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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31 사영리란?

설악산 등 중부지방을 곱게 물들였던 단풍이 이제 남부지방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백양사 단풍 축제가 열렸다 네요. 단풍은 기온의 변화로 식물의 녹색 잎이 빨간색, 노란색, 갈색 등으로 변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초봄에 새잎이 푸릇푸릇 싹트고 엽록소가 생기면서 신록이 우거지다가 가을에 엽록소가 파괴되어 자기분해과정 중에 안토시안이 생성되는 종은 빨간색과 갈색 단풍이 들고, 안토시안이 생성되지 않는 종은 녹색에 가려졌던 노란색이 나타나면서 노란 단풍이 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사영리란 4가지 영적 원리를 가리킵니다. 제1원리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 하반 절을 통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2원리는 우리는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셨지만 우리는 죄에 빠져 있습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며 살도록 창조되었으나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랐습니다.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적극적일 때는 하나님께 반항하게 되며, “하나님, 믿으세요.”라고 하면 “웃기지마,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신경질 부리거나, 소극적일 때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는데, “예수.”라고 하면 “관심 없어요.”라고 싸늘하게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사람은 죄에 빠져 있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행을 베풀거나, 불우 이웃 돕기를 하거나, 철학에 빠지거나, 세상의 이치를 알아보려고 노력하거나, 종교를 가지는 등,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하는 등,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도달하여 풍성한 삶을 누려 보려고 애쓰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벌어진 틈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겁니다.

제3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6절을 통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시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12사도에게도 보여주셨고 500여명의 제자들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3가지 원리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4원리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을 통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잘아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통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여 영접하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뜻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가 나의 주인인 인생을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일 때는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일 때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중심에 들어오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입으로 하는 말보다는 중심의 태도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지금 이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 안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할 시살은 감정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지 우리 자신의 느낌에 근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한 결과,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계3:20,골1:27) 2. 여러분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골1:14)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4.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요5:24) 5.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요10:10,고후5:17) 여러분의 생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었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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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34-40 가장 큰 계명

