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이 반쯤 꺼진 응급실의 적막을 핸드폰소리가 깨놓았다. 수아였다.

뭐냐? 수업도 안 오고 웬 전화질이야?”

나는 병원에 누워 있다고 얘기했다. 내 귀를 때리는 내 목소리가 제법 처량했다. 잠에서 막 깬 탓이었다. 하지만 환자 역을 맡는 것이 본능적으로 마음에 들어, 일부러 더 힘이 없는 척 군 것도 사실이다.

반시간쯤 뒤 수아는 내 옆에 와 있었다. 나의 환자연하는 처지가 꽤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당황하고 놀라워하는 수아의 얼굴이 재미있었다.

아니, 이걸 이렇게 방치해 두면 어떡해요? 저렇게 계속 토를 하는데!”

수아는 토사물이 가득 한, 내 침대 옆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애꿎은 조무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쓰레기통을 들고 나갔다.

그렇게 대책 없이 살 때 알아 봤어. 민영이 너, 일부러 이런 거지, ?”

어깃장을 놓긴 했지만 수아는 나를 은근히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연애는 잘 돼 가?”

지금 네가 남 연애 걱정하게 생겼냐?”

수아는 한 반 시간쯤 앉아 있다가 기숙사로 돌아갔다.

 

요즘 수아는 연애의 몽상에 젖어 희망이라는 괴물을 붙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남자가 드디어 수아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이다. 적어도 수아의 말로는 그랬다. 나는 연애의 몽상보다는 그 희망이라는 괴물 때문에 수아를 조금은 질투했다. 역시나 그 때문에 수아가 그 남자와 연결되지 않기를 바랐다. 연애의 몽상이 실현되면 희망이라는 괴물도 꼬리를 감출 테니까. 가히, 유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유치하다는 것을 안다는 이유로, 나는 나를 성숙한 남성의 형식쯤으로 간주하고 뿌듯해했다.

 

이튿날 아침, 수아가 잠이 덜 깬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지금껏 관객의 등장을 기다린 양 나의 구토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증세는 어젯밤보다 더 심해져, 싯누렇고 쓰디 쓴 시큼한 액이 뱃속 깊은 곳에서 숨을 헐떡이며 기어 올라왔다. 내가 의식하는 나는 조그만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구토에 몸을 내맡긴 나였다. 이쯤 되면 연극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이 구토하는 더러운 실존을 때려치우고 뱃속에다 음식물을 가득 채워 넣는 아름다운 실존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을 깡그리 무시하고 시골 의사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

저 학생 말이야, 어디 큰 병원으로 데려가.”

과잉된 친절이 쏙 빠진, 마냥 정감 있는 어투였다. 그랬기에 또한 건조했다.

? 그렇게 심각해요?”

아니, 저 학생이 심각한 게 아니고 우리 병원이 심각해. 병실이 없어.”

병실요? 그럼 입원해야 돼요?”

글쎄, 그게 지금쯤은 나아져야 되는데 저렇게 계속 구역질을 해댄단 말이야. 도무지 왜 그럴까? 알다가도 모르겠어. 애가 선 것도 아니고, 무슨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시골 의사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를 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솔직함에 나는 은근히 감동했다.

 

한편, 수아는 생명의 은인으로 거듭났다. 수아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택시를 탔고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옮겨갔다. 모든 검사가 다시 시작됐다. 그동안에도 나에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각인시킨 것은 저 살인적인 구토였다.

 

정신을 차렸더니 어느 병실의 구석 침대였다. 담당 의사는 위장 내시경을 권했다. 머릿속에 동네 병원의 시골 의사의 잔영이 남아 있는 탓인지 그는 왠지 도시 의사라는 말이 어울려 보였다. 내가 인상을 쓰자 젊은 도시 의사는 언뜻 미소를 내비치었다.

요즘은 수면 내시경이 있어서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실은 내시경이 아니라 수면이 싫었기 때문에 나는 있는 힘껏 말했다.

그냥 해도 돼요.”

내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것이 나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럼 그러시죠.”

도시 의사는 사라졌다.

 

뱃속은 어차피 하루 종일 비어 있었다. 간호사는 불쾌한 물약을 갖다 주었다. 끈적끈적하고 질척질척한 물약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목구멍까지, 식도까지 한 대 얻어맞은 양 얼얼하게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절로 인상이 써졌다.

, 내시경에 정 들었냐? 또 내시경 하려고 일부러 밥 굶었지?”

수아가 옆에서 연신 툴툴댔다. 서울로 유학 온 뒤 위장 내시경을 한 것이 벌써 세 번째다. 그때마다 수아는 내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러니 툴툴댈 권리쯤은 충분히 있는 셈이다. 물론, 나의 내시경의 근원은 수아가 알 리 없다.

