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족발 아줌마는 주민 운동장의 가두리를 걷고 있었다. 두툼한 팔을 씩씩하게 흔들고 푸짐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제법 속력을 냈다. 그녀는 남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걷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면서 마주치는 사람 하나하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걷기 운동이 아니라 사람 구경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이런 습관을 동네 사람들은 다 잘 알고 있었다. 폐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벌써 운동장을 세 바퀴째 돌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목이 말라오는 가운데 잠깐 고개를 숙였는데, 그만 족발 아줌마의 씩씩한 손놀림에 팔을 맞아버렸다.

아니, 아줌마, 남들 뛰는데 방해 되게 왜 거꾸로 뛰어, ?”

어디로 뛰든 내 마음이지, 할아버지가 무슨 상관이에요?”

족발 아줌마는 폐지 할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두 발은 부지런히,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족발 집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목을 축 늘어뜨린 채 지나갔다. 이 스물넷의 청년은 몸이 영 부실했다. 자리몽땅한 부모와는 달리 몸뚱어리도, 팔다리가 길었지만 겅중거리며 허우적대는 모양새가 영 볼썽사나웠다. 결국, 족발 아줌마가 참다못해 아들의 모가지를 붙들고 매일 저녁마다 운동장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 아들은 어미를, 정확히 그녀의 솥뚜껑 같은 손의 힘이 너무 무서워했다.

 

족발 아줌마는 철봉에 매달려 용을 쓰고 있던 소영이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 저어기 가서 놀아. 이제 우리 아들 턱걸이해야 돼.”

나도 해야 되는데?”

그러곤 두 팔을 더 뻗어 철봉에 매달린 채 힘을 쓰는 척 했다.

얘가 정말! 계집애가 무슨 턱걸이야, 턱걸이는. 턱도 한 번도 못 걸었잖아? 아줌마가 아까부터 다 봤어. 저리 가!”

소영이는 두툼한 족발 아줌마의 위엄에 짓눌려 슬그머니 비켜섰다. 철봉 옆에서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맨손체조를 하고 있던 사람들도 그녀의 호통에 질려,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났다. 바로 옆의 낮은 철봉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중학생 두 명은 낄낄대며 신기한 모녀를 구경했다.

, 이제 매달려 봐.”

족발 집 아들은 어수룩한 팬터마임을 하듯 두 팔을 흐느적거리며 철봉에 매달렸다.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몸을 끌어올려야지!”

어머니, 손바닥이 아파서.”

벌써 한 달째 되풀이되는 투정이었다.

허허, 사내 녀석이! , 올린다, 시작!”

이 말과 동시에 족발 아줌마의 두툼하고 힘센 손바닥이 철썩, 소리를 내며 아들의 가느다란 허벅지에 닿았다. 아들은 갑자기 엉덩이가 뜨거워진 송아지처럼 다급하게 몸을 들어올렸다.

이놈이 정말! 다리를 앞으로 들어 올리면 어떡해?”

족발 아줌마의 손바닥이 이번에는 아들의 들려진 엉덩이에 가서 철썩, 소리를 냈다. 아들은 그제야 팔을 구부리며 몸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60킬로그램도 안 되는 앙상한 몸이었지만 팔 힘이 워낙 부실해서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힘겹게 철봉에 매달린 신세가 됐다. 얼굴도, 몸도 온통 땀을 절었고 시뻘겠다.

그렇지, 좀 더! 옳거니! 장하다, 내 새끼!”

 

바로 그때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축구공이 날아와 족발 집 아들의 배를 툭 쳐버렸다. 그는 총을 맞은 것처럼 땅바닥으로 푹 꼬꾸라지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족발 아줌마는 기겁을 하며 공을 찬 사람이 누구냐며 물어뜯을 기세로 고함을 질러댔다.

, 내 공, 내 공!”

족발 아줌마를 향해 열심히 달려온, 아니 아장아장 걸어온 건 조그만 사내 아이였다. 그 뒤를 따라 젊은 남자가 걸어왔다.

우아, 아빠, 나 이제 공 되게 잘 차지? 어라, 죽었어? , , 일어나, 얼른!”

