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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8 주의 길을 준비하라

요한이 등장하였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이라 부르지만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나옵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 요한이라는 뜻이죠. 제가 요한을 좋아하는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참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갈급해 지잖아요? 유대 백성들은 죄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선지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유대 광야에 등장했습니다.(유대 광야는 사막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를 연상시켰습니다.(왕하1:8) 요한은 낙타털로 짠 거친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옷이 내려가지 않도록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메뚜기를 구워 먹고 광야에서 흔한 석청(야생 들꿀)을 채취해서 먹었습니다.(막1:6) /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아 길에서 잠 잤습니다./ 요한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눈은 사막의 태양처럼 이글거렸고 입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설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잔잔한 물가에 떨어진 바위가 물을 뒤집어 놓듯이, 말씀에 굶주려 있는 유대 백성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요한이 설교한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니요? 유대 백성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믿었지 행동으로는 떠나 살았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언행심사’란 화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과녁에 쏘았을 때 자꾸만 빗나갔습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과 생각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의 교인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행동으로는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서는 맘몬(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만 교인이지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C_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이 유대 백성들에게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했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하였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요한에게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막1:5)(유대광야에서 요단강까지는 가깝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서 세례를 받으려고 나왔습니다.(마3:7)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교활하고 가증스럽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유대 백성들이 회개했듯이 오늘날의 새 교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지만,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세례를 받으려하였듯이 기존 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필터로 말씀을 걸러서 듣다보니 신앙이 정체되어 버렸습니다. 말씀을 편식하다보니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신앙은 유기체와 같아서 자라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물은 흘러야지 고여 있으면 썩어버립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들을 보십시오. 새 교인이 아니라 기존 교인들입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입니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마3:8) 회개한 증거를 보여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입으로는 회개하고 행동으로는 회개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분(예수 그리스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전령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행차하려면 전령이 앞서가서 길을 평평하게 닦았습니다. 그렇듯이 요한은 오실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상을 회개시키려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과 그분을 비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천한 종이고 오실 그분은 귀한 주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1:7하) 천한 종은 주인의 신발 끈을 푸르고 발을 닦아주었지만, 요한은 오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해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조연이고 오실 그분이 주연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 요한은 회개의 물세례를 베풀었지만, 오실 그분은 구원의 성령과 불세례를 베푸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높여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백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요한이 회개하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대부분의 유대 백성들은 외면했습니다. 이제 그분이 다시 오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면 심판을 하십니다. 요한은 심판을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도끼’와 ‘손에 들고 있는 키’에 비유하였습니다.(마3:10-12) 농부가 도끼를 들고 과수원에 갑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대로 두고,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버립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땅만 버리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아내가 키를 들고 타작마당으로 갑니다.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기 위해섭니다. 쭉정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곳간은 천국을 상징하고,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농부가 도끼로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로 나누듯이, 농부의 아내가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듯이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잘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불에 태워 버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을 통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재림 불감증에 걸렸는지도 모릅니다. 안전 불감증에 걸리면 사고가 일어나듯이 재림 불감증에 걸리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신랑을 신부처럼 정결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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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24-37 깨어 있어 기도하라.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재림하신다.)’는 말씀이 318번 나옵니다.(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네요.) 1년은 365일이죠. 