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이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손이 저절로 올라가 할머니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푸석푸석하고 메마르고 싸늘한 것이 느껴졌다. 소영이는 얼른 손을 뗐다. 머리카락 한 올이 소영이의 손가락에 낀 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순간, 벽에 붙어 있는 무수한 단추 중 하나에 빨간 불이 들어왔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렸다. 할머니가 이제 막 전기 공급을 받은 로봇처럼 두 눈을 번쩍 떴다. 소영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그 바람에 소영이의 손에서 비닐봉지가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의 몸 깊은 곳에서, 아마도 뱃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 , , , ~? , , ~~~?”

 

말이라고 하기엔 동물의 신음에 가까울 만큼 애매하고, 또 동물의 신음이라고 하기엔 발음이 제법 또렷하고 억양도 있었다.

 

할머니, 밥 달라는 거야? 안 그래도 이거 할머니 주려고 갖고 왔어.”

 

소영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레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갑자기 할머니의 팔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 비닐봉지를 낚아챘다. 곧 다른 쪽 팔이 또 용수철처럼 튕겨 올랐으나, 봉지 속으로 들어가는 손의 움직임은 몹시 둔했다. 두툼한 손가락이 봉지 안에서 한심하게 꿈틀댔다. 사위가 조용했기 때문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봉지의 밑바닥이 찢기면서 내용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은 겨우내 떡붕어 아저씨가 냉동실에 보관해 온 꽁치 두 마리였다. 어찌나 꽁꽁 얼어붙었는지, 돌멩이보다 더 딱딱했고 온 몸에 뽀얀 성에가 덮여 있었다.

 

꽁치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두어 번에 걸쳐 통통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꼬리를 밑으로 향하고 머리를 위로 지켜든 채 꼿꼿이 섰다. 그러곤 지느러미가 없어서 영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힘겹게 삐거덕대며 흔들더니 곧 스카이콩콩처럼 바닥을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꽁치들은 몸이 슬슬 녹아, 꼬리 춤의 모양새도 훨씬 더 유연해졌다. 푸른 살이 흐느적거리며 벌렁거릴 때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일자로 쭉 갈라진, 내장이 다 사라진 꽁치의 배, 아니 몸뚱어리는 언제 난도질을 당하고 언제 죽었었느냐는 듯 신나게 통통거렸다.

 

소영이는 두 마리의 꽁치를 모두 손에 넣으려고 분주하게 앞뒤, 좌우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꽁치들은 늘 수색자의 손바닥보다 한 발 앞서 뛰는 벼룩처럼 소영이의 손아귀를 쏙쏙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반들반들한 얼굴 아래쪽에 불그스름하게 뚫려 있는 입을 달싹이며 계속 ~, , , ~소리를 반복했다. 꽁치들은 할머니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튕겨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세 번에 걸쳐 제자리 뛰기를 하더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영이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이들도 모두 그리로 달려가, 벽과 하늘을 이어주는 틈새로 얼굴을 내밀었다. 꽁치 두 마리는 어느새 푸른 하늘과 뒤섞여버렸다.

 

~? ~! ~주우.”

 

할머니의 신음소리가 좀 더 길고 필사적이었다.

 

이런, 꽁치들은 할머니가 싫은 가봐. 생 거라서 그런가? 다음번에 익혀서 갖다 줄게.”

 

소영이는 몸을 돌렸다. 때문에 할머니의 손이 힘겹게 파닥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나름대로 손짓이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소영이는 매일 성 주변과 유리벽 사이를 돌며 꽃밭을 구경했다. 산책의 끝은 늘 성탑 안이었다.

