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행 2:1-13(4)  성령님이 임하시니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님의 강림을 기념하는 주일이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님이 임하셔야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1) 성령님은 언제 임하셨을까요?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1절) 우리나라는 민족의 명절이 설날과 추석입니다. 이스라엘은 3 대 절기인 무교절과 칠칠절(맥추절, 오순절)과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이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무교절의 전날인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방에 사는 시골 사람들도, 외국에 사는 해외 동포들도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포화상태가 되었죠.

2) 성령님은 어디에 임하셨을까요? 1절과 2절을 보면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1절을 보면 ‘한 곳’이, 2절을 보면 ‘온 집’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한 곳과 온 집은 같은 장소였습니다. 거기가 어디일까요? 1장 13절을 보면 사도들이 유하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이층 방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층에 있죠. 이 집의 주인은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은 마가였죠. 사람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성령님은 누구에게 임하셨을까요?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1,2절) 그들은 사도행전 1장 13-15절을 보면 11 사도들과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을 포함하여 120 명의 교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성령님은 각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셨는데(민11:26-29,삼상10:6-12), 신약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도 임하십니다.

4)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1장 14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부터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50일 만에 임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40일 속에 사흘을 빼면 일주일이 되고 사흘을 포함하면 열흘이 됩니다. 그들은 일주일 또는 열흘 동안 마음을 모아 기도하였습니다. 7과 10은 거룩, 완전,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우리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5) 성령님은 어떻게 임하셨을까요? (1) 2절을 보면 성령님이 임하시는 소리가 귀로도 들렸습니다.(청각)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와 집(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스어로 성령님(프뉴마)과 바람(프노에)은 발음과 철자가 비슷했습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2) 3절을 보면 성령님이 임하시는 모습이 눈으로도 보였습니다.(시각)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불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6) 성령님은 왜 임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증언하라고 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셔야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7) 성령님이 임하시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4절을 보면 그들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는 다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죠.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교제하는 거죠. 우리는 성령 세례는 딱 한번 받으면 되지만(일회적) 성령 충만은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지속적) 그들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님이 시키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 말씀했던 무아지경에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말하였습니다.) 

8)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그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동안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러 온 해외 동포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해외 동포들의 귀에 자기가 사는 나라 말이 들렸습니다. 그리스어로도 들렸고 이집트어로도 들렸습니다. 해외 동포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말소리가 들리는 장소로 몰려갔습니다. 그들이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동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1) 이 광경을 보고 마음의 문이 반쯤 열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자 놀라면서 신기해하였습니다. (2) 이 광경을 보고 도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외국어를 지껄인다고 빈정거렸습니다.

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사도들처럼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 걱정은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기도에 몰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교인들은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이 시들어버린 교인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면 교회를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면 복음을 전하고픈 열망이 생깁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님을 경험하고 교회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성령강림주일에 성령님을 체험하고 교회를 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일 4:7-12 5가지 사랑의 언어

미국의 저명한 상담심리학자인 게리 채프먼 박사는 결혼과 가정에 관하여 30년 동안 상담하면서 5가지 사랑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다양하다 보니 내가 기대하는 사랑의 언어와 상대방이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가 달랐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더라도 내가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가 상대방이 기대하는 사랑의 언어와 다르면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엇박자가 나다보면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고 상대방에게 맞는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바라며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정하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참 잘 했어요.” “옷이 잘 어울리네요.” “음식 맛이 너무 좋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인정하는 말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외모나 성격을 칭찬하는 겁니다. 인정하는 말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으면  행복해 합니다. 예수님도 인정하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34절을 통해 ‘혈루증-하혈병-생리불순’을 앓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부정한 여인을 딸이라고 인정해 주었고, 옷깃을 만진 행동을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었고, 12년 동안 고통 받던 여인에게 건강하게 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정하는 말을 듣고 여인은 육신의 질병을 고쳤고 마음의 상처도 고쳤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습니까. 우리도 상대방에게 핀잔하는 말 보다는 인정하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랑의 언어는 ‘친밀한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밀한 시간을 가질 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는 아빠가 치킨을 사줄 때 보다 함께 놀 때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아이에게는 용돈을 주기보다는 축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빨래를 해줄 때 보다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아내에게는 설거지를 거들어주기 보다는 클래식을 켜놓고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친밀한 시간은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겁니다. 친밀한 시간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행복해 합니다. 예수님도 친밀한 시간을 중요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1-42절을 통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갑자기 방문하시자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봉사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친밀한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음식 준비에 바쁜 마르다를 이해하셨지만 말씀을 들으려는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친밀한 시간은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세 번째 사랑의 언어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선물로 담아줍니다. 선물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선물의 값어치가 아니라 선물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선물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값싼 선물을 주더라도 기쁘게 받으십시오. 그 사람은 선물을 주면서 사랑도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값싼 선물이라고 인상을 찌푸린다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 여호수아는 지금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휴대폰을 사주 세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선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1-13절을 통해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생선이 없다고 물뱀을 주지 않고, 아들이 계란을 달라고 하면 계란이 없다고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달라고 구하면 좋은 선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성령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선물보다는 성령님을 선물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도 주시고 물질적인 선물도 주십니다.