주일은 52일이고 평일은 313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루에 한번 꼴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만 말씀하셔도 믿을 텐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3절을 통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신한 여자가 반드시 해산의 고통을 겪듯이 반드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징조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 5절부터 23절까지 재림하실 징조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땅에서는 대환난이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13장 24-25절을 통해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이 지난 뒤에는 하늘에서는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흔들립니다.(아마 지구가 태양계를 이탈하나 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모습은 눈으로도 보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듯이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재림하십니다.(구름은 예수님의 자가용인가 봅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선택하신 백성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모으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모습은 귀로도 들립니다. 대통령이 입장할 때 팡파르가 울려 퍼지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살전4:16, 이 소리가 하나의 소리인지 세 가지 소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실 징조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28-31절)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잎과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있는 4월부터 초막절이 있는 10월까지 모두 다섯 번 열매를 맺습니다. 건기동안 열매를 맺죠. 처음에는 잎도 작고 열매도 작고 당도도 적다가 차차로 잎도 커지고 열매도 커지고 당도도 높아집니다. 무화과나무는 우기인 나머지 기간에는 가지가 앙상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아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았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은 땅에서의 대환난과 하늘에서의 대격변이 일어나면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징조를 보여주고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시각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간을 알려 주신다면 우리는 실컷 놀다가 막차를 타려고 할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32절) 예수님도 모르시는데 사람이 안다면 뭔가 잘못된 거겠죠.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을 통해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알기 때문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둑이 갑자가 들어오듯이 갑자기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주인은 언제 도둑이 들지 모르기 때문에 늘 집단속을 해야 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다른 사본에는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깨어 있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고 있는 걸까요? 예수님은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34-37절) 어떤 주인이 타국(다른 나라)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무를 맡겼습니다. 주인은 문지기를 따로 불렀습니다. 문지기는 주인의 열쇠를 보관하였고 방문객을 관리하였고 다른 종들을 감독하였습니다. 문지기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자유민 여성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언제 올지 모르니 문지기에게 깨어 있어라 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주인이 저물 때에 올는지, 밤중에 올는지, 닭 울 때 올는지, 새벽에 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유대인은 밤을 셋으로 나눴으나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이 하듯이 밤을 넷으로 나눴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문지기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재림하셔서 성도들이 깨어 있으면 어떠실까요? 흐뭇해하실 겁니다. 예수님은 깨어있는 성도들을 칭찬하시고 상을 주실 겁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참을 가지고 들에 가보니 일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다음에 그 사람을 일꾼으로 또 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자고 있다면 어떠실까요? 탐탁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은 자고 있는 성도들을 꾸중하시고 벌을 내리실 겁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참을 주려고 들에 가보니 일꾼들이 농땡이를 치다가 주인이 오니 그제서 일하는 척 합니다. 주인의 마음이 탐탁지 않습니다. 다음에 그 사람을 쓰고 싶지 않아집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충성하면 상주시고 싶고 불충하면 벌주시고 싶어질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목이 터져라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재림불감증에 걸리지는 않았습니까? 재림불감증에 걸리면 언제 재림하실지 무감각해져서 맡겨주신 사명을 멀리하고 세상에 얽매입니다. 일꾼이 아무리 일했더라도 주인이 올 때 놀고 있으면 당황하게 되듯이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충성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놀고 있으면 난감해 집니다. 과거의 수고가 감안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사골 곰탕이 아닙니다. 사골 곰탕도 어지간히 우려야 국물 맛이 진하지 너무 우려내면 맛이 연해집니다. 여러분, 과거를 자랑하지 마시고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으로 감당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는 이 땅에서의 삶보다 훨씬 더 부요해 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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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14-30 주인과 결산할 새

어떤 사람이 타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여행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 당시 부자는 전문적인 회계사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습니다. 요즘도 재산관리사(Financial Planner)가 있잖아요. 그 당시 회계사는 자유민들 중에서도 있었고, 종들 중에서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종들 중에서 능력에 맞게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달란트는 원래 금과 은의 무게 단위였으나, 나중에는 화폐 단위가 되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대략 노동자의 15년 품삯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일당을 \50,000으로 계산한다면 \273,750,000이 됩니다. 대략 3억 원이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종에게는 15억 원을, 어떤 종에게는 6억 원을, 어떤 종에게는 3억 원을 맡겼습니다. 이 사람은 종들을 믿었고 또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맡겼습니다.

