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선택을 선택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는데요?

어제는 정희진처럼 쓰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5권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재독했다. 작년에 읽을 때는 ‘공부’에 대한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부분에 꽂혀서 읽었는 데, 이번에는 논쟁의 구도나 지식의 전제 같은 부분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차피 또 읽을 거라서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다가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을 좀 적어두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님이 줄곧 주장해오신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미소지니misogyny로 바꿔 부를 데에 대한 요청인데… 지금까지 난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고. 여전히 “그건 미소지니예욧!!!”라는 말로는 저들의 말(과 행동)을 무력화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으잉~? 지니??🧞‍♂️ 소원을 말해봐??! 할 것이 뻔함. 그에 비하면 “그건 여성혐오예욧!!!” 가해자가 되길 꺼려 하는 세상에서 거북함과 거부감을 끼얹는 공격의 언어로 매섭고 날카롭지 않나? 어차피 말로 상처주는 세상. 나도 니들을 상처주고 싶은 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혐/남혐의 이항대립 구도를 강화시켜서 더 중요한 다른 문제를 은폐하게 돼버리는 현실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용어를 바꿔쓰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에 내 눈에 *쎄게* 읽힌 부분은 바로 이 문장들이었다. 


-(180) (특히 20, 30대를 중심으로) 사안에 따라 젠더 문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모두 ‘여혐, 남혐’으로 몰고 간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서로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일 놀란다. 일단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젠더 갈등, 젠더 전쟁으로 미화되고 있다. 


-(183) 검찰 문제를 다루는데 왜 배우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들먹이며 비난하거나 반대로 개방적인 척 하는가. 윤 씨 측의 물타기인가, 진보 진영의 무지인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검찰 문제는 은폐되었다. 위 두 가지 사안은 복잡한 현실을 젠더로 은폐하거나 젠더 문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젠더만 동원된 것이다.


특히 나의 어떤 부분을 긁은 것 같은 문장. 


-(236) 이제까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 구조로서 젠더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노동 시장의 성차별, 성별 분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기도 한다.* 김건희 씨 사건의 경우 젠더는 본질적인 문제(검찰 개혁)를 은폐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더구나 내가 가장 좌절한 점은 김건희 씨가 여성성이라는 자원을 활용한 점을 비판한 페미니스트도 없었고, 이를 문제 삼은 내가 여성주의자들로부터 ‘여성 혐오’라고 비난을 받은 사실이다. 이는 현재 한국 여성주의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김건희 씨는 억울하다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여론은 그를 도왔다. ‘회원 유지(Yuji)’와 ‘쥴리’는 비판이든 조롱이든 냉소든 그 자체로 윤 씨를 삭제하고 문제의 성격을 이동시켰다.


지역 감정과 분단 현실을 이용한 (하, 슬프게도 한국 사회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일까) 선동 정치는 신자유주의의 직격탄(노동시장 자체에 진입 어려움 ㅠㅠ)을 맞은 2030세대가 헬조선/흙수저 담론으로 본인들의 위치성을 자각하는 것 보다 여혐/남혐 대결을 조장하는 것이 통치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습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젠더를 정치에 활용하는 것, 그게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정치를 보면 안다(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 정치인 줄리아 길라드와 관련한 여성 영화(트랙백 참고)를 본 적이 있는 데, 정말 정말 속상했다). 1세계들의 민주주의도 젠더가 정치의 최종 심급이 되어버린 현실. (희망적으로 보아야 하나? 미국 페미니즘 책 보면 뭔가 희망이  꿈틀 느껴지기도...) 


그런데 한국은. 논쟁의 구도가 여혐/남혐으로 정리돼버리면 백전백패다. 왜냐면 남자도 여자 미워하고 여자도 여자 미워하거든. 심지어 여성주의자도 여자 미워함. 이러다 젠더(성역할 고정관념)를 문제화 하는 데 주력해온 여성주의적 성과마저도 다 무너지는 꼴이 날 지도 모르겠다. 한 줌의 빨갱이를 골라내려다가 후퇴한 민주주의가 얼마인가. 한국은 보수/진보 였던 적이 없다. 레드 콤플렉스와 지역감정을 이용한 정치였지. 언제나.  


논의를 이항 대립으로 끌어서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치는 대단하게도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됐고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점점 더 유효해질 것 같다. 마치 종북논란처럼 논의를 산으로 끌고 가는 데 여혐/남혐 이라는 정치적 선동 구도는 말이다.