 

*

 

중학교는 읍내에만 있었다. 몹시 추웠던 1월말, 나는 아빠와 함께 읍내로 향했다. 간만의 외출이라 정류장 앞에서부터 마음이 달떴다. 하지만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를 보자마자 속이 메슥거려 왔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어른들의 등에 업혀 갈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구토 덩어리였다. 구토가 내 몸 안이 아닌, 내 몸 밖에도 존재할 수 있다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버스, 아니, 모든 탈것에 대한 공포의 시작이었다.

 

버스 안으로 들어가자 시큼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몸은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나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진동이 뱃속은 물론 머릿속과 마음속까지 휘저어 놓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토악질이 시작됐다. 아빠는 머리에 쓰고 있던 털모자를 황급히 벗어 토사물을 받아냈다.

아이고, 무슨 멀미를 이래 하노? 아를 잡네, 잡아.”

버스에서 내렸을 때 아빠가 말했다.

 

귀갓길은 더 참혹했다. 뱃속의 내장이 제 맘대로 꼬이며 구토를 턱턱 뱉어냈다. 장터에서 아빠와 함께 먹은 뜨끈하고 얼큰한 돼지국밥이 내 뱃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추한 모양새를 하고 뭉텅뭉텅, 다시 세상에 나왔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나는 끓는 물에 삶아낸 우거지 꼴이었다. 집까지는 가파른 산길을 한 시간 쯤 올라가야 했다. 아빠는 나를 등에 업었다. 달빛을 받은 거무스름한 산길과 검푸른 하늘 위에 금강석처럼 톡톡 박혀 빛나는 별들 사이를, 열 네 살짜리 딸을 업은 마흔 살의 남자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부모님은 나를 읍내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침 고등학생인 육촌 언니가 읍내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덕분이기도 했다. 우리의 방은 조그맣고 아담했는데, 초등학교 교사 부부가 사는 정갈한 양옥집에 딸려 있었다. 봄이면 몇 그루의 감나무가 노란 감꽃을 소보록하게 피웠다. 하지만 나의 자취생활은 감꽃 마냥 다부지고 예쁘지는 못했다. 주중은 금식의 시간이었고, 주말은 폭식의 시간이었다. 집에만 올라가면 주중에 오그라뜨려놓은 배를 풍선처럼 부풀리겠다는 듯 다섯 끼, 여섯 끼를 먹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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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혹은 청춘의 기록

 

 

 

스물세 살이오三月이오咯血이다

(李箱, 逢別記)

 

 

 

 

스물일곱 살이오오월이오구토다.

 

*

 

무늬만 국문학도인 백수, 하루 두 갑의 담배를 바닥내는 골초, 대학에 들어온 이래 기숙사와 하숙집과 원룸을 전전하며 8년째 자취 생활, 친구라곤 딱 하나, 애인은 없다. 구토의 습격이라도 받지 않았다면 얘깃거리라곤 통 없는 것이 나의 삶이다.

 

*

 

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따라 물수제비를 뜨려고 조약돌을 집어 든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는다.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독학자의 열띤 고백을 듣는다. 옛 연인과 재회하여 그녀를 포옹한다. 그때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구토가 거세게 치밀어 오른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그럼에도 뻔뻔하고 야성적인 실존에 대한 구토이다.

왜 당최 이것이 없지 않고 있느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조약돌이나 문손잡이가 아니라 구토를 향해 외치고 싶다. 그것은 변비처럼 우리의 신경을 지긋이 자극하여 비등점까지 끌고 가거나 아니면 설사처럼 느닷없이 우리를 덮쳐 쥐어짜고 우리의 실존을 화장실에 붙박아둔다. 나에게 후자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

 

나는 밤새도록 배를 붙잡고 씨름했다. 위아래로 연거푸 쏟아내는 동안 뱃가죽은 등가죽에 찰싹 달라붙었다. 동이 터올 무렵에는 몸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척추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하루 동안 뱃속에 들어간 음식물을 떠올렸다. 고향집에서 올라온 돼지고기 장조림과 고들빼기김치, 식은 밥, 연거푸 몇 개를 깎아 우걱우걱 씹어 먹은 참외. 음식물을 아무리 조합해도 마땅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119를 불렀다.

 

동네 병원 응급실. 의사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소변과 혈액을 뽑혔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서늘한 판자 위에 누워, 역시나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엑스레이 촬영도 했다. 그러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링거를 꽂고 있었다. 악몽과 통증이 사투를 벌이듯 번갈아가며 나를 덮쳤다. 간호사가 다가 왔다.

보호자는 언제 오세요?”

곧 올 거예요.”