종들도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16절) 그 당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장사를 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장사를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17절) 그 당시는 돈보다 명예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종들은 주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아무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돈을 갑절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를 하자니 손해를 볼 것 같고, 빌려주자니 떼일 것 같아,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습니다.(18절) 그 당시는 전쟁이 자주 터지고, 도둑이 들어오다 보니 땅을 파고 돈을 묻어두었습니다. 그러다 주인이 죽어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돈을 보관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오랜 후에(얼마 뒤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불러 맡긴 돈과 남긴 돈에 대해 결산하였습니다.(19절)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보고합니다.(20절)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칭찬합니다.(21절)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자 더 큰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습니다./ 이번에는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보고합니다.(22절)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합니다.(23절)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주인은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자 보상으로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인의 칭찬 한 마디에 그동안의 고생이 눈이 녹듯이 녹아 내렸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똑같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맡게 달란트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핑계를 댑니다.(24-25절)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은 재산 증식의 귀재라 원금을 잃으면 어쩌나 두려워하여 장사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아예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칩니다.((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핑계를 일축했습니다. 그 당시 은행의 연이율은 25% 정도이었고, 사채의 연이율은 60% 정도 이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돈을 꾸어주기만 했더라도 상당한 이자를 받았을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고리대금을 금지했으나(출 22:25, 레 25:36-37, 신 23:19-20) 이방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수건에 싸서 묻어두었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렇게도 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원금을 잃으면 어떠하나 걱정한 것으로 보아 소심하였고, 돈을 수건에 싸서 묻어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성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 달란트만 남겼어도 칭찬받았을 텐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심판을 내립니다.(28-30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받아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남은 한 달란트를 주었고, 한 달란트 받아 땅에 묻어둔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주인은 충성한 종들에게는 보상을 해 주었고, 불충한 종에게는 심판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가듯이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오듯이 예수님은 다시 돌아오십니다./ 종들은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종은 주인의 달란트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인 것입니다. 주인이 달라고 하면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지 말고 내어 드려야 합니다./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시간도 되고 물질도 되고 외모도 되고 재능도 되고 지식도 되고 건강도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많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작게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왜 맡기셨을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달란트를 잘 활용하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하고 있습니까?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에 묻어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인이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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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감사 그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암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671명이 죽었는데, 악성신생물(암)으로 185명(27.6%), 뇌혈관 질환으로 81명(12%), 심장 질환으로 59명(8.8%), 고의적자해(자살)로 34명(5%), 당뇨병으로 31명(4.6%), 운수사고 21명(3.1%)이 죽었습니다. 암은 전체 사망자의 4분의 1이 넘었습니다. 1,000명 중에서 276명이었습니다.

1.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병을 가장 무서워했을까요? 나병을 가장 무서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제사장이 검진하다 보니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하면 입은 옷을 찢어버리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 질렀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에서 쫓겨났고 회당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육체적으로 고통 받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 버림받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소록도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은 암처럼 전염될 확률은 적었으나 에이즈처럼 격리되었습니다.