네 번째 사랑의 언어는 ‘봉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어떤 아내들은 남편들이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롯데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하기보다 설거지를 해주거나 방 청소를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들이 연봉을 많이 받는다고 자랑하기보다 정성이 담긴 아침식사를 차려주기를 기대합니다. 서양속담에 “말보다 행동이 훨씬 더 웅변적이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봉사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6-37절을 통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짐을 뺏기고 죽을 정도로 맞았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피해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천으로 상처를 싸매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고 그 사람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존경하던 종교지도자들은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했지만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헌신했듯이 우리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사랑의 언어는 ‘신체적 접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킨십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값비싼 물건을 주었을 때보다 상대방의 체온을 느꼈을 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따뜻한 품안에서 반듯하게 자랍니다. 청소년들은 부모님의 손길을 피하면서도 그리워합니다. 청년들은 몸을 부대끼면서 우정을 쌓아갑니다. 부부들은 성관계를 통하여 ‘남’에서 ‘님’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도 신체적인 접촉을 가지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3절을 통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에 걸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병이 낫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도 병을 고치셨고 안수하셔서도 병을 고치셨습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고 계시고 어떤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고 계십니까? 내가 느끼지 못해도 상대방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상대방이 느끼는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해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졌을 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하는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요일4:10,2:2)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4:1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요일4:12)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 14:15-21 너희와 함께 하리니

저는 지난해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로마교황청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가 보니 천장과 벽면에 그림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아 4년 동안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 창조부터 노아의 방주까지 9가지 장면을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4번째 그림인 [아담의 창조]입니다. 벌거벗은 아담이 비스듬히 기대고 왼손을 구부정하게 뻗칩니다. 흰 수염을 흩날리는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 오른손을 힘차게 뻗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아담의 손가락에 닿기도 전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하나님의 자애로운 얼굴을 쳐다봅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이 손끝으로 아담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그 생명의 기운이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아담을 만들어 생명의 기운인 성령님을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생명체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은 우리에게 생명의 기운인 성령님이 임하셔야 생명력 있는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성령님에 대하여 4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통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영어성경 NASB는 Helper 조력자로, NIV는 Counselor 상담자로, KJV는 Comforter 위로자로, NRSV Advocate 대변자로 번역했습니다. 한글성경 새번역은 변호해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으로, 공동번역은 협조자로 번역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상담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대변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것처럼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장 23절을 통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 절을 통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동반자이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한 성령님은 우리와도 함께 하실 겁니다./

14장 26절을 통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실 겁니다. 제자들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신학자들은 교인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주장합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는 작용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불을 켜야 방안이 환해지듯이 성령님이 조명해 주셔야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교사이십니다. 제자들을 가르친 성령님은 우리도 가르치실 겁니다./

15장 26절을 통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증언하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강에 돌을 던지면 물의 파장이 점점 퍼져나가듯이 제자들은 지금 있는 자리부터 시작해서 지구촌 전체까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전파했습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복음을 이해시키시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증언하십니다. 사람이 복음의 씨를 뿌리지만 복음의 싹이 트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증인이십니다. 제자들에게 증언해주신 성령님은 우리에게도 증언해 주실 겁니다./