 

한 번은 떡붕어 아저씨가 만들어준 꽁치 구이를 들고 올라갔다. 역시나 아저씨의 말대로 뚱보 할머니가 맛을 보기도 전에 구운 꽁치가 먼저 성탑 밖으로 뛰어내렸다. 김밥을 가져가도, 오이와 당근, 참외와 딸기를 가져가도 마찬가지였다. 먹을 것들은 발이 달린 양 냉큼 뚱보 할머니를 피해 달아났다. 마지막으로 소영이는 물을 들고서 방을 나섰다. 그 중 절반은 꽃들에게 주었다. 물을 머금자 꽃들은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황매화는 꽃잎이 더 무성해졌고 제비꽃은 보라색이 더 선명해졌다. 할미꽃도 더 아름다운 적자색을 뽐내며 솜털마저 미세하게 하늘거렸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물은 소용없게 돼 버렸다. 자동인형이 옆에서 할머니를 일으켜 받쳐주었지만, 물방울은 물 위의 기름처럼 할머니의 입술에 동그랗게 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소영이는 물을 손바닥에 부어 할머니의 얼굴과 몸에 조금씩 뿌려보았다. 하지만 꽃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영이는 허탈한 마음으로 성탑을 내려왔다. 그리고 꽃밭을 돌아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관리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문지기가 아니었다. 소영이는 의아스럽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특수교사와 닮은 데가 있었지만 옷차림도 허름하고 얼굴선도 기괴하게 망가져 있었다. 몸에 커다랗고 시커먼 자루 같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꼭짓점이 축 늘어진 고깔모자를 쓴 모습도 괴기스러웠다. 소영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줌마설마 마녀? 선생님, 정말 마녀 맞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소영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녀라면 날렵하고 경쾌한 꼬마 소녀거나 아니면 과자로 만든 집을 지키던 처녀처럼 무척 예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사악한 눈을 번득이는, 추악하게 늙은 꼬부랑 할머니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생김새와 차림재가 약간 얄궂긴 해도 동네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얼굴빛은 왠지 누리끼리하고 간간히 기미나 주근깨가 보였다. 깡말랐다고 할 만큼 여위었지만 왠지 뱃살과 허벅지살이 출렁이는 것 같고 조그만 젖가슴은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을 고민한 결과, 소영이는 그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 선생님한테도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꺼번에 왔구나? 에이, 그래서, 이렇게 미워진 거야?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왜는 왜야? 나도 여기 사는 걸. 아줌마 집 구경 갈래?”

!”

세상에, 아줌마 마녀는 처음 봐.”

마녀라고 별 수 있겠어? 그것도 종류별로 다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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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동화 속의 동화

 

 

   

성 둘레에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졌다. 혹독한 추위를 잊은 채 성은 겨울잠에 돌입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도 오랜 잠에 빠졌다. 떡붕어 아저씨는 꿈을 꾸는 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맞추어 눈을 떴다가 감았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수족관을 오갔다. 간간히 소영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이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소영이는 해와 달의 순환에는 무관심한 듯 잠에 빠져 있었다.

 

꿈같은 현실 속에서 소영이는 싸늘한 밤거리를 헤매다 성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팍에 하얀 봉지를 꼭 품은 채였다. 그 안에는 막 구워낸 바삭바삭하고 따뜻한 붕어빵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첫 번째 붕어빵은 몸통만, 두 번째 붕어빵은 머리만, 세 번째 붕어빵은 꼬리만 남아 있었다. 갑자기 눈앞에 구덩이 속에 묻힌 할머니가 나타났다. 웬일로 몸까지 움직였다. 비록 두 발로 걷지는 못했지만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짚고 무릎을 끌며 기어 다녔다.

할머니!”

 

소영이가 할머니를 부르자마자 갑자기 성이 구덩이 오막살이의 음침한 부엌으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네 발 달린 동물처럼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침도 질질 흘렸다말이, 아니,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나왔다. 소영이 귀에는 그것이 으로 들렸다. 소영이는 아직 식지 않은 붕어빵 봉지를 내밀었다.

할머니, 이거!”

을 보자 할머니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쭈그리고 앉아 미소만 지었다.

 

소영이는 직접 봉투를 열어 붕어빵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은 조각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몸뚱어리가 돼 있었고, 더욱이 붕어빵이 아니라 반짝이는 비늘이 붙어 있고 파닥대기까지 하는 진짜 붕어였다. 붕어는 몸통으로 폴짝 뛰어 할머니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곤 꼬리를 받침대 삼아 몸통과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말했다.

밥 남기지 마!”

하지만 그때 갑자기 할머니의 몸 뒤에서 회색 털의 토끼가 나타나 붕어를 꿀꺽 삼켜버렸다.