물론 보호자는 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슬그머니 눈이 떠졌다. 내 몸 위로 묵직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얀 가운, 청진기. 아까 본 그 의사다. 어딘가 시골 의사라는 단어 조합을 연상시키는, 지긋한 나이에 몸집이 푸짐한 할아버지. 이 인상에 몹시 부합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봐, 학생, 엄마는 언제 와?”

나는 실제보다 더 기운이 없는 척,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이상은 없고 장이 왕창 꼬였어. 열이 나고 아파도 별 수 있나, 그냥 기다려야지. 이제 슬슬 집에 가도 될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안 와? 엄마가 와야지 애를 보내지, .”

엄마는 못 와요.”

내 말에 의사는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구라도 와야지! 거참, 딱하네.”

혀를 끌끌 차며 의사는 퇴근했다.

 

어느덧 창밖이 거무스름했다. 이쯤 되자 진짜로 서러워해도 될 것 같았다.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업 중이었다. 이제 어쩌나. 아무리 서러움을 과시하고 싶어도 시골에다 전화를 거는 건 별로이다.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다. 스물일곱이나 처먹고서 병원에 드러눕다니. 비단 자식으로서, 맏딸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도 염치없는 짓이다.

 

나는 모로 드러누워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링거액이 혈관 속에 눈물방울을 하나씩 떨어뜨릴 때마다 내 의식이 한 발짝씩 죽음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물론, 배탈 때문에 죽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내 인생에 때 이른 죽음을 갈망할 만한 설움이란 전혀 없었다. 이게 나는 못내 속상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허름한 동네 병원의 지저분한 침대 귀퉁이에서 이대로 죽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 좀 살려달라는 청춘의 원성을 싹 무시하고 억울할 것도 없이 황망하게 덜컥.

 

*

 

무의식의 한가운데서 나는 구토의 역사를 썼다. 그것은 거의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날이 새기 전부터 어른들은 돼지를 잡았다. 몸집도, 목소리도 제일 큰 돼지, 나의 꿀꿀이였다. 꿀꿀이 멱을 따는 소리는 제법 생경하고 또 처연했다. 얼마 뒤 녀석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그 단절이 조금은 이상했다. 꿀꿀이의 몸뚱어리가 몇 조각났다. 이제 꿀꿀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마솥 안에 들어간 것은 아까만 해도 꿀꿀대고 씩씩대며 돼지우리를 활보하던 그 꿀꿀이가 아니라 그냥 고기 덩어리였다. 한쪽에서 돼지고기가 삼기는 동안 나는 계속 코를 킁킁거렸다. 내 모양새가 왠지 오늘 새벽까지만 이 세상에 있었던 꿀꿀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지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것은 꿀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한쪽에서 열심히 끓고 있는 탕국처럼 맛있는 음식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유쾌한 아침, 추석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선산에 성묘를 다녀오고 술판이 벌어지는 사이에 하루가 저물었다. 그 끄트머리에 나는 집 뒤의 묏등만큼 불러온 배를 껴안고 방안에서 뒹굴었다. 뒷간을 다녀오면 또다시 뱃속에 음식물을 채워 넣었다. 3, 4년 남짓한 내 인생을 다 헤적여 봐도 먹을 것이, 그것도 고기가 이렇게 푸짐했던 적이 없었다. 뱃속은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내 손은 거침없이 고기조각을 탐했다. 급기야 또 뒷간으로 달려갔다. 아니, 뒷간까지도 못가고 앞마당 귀퉁이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설사가 뭉텅뭉텅 쏟아졌다. 바둑이는 컹컹 짖고 꼬리를 살랑대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고, 간만에 기름기가 들어가서 안 그렇나.”

내 뒤를 따라 나온 엄마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엄마, 꿀꿀이가 나 괴롭히는 거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도 뚝뚝 떨어졌다.

그기 무슨 소리고? 딱 먹을 만큼만 먹으면 꿀꿀이도 좋아할 기다. 이제 고만 먹고 내일 또 먹으래이.”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 꼬꾸라지며 음식물을 게워냈다. 대충 씹힌 고기 조각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돼지고기 냄새와 뱃속 냄새가 뒤섞여,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힘없이 방 한구석에 드러누웠다. 엄마는 궤짝을 뒤져 알약 몇 개를 찾아냈다.

민영이 아빠, 여 소화제가 어떤 거라요? 불이 캄캄해서 영 안 보이네.”

호롱불이 캄캄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엄마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수내 마을 일대에서 밭일 잘 하고 담뱃잎 엮는 솜씨가 일품이기로, 또 장 잘 담그기로 소문난 엄마였다. 그래도, 아니 그 때문에 엄마는 자기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창피해했다.

