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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3-35 눈이 밝아져 알아보더니

주보에 나와 있는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의 그리스도]라는 그림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죠. 그림을 보면 어둡고 넓은 실내 한가운데에 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림은 자연스럽게 중앙에 집중되네요. 그림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만난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소년이 음식을 나르고 상이 차려지자 나그네는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줍니다. 바로 그때 두 제자는 그 나그네가 예수님인 것을 알아봅니다. 왼쪽에 등을 보인 제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얼굴에 대고 있고, 오른쪽에 있는 제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네요. 소년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예수님을 모르는 것 같네요.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다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고 나서 그린 그림입니다. 인생의 풍파를 겪어서 그런지 그림의 깊이가 깊어졌다는 평가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그림은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그림 그림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글로바(24:18)였고 다른 한 명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두 제자는 슬픈 기색이었습니다.(17) 그것은 두 제자가 ‘선지자’로 여겼고(19),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던(21) 스승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사형 판결을 받고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없이 붙잡혀 가셔서 허무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두 제자는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여 제자들이 무덤에 찾아가 보았는데 시신은 보이지 않고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여 남 제자들이 가보았더니 시신이 보이지 않아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뒤에서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두 제자는 그 사람이 예수님인지는 꿈에도 생가하지 못하고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낸 순례자인가 싶어 가던 길을 동행하였습니다. 지금 두 제자는 스승을 잃고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셨듯이 우리가 힘들어 할 때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정에 불화가 생겨 속상해 하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교회가 부흥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톱뉴스를 듣지 못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18) 두 제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바랐는데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하였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여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다녀서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19-24)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다고 나무라셨습니다.(25)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창3장, 12장, 시22편, 69편, 110편, 사53상, 렘31장, 슥9장, 13장, 말3장)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구원할 ‘영광의 왕’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고 돌아가실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그런지도 모르고 두 제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출세하려고 따라다녔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실망했습니다. 두 제자는 우리처럼 이기적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듯이 우리도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사회적 지위에 걸 맞는 교회는 저 교회야. 저 교회는 포항시장도 다닌다잖아.’, ‘내 사업을 위해서는 저 교회를 다녀야 해. 저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교회는 포항공대 교수들도 다닌다지. 저 교회를 다녀야 내 수준도 덩달아 올라가겠네.’ 그러다 보니 개척교회는 이마트 옆에 있는 구멍가게처럼 사람이 떠나가고 대형교회는 사람이 몰려드는 지도 모릅니다. 두 제자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가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도 기도하고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키기 보다는 부흥된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두 제자가 고난을 외면하고 영광을 추구하였듯이 우리도 밥상을 차리기 보다는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거잖아요.(시126:5-6)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성공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두 제자를 나무라셨듯이 성경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도 나무라십니다.

두 제자는 집에 도착하자 예수님에게 하룻밤 머물다 가시라고 초청하였습니다. 밤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미천한 종을 시켜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하였습니다. 거실에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떡(빵)과 포도주가 놓였습니다. 두 제자는 손님인 예수님을 중앙에 앉히고 양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주인이 식탁을 주관하지만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에게 주도권을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축복기도를 하시고 빵을 떼어주셨습니다. 그제 서야 두 제자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두 제자와 길에서 대화를 나누시고 빵을 떼어주신 분은 길을 가던 나그네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 제자들의 말처럼 정말로 살아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길에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32) 예수님이 집에서 빵을 떼실 때 눈이 밝아졌습니다.(31)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의 전례’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빵을 떼신 것을 ‘성찬의 전례’라고 말하더군요.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었다 네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는 때와 장소는 미사라더군요.(다음카페 성복성당 오늘의 묵상) 미사를 통해 마음이 뜨거워졌고 영안이 열렸다는 거죠. 사실 개신교 예배학자들도 매주 예배시간마다 설교도 하고 성만찬도 하라고 강조합니다.(제임스 화이트, 로버트 웨버) 그러나 개신교의 보수적인 LABC를 보면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이 아니라 식사라네요.(896쪽) 예수님과 식탁에서 교제를 나눌 때 영적인 눈이 떠졌다고 거죠. 어찌됐든 두 제자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고 떡을 떼며 영안이 열렸듯이 우리도 말씀을 들어야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만찬이든 식사든 주님과의 교제를 나눠야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두 제자가 알아보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두 제자는 달라졌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 실망해서 그리고 자신들도 피해를 당할까봐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밤중에 강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3) 두 제자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해 보니 11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집에서 떡을 떼셨다고 말하였습니다.(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두 제자를 바꾸어 놓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예배를 드리면서 만나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고 교제를 통해 만나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두 제자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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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9-29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

