지도, 속지도 노랗게 바라다 못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책이 오늘도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할머니 옆에 음전한 신부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천연산 장식품 같기도 했다.

 

해수가 집을 떠날 때 엄마는 늘 그렇듯 골목 앞까지 배웅을 했다. 노부부는 여전히 자연의 손이 만들어놓은 최고의 박제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고개가 할아버지 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할아버지의 손이 할머니의 손을 살포시 쥐고 있었다. 그렇게 소파에 앉은 채로 노부부는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의 목엔 큰아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이 걸려 있었다.

 

좀 춥지 싶은데?”

엄마의 말에 해수는 <훈이네 복덕방> 안으로 들어갔다. 해수가 말을 꺼내자, 아까부터 그곳을 지키던 젊은 남자는 복덕방 한 쪽에 개져 있는 담요를 내밀었다.

괜히 깨우지는 마시고요.”

자주 저러시나 봐요?”

저 정도면 점잖죠. 접때는 두 양반이 손잡고 초읍까지 갔다 아입니까. 공원에서 간신히 찾았어요. 요즘은 멀리 나가 봐야 저 앞 파출소지만.”

해수는 담요를 껴안은 채 <훈이네 복덕방>을 나왔다. 담요를 덮어줄 때도 노부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콧구멍과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웅장한 합창에 붙은 조용한 후렴구처럼 낮은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그 따뜻한 숨결에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늙은 몸뚱어리의 향내가 배어있었다.

 

얼렁 가자.”

해수의 손을 당기며 엄마가 말했다.

저 양반들, 그래도 곱게 늙었제. 저라다 하나가 죽으면 다른 쪽도 금방 죽을 기라. 나랑 너거 아빠도 저래 늙으면 좋겠구만.”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엄마도 이미 늙으면이라는 가정법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다. 버스나 전철을 타도 경로우대증만 보이면 됐다. 그렇기에 엄마는 누가 자기를 할매라고 부르면 하루 종일 별 일 아닌 것에도 짜증을 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미친 놈, 누가 할매라고!”하며 투덜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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