민영이가 알약을 먹겠나, 어디 한 번 보자.”

아빠는 소화제를 골라냈다. 조그맣고 동그란 초록색 알약이었다. 엄마가 밖에 나가 양푼에 찬물을 떠왔다.

, 입에 탁 넣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꿀꺽 삼키면 된대이. 함 해봐라.”

배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고분고분,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하지만 꿀꺽 삼켜진 건 물 뿐, 알약은 그대로 혀 안에 남아 있었다. 언젠가 장날 할머니를 따라 읍내에 갔다가 먹어본 사탕처럼 달달했다. 나는 혀를 놀려가며 알약을 핥았다. 하지만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달았던 사탕과는 달리, 알약은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아이고, 써라!”

나는 알약을 툭 뱉어버렸다. 엄마와 아빠는 그 소중한 소화제를 무려 세 알이나 낭비하며 내 뱃속에 넣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나머지도 전부 하얀 맨 살을 드러낸 채 방바닥 어디에 쿡 처박혔다.

진땀을 빼는 사이에 뱃속도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내 손은 절로 방구석에 쌓아놓은 과일더미로 향했다. 잠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커다란 사과 하나를 전부 먹어치웠을 것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과식, 아니 폭식의 습관은 그날 처음 생겼다. 이후 평생을 따라다닐 섭식장애의 기원이다. 또한 그때 나는 처음으로 똥과 오줌뿐만 아니라 토사물이 내 몸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토 없는 실존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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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은학이는 모래를 뒤집어쓴 채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웬일인지 침까지 탁탁 뱉어댔다.

침은 왜 뱉고 그래? 그건 나쁜 버릇이야.”

입안에 모래가 가득 들어갔어요.”

은학이는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또 모래 장난 했어? 비도 오는데?”

흡사 은학이의 독특한 취미를 오늘 처음 발견했다는 투였다. 특수교사는 따뜻한 옥수수차를 머그컵에 따라주고, 수건으로 은학이의 목과 팔을 닦아주었다. 은학이의 몸이 좀 데워지면 감자와 고구마가 나왔다. 은학이는 특수교사와 마주 앉아 입김을 호호 불며 이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무척 짧았다.

 

구구단 외우기가 시작됐다. 5단을 시작한 건 올해 봄부터였다. 여름방학을 할 땐 분명히 다 외웠는데, 개학을 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싹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일관된 암기 방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가령 봄 학기 내내 4단을 외우고 가을 학기가 되면 다 까먹었다. 하지만 내년 봄이 됐을 때는 4단의 절반은 남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느리긴 하지만 어쨌거나 5단까지 온 것이었다.

, 그림을 봐. 다섯 개에 다섯 개를 더 하면 열 개지? 다섯 개가 두 개라고 생각하면 돼. 다섯 개에 다섯 개를 더 하고 또 다섯 개를 더하면, 다섯 개가 셋? 그럼 몇 개?”

열다섯 개요.”

옳지! 바로 그거야.”

복습이 끝났다. 은학이는 오만상을 쓰며 5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오를 넘기지 못하고 대뜸 물었다.

선생님, 단무지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게 5단이랑 무슨 상관이야?”

은학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불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래도 5단을 읊조리긴 했다.

오일은 오, 오이 십, 오삼 십오, 오사 이십, 오오 이십오, 오육 삼십, 오육 삼십, 오육 삼십, 오칠, 오칠은, 오칠이, 오칠이 녀석이.”

은학이는 눈을 꼭 감은 채 무던히도 애를 썼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은학이는 한 쪽 눈을 살짝 내리뜨곤 책을 힐끔 봤다.

오육은 삼십, 오칠은 그러니까 삼십오, 오팔은, 오팔은.”

, 이제 앞에서부터 복습하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외우자.”

헤헤, 그럼, 선생님, 이제 대답해보세요. 단무지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굴까요?”

일단 복습부터! 오일은 오, 시작!”

오일은 오, 오이 십, 오삼은 십오, 오사 이십, 오오 이십, 이십, 이십.”

아까까지 잘 했잖아?”

까먹었어요.”

또 왜? 단무지 때문에?”

, 생각났다! 오오 이십오! 오육은 삼십이고, 단무지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굴까요?”

, 몰라. 누군데?”

모르면 네이버한테 물어봐야죠!”

은학이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 소리는 운동장까지 들썩이게 만드는 종소리에 묻혀버렸다.

 

은학이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하지만 잠시 뒤에 근엄한 자세로 거들먹거리며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단무지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다꽝입니다!”

마치 어마어마한 비밀이라도 폭로하는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난로 위의 군밤을 냉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선생님, 그럼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입안에서 놀고 있는 군밤 때문에 발음도 어설펐다.

장영실?”