-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가부장제의 일시적 패퇴*다. 물론 성차별은 여전하지만 그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 역사상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경제 패러다임은 없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계급과 젠더 질서를 가시적으로 변화시켰는데, 이 가시성이 지나치게 과잉 재현되어 ‘남성 역차별’이라는 난센스를 낳았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커졌을 뿐인데, ‘흙수저 남성의 군 입대 vs 중산층 여성의 사회 진출’로 왜곡되었다. 이 왜곡은 이대남 현상, 페미니즘의 대중화, 현실 정치에서 젠더 이슈의 비중이 높아진 점(정치 지도자들의 성범죄와 남성 유권자의 분노) 등으로 드러났다.


사실 이는 *여성의 지위 향상이 아니라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이라는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실업의 만연화로 남녀 모두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저출산, 비혼, 1인 가구의 등장, 남성의 계급분화의 가속화는 실업에 대한 대응이자 현실이다. 취업과 결혼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에게 가족 내 성 역할이 아닌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부분적으로 부여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기술 발전의 산물인 1인 매체, SNS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가 남성과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되었다. 여성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비록 여성 노동시장의 질은 100위권 밖이나, 한국 여성의 높은 교육 수준은 여성주의 언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남성 지배 문화에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개인화는 신자유주의 가장 원치 않은 결과이다.  (릿터, 31호 <정희진 ‘모두가 작가인 시대’를 사는 법-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와 글쓰기>)


나는 똑똑하다. 얼마나 똑똑하냐면. 취업과 결혼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ㅋㅋㅋ)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넘나 기력과 체력이 없으므로 반려묘 돌봄 + 자기 돌봄도 간당간당한 처지에, 돌봄을 동거인 남성 및 낳게 될지도 모르는 자식에게 제공할 여력이… 그래… 나는 없다… 나는 내게 그런 대단한 에너지와 사랑이 없다는 것을 슬프지만 인정해야했던 것이다.


여성의 개인화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원치 않는 결과이긴 했겠지만… 내가 신자유주의 덕분에 암튼 저임금이나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아주 좋고… 하하하하하!!! 성역할 때문에 왠지 해야할 것만 같은 돌봄 안 하는 대신 자기 돌봄에 매진하며 책 읽고 독후감 쓸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은 데… (ㅋㅋㅋ 내 자랑 그만하고)


남성vs남성의 차이, 여성vs여성의 차이가 / 남성vs여성의 차이보다 더 커졌다는 지적이 맞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가시화라기 보다는 내 현실에서... 사회의 노동력이 되어야 하는 진입 단계에서랄까. 어쨌든 IMF이후 이젠 일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면 나보다 윗 세대 여성 대부분은 돌봄과 관계된 저임금의 일자리와 자영업을 할테고, 그녀들은 나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와 동생들(여남 둘 다 해당된다)이 사회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또래 여성/남성들과의 불화가 아니었다. 이미 기득권이 되어있는 윗 세대 (가부장)남성 집단의 빻음—무능력, 일대신 정치, 각종  허세, 눈치 없음, 갑질, 행패, 멸시, 희롱, 추행, 성 역할 강제 및 저임금 강요(이중 노동) 등등—이다. 나는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영화를 보다가 엉엉 운적이 있었는 데... 존경할만한 남자 어른을 만나는 것이 로맨스보다 더 심각한 판타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 뭐 그래 이것도 흙흙수저 우리 가족 기준 일반화다. 내 친구들은 여자 상사 비위 맞추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나도 그런적 있고. 직군과 직종마다 또 다를테지. 여초회사에서는 여성들 간의 문제가 더 도드라질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생각했었다. 젠더 보다 계급보다 지역에 대해. 흙수저 그리고 지방수저가 있다고. 월급 180을 받던 지방 출신 나는 월세로만 50만 원을 냈다. 같은 월급을 받던 동료는 집에서 다니면서 시드머니를 모았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다르다. 다르더라. 나는 쪼잔해지지 않기 위해서 퇴근 후에 치맥이라도 한잔 할라치면 기꺼이 반띵을 했지만, 옷 좀 사 입으라면서 상사한테 은근 비교 당할 때는 정말 화딱지가 났다. ㅋㅋㅋㅋㅋㅋ (옷 안사고 치킨 먹고 맥주 마시는 게 더 중요햇!!) 