으악!”

소영이는 비명을 질렀다. 꿈속에서 소영이는 눈을 떴다. 꿈속의 현실은 이랬다.

 

, 아니 밥이 나타났다. 하지만 밥그릇에 담긴 하얀 쌀밥이 아니라 밥알 모양의 뽀얗고 보들보들해 보이는 생명체였다. 거대한 몸체에는 짧달 막한 팔다리가 붙어 있긴 했지만 신체 부위가 확연히 구분돼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윗부분에는 눈사람 마냥 눈, , , 귀가 붙어 있었다. 심지어 그 얼굴 아닌 얼굴에 표정도 살아 있었다. 두 눈은 무섭게 소영이를 노려보았고 입술은 엄격한 모습으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입술이 열리며 말도 새어 나왔다.

밥 남기지 말라고 했지?”

 

소영이는 할머니를 위해서 그런 거라며 열심히 변명을 했다. 하지만 밥 귀신은 계속 무섭게 야단을 쳤다. 그 주위로 반찬 귀신들이, 그러니까 대파 귀신, 쪽파 귀신, 마른멸치 귀신, 미역 귀신, 쏘가리 귀신 등이 나타나서 똑같은 말, 똑같은 목소리로 설쳐댔다. 소영이는 그들의 야유를 피하느라 손을 마구 휘두르며 외쳤다.

에이, 바보들!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세상을 깜깜하게 만들어버릴 테다!”

이 말과 함께 소영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꿈밖의 소영이는 눈을 감은 채 거세게 몸을 흔들었다. 그래도 귀신들이 진정하지 않자 꿈속의 소영이는 자기를 덮친 감자 귀신의 팔을 콱 깨물어버렸다. 소영이는 곧 잠잠해졌지만, 떡붕어 아저씨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그의 턱에는 소영이의 이빨 자국이 시뻘겋게, 커다랗게 나 있었다.

 

소영이가 기나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소영이는 냉동실에서 봉지 하나를 꺼냈다. 1층까지 내려오자 문지기 방을 힐끔 살폈다. 역시나 닫혀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서 문의 위쪽에 달려 있는 창문에 코를 갖다 댔다. 문지기가 등을 돌린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 벽을 바라보는 듯했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초상화인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소영이는 성 밖으로 나왔다.

 

유리벽과 성채 사이의 공간은 아늑하고 오붓한 꽃밭이었다. 황매화와 흑싸리, 싸리 꽃, 뚱딴지 꽃이 유리벽을 안쪽에서 에워싸고 그 사이로 꽃다지, 제비꽃,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바닥에는 잔디가 사람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채로 자라나 있었다. 초록색 잔디를 배경으로 할미꽃에 눈에 뜨였다. 꽃송이가 밑으로 좀 구부러졌다는 걸 빼면 꽃잎과 꽃줄기, 잎에 뽀송뽀송 솜털이 나있는 것이 할미보다는 어린아이를 연상시켰다. 그것도 걸음마를 막 시작한 포동포동한 어린아이를. 유리벽 너머로 꽁꽁 얼어붙은 연못과 앙상한 나무들이 보였다. 그냥 보기에도 무척 싸늘할 것 같은 겨울바람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흔들고 지나갔다. 어떤 나뭇가지는 고드름 부러지듯 툭 끊겨 꽁꽁 언 땅 위에 떨어졌다.

 

소영이는 꽃밭을 누비며 성채를 한 바퀴 돌았다. 소영이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계단이 있던 자리를 찾아 다시 성채를 반 바퀴 돌았다. 그리고 성탑 꼭대기를 향해 외쳤다.

할머니, 할머니, 머리카락 내려줘!”