아이는 축구공을 품에 안자마자 발길질로 족발 집 아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축구공의 아이 머리, 아니 아이의 상체보다 더 컸다. 터무니없고 드세기로 유명한 족발 아줌마도 유치원에 다닐까 싶을 꼬마에게 성질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애 아빠에게 아들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켰냐며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화는 당연히 아들한테로 갔다. 아줌마의 세 번째 손바닥 공격은 아들의 뺨을 향했다. 철썩, 소리가 남과 동시에 아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족발 아줌마는 씩씩대며 아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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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는 앞발로 뼈다귀의 한쪽을 누르고 이빨로 뼈다귀 끝을 아작아작 씹었다.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입과 턱 안은 전부 날카로운 이빨로 덮여 있었다. 돌멩이보다 더 딱딱한 뼈다귀도 누리의 이빨에는 여지없이 부서졌다. 뼈다귀가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누리는 그 단면을 혓바닥으로 할짝할짝 핥았다. 단면은 울퉁불퉁한 초콜릿색이어서, 소영이 눈에는 꼭 초콜릿 바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소영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글라스 아줌마가 열무를 가득 껴안고 비닐하우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맞은편, 낮은 담장 아래로 할머니 하나가 시커멓고 커다란 봉지를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덩치가 유치원생만큼 작았지만 등은 참 꼿꼿했다. 머리카락도 거의 새지 않고 풍성했다. 이목구비도, 표정도 또렷했다. 그 뒤를 따라 족발 집 아줌마가 달려오며 소리를 질러댔다.

할머니, 할머니! 또 어딜 가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귀를 먹었는지 묵묵부답, 계속 제 갈 길을 갔다. 족발 집 아줌마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아니, 또 남의 집 대문 앞에 갖다 놓으려고 그러죠? 세상에, 무슨 저런 염치가 다 있어!”

선글라스 아줌마가 그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래요?”

, 글쎄, 자기 집 쓰레기를 저렇게 남의 집에 떡하니 갖다놓는다니까요. 누구는 돈이 남아돌아서 쓰레기봉투를 따로 산대요? 우리 집 대문 옆에 두고 가려는 걸 딱 봤지 뭐예요.”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영이는 누리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러니까 더 화나죠! 저어기 구청 근처에 재활원 있죠? 그 원장 어머니예요.”

우아, 할머니, 정말 작은데 참 잘 걷는다! 짐도 무거운데 참 잘 걷는다!”

소영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족발 아줌마는 소영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1시간은 족히 되는 길인데 쓰레기를 버리려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거예요. 어휴, 저 봐, 이번에는 정말 혼쭐을 내줘야지.”

할머니는 저 멀리 전봇대 옆에 쓰레기 봉지를 얌전히 내려놓는 중이었다. 족발 아줌마는 비탈길을 거의 뛰다시피 걸어 내려갔다. 둘이 실랑이 하는 장면이 보였다. 할머니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족발 아줌마는 할머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할머니는 꿋꿋했다. 족발 아줌마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이만하면 충분히 꾸중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유유히 걸음을 떼 놓았다. 족발 아줌마도 제 풀에 지쳐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으로 등이 굽은 할아버지가 폐지가 담긴 짐수레를 힘겹게 끌며 지나갔다.

 

아줌마, 재활원이 뭐야?”

이모라고 부르라니까.”

에이, 알았어. 이모, 재활원이 뭐야?”

괴물들이 사는 데야.”

? 세상에 괴물이 어디 있어? , 선글라스 아저씨다!”

정말로 선글라스 아저씨가 오르막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도 함께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조수 겸 견습생으로 선글라스 아저씨를 따라 다녔다. 선글라스 아줌마는 저녁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주가 올라왔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도 그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선글라스 내외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2층으로 올라온 소영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느덧 코를 고는 떡붕어 아저씨 옆에서 소영이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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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오늘 엄마 힘들다니까! 뼈다귀나 먹어, 얼른!”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선글라스 아줌마는 자기에게 달려들어 긴 혀로 얼굴을 핥아대는 누리를 선뜻 내치지 못했다. 누리는 뒷발로 땅을 짚고 앞발을 든 채 서 있었고, 그녀의 몸은 누리에게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 저 개 말입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선글라스 아줌마는 개를 떼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깡마른 젊은 아가씨가 보였다. 복덕방 아저씨도 옆에 있었다.

집 보러 온 사람입니다.”

우아, 개 정말 크다! 이리 와, 이리 와봐!”

소영이는 어린 계집애처럼 종종 걸음을 치며 누리를 향해 다가갔다. 겁을 먹기는커녕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너도 나를 좋아하리라는 확신에 찬 행복한 표정이었다. 누리는 눈꼬리가 축 처진 커다란 눈을 잠시 굴리더니 이내 아가씨를 맞이했다.

이거 골든 레트리버죠? 그것도 순종인 것 같은데요?”

떡붕어 아저씨가 선글라스 아줌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누추한 Y섬에, 또 이렇게 허름한 집에 족보도 좋은 영국산 개가 있는 것이 다소 의아했다. 더욱이, 날도 아직 훤하건만 술 냄새를 풍기는 중년 여자 옆에 붙은 맹인견이라니.

, 뭐 그런 거 맞아요.”

아줌마, 이거 여자애야, 남자애야?”