맞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번에는 정말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며칠 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서 사라졌다. 기나긴 겨울이 시작됐다.

 

*

 

떡붕어 아저씨는 벽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고가 붙박여 있었다. 무수히 많은 숫자를 입력하자 금고 문이 열렸다. 싯누런 금괴들이 소복이 쌓여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하나를 꺼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벽의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어, 갈라졌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와 함께 성을 나섰다. 바다를 건너진 않았지만 머나먼 길이 시작됐다.

 

아저씨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실내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필품을 잔뜩 샀다. 그 다음엔 농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막 추수한 쌀과 햇과일, 배추와 무를 비롯한 야채, 태양에 말린 고추 한 포대 등을 샀다. 트럭이 거의 다 찬 상태였다. 그 다음에는 숲속으로 갔다. 떡붕어 아저씨는 곳곳에 덫을 놓았다. 그리고 소영이를 판판한 돌 위에 앉혀 놓고 한참을 기다렸다. 토끼 세 마리, 꿩 다섯 마리, 어미 잃은 새끼 멧돼지 한 마리 등 소득이 컸다.

 

집에 돌아온 떡붕어 아저씨는 하루 종일 저장 음식을 만들었다. 김치를 담그고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고 고기를 해체해 일부는 냉장고에 넣고 일부는 다른 방에 걸어 말렸다. 모든 것이 다 끝났을 때 아저씨는 음습한 방으로 들어가 미끼용 벌레들을 꺼내왔다. 소영이에게는 겨울 잠바를 입히고 구명조끼도 씌웠다.

우아, , 물에 들어가는 거야?”

아니. 발을 헛디딜까봐 그러는 거야.”

 

둘은 바닷가로 나갔다. 떡붕어 아저씨는 낚싯대를 세 개나 설치했다. 낚싯대가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달그락거렸고 주둥이가 뾰족한 검푸른 꽁치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잡힌 꽁치들은 순식간에 그물망에 들어갔다. 그 즉시 꿈틀대는 갯지렁이를 싹둑 잘라, 반 토막씩 낚시 바늘에 꽂았다. 소영이에게도 낚싯대가 주어졌다. 어쩌다 꽁치가 걸려들면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옆에서 아저씨는 고등어 잡이용 미끼를 준비했다.

어라, 그건 뭐야?”

가짜 미끼야.”

에이, 고등어가 바보야, 그런 걸 먹게?”

하지만 거짓말처럼 고등어가 우수수 걸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고등어가 꽁치보다 더 바보였네. 덩치만 커갖곤.”

고등어가 꽁치보다 눈이 더 나빠서 그래. 개체수가 많아서 먹이쟁탈전도 더 심한 거고. 고등어는 성질도 급해.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는 녀석이거든. 그래서 도시의 일반 식당에서 회로 팔기가 힘든,”

으악, 아저씨!”

소영이는 저도 모르게 낚싯대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떡붕어 아저씨가 용케 붙잡아 끌어올렸다.

허허, 갯지렁이를 문 문어는 처음 보는 걸.”

아저씨의 딱딱한 얼굴에 경련이 일면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실은 기뻐서 실실 웃고 있는 것이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떡붕어 아저씨는 오랫동안 물고기를 다듬었다. 내장을 제거당한 물고기들은 두세 마리씩 묶여 냉동실에 안치됐다. 이번 겨울은 족히 날 수 있는 양이었다. 소영이는 문득 성탑 안에 누워 있는 뚱보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 할머니에게도 겨울이 올까. 한편 떡붕어 아저씨는 성 안에 거대한 수족관을 만들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성 바깥의 연못에 관을 연결해 이쪽으로 물을 끌어왔다. 바윗돌과 돌멩이, 자갈도 깔고 온갖 민물고기와 해초를 다 풀어 놓았다.

 

월동 준비가 끝나자 슬슬 겨울이 올 기미를 보였다. 겨울 속에서도 계절은 매일매일 바뀌었다. 어제는 봄비가 내렸지만 오늘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했고 모레는 눈이 퍼부었고 그 모레 다음날에는 앙상한 진달래 나뭇가지 끝에 꽃봉오리가 맺혔다. 하지만 진달래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또 겨울이 와버렸다. 진분홍색 진달래는 새하얀 눈보라에 묻혀버렸다. 다음날 곧바로 눈이 녹으면서 폭염이 시작됐고, 신록은 어느덧 우거진 녹음이 됐다.