고개를 뒤로 완전히 꺾고 하늘을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이는 두 번, 세 번 연거푸 외쳤다. 그러자 하늘의 꼭대기에서 가느다란 뿌리가 뻗어 내려오는 것 같았다. 꿈틀대는 뿌리는 땅에 가까워지면서 몸을 배배 꼬며 춤을 추는 뱀처럼 변했다. 소영이는 뱀의 꼬리를 잡은 채 성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영이는 하늘과 맞닿은 창문을 통해 탑 안으로 들어섰다. 고약한 냄새가 성탑 안을 채우고 있었다. 소영이는 숨을 더 깊이 들이셨다 내쉬길 반복했다. 방안의 냄새가 지난번보다 훨씬 더 진했다. 하지만 이것이 똥 냄새나 오줌 냄새인지, 아니면 양념이 너무 많이 들어간 음식 냄새인지, 아니면 뭔가 특이한 꽃 냄새인지 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길고 튼튼한 안락의자 위에 반쯤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머리카락도 여전히, 한 올 한 올 벽에 설치된 장치에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을 덮고 있던 투명한 마개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할머니의 얼굴이 다 보였다.

 

그것은 둥그렇고 커다랬으며, 무엇보다도 파리가 앉아도 미끄러질 것처럼 반들반들 윤이 났다. 겉껍질 위의 잡티들을 조금씩 태우거나 긁어내고 심지어 겉껍질 자체를 끊임없이 발라내고 그 위에 왁스칠을 해놓은 덕분이었다. 목은 헐겁고 무겁고 굵은 주름으로 뒤덮여 있건만 얼굴은 무척 팽팽했다. 얼굴 살 안에 바람을 주입하고 얼굴 둘레에 용수철을 달아 뒤로 잡아당겨놓은 덕분이었다. 이런 얼굴과 빵 반죽처럼 부풀어 오른, 바늘을 갖다 대기만 해도 묽은 지방이 줄줄 흘러내릴 성 싶은 몸의 조합이 몹시 기괴해 보였다. 몸뚱어리는 이스트라도 집어넣었는지 이전보다 더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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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가 처음 약을 먹은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 건물, 같은 방에 살고 있었다. 한밤중에 수아가 배를 붙잡고 우는 소리를 하며 나를 깨웠다. 당최 왜 쥐약을 골랐는지 알 수 없었다. 자살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더 당최였다. 구태여 이유를 캐보자면, 그냥 자살을 하고 싶었다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쥐약이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즉 미학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둘 다 평범한 삶을 혐오했고 카인의 표식을 달고 싶어 안달했다. 실상 그래본들 우리는 우리가 모범생 콤플렉스에 갇혀 아주 조금씩 변덕을 부려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청춘의 한가운데를 갈라놓을 각혈의 기습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쥐약이 두려웠던 나머지 수아는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솔직히, 진짜 맛만 봤다고 해도 되겠다. 덕택에 위세척을 하고 다음날 바로 병원을 나왔다. 이번엔 수면제를 골랐기 때문에 좀 많이 먹어버렸다. 내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동네 약국을 이곳저곳 돌며 수면제를 사 모으는 수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어, 의식이, 생명이 끊어지길 기다리다가 , 이건 아니야!’하며 느닷없이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수아의 모습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무 살적 수아가 이른바 미학적 고뇌로(, 아무 이유 없이!) 자살을 기도했다면, 스물일곱의 수아는 사물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가 있었다. 희망이라는 괴물이 얌체 같이 꼬리만 잘라놓고 도마뱀처럼 싹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간단히, 실연이었다.

 

수아 덕분에 예의 그 시골 의사를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수아와 내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허허, 이번엔 친구야? 거참, 골치 아픈 처자들이구만.”

수아는 또 위장을 말끔히 씻어냈다. 하지만 세척액이 수아의 마음속과 머릿속까지 비워주지는 못 했다. 그 속의 자갈들까지 모조리 쓸어갔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아 수아는 사흘을 병실에 누워 있었다. 요양이 따로 없었다.

 

시골 의사는 아침마다 수아를 보러 왔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끌끌 찼다. 한 번은 저녁 무렵, 병원 건물 옆에 서 있던 나를 슬쩍 불렀다.

저 친구, 대체 무슨 일이야?”

수아의 위신을 생각해 스물일곱 살이오오월이오불면이다여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아의 작태가 왠지 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심술이 났다. 게다가 이 좋은 5월을 내도록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보내고 있잖은가.

남자 친구한테 차였어요.”

아이쿠, 연애 문제야?”