소영이의 질문에, 더 정확히 너무도 어린애 같은 몸짓과 표정에 선글라스 아줌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소영이와 떡붕어 아저씨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늠름하게 생겼어도 여자야. 전에 누리 주인이 교미 시키려고 저어기 포항에서 수컷을 한 마리 데려왔는데, 영 잘 안 됐어요. 얘도 영영 애를 못 낳을 거예요. 개는 주인을 닮는다잖아요?”

딱히 술기운이 돌아서는 아니고, 그저 습관적으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또 습관적으로, 눈앞의 이 얼빠진 처자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복덕방 아저씨는 손님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방은 겨우 두 칸이었고 큰 방 작은 방 할 것 없이 무척 작았다. 소영이는 벽에 손을 짚고 힘을 주었다. 그대로였다. 옷장 문을 열어보고 싶어도 옷장이랄 것이 없었다. 화장실은 마루 끝에 있었다. 방에 비하면 넓은 편이었지만 벽이 얇은 탓인지 한데 기운이 그대로 들어왔다. 조그만 창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맞은편 족발 가게 간판과 그 옆에 늘어선 가게, 그 뒤로 교회의 십자가가 보였다. 치렁대는 머리채 계단 따위는 물론 찾을 수 없었다. 마법의 성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날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새 집으로 들어왔다. 선글라스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도배를 하고 장판을 새로 깔았다. 세간을 사는 일은 선글라스 아줌마가 도와주었다. Y섬의 오붓한 집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방문만 열어도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크루즈호 떠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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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누리는 아래층 사람이 돌보았다. 환갑이 다 된 남자와 사십대 중반의 여자로 혼인 신고를 하고 같이 산 지 십년이 넘은 부부였다. 남자는 밤에도, 또 방안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눈 하나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여자는 두 눈이 다 멀쩡했지만 남편과 보조를 맞추느라 옅은 색이 들어간 안경을 썼다. 해서, 그들은 선글라스 부부라고 불렸다. 선글라스 아저씨로 말할 것 같으면 한창 때는 공장에서 꽤 알아주는 일꾼이었지만 중년 고비에 정리 해고의 쓴맛을 맛보았다. 이혼보다 더 큰 시련이었다. 그 후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함께 술장사를 시작했으나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부부가 공히 술을 너무 좋아했던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은 조그만 족발가게를 열었다. 남자도 여자도 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가게 이름은 곰탱이 족발이었다. 가게는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대문만 열어도 곧장 보이는 곳에 있었다. 술집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오직 족발만 팔고자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금방 허물어지고 어느새 술이 등장했다. 술안주는 많을수록 좋아, 선글라스 내외는 집안의 식탁을 통째로 가게로 옮겨왔다. 솔직히 그들의 족발은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선글라스 아저씨의 족발 써는 솜씨도 서툴러, 뼈다귀에는 늘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래도 부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족발 가게라서 배달 주문도 적지 않았고, 가게 안에도 늘 서너 명의 중년들, 노년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비좁은 동네라 늘 그놈이 그놈이었고, 새로운 뉴스거리도 마땅히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족발을 뜯을 때는 뭐든 할 얘기가 있었고 함께 낄낄댈 건수가 있었다. 문제는 그 손님들 속에 주인 내외도 끼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족발과 소주를 앞에 두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 탓이었다. 족발을 파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마시며 함께 놀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족발 가게는 밤늦도록 열려 있었지만 주인 내외는 땡전 한 푼 저축하지 못했고, 혹은 그러지 않았고, 밤마다 술에 전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족발 가게 문을 여는 시간도 조금씩 더 늦추어졌다. 그러던 것이 아예 안 열리는 날도 생겼다. 두 내외는 전날 마신 술독을 빼내느라 방안에서 뒹굴었다. 결국, ‘곰탱이 족발곰탱이라는 이름에 딱 걸맞은 사람에게 팔렸다.

 

곰탱이 족발의 새 주인은 젊어서부터 족발만 만들어 팔아온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인이 다 그렇듯, 그는 서비스를 포함한 각종 장식은 다 빼고 오직 족발, 상추와 깻잎, 마늘, 새우젓, 쌈장, 콩나물국만 내놓았다. 곰탱이 아저씨의 족발 써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두툼한 손으로 족발의 장딴지 부분을 받치고, 역시나 두툼한 손으로 여유만만하게 뼈마디 부분에 칼날을 갖다 댄 뒤 가뿐하게 살점들을 도려냈다. 그것들은 접시나 스티로폼 접시의 가두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살이 싹 발려나간 다리뼈는 접시 한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이제 그야말로 발 부분의 마디를 손과 때론 칼의 힘을 빌려 쪼개는 일이 시작됐다. 간혹 마디가 너무도 세게 맞물린 녀석을 상대할 때는 힘을 주느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하지만 그의 힘과 요령을 당해낼 돼지 뼈는 없었다. ‘곰탱이 족발은 나날이 번성했다. 서너 명만 앉아 있어도 충분해 보였던 가게가 이제는 늘 사람들로 북적댔다. 문전성시라는 말이 실감났다. 중년과 노년은 물론이거니와 젊은 사람들도 곧잘 이 집을 찾았다. 그 손님들 중에는 선글라스 부부도 있었다.