환절기가 되면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몸에 걸리는 감기도 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감기도 있다고 합니다.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입니다. 몸의 감기가 누구나 걸릴 수 있듯이 마음의 감기도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우울증 환자가 있었습니다. 디두모(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토마스)였습니다.

미국의 가정 의학 전문의 돈 콜버트 박사는 [감정치유]에서 우울증은 ‘우울증’과 ‘정서불안’과 ‘양극성 장애’의 세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몇 주 동안 우울증 증상이 다섯 가지 이상 나타나면 우울증이고, 두세 가지가 나타나면 정서장애라고 합니다. 여러분 슬프고 행복하지 않으며 기분이 낙담되었습니까? 체중이나 식욕이 심하게 감소되었습니까?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집니까? 수면태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잠을 못자거나 잠에 빠졌습니까?) 만성적인 피로로 고생합니까? 집중력이 저하되었습니까? 움직임이 둔해졌습니까? 쉽게 흥분합니까? 회의주의에 빠졌습니까? 자살충동을 느낍니까? 두세 가지면 정서장애, 다섯 가지 이상이면 우울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마는 우울증 중에서 양극성 장애를 앓았습니다.(다른 말로 하면 조울증에 빠졌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청룡열차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땅 밑으로 내려갔다 하듯이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 아주 나빠졌다 하는 증상입니다. 기분이 널뛰기를 하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증상입니다. 도마의 구체적인 증상을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인기를 누렸으나,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견제를 받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이 깨우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앞장섰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좋은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들뜨기도 합니다.

두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처는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장소라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인격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거처는 하늘나라도 되고 하나님 아버지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라고 낙담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장소도 모르고 가시는 방향도 모르자 기분이 침울해졌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나쁜 일이 없는데도 갑자가 가라앉기도 합니다.