시골 의사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퇴근길이었음에도 나를 붙잡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나는 이야기를 최대한 미화했다. 그 이야기 속의 수아는 정녕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7년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연모해 온 남자, 그 남자와 함께 한 선운사에서의 달콤한 하룻밤, 다시 옛 여자에게로 돌아간 그 남자, 그 남자의 뒤태를 바라보며 한숨짓고 눈물짓는 이 여자, 사경을 헤매다 이제 간신히 깨어나 병상을 지키는 이 여자.

 

저런, 저런.”

뒤돌아서는 시골 의사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였다. 너무 웃겨서 나는 혼자 키득댔다. 사귀던 여자 친구와 잠깐 다툰 틈에 질투 작전을 펴보고자 수아에게 접근한 그 남자 녀석은 차라리 충분히 진지했다. 하지만 수아는 뭔가. 그 빤한 수작을 다 알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의 관념을 떠받드는 관대한 연인의 역을 맡으려고 안달복달하다니.

 

다음 날 오전, 퇴원을 하면서도 수아는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 정말 나도 평범한 여자처럼 살고 싶은데, 연애 한 번 하기 힘들다!”

지랄, 네가 무슨 마릴린 먼로 쯤 되냐? 이제 우리도 애 엄마가 돼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야, 정신 차려. 아니, 어차피 너한테 별로 마음 없는 거 안 보이디?”

마음이 영 없지는 않았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눈치였지만 수아는 입을 닫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병원을 나온 뒤였다. 어조도 사뭇 달랐다. 오랜만에 따사로운 봄볕의 세례를 받은 덕분이리라.

감자탕 사줘.”

먹자도 아니고 사줘는 또 뭐야? 속 부대낄 텐데 괜찮겠어?”

이렇게 물은 건 실은 퇴원 후 열흘 째 육식을 삼가고 있는 내 뱃속이 걱정된 탓이었다.

돼지 등뼈도 다 씹어 먹을 것 같은데.”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볼까?”

우리는 룸메이트 시절부터 다니고 있는 감자탕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감자탕 중자를 다 바닥내고서 우리는 식당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물론 등뼈는 먹지 못했지만 감자 조각 하나, 무청 줄기 하나 남지 않았다. 음식물이 우리의 뱃속에 무사히 자리 잡았음을 증명하듯 거나한 트림이 올라왔다. 우리 둘 다 이 트림이 반가웠다. 그것은 뭔가가 새로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서른을 앞두고 또 한 번 살아봐도 될 것 같았다. , 이번에는 그저 마냥 사는 거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과 머릿속에 숨겨두었던 냉소와 위악과 가식의 약병을 슬그머니 치워버렸다.

 

*

 

스물일곱 살이오오월이오구토다.

 

 

20109월 // <문학과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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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식 딱지가 사라지고 미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돼지 갈비라도 뜯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구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뱃속은 미음도 간신히 받아들였다. 그럴수록 머릿속에서는 음식 생각이 간절해졌다. 식사 시간마다 풍겨나는 반찬 냄새와 쩝쩝대며 음식 씹는 소리에 질투마저 생겼다. 마침내, 죽이 나왔다. 새로이 찾아온 참한 식욕에, 구토의 흔적을 떨쳐버린 뱃속에 나는 감사했다. 이제 곧 새로운 생활이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병원에 들어온 지 닷새째였다.

 

내 맞은편에 누워 있는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그곳에 누워 있었다. 항상 누워만 있었다. 더러 간병인이 와서 상체를 세우는 일이 있었지만 아주 잠시였다. 간병인이 그녀를 상대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마다 침대 주변에 커튼을 쳤기 때문이다. 항상 누워만 있는 그녀도 간혹 제 힘으로 몸을 살짝 돌리는 일이 있었다. 침대에 바싹 붙여 놓은 작은 탁자 위에 노트북이 있었다. 그녀는 그 쪽으로 한 손을 뻗어 마우스를 클릭하며 인터넷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윈도우는 정녕 세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창이었다.

 

이제 좀 나아졌어?”

내 옆 침대의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들어올 때는 곧 죽을 것 같더니만. 난 암이라도 걸린 줄 알았지, 뭐야.”