 

선글라스 부부는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아니, 일감이 매일 있지도 않았으니 사흘 살이, 나흘 살이라고 해야겠다. 더러 일주일씩 일이 쭉 있기도 했다. 새 집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벽지를 발라주고 장판을 깔아주는 일, 고장 난 수도관, 하수관, 변기를 뚫거나 부품을 새로 갈아주는 일 등이었다. 그때마다 선글라스 아저씨는 창고에 쟁여 놓은 공구를 챙겨 들고 나갔다. 그만 해도 부부가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월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식비와 생활비는 딱 버는 만큼만 썼다. 때문에 선글라스 아줌마는 구태여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집과 텃밭을 오가며 살았다. 남편이 일을 나가고 없는 날에는 누리를 붙들고 놀았다. 간간히 곰탱이 족발에 들러 먹고 남은 돼지 다리뼈를 가져와 누리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누리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엄마’, 남편을 아빠라고 불렀는데, 굳이 이 말을 알아들어서는 아니겠지만 누리는 그들 부부에게 낯가림이 없었다. 이렇듯 누가 봐도 아래층 사람들이야말로 이 집의 새 주인으로 적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그들의 꿈은 그저 까다롭지 않은 주인이 들어와 지금 전세금 그대로 살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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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Y다리를 건너갔다. Y섬 어귀에 약국 영감이 말한 식당이 있었다. 오직 영계백숙만 파는 곳이었다.

할아버지 왜 이런 데서 이러고 살아? 여기도 곧 허물어질 텐데, 그치 아저씨?”

배가 어느 정도 차자 소영이가 물었다.

이렇게 보시하고 사는 인생도 나쁘진 않소.”

보시? 그건 뭐야?”

베풀고 산다는 뜻이오.”

에이, 베풀긴 뭘 베풀어? 딱 보니까 이렇게 노는 걸. 아저씨, 남은 닭고기는 제사 지내자. 성탑 할머니도, 문지기도, 마녀 아줌마도 다 올 거야, 닭고기 먹으러.”

여기서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올까, 귀신들이?”

그러곤 떡붕어 아저씨를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올려다보지 않아도 됐다.

이제 어떡해? 어디로 가, ?”

떡붕어 아저씨는 물끄러미 서 있기만 했다. 약국 영감은 아직도 입맛을 다시며 황홀한 점심식사의 여운을 음미했다. 그러고는 둘의 앞날을 축복해주며 천천히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둘은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물론, 식당이 아니라 그 식당이 있는 Y섬에 말이다.

 

*

 

Y.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지대가 높고 비탈진 곳에 2층짜리 주택이 하나 있었다. 낡았지만 단정한 건물이었다. 뒤쪽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을 밭으로 일구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와 P시의 공장에서 일했다. 밭은 주로 그 집 할머니가 가꾸었다. 늦은 봄이나 한여름이면 손녀를 등에 업고 나와 도라지 싹이 돋도록 김을 매고 상추나 깻잎을 뜯곤 했다. 그렇게 거둔 채소는 저녁녘에 동네 어귀로 나가 근처 주부들에게 팔았다. 그 돈으로 손녀에게 과자나 머리핀을 사주는 것이 할머니의 낙이었다. 손녀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도 할머니는 밭농사에 열심이었다. 조그만 닭장을 만들어 토종닭을 키우기도 했다.

 

손녀가 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들 내외는 Y섬을 떠나 P시의 내부로 들어갔다. 대출을 끼긴 했지만, 또 평수가 적긴 했지만 전세 아파트도 하나 얻었다. 할머니는 Y섬에 그대로 남았다. 그래도 죽을 때는 아들 내외의 집에서 죽었다. 병치레를 한 건 두세 달 밖에 안 됐다. 매일 공장에 나가는 부모를 대신하여, 어느덧 중학생이 된 손녀가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자는 잠에 조용히 갔는데, 손녀는 이것을 무척 슬퍼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한처럼 남았다.

 

장례식 직후 그들은 방치해둔 Y섬의 집을 내놓았다. 집값은 별로 비싸지 않았지만 초로로 접어든 개 한 마리를 키워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개는 아파트로 이사 갈 때 손녀가 울며불며 이별한 강아지 누리였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도 누리는 여전히 이 집의 일부인 양 버젓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집은 누리의 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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