직장 동료와 나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일자리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이직으로 경력 물타기하면서 버텨야하는 사회 초년생의 처지는 많이 다르진 않았다. 다 흙수저였고 나는 좀더 흙흙이었다는 소리. 그런 우리에게 일도 주(떠넘기)고 모욕도 주는 상사/대표 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권력에 도취되어 눈치없이 쩝쩝대는 생긴것 포함 한남스러움의 표본이 바로 *선출*된 현 대통령이시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남혐에는 근거가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이것도 생물학적 남성이라기보단 개인적 인격과 그 위치가 근거란걸 인정해. 그리고 일반화/유형화 할 수 있을만큼 그런식으로 사회화된 인간들이 득시글 거리지.  


그런데 동년배 또래의 남성들에겐? … 곰곰 생각해 봤다. 인터넷에서 여성 혐오하는 이상한 놈(이 치들의 포르노에 쩐 뇌에 대해서는 내가 그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포르노는 너무도 너무도 대중화 되어서  다 똑같다. 정도의 차이지만 관대하게 패스하겠다.)들 말고, 일상에서. 남자들. 어떤 종류의 대화를 하면 너무도 역지사지가 안되는 데다가 맨스플레인을 일삼지만, 나는 말을 잘해서 내 앞에서는 차마 맨스플레인을 하지 못하지 니들. 그래.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나는 모른다. 


생각해보면 젠더 갈등은 남친이랑 했고, 동료 남자들과는 그냥 담배나 노나 피면서 윗사람들 욕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직격탄을 맞은. 취업 시장에서는 경쟁했었어야하며, 결혼 시장에서는 아마도 미리 탈락된. 나와 비슷한 계층의 또래의 남성들에게. 인간적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든다.…  (근데 그걸 포르노로 풀고 여혐으로 풀면 안되지 않을까? 하, 됐다. 입아픔) 


어쩌면 정말은. 또래 남성들에게 느낀 남혐의 근거는. 관습적 이성애 사회에서 친밀한 관계의 실패 경험일테다. 성적 대상화, 평가. 질 나쁜 연애. 질 나쁜 섹스. 혹은 실패한 연애. 위험했던 섹스. 몰 이해. 소통 실패. 사회생활 속 이중의 억압에 대한 하소연에 돌아오는 맨스플레인. 그들과 비슷한 몸을 한, 좀처럼 성찰하지 않는 종족 일반에 대한. 그리고 인터넷 덕에 드러난 그들의 저열한 문화와 서열질, 속내. 뭐 그런 것들.을 깨치고 나면. 로맨스는 불가능하다. 취할 것이 없는 걸리적/징징 거리는 집단. 나에게 남성은 그런 종족으로 타자화되어 버렸을 지도.


그리고 어떤 집단을 타자화하는 건 여남 불문 빌어먹을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182) 문명은 여성의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 다른 인간은 배제되어야 했다 겉보기에 남성과 다른 존재, 타자(the others)가 필요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인 여성이 가장 적합했다.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 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타자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이기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 정희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펼쳐진 성애화된 여성성의 이미지(포르노)를 볼 때마다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것은 논외로 치자. 이 책이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모든 걸 환원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후차의 문제가 아니다. 젠더가 뒤에 오는 문제도 아니지만(해일 오는 데 조개 줍는) 맨 앞에 항상 위치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이미 완전 승리해버린 한국 사회에서 젠더 가시화가 아니라 젠더가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동원되는 방식으로도 쓰인다는 지적은 건조하게 놓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끼친다. 마치 지역 감정과 레드 콤플렉스처럼 사람을 재빨리 아메바로 만들어 버리는. 


언젠가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싶은 감각(감정)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34792973- 작가라는 문제, 대상화의 문제, 유대인 문제 /  


미세하게 추적해 보면 출발은 위기 앞에서의 자기 보호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지배와 통제가 목적이기도 할테지만 조금 더 원초적인 것은 방어- 아닐까.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시절이다. 사실 나는 그것에 거의 완벽히 지쳐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그것대로 장한 일이지만, 타인에게 가혹해지는 순간들은 낯설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내 익숙해져야 했다. 매번 나를 낯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나와 타인에게 미세하게나마 관대해지기로 한 것은 어찌저찌 살아 남은 후에 고독을 구축할 수 있게 된 후 부터다. 그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셀프 마취(대체로 취해 있었음).