세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20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사람 유다는 죄책감에 빠져 목을 매 자살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해코지를 당할까봐 문들을 닫아걸고 숨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슬픔에 잠겨 바람을 쐬고 돌아다녔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라고 불신하였습니다. 도마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려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서 손가락을 내밀어 손에 넣어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우울증 환자가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통해 엘리야 선지자가 낙담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역을 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서 떡과 물을 마시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시고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시편 기자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시편 42편 5절을 통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질문하고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찬송하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죽고 싶다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던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도마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마드라스 근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빨갛게 달아오른 쇠로 만든 접시에서 불 고문을 당한 후에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졌으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에서 타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도마의 허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도마가 순교한 산은 지금 성 도마 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울증에 빠져 기분이 침울해 있습니까?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십니까?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라고 말합니다. 교인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낙심한 마음에 희망의 태양이 솟아오릅니다. 불안한 마음에 평안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슬픈 마음에 기쁜 찬송이 들여옵니다. 시편 42편 5절을 읽어봅시다.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우리 교인들도 혹시 우울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나 한숨소리가 찬송소리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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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1-10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저는 부활절이 될 때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제외하고 성인 남자들의 숫자만 셌습니다.(마14:21)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믿겠지만 여자인 마리아에게 알려준다면 다른 제자들이 의심할 것이 뻔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을 터인데 베드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습니다.(눅8:1-3) 일곱 귀신은 귀신 들린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귀신이 심하게 들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나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눅5:11)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겼습니다.(눅8:3) 따르는 것과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다녔다면 마리아는 교회 봉사를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 제자였습니다. 여 제자 중에서도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 제자들의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첫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하였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하였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출세하려 했으나 붙잡혀 가시자 해코지를 당할까봐 도망가 버렸습니다.(눅23:44-56) 그러나 마리아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릴 때 뼛조각이 자신의 살에 박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울 때 자신의 머리에 굵은 가시가 박히는 쓰라림을 받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 넘어지실 때 자신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드는 고통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망치질을 할 때 자신의 팔목과 발목에 못이 박히는 끔찍함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자신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지는 충격을 겪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 자신도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냈을 때에 자신도 돌무덤에 매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여 제자인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집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안식일까지 3시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다른 사람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매장하였습니다.(눅24:1-10) 안식 후 첫 날이 되었습니다. 12 제자들은 여전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으나(요20:19) 마리아는 새벽같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세마포(수의) 사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향품을 바르는 것은 사랑과 헌신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무덤에 꽃을 들고 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LABC 483쪽) 마리아는 어떻게 돌문을 열까를 걱정했습니다.(막16:3) 이스라엘의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았고 돌을 노끈으로 묶었고 빈 공간은 점토로 봉인했습니다. 마리아가 밀어서는 돌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문을 굴려 놓고 위에 앉아 있었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너무 무서워서 기절해 있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고 알려주고, 시신을 눕혔던 자리를 보여주고, 다른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마리아는 기쁨에 겨워 다른 제자들에게 달음질해 가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신하가 왕에게 복종의 표시로 엎드려 발을 붙잡듯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마리아에게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세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12 제자들보다 나았습니다.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리아는 섬겼고,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마리아는 떠나지 않았고, 12 제자들은 방안에 숨어 있었지만 마리아는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베드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호랑이와 곰은 사람이 되고 싶어 환웅을 찾아 갔습니다.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톨을 주면서 백일 동안 동굴 안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있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곰은 끝까지 견디어 여자가 되었습니다. 환웅은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분이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곰이 끝까지 견뎠기 때문에 여자가 될 수 있었고 마리아가 끝까지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우리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우리 창대교회가 부흥하는 날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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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3-5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염불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고 잿밥은 부처님 앞에 차려놓은 밥입니다. 이 속담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건성으로 하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에 마음을 쏟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열심은 없으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출세하려고 욕심을 품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룟 사람 유다입니다.