농담이었는지 할머니는 키득키득 웃었다. 내 시선은 계속 맞은편 침대에 머물러 있었다.

젊은 나이에 안 됐어. 교통사고야. 얼마 전에 남편이 다녀갔는데 결국 이혼했지. 애들도 있고 한데.”

할머니는 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그때 의료진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유난히 들떴다.

또 오셨어요? 지난주에 나가셨잖아요?”

수간호사는 약간은 놀리는 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팔을 못 들겠는 걸 어떡해? 어휴, 이것 좀 봐, 이제는 요 만큼도 못 들겠어.”

, 푹 쉬다 가세요.”

쉬긴 어떻게 쉬어! 치료를 받아야지, 치료를! 얼른 고쳐줘!”

의료진 일동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맞은편 여자를 빼면 전부 노인이었고, 그들은 대개 말이 없었다. 이 병실이 시끄러웠다면, 오직 일 이주 간격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온 옆 침대 할머니 덕분이었다.

 

이틀 뒤, 담당 의사는 나에게 밥을 처방주었다. 은색 식판에 소복이 담긴 밥알 더미와 맑은 북엇국,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구운 고등어 한 토막, 파릇파릇한 시금치 무침. 나는 조심스럽게 국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이어, 밥 한 숟가락과 시금치가 들어갔다. 구토의 흔적은 내 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퇴원했다. 의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진단서를 굳이 떼 주었다. 거기에 적힌 내 병명은 급성 장염이었다. 그리고 괄호 속에 과로와 영양실조라는 말이 들어갔다. 장염이야 영원한 트렌드이지만, 마지막 두 개는 극히 시대착오적인, 병명 같지도 않은 병명이었다. 나는 대단히 실망했다. 최소한 결핵처럼 어딘가 좀 있어 보이는 병을 기대했는데 말이다.

 

병원 건물을 나왔다. ‘완쾌라는 말에 생명을 부여해주는 화창한 날이었다. 나 혼자 두 다리로 서서 맑은 정신으로 바깥 공기를 맛보는 것이 일주일만인가. 나는 두 발을 움직이며 가볍게 제 자리 걸음을 해보았다. 내 맞은편에 있던 환자가 생각났다. 아마 그녀가 잃어버린, 어쩌면 언젠가 되찾기를 갈망하는 실존이 이런 것이었겠지. 내 사정은 좀 달랐다. 나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건물 옆에서 들이켠 담배의 첫 모금은 몸이 다 나았다는 신호였다. 흡연하는 나, 심지어 내 의지로 흡연을 멈출 수도 있는 나, 그 실존이 되돌아왔다.

 

*

 

몇 통의 링거를 꽂아 두었던 팔뚝의 붓기가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는 허연 버짐과 같은 얇은 각질이 일어났다. 허물을 다 벗자 새 살이 돋아났다. 변태의 작업이 끝났을 때도 나는 여전히 골초였다. 하지만 그래도 뱃속이 염려되어 식사 시간을 엄수하고 주로 소화하기 쉬운 것만 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또한, 스물셋의 3월처럼 각혈을 꿈꾸고 있었다. 정작 각혈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밤중에 수아가 전화를 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수아, , ?”

아니나 다를까 였다. 다만, 이번엔 쥐약이 아니라 수면제였다. 나는 부리나케 수아의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119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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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년이 흘렀다. 3학년이 되면서 학업에 강도가 붙었다. 거창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꿈도 생겼다. 꿈이 커지면서 희망이라는 괴물들이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내 뱃속을 간질였다. 어떨 때는 그 괴물들이 내 뱃속을 다 점령해버려, 속 쓰림을 고스란히 안은 채로 날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배를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척추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엄마가 소식을 듣고 내려왔을 때는 이미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낸 뒤였다.

어린 처자가 몸이 이래 부실해서 우짜겠노?”