힘듦과 불안의 이유를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찾는 것. 가까이 있는 미운 타인에게서 찾기는 참말로 쉬운 일이라, 일찍/이찍을 서로 비난하는 정치만큼이나 여혐/남혐은 심해질 것 같다. 정희진의 지적대로 *신자유주의 덕분에 정말로 젠더가 가시화*되어버린 것이다. 경쟁에서 탈락된 젊은 남성들의 열등감 폭발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노릇이고. 그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가장 쉬운 약자를 혐오하는 방법으로 찾고 있는 것도 너무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논의를 자꾸 여남 대결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보아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위근우의 인스타그램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위근우 인스타그램 @plusratioquamvis99)


갈등 자체를 문제시 하는 프레임. 페미니즘 때문에 역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대남. 허어... 어렵다. 어려운 줄은 알았지만, 너무 어렵네. (한숨 폭폭~😮‍💨) 


무언가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나는 페미니즘에서 나의 언어 찾고 공부하는 여성주의자다. 다만 내 여성주의적 언어 생산(?)이 현실에서 여혐/남혐의 구도를 부채질해 중요한 다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떤 언어를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을 더 해야한다는 것, 더 면밀히 보아야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동안은 머뭇머뭇했지만, 또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앞으로는 여성 혐오라는 표현보다는 미소지니라는 용어를 더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맘을 좀 고쳐먹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시 입에 착 달라 붙진 않네.



어쨌든 복잡한 현실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을 하자.

공부하자 공부하자 공부를 하자.


왜?


생각 안 하고 공부 안 하면 영원히 일찍/이찍으로만 싸워야 할 테니. 


그런 공동체에서 이미 충분히 살아 왔으며, 싸우느라 맘이 격해져서 계속해서 모두 함께 멍청해지는 기분… 난 좀 싫다. (물론 싸울 땐 싸울 거다. 그러나 미련을 남겨둔 편향을 인식한 결단 쯤으로.) 



2023. 8. 12.


(여름에 썼던 거 가져옴 ㅋㅋ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다" 부분 읽어보면 좋을 듯!)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8153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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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18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 하트도 여름 거 가져옴.

공쟝쟝 2023-12-18 18:24   좋아요 2 | URL
히히❤️❤️❤️❤️❤️❤️❤️❤️❤️❤️❤️❤️❤️❤️❤️❤️❤️
근데 나 그거는 못하게쒀여. 쭈아아압쫩~! 이건 은오님 주자.

단발머리 2023-12-20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건 과계몽된 여성들과 이해 못 하는 남성들간의 간극이겠죠. 여성혐오는 미소지니로 번역된 것이 옳았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오천년 가부장제에 도전(?)하고 일부 성공한 건 신자유주의 뿐이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에 완벽 동의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이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한줌의 이대남들이 과대표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소리는 더 크게 나지만 투표율은 20대 여성이 더 높다고 하죠.

대상화와 타자화에 대해선, 저도 더 생각해보려고요. 그게 참 어려운 문제더라구요.

공쟝쟝 2023-12-21 09:59   좋아요 1 | URL
대상화 타자화는 저도 읽는 사람에 머무르는게 아니라 쓰면서 계속 가지는 질문였어요. 한번에 결론 빵 나면 것두 윤리라고 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는 읽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쓰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하겠다… 정도로만 맘 먹었어요. 아무도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는 것 역시 환상이라고 생각하니깐요! (찡긋-!)

그리고 그래봤자ㅋㅋㅋ!! 독후감ㅋㅋㅋ 더 잘 쓰고 싶긴 합니다!!

단발머리 2023-12-21 10:00   좋아요 1 | URL
그 지점 좋네요.
그리고 그래봤자 ㅋㅋㅋㅋㅋ독후감ㅋㅋㅋ
많이 안 읽으심, 내 글을 ㅋㅋㅋㅋㅋ
누가 주의해서 보신다고 이리 조심하나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2-21 10:0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래봤자 좋아요 50 안된다 ㅋㅋㅋㅋ 하지만 난 안다. *중요한 건 필력이다*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1 10:04   좋아요 1 | URL
좋아요 100 넘으면 나도 좀 진지하고 알차고 자기성찰적인 글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써보려 합니다. 그러나 50이 안 된다 ㅋㅋㅋㅋ 그것도 이웃님들이 💜으로 눌러주시는 것임 ㅋㅋㅋㅋ 여러분, 감사해요 💕