1.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지방 출신이었습니다. 유다는 유대 출신이었습니다. 수도권 출신이었습니다.(마10:4) 유다는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관직으로 이끌어줄 집안도 없었고 사업을 벌일 자금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남보다 큰 꿈과 좋은 머리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하면 출세할까 고민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고시 공부를 했을 텐데 말입니다. 유다가 꿈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선지자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꿈을 실현시켜줄 인물인지 알아보려고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습니다. 당장 선거를 치른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기세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번쩍이는 눈빛을 보고 제자로 채용했습니다. 유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2. 다른 제자들은 직분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관공무원 출신을 제쳐두고 유다에게 돈궤를 맡겼습니다.(요12:6) 파격적인 발탁이었습니다. 유다는 어린아이가 엄마의 지갑을 털어 가듯이 예수님의 지갑을 털어가 뒷주머니를 찼습니다. 유다는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을 때 화가 났습니다.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면 유다의 수입도 짭짤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요12:4-6) 유다는 푼돈은 그만 벌고 목돈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하루빨리 예루살렘에 입성하길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이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국무총리가 될 것이고 돈궤를 맡은 유다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보다 재정을 총괄하는 장관이 재산을 불리기가 유리했습니다. 유다는 신분 상승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구름에 떠 있는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3. 그러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국정 청사진은 펼쳐 보이지 않고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처음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으나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자 정말이지 싶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허무하게 돌아가신다면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다녀도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꿈을 실현해 보려던 계획을 접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마26:3-5)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제국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예수님을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만약 유다가 예수님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편에 선다면 유다의 앞길이 열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과 보낸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의 ‘인간적인 정’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출세’를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유다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편의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유다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사나이였습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반색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노예 한 사람의 가격인 은전 서른 냥을 셈하여 주었습니다.(마26:14-16) 유다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눈치 빠른 종교지도자들은 서른 냥은 착수금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일이 끝나면 더 많은 돈과 함께 관직까지 내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거래는 성사되었습니다. 한쪽은 돈과 권력을 얻고, 다른 한쪽은 정적을 제거하고. 양쪽 다 최상의 거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4.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유다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배신자가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떠보았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유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안다는 표정으로 유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유다는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일을 늦추었다가는 발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마26:17-25)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3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유다는 재빨리 이 사실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입을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태연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유다는 예수님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배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군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선히 붙잡혀 가셨습니다.(마26:47-56)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형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시켰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열고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공회는 사형은 선고할 수 있었지만 집행은 로마제국의 총독이 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반역죄를 씌웠습니다. 유다는 그제 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종교지도자들은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랐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종교지도자들은 쌀쌀맞게 응수했습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이용당했음을 깨달았습니다.(마27:3-4) 유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유다의 허황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은전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유다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유다는 너무도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마27:5) 유다는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비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친 덫에 자신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유다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설계해 주십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면 힘들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열어주시면 지름길로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두 번 장담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철저히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잘못을 후회하였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포자기 하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도 베드로나 유다처럼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 부모가 속 썩이는 자녀가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돌아오면 부모가 자녀를 용서하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로서 맞아주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자녀로서 맞아주십니다. 우리도 혹시 죄를 범했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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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현세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인생을 즐기다 가려고 하죠.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한번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져서 영적으로 또 한 번 죽게 된다고 말씀합니다.(계20:14) 불못은 죽지도 않으면서 영원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곳입니다.(계20:10) 성경은 두 번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두 번(거듭) 태어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5절을 통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은 육체적인 출생을 성령은 영적인 출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거듭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 죽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불못에 던져져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지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깨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을 잠을 잔다고 표현합니다.(마9:24,막 5:39,요11:11-14,행 7:60,고전 15:51-52,살전4:13-17,벧후 3:4) 예수님은 나사로를 자다가 깨어난 사람의 시범 케이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매 년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출23:14) 예수님도 12살 때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눅2:42)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동쪽으로 3Km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언니인 마르다, 여동생인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이렇게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오빠도 되고 남동생도 된다고 말합니다. 정황상 남동생으로 사료됩니다만 우리말 성경에 오라버니라고 나왔으니 오빠라고 여기겠습니다. 예수님이 방문하시면 천한 종이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고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고 귀한 손님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여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정신을 빼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삼남매는 예수님을 존경하였고 예수님도 삼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인 나사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병들었으니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며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당일 장을 치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 중턱에 있는 석회암 바위를 파서 동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물로 깨끗이 씻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유를 바르고 천으로 둘둘 감싸고 세마포 수의를 입혔습니다. 동굴 무덤은 맷돌같이 둥근 돌로 굴려서 막고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밀가루로 붙이듯이 점토로 동굴 틈새를 봉인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나 살이 썩으면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뼈를 추려서 유골함에 넣고 무덤 벽에 있는 납골당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동안 조문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상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가는 조문객들로 북적였고 큰소리로 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당을 받고 곡하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요1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삼일 동안 무덤 주위에 머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사로는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동안 의지하며 살던 오빠가 갑자기 죽자 너무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문을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11:21)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빠를 살려주시지 않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위로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는 오빠가 나중에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생인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도 아쉬움을 쏟아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11:32) 마리아도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셨는지 아니면 믿음이 있으면서도 믿음이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서 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도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1:35)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자 시신 썩는 냄새가 풍겼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정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보시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물으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 이다.”하고 기도하시고,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11:43)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동굴 무덤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나사로는 중국 귀신인 강시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콩콩 뛰듯이 손과 발이 묶였기 때문에 깡충깡충 뛰면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이르셨습니다.(11:44) 나사로의 흐물흐물하던 살결이 어느새 탱탱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첫째, 예수님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귀로 들어서 얻은 지식은 30%, 눈으로 보고 얻은 지식은 50%, 손으로 만져 보고 얻은 지식은 80%가 기억된다고 합니다.(한국학교발명협회 발명의 길잡이 365일)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수님이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고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둘째, 예수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셋째, 우리도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넷째, 영적으로 자고 있는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서 깨어나 도약의 날개를 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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