2.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부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북부인 갈릴리와 중부인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셨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던 나병환자들 10 명이 예수님을 보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습니다.(12-13절)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13절을 통해 나병환자에게 안수 기도도 해주시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수 기도도 해주지 않으셨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개떡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나병환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라.’ 로 이해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찾아갔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23절을 통해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3. 나병환자들은 믿음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걸아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영화 [벤허]에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흘리신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시는 순간 나병이 나았습니다. 벤허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9 명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나병이 나으면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 갔습니다.(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이 나았다고 판정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회당에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9 명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1 명은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제사장의 ‘정하다.’는 선언보다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4. 감사한 사마리아인은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1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간 9 명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의 혼혈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경멸하는 인종이었습니다. 요즘은 국제 결혼하는 가정이 많아 혼혈아들이 많아졌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온갖 차별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도 그랬으니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찾아갔고, 사마리아인은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잊은 유대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17-18절)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이 기특하셨습니다.(19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9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육신의 질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러나 1명의 사마리아인은 말씀을 믿고 육신도 치유되었고 감사를 하여 영혼도 치유 되었습니다. 육신이 치유되면 병이 낫지만 영혼이 치유되면 구원을 받습니다. 9명의 유대인들은 작은 것은 얻었지만 1명의 사마리아인은 큰 것까지 동시에 얻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보는 잡지에 만화 만평이 나왔습니다. 저울이 있는데 기울어져 있더군요. 한쪽의 저울추는 올라갔고 한쪽의 저울추는 내려같더군요. 내려간 쪽에는 ‘간구’라고 쓰여 있었고 올라간 쪽에는 ‘감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간구는 무거워서 내려갔고 감사는 가벼워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아쉬워서 간구는 많이 하지만 평소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저울추는 어떻습니까? 간구와 감사와 균등합니까? 아니면 기울어져 있습니까? 우리의 저울추가 균형을 이루거나 아니면 감사 쪽으로 기울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감사할 일들을 더 많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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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0:10 다리전도란?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7절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셨습니다. 질문 1. 그렇다면 부모님이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부모와 자녀 간의 정상적인 관계인 효도를 원할 겁니다. 그 다음은 자녀가 잘 되는 것을 원할 겁니다. 즉 부모와 함께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요. 하나님도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질문 2. 그러나 자녀가 부모에게 반항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네, 불효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장 완벽한 생활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는데 인간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59장 2절을 통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후손에게도 유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모두 죄를 저질러 죄인이 되었습니다.

질문 3. 여러분은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닐 겁니다.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에 동의합니까? 동의할 겁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6장 23절을 통해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지으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은 한번 죽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통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지으면 육적으로도 한번 죽고 영적으로도 또 한번 죽습니다. 둘째 사망은 지옥에 던져지는 겁니다. 지옥은 죽을 라야 죽을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질문 4. 여러분은 혹시 잘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까? 인간은 죄를 저지르면 본능적으로 죄책감을 느낍니다. 또한 인간은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는 본능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서 3장 11절을 통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세계를 가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통해서 영원한 세계를 깨달으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선행을 통해서 좋은 데를 가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을 만들려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물질을 통해서 영원한 만족을 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행전 4장 12절을 통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종교로도, 선행으로도, 교육으로도, 물질로도 영원한 세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 등산해 보신 적 있죠? 어떤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엄청난 고생을 하고 내려오다 한번 잘못 간 등산길은 되돌아올 수 있지만 한번 잘못 간 인생길은 돌이킬 수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잠언서 14장 12절을 통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자기가 간 길에 대해 책임도 져야 합니다. 우리는 깜깜한 밤을 항해하는 배처럼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때 등대에서 빛을 비추어 주듯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질문 5. 여러분은 부모님에게 회초리를 맞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있을 겁니다. 부모님이 우리가 미워서 때리지 않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죄를 저질렀어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님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셔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을 통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질문 6. 여러분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인데 이 사실이 믿어집니까? 솔직히 안 믿어지죠. 영국에 루이스 월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은 특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앙을 가지고 군인의 길에 들어서 대영제국의 삼성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에도 박식했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장군으로서의 명예와 역사학자로서의 지식과 문학도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증명하려고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2년 후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검토해보니 예수님의 부활은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부활을 주제로 두 가지 책을 썼습니다. 첫 번째 책은 [무덤의 돌은 어디에?]였고 두 번째 책은 [벤허]였습니다. 여러분 벤허아시죠? 불후의 명작 벤허는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분기점입니다. BC는 예수님 탄생 이전이고 AD는 탄생 이후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통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질문 7.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심판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영원한 삶을 선택하겠죠? 그렇죠?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겁니다. 영접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초청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통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0장 10절을 통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하나님, 예수님께서 저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이제 저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이합니다. 저희 마음에 들어오시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 이제는 저희의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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