 

 

---- 2부 끝났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3부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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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다음 소영이는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돌멩이를 갖고 공기놀이를 했다. 옆에서는 아이들이 늑목을 타고 있었다. 은학이와 태형이도 그 틈에 끼여 있었다. 둘이 몸 차이가 너무 나서, 어떨 때는 둘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은학이의 굵은 팔뚝 밑으로 태영이의 발이 혹처럼 달랑거렸다. 그리고 은학이의 어깨 너머로 태형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춤을 추듯 팔랑댔다. 바로 그 때 다들 얼음 망치로 얻어맞은 듯 화면이 정지되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3초쯤 뒤에는 이전보다 더 부산한 움직임과 더 요란한 소리가 시작됐다. 그 사이로 여느 때와 달리 몹시 흥분한 은학이의 굵직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데려와, 빨리!”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다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소영이의 눈앞에는 얼굴 아랫부분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태형이가 서 있었다. 딱딱한 철봉이 살짝 벌어진 입에 탁 받히는 순간, 태형이는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경악과 공포와 통증이 한꺼번에 태형이를 덮쳐버렸다. 급기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 누나, 누나 미워!”

입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태형이는 눈물을 훔친 손으로 아파서 미칠 것 같은 입에 손을 살짝 댔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감지되자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양손은 온통 피범벅이 됐다. 소영이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태형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의사 선생님이 다 고쳐 줄 거야!”

이렇게 말하며 소영이는 태형이의 손을 잡았다. 피 칠갑을 한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소영이는 태형이의 손을 살짝 펴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도무지 어느 순간에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이빨 두 개가 피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그나마 하나는 삼분의 일 정도가 부서져 나간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다시 붙여 줄 거야, 그치, 누나?”

, !”

소영이는 풀었던 태형이의 손을 다시 꼭 쥐어 주었다. 태형이의 믿음은 정녕 소영이의 믿음이기도 했다.

 

태형이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은학이는 자기도 가겠다고 박박 우겼지만 그냥 제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걸로 끝났다. 결국 섬마을 병원으론 해결이 안 돼, 태형이는 시내 병원으로 이송됐다. 위쪽, 아래쪽 앞니 네 개는 완전히 나가버렸다. 그 중 하나는 영구치였다. 이빨이 부서진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잇몸 뼈에 금이 간 것이었다. 태형이는 한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아직 성장 중인 아이라 앞으로 이빨을 제대로 유지하는 데 얼마나 더 돈이 들지도 몰랐다.

 

뒤늦게 태형이 어머니가 도착했다. 그녀는 부두 근처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에 양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병원 안으로 음식 냄새가 확 퍼졌다. 그녀는 생각보다 큰 사고가 아니어서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이 어머니 정말 답답하시네. 사실 학교 측 잘못이거든요? 그 학교, 놀이시설 낡은 걸로 유명한데. 어머니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시면 시민단체 같은 곳에서도 도와줄 거예요.”

담임교사와 보건교사는 잠자코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태형이 어머니는 교사들과 간호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이만하길 다행이지요, . 우리 어릴 때는 이러다가 병신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태형이 어머니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과 함께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도 은학이를 나무라진 않았다. 실제로도 키도 작고 힘도 부치는 녀석이 기필코 은학이를 따라 위로 올라가겠다고 우긴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은학이는 자기가 때문에 태형이가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다. 피범벅이 된 태형이의 손에 들려져 있던 이빨 두 개는 은학이가 보관하기로 했다.

 

은학이와 소영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태형이를 보러갔다. 마취에서 막 깨어난 태형이는 입과 턱 주변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 내 이빨은? 잘 있어? 안 버렸지, ? 누나랑 형은 이빨이 다 붙어 있어서 좋겠다.”

태형이는 찔끔 거리던 눈물을 왕창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영이도 따라 울었고, 은학이도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영이가 킥킥 웃기 시작했다. 은학이가 옆에서 근엄하게 훈계를 했다.

소영아, 너는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에이, 웃긴 걸 어떡해? 뽀얀 밤톨이 시뻘건 사과가 됐잖아!”

누나, 미워! 아픈 사람 놀려!”

하지만 태형이 역시 눈에 눈물을 그득히 담은 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멎자 또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자 다시금 이빨의 존재가 상기되었다.

, 내 이빨 잘 지켜줘야 해, 알았지?”

그럼! 이제 너만 나으면 돼.”

, , 네가 다 나으면 의사 선생님이 이빨 다시 붙여 줄 거야.”

소영이도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음에 올 때는 이빨 가져와, .”

 

태형이의 부탁대로 다음번에 은학이는 유리병에 담긴 이빨 두 개를 들고 갔다. 태형이는 이빨을 꺼내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 여기 깨진 이빨도 붙일 수 있겠지, ?”

당연하지!”

맞아, 내가 나을 때쯤이면 이빨도 알아서 커져 있을 거야.”