의사는 내시경을 권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여자 의사였다. 그리고 몸집이 푸짐하고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검은 뿔테를 두른 두툼한 돋보기안경을 낀 할머니였다. 그녀는 거창 출신이었고 이른바 대처에 나가 공부를 한 뒤 다시 거창으로 돌아와 읍내에 조그만 병원을 하나 열었다. 여자 슈바이처가 되겠노라는 어릴 적 꿈을 그녀 나름대로 옹골차게 실현한 셈이었다. 진찰실 벽에는 학사모를 쓴 젊은 날의 그녀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사진 바깥의 늙은 여자와 사진 속의 처녀. 그들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얘기해주는 유일한 표식은, 볼록렌즈 때문에 두 세배는 더 커져버린, 쌍꺼풀이 또렷이 진 큰 눈과 그 눈망울 속에 담겨 있는 어떤 온기였다.

 

의사는 내시경 검사를 할 때도 내 옆에 있었다.

, 인제 들어간대이. 그래, 그래, 얼라들처럼 침도 질질 흘리고, 아이구, 구역질 참지 마래이, 그래, 그래, 아이구, 잘 한다, 잘해. 조금만 더 참으래이, 인자 뱃속도 보이네, 그래, 그래. 니 나중에 시집가서 얼라 낳을라 카면 이것보다 더 힘들다, 옳지, 옳지.”

그것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옛날이야기였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였지만 주인공이 나라는 것이 문제였다. 시커멓고 굵은 호스가 (물론 호스의 색깔까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왠지 그것이 시커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타고 뱃속까지 무자비하게 기어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구토의 연장일 뿐, 통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몸은 굼벵이처럼 웅크려져 통째로 진동하는데도 나는 말하자면 의연했다.

 

검사가 끝났을 때 의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 아가 평소에도 속이 안 좋다케서 어디 큰 이상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마 염증이 좀 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고생 안 해도 됐는데. 얼라 낳는 연습 좀 했다고 생각해라.”

미안한 마음에 덧붙인 말이 또 이것이었다. 아무래도 여자가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통증이 산통인 모양이었다.

어야, 니 자꾸 그래 밥 잘 안 먹고 밤새고 그카면 나중에는 뱃속에 빵구난대이. 위염이 위궤양 되고 그게 위암이 되는 기다. 인자 밥 잘 먹을 기제?”

엄마와 함께 병원을 나갈 때 의사는 손녀를 어르듯 일러주었다. 나의 뒤통수 너머로 그녀가 혼잣말로 웅얼대는 소리가 싸늘한 겨울바람에 실려 왔다.

하긴, 니가 클 때쯤이면 위암 같은 거야 웬만큼은 안 고치겠나.”

몇 년 전, 서른을 갓 넘긴 이모가 위암으로 죽었을 때도 그녀는 비슷한 말을 했더랬다. 20년만, 아니 10년만 더 늦게 태어났어도 이렇게 부질없이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

 

당연하지만, 모종의 오기에서 나는 의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의사가 다 할머니 의사 같지 않다는 것을 안 뒤로 의사라면 더더욱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죽은 후에도 괴물 같은 속도로 발전을 거듭한 의료 기구는 신뢰한다. 추상적인 개념도, 구체적인 인간도 아닌 까닭에 그것을 신뢰하기는 참 쉽다. 도구가 우리를 배반할 가능성은, 물론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제일 낮다.

 

목구멍과 식도가 흐리멍덩하고 무뎌졌을 때 가느다란 호스가 내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내 얼굴 앞에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몸은 구역질에 점령당했지만 두 눈과 의식만은 바투 부여잡은 채 나는 내 뱃속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자그마한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부유하는 괴상한 공간, 언젠가 요나 얘기를 처음 듣고 상상해본 고래 뱃속과 같은 불쾌한 표면, 어딘가 에이리언의 분비물을 연상시키는 끈적끈적한 질감. 모니터로 걸러진 내 뱃속은 어떤 말로도 쉽게 설명되지 않았다. 어떻든 저것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콧구멍과는 달리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바로 저것이 거침없이 타액과 점액을 흘려보내고 척추를 몇 번이나 끊어놓는 것 같은 통증을 유발하는 구토의 진앙이었다. 호스가 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 뱃속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구토는 남았다. 나는 계속 꿱꿱거렸다.