16장 8절-11절을 통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새번역은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고, 공동번역은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은 믿지 않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요3:18)라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사탄이 이미 심판과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과 사탄이 이미 심판과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검사이십니다. 성령님이 사람들을 깨우치시듯이 우리들도 깨우치실 겁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증언하시고, 우리를 깨우치실 겁니다. 제자 신학대학을 다닐 때 신약 교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한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보혜사(保惠師)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지킬 보에, 은혜 혜에, 스승 사입니다. 보, 성령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면서 지켜주십니다. 혜, 성령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잊어 버려도 기억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자리에도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라고 어머니를 허락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라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 14:6(1-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3백 년 전에 동양과 서양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중국은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중국은 길을 막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민족을 공격하기 위해 15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로마는 길을 닦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촉진했습니다. 중국은 패쇄적이었고 로마는 개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길을 차단한 중국은 오히려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길을 건설한 로마는 오랫동안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은 피가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흐르듯이 모든 길은 로마로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속국으로까지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로마 제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는 여러 갈래 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으나 천국은 한 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2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아멘.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올 테니 옆집에서 놀고 있어라 말하듯이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2) ‘거처’는 ‘하늘나라’라는 장소적 개념도 있고, ‘하나님 안에서’라는 관계적 개념도 있습니다.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늘나라에서 거처할 방(rooms, NIV)을 마련하러 가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관계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사는 길을 마련하여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개념을 종합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와서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듯이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4:3)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가서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왜 자신을 떼놓고 시장에 가는지 모르듯이 도마는 예수님께서 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말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4:5)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장소도 몰랐고 아버지께로 가는 방향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와야 한다고 설명해 주듯이 도마에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목적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산으로 올라가는 여러 길이 있듯이 천국으로 가는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동차가 일방통행로를 달리듯이 천국은 한 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길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상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에는 이것이 옳고 저것에는 저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는 성경은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라 총체적인 진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진리가 아니라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 보편타당한 진리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여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을 주시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라는 말을 통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신실하게 신앙 생활한다면 기독교인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길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통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멸망당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고 거부하지만 구원받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능력으로 보고 영접합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23장을 통해서 예수님과 두 명의 행악 자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는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으나(거부했으나), 다른 하나는 비방한 행악 자를 꾸짖고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고 영접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행악 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행악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로 들어가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발견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길을 막았던 중국이 쇠퇴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면 멸망하게 됩니다. 길을 열었던 로마가 흥왕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둔다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 10:1-10 나는 양의 문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24절기(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계절을 구분한)는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4월을 예로 들면 4일은 청명(淸明)입니다. 청명이 되면 농사를 짓기 위해 논과 밭둑을 손질하고 못자리판을 만듭니다. 20일은 곡우(穀雨)입니다. 곡우가 되면 봄비가 내려 여러 가지 작물에 싹이 트고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지었으나 이스라엘은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백에서 수천 평의 농사를 지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십에서 수백 마리의 양을 쳤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가족모두 달라 들어 농사를 짓고 양을 쳤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창29:10)도 모세의 아내 십보라(출2:16)도 양을 쳤습니다.