태형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은학이는 약간 의아스러웠지만 태형이의 희망에 찬물을 들이붓지는 않았다. 반쪽이라도 붙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퇴원을 하자마자 태형이는 곧장 이빨부터 접수했다. 언젠가는 의사 선생님이 이 이빨을 제자리에 붙여 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이빨 중 큰 녀석이 있던 자리가 간질간질해졌다. 자꾸만 혀끝을 그 쪽에 갖다 대고 후비는 버릇도 생겼다. 한 날은 혀끝에 뭔가 딱딱한 것이 감지되었다. 손가락을 넣어봤다. 정말로 뭔가 딱딱하고 평평한 돌멩이 같은 것이 생겨 있었다. 태형이는 이 모든 것이 양치질을 게을리 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빨을 닦을 때마다 그 부분을 유난히 더 세게 문질렀다.

 

*

 

별채 건물은 겨울이 빨리 왔다. 10월 중순부터 특수반에는 특별 난방이 시작됐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도록 교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기만 했던 녹슨 난로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특수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난로 청소를 했다. 장작도 주문했다. 우체부는 한 해 동안 묵혀 놓았던 리어카를 꺼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위해 아껴온 사흘간의 휴가를 냈다. 그는 성 주변 숲 속에서 하루 종일 나무를 벴다. 다음 날에는 그 나무를 열심히 쪼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작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서 우물이 있는 학교까지 직접 갖고 왔다. 우체부가 우람한 육체를 뽐내며 할 수 있는 가장 보람찬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아들의 손을 빌려 장작을 교실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았다. 일이 끝나자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주먹으로 닦아냈다. 은학이도 옆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땀을 훔쳐냈다.

해마다 이렇게 고생을 하시니. 내년엔 연탄으로 바꿀까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나무가 있는데 연탄을 왜 써요?”

우체부는 웃으며 떠나갔다.

 

특수교사는 난로 위에 싯누런 주전자를 올렸다. 군데군데가 우그러졌지만 옥수수차를 끓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옆에는 은박지를 평평하게 깔았다. 그리고 다소 도톰한 크기로 저민 감자와 고구마, 껍질에 칼집을 낸 밤, 말린 가래떡을 얹었다. 늦가을,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음식이었다. 그 맛을 아이들은 단순히 혀끝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느꼈다. 구워놓은, 말린 인절미는 최고의 상이었다.

 

소영이는 이 음식도 다 먹지 않고 조금씩 떼 내어 한 곳에 모아두었다. 그러곤 쉬는 시간이 되면 한꺼번에 학교 뒷마당에 갖다 놓았다. 그때마다 고수레!”라고 외쳤다. 할머니가 왠지 이 음식만은 꼭, 구덩이 속을 나와 먹고 가리라고 믿었다.

 

태형이는 음식물을 입안에서 용케 돌려가며 악착스럽게 먹어댔다. 소영이나 은학이가 자기보다 더 많이 먹는다는 생각이 들면 또 누나, 미워!” “, 미워!”를 연발했다. 말랑말랑하게 잘 익은 감자나 고구마를 먹고 나면 표피가 바싹 구워진 가래떡을 집었다. 한 번 입을 넣으면 태형이는 있는 이빨, 없는 이빨, 반쯤만 있는 이빨을 다 동원하여 열심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가래떡을 씹었다. 워낙 공을 들였기 때문에 가래떡은 더욱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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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사가 돌아오자 소영이는 대뜸 물었다.

선생님, 마녀야?”

? .”

특수교사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소영이는 발끈했다.

하지만 왜 마법을 쓰지 않아?”

그야 마법을 쓰지 않는 마녀니까 그렇지.”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말 그대로지. 마녀이지만 마법을 쓰지는 않아.”

 

소영이는 마법을 쓰지 않는 마녀, 라는 말에 골몰해 있다가 다시 물었다.

과자로 만든 집에 있던 언니, 선생님 맞지?”

글쎄, 나는 그 시간에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였을까?”

소영이가 모험담을 쭉 늘어놓아도 특수교사는 애매한 반응만 보였다. 선생님이 의뭉스럽게 딴청을 부리는지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 통 알 수 없었다. 고민하는 소영이를 앞에 특수교사는 마분지 몇 장을 차례로 내놓았다.

 

여기 쓰인 대로 해봐, 알았지?”

소리를 질러 보세요.

으악!”

평소에도 이렇게 외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소영이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덧셈과 뺄셈 숙제를 하고 있던 태형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 그 다음은?”

사탕을 먹어보세요.

소영이는 마분지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아주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팔을 양쪽으로 크게 벌렸다가 모으면서 하트 모양을 그렸다. 특수교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자 소영이는 자신의 의사를 더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특수교사를 한 번 가리킨 뒤 또다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입술까지 모아 앞으로 삐죽 내밀었다. 특수교사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소영이는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머리를 굴렸다. 마침내는 특수교사 옆으로 바싹 다가가 볼에다 뽀뽀를 쪽 했다.