우리나라 목사님들에게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까요?’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오겠습니다만 아마 주일을 거룩하고 지키고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는 교인이라고 답변할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잘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잘 했다고 교회에서는 호평을 들었지만 세상에서는 경쟁자를 잔혹하게 쓰러뜨리는 비정한 사업가였다는 악평도 들었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의 형식입니다. 겉모습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겉보다는 속을 중요시 하십니다. 신앙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네 번의 논쟁가운데 세 번째 논쟁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 그 중에서도 율법을 해석하는 율법사 오늘날로 하면 신학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35절) 공동번역에는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서(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613가지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248개는 ‘하라’는 조항이었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조항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조항’과 ‘덜 중요한 조항’을 나누는 작업을 하느라 고생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율법 중에서 가중 중요한 조항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족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율법사는 망신을 주려고 벼렸습니다. 유대와 헬라 세계에서 유명한 스승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37-4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613가지 율법을 2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적 차원이고 목숨은 의지적 차원이고 뜻은 지식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 다시 말해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두 번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도 포함되고 남도 포함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골자라고(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인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아들을 죽여서까지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듯이 우리도 신앙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친한 사람은 자주 만납니다. 마음이 잘 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하나님과의 영혼의 대화인 기도를 자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이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서 들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포함된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언제 어디서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나 제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면 머리로 주일이라고 인식하고, 가슴으로 예배를 드리려는 마음을 갖고, 의지로 차를 몰고 교회로 와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그러면 인생에도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한데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수평적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가로에 해당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해도 무한대로 용서해주시지만 이웃은 조금만 잘못해도 서운해 합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잘못해도 금방 잊어버리지만 이웃은 마음에 담아 둡니다. 앙금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원만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원만한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줍니다. 상대방을 배려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원만해지려면 내가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한만큼 상대방이 하기를 바란다면 얼마가지 않아 관계가 틀어집니다. 나는 이만큼 했으면 됐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지 않고 베풀어야 상대방의 마음이 열려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신앙의 형식인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강정은 속이 비었다면 맛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지키지만 내용이 없으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빈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도 먹을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있지만 형식이 없으면 속은 찼더라도 겉을 포장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는 교인이 돼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인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형식과 내용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엮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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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15-2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공산당 전술 중에 ‘통일전선’ 전술이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우익 개량주의자와 일시적으로 협력하여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전술입니다. 흔히 여러 당파나 단체나 계층이 독자적인 주장을 견지하면서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연합하는 전술입니다. 공동전선이라고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공공의 적인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하여 공동전선을 펼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종교집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자 예수님을 증오하였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찬성하는 정치집단입니다. 헤롯 당원들은 헤롯 대왕의 후손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바랐는데 예수님이 백성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위협적인 인물로 감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도 헤롯 당원들에게도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흉계를 꾸몄습니다.(16-17절)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 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지 어긋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제국에 3종류의 세금을 냈습니다. 첫 번째는 소득세로 곡식의 10분의 1과 과일의 5분의 1을 세금으로 냈습니다. 두 번째는 인두세로 14세부터 65세까지는 하루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를 세금으로 냈습니다. 세 번째는 관세로 항구와 성문을 통과하는 상품의 2%에서 5%를 세금으로 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리로 고용해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제국이 부과한 세금보다 몇 배나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백성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가혹한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인 로마인에게 협력하고 세금을 갈취하는 세리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세금이 이방 신전을 유지하는데 사용되고 로마제국의 부유층들이 사치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유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로마제국에 순응하는 매국노라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헤롯 당원들은 세금을 순조롭게 징수해야 헤롯 대왕의 후손이 집권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찬성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다고 반역죄로 고발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납부하라고 말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납부하지 말라고 말씀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저의를 간파하셨습니다. 유대와 헬라 세계에서 유명한 스승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18-20절)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로마제국의 은전인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21절)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황제는 디베료(티베리우스) 가이사였습니다. 은전에는 티베리우스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고, ‘가이사는 신이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가이사의 것이니 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은전은 가이사의 초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로마황제가 주인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22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은전을 소유하는 것은 은전을 주조한 나라의 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로마제국의 은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로마황제가 신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징수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로마황제는 백성들의 영혼을 소유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영혼을 소유할 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제국의 백성으로서 세금을 낼 의무가 있듯이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헌금을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3장 1절을 통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7절을 통해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 전서 2장 17절 하반 절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세금을 내야하고 위정자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자 동시에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우리는 이중국적자입니다. 우리가 군대를 면제받기 위해 이중국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고, 나중에 하늘나라에 갈 것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우리는 선량한 국민인 동시에 신실한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 번째로 장로 대통령을 배출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감리교회 장로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했지만 부정선거를 저질러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 충현교회 장로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지만 IMF 사태를 맞는 바람에 죄인 취급을 받고 상도동으로 물러났다가 요즘에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 소망교회 장로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진화를 제창했지만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는 바람에 모든 국민이 광우병에 걸려 죽을까봐 난리를 쳤었고 지금은 미국에서 일어난 금융위기 여파로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환율은 올라가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고 단기외채의 만기는 도래하고 이러다가 또다시 외환위기가 빠지지는 않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위기에 빠졌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금식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블레셋이 공격해 오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아마도 강력한 폭풍우였던 것 같습니다.) 어지럽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패배하게 만드셨습니다.(삼상7:2-14) 이스라엘이 국가의 위기상황 속에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선량한 국민으로서 그리고 신실한 성도로서 국가의 위기극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고 한국교회를 세우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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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1-14 청함에서 택함으로