 

잠시 뒤, 도시 의사는 구토에 파묻힌 나를 앞에 두고 헬리코박터 균 운운하며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 식으로 요약하자면, 위염과 위궤양과 심지어 위암 사이에 반드시 어떤 발전적 관계가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현재와 같은 만성 위염 단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오래 전 할머니 의사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 낳는 고통 어쩌고 하는 얘기만 빼면 말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말보다 내 뱃속을 담아놓은 사진이 더 인상적이었다. 왠지 물컹하고 끈적거리는 것 같은 사진과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넘치는 의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의사의 뱃속은 어떤 모양새일까. 사람은 뱃속도 얼굴처럼 다 다르게 생겼을까. 휠체어에 앉은 채 병실로 올라가며 수아에게 물었다.

네 뱃속이랑 내 뱃속이랑 사진 찍어 놓으면 구분할 수 있을까?”

수아가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나는 구토의 기습을 받으며 고꾸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또 침대였다. 구토가 내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이제는 위액은커녕 담즙도 올라오지 않았다. 토사물 없는 구토의 연속. 구토의 흔적 내지는 구토의 추억 같은 것이랄까. 그것이 명치끝에서 맴돌며 나를 고문하는 동안, 갈증이 입안과 목안을 넘어 뱃속까지 잡아먹고 있었다. 온 몸이 늦가을의 나뭇잎처럼 바싹 바싹 타들어갔다. ‘금식딱지가 붙은 뒤로 음식은 물론 물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갈증이 통증을 더 부채질했다. 괴로움을 호소하자 간호사가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통증이 가라앉는 환상이 제법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척추가 끊어지고 온 몸이 짜부라지면서 명치끝에서부터 숨 막힘이 턱턱 올라왔다.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라는 오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까 그 주사 다시 놔 주시면 안 돼요?”

나는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그거 자꾸 맞으면 안 돼요.”

아픈 걸 어떡해요?”

나도 모르게 눈물마저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이쯤 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순간, 나는 민망해졌다. 하지만 눈물은 멎기는커녕 충분히 이럴 권리가 있다며 뻔뻔스럽게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구토 때문에 온 몸이 너무 아파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는 스물일곱의 나. 참 추악하지만 참 정직하기도 한 이 실존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원래 그렇게 아픈 거예요.”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며 던진 마지막 말은 계시나 다름없었다. 통증은 그냥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어디까지 가는지를 지켜보는 수밖에. 그 어디의 끝은 의식을 잃는 것이었다.

 

악몽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더러 아름다운 것들이 섬광처럼 나타났다. 고향집 앞마당의 자두나무에 열린 작고 못 생긴 자두들, 읍내 자취집 마당의 감나무와 노란 감꽃, 주인집 마루의 미닫이 유리문, 늙은 할머니 의사의 곱디고운 처녀적 사진. 그러다 보면 또다시 고약한 것들이 나를 덮쳐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등학교의 복도, 아이들과 함께 마룻바닥에 머리통을 처박고 벌을 받고 있는 나, 똥오줌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이제 막 청소를 한 고향집의 변소, 다소곳한 찔레 덤불 한 구석에 유령처럼 번져 있는 뱀의 허물, 도라지 밭을 매던 호미 끝에 반 토막이 난 채 딸려 올려온 허옇고 두툼한 굼벵이 몸통.

 

비명을 지르며 나는 잠에서 깼다. 마침 맞은편 환자를 돌보고 있던 간호사가 달려왔다.

세상에, 이렇게 몸부림을 치면 어떡해요?”

간호사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배어나왔다. 링거를 꽂아둔 팔뚝이 붉은 피로 물든 채 퉁퉁 부어 있었다. 침대 시트, 이불에도 핏방울이 보였다. 간호사는 링거 위치를 바꿔 반대 팔에 바늘을 꽂으려 했다. 하지만 바늘이 좀처럼 혈관에 꽂히질 않았다.

무슨 혈관이 이렇게 가늘어요?”

이제는 간호사의 존재 자체가 짜증으로 변했다. 처음부터 오른팔의 혈관이 너무 가늘어 왼팔에 꽂은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간신히 바늘을 꽂긴 했지만 간호사는 숫제 울상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턱턱 갈라지고 얼굴이 까칠까칠, 거뭇거뭇한 것이 이제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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