, 사탕을 사랑이라고 읽었구나!”

특수교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참에 태형이도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소영이를 향해 하트 모양을 동그랗게 그려주며 웃었다. 그런데도 입으론 누나 미워!”라는 말을 내뱉었다. 소영이 누나는 엄연히 누나인데도 자기가 지난봄에 공부한 것을 이제야 배우고 있다니, 그건 미운일이었다.

 

특수교사는 태형이 쪽으로 갔다.

아직 못 끝냈어?”

어려워요!”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봐.”

특수교사는 교실 뒤쪽으로 가서 앉았더니 책을 펼쳤다. 그 틈에 태형이는 소영이에게 열심히 손짓을 했다. 소영이가 살금살금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태형이가 귀엣말로 물었다.

누나, 5더하기 3은 얼마야?”

“5에다가 3을 더하라고?”

.”

. 5에다 3을 더하면, 그래, 53이네!”

우아, 정말 그러네! 에이, 누나, 미워!”

답 가르쳐줬는데 왜 미워?”

나는 모르는데 누나는 아니까 밉지.”

, 유치해!”

 

*

 

1학년 1반 수업은 따분했다. 4교시라 더 그랬다. 소영이는 수업 내내 칠판 옆에 걸린, 동그란 벽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시침에 집중했다. 12시에 고정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제 분침을 보았다. 분침 역시 그림책의 시계 침처럼 숫자판에 딱 붙어 있었다. 소영이는 뚫어져라 분침을 응시했다. 새끼거북이처럼 아주 미세하게, 아주 천천히 분침이 움직였다. 그 옆으로 초침이 째깍째깍 분주하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침의 분주한 발걸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분침은 이제 겨우 ‘1’을 살짝 비켜났을 뿐이었다. 세 개의 침에게 부여된 운명이 불공평하게 여겨졌다. 왜 하나는 가만히 있고 또 하나는 기어가고 또 하나는 저렇게 각박해야 되나. 이 생각을 하다 보니 분침은 어느새 ‘3’을 훌쩍 넘어 ‘4’에 근접하고 있었다. 시침 역시도 아주 약간이지만 ‘12’의 정중앙으로부터 살짝 떨어져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듯싶었다. 소영이는 초침에 집중한 채 인내력을 갖고 좀 더 기다렸다. 한참이 흘렀다. 다시 분침을 봤다. 정확히 ‘5’에 머물렀지만, ‘6’으로 가려면 아직도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에도 초침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동일하고 균일한 속도로 숫자판을 돌아야 될 것이었다.

 

마침내 소영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허기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소영이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친구들의 눈이 그 쪽으로 쏠렸다. 소영이는 문 곁에 있던 의자를 시계 밑에 갖다 놓고 그 위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웅성댔다. 담임교사가 소영이를 보며 말했다.

소영아, 뭐 하니? 연필깎이는 뒤에 있잖아?”

소영이가 수업 도중에 걸핏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연필을 깎으러 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초침이 불쌍해. 내 배도 불쌍해. 배가 고파서 자꾸 울어.”

?”

담임교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영이를 쳐다봤다.

 

소영이는 손을 뻗어 가늘고 긴 초침을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발뒤꿈치를 세워가며 한 바퀴 돌렸다.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소영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연이어, 소영이는 초침을 세 바퀴 더 돌렸다. 분침은 아직도 ‘6’에서 딱 요만큼 떨어져 있었다. 소영이는 초침을 한 번 더 돌렸다. 그제야 소영이는 몸을 돌리며 담임교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1230분이야! 나 밥 먹으러 갈래!”

담임교사는 당혹스러워했고, 소영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위업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의자에서 내려올 때 그만 균형을 잃어버렸다. 오른발이 교실바닥에 닿기도 전에 왼발이 의자 위에서 비틀거렸다.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소영이는 무릎을 움켜쥐었다. 담임교사가 소영이게로 달려갔다. 가벼운 타박상이었지만 연한 피부에는 시퍼런 멍이 생겨버렸다.

 

아이들은 이때를 노렸다는 듯 모두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소영이 말이 맞아요, 선생님! 12시 반이잖아요!”

선생님, 밥 먹게 해주세요!”

수업 끝났다! 밥 먹으러 가자!”

곳곳에서 아이들이 떠들어댔고, 담임교사는 주먹으로 교탁을 탁 쳤다.

다들 조용히 좀 못해! , 3!”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담임교사 역시도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렸다. 진정이 됐을 때 종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허락도 없이 모두 책상에서 일어나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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