농부나 목자나 해가 뜨면서부터 일이 시작됐습니다. 해가 뜨면 농부는 농기구를 챙겨서 논으로 나갑니다.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푸른 풀밭으로 나갔습니다. 농부는 해가 지기 전에 일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땀 흘려 일합니다. 목자는 어디선가 들짐승이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양떼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한참 일하다보면 목이 마릅니다. 농부는 그늘로 나가 막걸리로 목을 축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시냇가로 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농부는 농기구를 챙기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자는 배가 불룩해진 양떼를 이끌고 우릿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농부는 짚을 엮어서 초가집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담을 쳤고 싸리나무로 대문을 만들었습니다. 목자는 동굴이나 아니면 공터에 돌이나 나뭇가지로 담을 두르고 담 위에 가시를 올려놓고 우릿간을 만들고 양떼가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문을 만들었습니다. 밤이 되면 농부는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목자는 담 밖을 어슬렁거리는 들짐승을 신경 써야 했고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단단히 지켜야 했습니다. 농부는 낮에는 다른 농부와 함께 일하다가도 밤에는 자기 집으로 가서 따로 잤으나, 목자는 낮에는 자기 구역에서 따로 풀을 뜯기다가도 밤에는 다른 목자의 양떼와 함께 재웠습니다.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은 외삼촌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말씀합니다.(창31:40) 성경을 보면 목자가 양떼를 먹이고 지키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먹이시고 지키신다고 생각했습니다.(시23:1, 77:20, 79:13, 95:7, 100:3, 사40:11, 겔34:11-31)

이처럼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하게 보는 목자와 양과 우리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라기보다는 ‘알레고리’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하나님입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들의 길을 인도하고 막대기로 들짐승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목자가 지팡이로 길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에 길을 인도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보호해 주십니다./

양떼는 교인들입니다. 양떼는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첫째, 양은 시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길을 잘 찾아가는데 양은 눈이 어두워서 길을 잘 찾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비와 연어는 방향감각이 좋아 고향을 잘 찾아가는데 양은 길치라 집을 잘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양이 눈이 어둡듯이 우리는 눈앞의 일에만 급급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장기로 말하면 우리는 최하수이고 하나님은 초고수입니다. 우리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우리의 인생 전체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양은 방어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슴도치는 몸을 웅크리면 가시가 돋아나고 스컹크는 가스를 배출하고 달아나는데 양은 들이받을 튼튼한 뿔도 없고 도망갈 빠른 발도 없습니다. 양이 무기력하듯이 우리는 마귀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막대기로 들짐승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자를 떠나지 말고 양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양은 시력도 양하고 방어능력도 없지만 청각이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목자는 밤에 양떼들을 함께 재웠다가 아침에 따로 데리고 나갑니다. 양떼가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에 섞일 염려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양떼는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 나갑니다. 목자가 위험하다고 소리치면 양떼는 위험을 감지하고 가던 길을 멈춥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둑은 누구일까요? 목자는 어디선가 들짐승이나 도둑이 나타날까봐 낮에도 한눈을 팔지 못했고 밤에도 선잠을 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속담에 ‘열 사람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고 목자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도 도둑을 막아내기 어려웠습니다. 목자가 돌이나 나뭇가지로 담을 두르고 담 위에 가시를 올려놓고 우릿간을 만들고 양떼들이 드나들만한 조그만 문을 만들고 입구를 단단히 지켰지만 도둑은 돌로 만든 담을 슬며시 넘어오거나 나뭇가지를 살며시 헤치고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도둑은 거짓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도둑이 우릿간을 뚫고 들어와 양떼를 훔쳐가듯이 지금 거짓 선지자가 교회로 침투하여 교인들을 빼내가고 있습니다. 도둑이 남의 양떼를 약탈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려하듯이 지금 신천지 추수꾼들이 교인들을 빼내가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교인들을 빼가고 개척교회는 교회를 접수하려 합니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들어오듯이(요10:10) 이단들은 신앙생활 잘하는 교인들을 실족시키려고 들어옵니다. 이단문제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 포항에도 이단들이 침투하여 포섭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단을 막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어디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하더라도 함부로 참석하면 곤란합니다. 이번 주 18일(금)에 포항중앙교회에서 [이단 사이비 대책 세미나]를 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10:7) 도둑은 담을 넘어오거나 헤치고 들어오지만 예수님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십니다. 담을 통해 드나드는 양떼는 도둑에게 죽음을 당하지만 문을 통해 드나드는 양떼는 목자에게 꼴을 얻습니다.(10:9) 이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교인들은 잘못된 교리에 세뇌되어 결국은 신앙을 잃게 되지만 정통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은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멸망을 안겨줍니다. 비참하게 안겨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풍성하게 주십니다.(10:10) 우리는 담을 넘어오는 도둑에게 미혹되지 말고 문으로 드나드는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