미국 베델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로버트 스타인 박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방법과 메시지를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일상생활과 연관시켜서 가르치셨습니다. 설교를 친숙한 사물과 연결시켜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제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비교인들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결과 제자들은 비유를 보고 듣고 깨달았지만 비교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마13:11-13)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무엇 무엇과 같다.’고 직유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절을 통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을 혼인시키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장에 가보면 딸을 시집보내는 가정은 왠지 서운한 기색이고, 아들을 장가보내는 가정은 무언가 들떠있는 기분이더라고요. 왕이 아들을 결혼시키자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왕은 종들을 보내 손님들을 정중히 초청하였습니다. 아마 귀족들을 초청했을 겁니다. 손님들은 기꺼이 초청을 수락했습니다. 왕에게 초청을 받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인날이 되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1주일에서 2주일 간 진행됩니다. 왕은 온갖 진귀한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고 초청을 수락한 손님들에게 종들을 보냈습니다. 손님들은 처음에는 잔치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상 당일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손님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자 왕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손님들이 초청을 거절하면 왕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왕은 손님들에게 다른 종들을 보내 간곡히 초청하였습니다.(4절 하반 절)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왕은 최고급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롯데호텔 뷔페를 예약했습니다. 그러나 손님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표준새번역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남은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하면 왕을 모욕하는 겁니다. 왕이 보낸 종들을 죽인 것은 왕에 대한 반역행위였습니다. 왕은 분노했습니다. 왕은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처음 초청받은 손님들은 잔치에 참석하지도 않고 왕이 보낸 종들까지 죽여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왕은 종들에게 다른 손님들을 초청하라고 지시했습니다.(8-9절)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왕은 요즘 같으면 푸드 뱅크에 기탁하면 되지만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큰길로 나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아마 평민들까지 초청하라는 말일 겁니다. 종들은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려왔습니다. 잔치 자리는 금세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왕은 손님들을 접견하러 들어왔습니다. 잔치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혼인잔치에 참석하려면 더러운 옷이 아니라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이 에티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12절)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왕은 예의를 갖춰 물었으나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음식을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렸는지 어떤지 예복을 갖춰 입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왕이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13절)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왕은 안타까웠습니다.(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나중에 초청받은 손님 중에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아 잔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여기서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왕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결혼하는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혼인잔치는 천국잔치를 가리킵니다. 잔치에 참석하라고 심부름을 갔던 종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처음 초청받은 손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왕이 혼인잔치를 베풀고 종을 보내 손님들을 초청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선택하시고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손님들이 초청을 거절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리를 대신했습니다. 손님들이 종들을 죽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왕이 살인자들을 죽이고 동네를 불사르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주후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멸망당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세계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온갖 멸시를 당하다 1948년에 독립 국가를 건국했습니다.

나중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입니다. 종들이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려왔듯이 교회 안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어른도 있고 아이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아직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 훈련소입니다. 나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쭉정이를 알곡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그러나 잔치에 참석하려면 깨끗한 예복을 입어야 하듯이 교회에 다니려면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예복을 바른 믿음과 바른 삶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천국잔치에 참석하려면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잔치에서 쫓아내듯이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엉터리로 살았더라도 교회에 다니고 나서도 바르게 살지 않는다면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은 것으로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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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33-46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저는 울진에서 목회할 때 딸아이의 출생을 기념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구덩이를 얕게 파고 뿌리를 펴서 흙에다 퇴비를 섞어 덮어주고 물을 흠뻑 주었습니다. 지지대를 만들어 포도나무가 자랄 때마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묶어주었습니다. 원순은 자라도록 그대로 두고 곁순은 따 주었습니다. 3년째가 되니 포도 알이 맺혔습니다. 색깔은 연두색이었고 크기는 좁쌀만 했습니다. 포도는 수분이 필요하기에 아침마다 물을 주었고, 영양분이 부족할까 비료를 퇴비에 섞어주었습니다. 포도 알이 점점 커지면서 자주색으로 변해갔습니다. 포도가 익어가자 말벌이 몰려와서 포도 알 속의 당분을 빨아먹었습니다. 포도송이를 신문지로 싸면 익어가는 게 보이지 않을까봐 붉은 색 양파자루로 덮어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가장 색깔이 진한 포도송이를 골라 지하수로 씻어 한 알씩 잎에 넣었습니다. 금방 딴 포도 알이라 싱싱했고 산자락에서 자라 머루 맛처럼 진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포도를 먹는 여름 내내 행복했습니다.

포도는 전 세계 과일 생산량의 3분의 1일 차지한다고 합니다. 과일 가운데 압도적인 1위 라죠. 포도에는 당분(포도당과 과당)이 많이 들어있어 피로 회복에 좋고, 비타민이 풍부해서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포도를 많이 언급합니다. 지지난 주에는 포도원에 일하라고 들여보낸 일꾼들에 관한 말씀이었고, 지난주는 포도원으로 일하러 보낸 두 아들에 관한 말씀이었고, 오늘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소작농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땅을 가진 지주입니다. 주인은 야생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포도원 주변을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송이를 발로 밟아서 포도주를 만드는 통을 만들고, 도둑이 들어오나 감시하기 위해 망대를 세웠습니다. 주인은 포도를 재배하기 위한 완벽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주들은 도시에 살면서 시골에 사는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농부들은 먹고 살기위해 한 평이라도 더 소작을 붙이고 싶어 했습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 3년에서 5년은 지났을 겁니다. 주인은 소작료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34절) 소작료는 추수 때 수확량의 많게는 50%에서 적게는 25% 정도를 냈습니다. 소작농들은 소작료를 내기는커녕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종 한 명은 심히 때리고, 한 명은 때려서 죽이고, 한 명은 돌로 쳐 죽였습니다.(35절) 주인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작농들이 종들을 죽인 것은 주인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이고, 주인은 소작농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명예에 수치를 입었습니다. 주인은 화를 참고 지난번보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소작농들은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당장 사병들을 이끌고 달려가 소작농들을 요절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번 더 참았습니다. 주인은 소작농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소작농들에게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자격이 있기 때문에 소작농들이 아들을 존중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37절) 주인은 소작농의 만행을 참을 줄 아는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은 어떻게든 소작농들이 돌이키기를 기다렸으나 소작농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고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소작농들은 주인의 아들이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고 유산을 차지하자고 흉계를 꾸몄습니다. 소작농들은 갈수록 악해져갔습니다. 죄는 죄를 낳기 마련입니다. 소작농들은 주인의 아들을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소작농들이 상속자를 죽인다 하더라도 포도원을 차지하기 어려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여기서 자비로운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소작농들이 죄를 뉘우치기를 기다리는 인자하신 분입니다. 주인이 만든 완벽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소작농들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주인이 소작료를 받아오라고 보낸 종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을 섬기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자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은 백성들은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때렸고(렘26:7-11,38:1-28), 세례자 요한은 죽였습니다.(마14:1-12)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40절)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은 아무리 자비로운 주인이라도 이 지경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41절)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 로 줄지니 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악한 소작농들을 징계하고 다른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줄 것이라고 대꾸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정곡을 찌르셨습니다.(42-44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버린 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부했지만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이셨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심판돌이기도 합니다. 주인이 소작료를 내지 않는 소작농들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아 소작료를 내는 다른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맡겼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에게서 거룩한 나라(출19:5-6)의 지위를 빼앗아 예수님을 영접한 이방인들에게 거룩한 백성이라는 특권을 주실 겁니다.

우리도 포도원을 일구는 지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소작농입니까? 악한 소작농처럼 포도원을 경작하면서 소작료를 떼먹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핏 값으로 구원해 주시고 직분을 맡겨주셨는데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세월을 낭비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선한 소작농이 되어 소작료를 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착하고 부지런한 종이 되어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원래의 소작농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았듯이 우리가 소작료를 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감격을 빼앗아 가실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4:2) 우리는 제 때에 열매를 바치는 착한 소작농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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