공쟝쟝 2023-12-21 10:05   좋아요 1 | URL
😊😊😊😊😊😊😊😊💕💕💕💕💕💕💕💕💕💕💕💕

단발머리 2023-12-21 10:43   좋아요 0 | URL
🤣🤪🤣🤪🤣🤪🤣🤪🤣🤪🤣🤪🤣🤪🤣🤪🤪❤️🧡💛💚🩵💙💜💖
 
[감정의 문화정치] ‘무엇이 끈적이는가’라는 질문

월요일 아침부터 내 <감정의 문화정치> 페이퍼에 <좋아요>로 발작 눌리게 하는 *철학 책 읽는 미소지니 남*에게 감정 한뭉탱이 섞어서 인용 문장 가져온다. (트랙백 참조)



가방 끈. 때로는 독립 연구자. 지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론에 특별히 재능이 있었던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살게 된 것이던가. 이론이라는 리그 안에서 이론으로 다투면서 세상을 덜 망칠 해석을 얻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써 왔다는 거 이해했음. 지성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더 치열하게 다퉈야지. 그래야 하는 게 맞고.


내가 아직도 좀 화나는 거는. 사회 전반의 미소지니가 너무 힘들다고, 살겠다고 뛰쳐나온 여성들한테 대고 본질주의, 반지성주의, 혐오주의라는 규정부터 잽싸게 들고 와서 분석하려 하던 종래의 여성주의자들 포함한 분석, 평가하고 싶어서 안달났던 종류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래 결론은 그들이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만들어진 앙심은 결국은 정말로 나 같은 대중을 반지성주의로 만든다. 쉬운 규정의 말. 언어(지식)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조신하게 돌아봐야하는 태도였을텐데도... 


더 신경질 나는 건. 

그 사람들이 규정한 지식에 기대서 결국 *하고 싶은 미소지니를 정당화*해야겠는 여성혐오자들의 탄생이겠지만.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이건 아닌가? 저건 아닌가? 생각하는 방법을 잘 몰라 휘청일 때. 이미 여성주의 지식으로 알고 있던 잘 배운 한남은 나한테 물어보더라. 너 스까야? 랟이야? 난 그 말이 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랟이었으면 너는 내가 무서워~ 아무말도 안 했겠지. 그때 나는 워마드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냥 몰라서 그건 뭐야? 헤헤 웃었다. 랟은 아니라며 딴 이야기 계속 하더라. 난 또 열심히 들었지. 하. 아마 내가 들어줬으니까 했겠지. 옳다고 안했는 데. 궁시렁.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대체. 책은 왜 읽냐. 라는 말을. 정말 해주고 싶다. 그래. 한국 사회에서 책 읽기야 말로. 식민화 된 영역이라는 걸 이젠 안다. 여성주의 고맙고 탈식민주의도 땡큐입니다. 이 모든 걸 하나 하나 볼 수 있게된, 그 동안의 나의 무지성과 반지성 위치성도 땡큐다.    


계속해서 하고 있는 말이지만 나의 (젠더화된) 감정에 평가와 걱정과 우려는 필요 없다. 진짜 해악인 건. 그런 감정을 가진 대중과 섞이지 못하는 섞일 생각 조차 없는. 지 혼자 잘난 지식이라는 거. 근데 지식이 권력이야. 나도 그건 이제 알아. 그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내려 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도 오케이. 요컨대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인 거지? 


그래서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 정치>가 탁월한 거고. 내 페미니즘 선생님 이민경, 정희진 만세입니다!  


(139) 대리자 없는 발화, 매개 없는 이해와 표현은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법이 아닌 회화에 해당하며, 이 능력은 무조건 연습으로부터만 나온다. 특정한 언어를 갓 접한 입문자가 문법적 지식을 학습하는 건 유창성에서 철저히 부차적이거나 혹은 능력을 갖추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규범보다는 그것을 활용하여 말하고 싶은 내용을 갖는 게, 누군가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모방할 준비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여러 번 듣고 여러 번 말하면 오류는 줄어든다. 

강남역 살인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은 전부 동요했고 상처 입었다. 그 흔들림으로 의식의 장막에는 틈새가 생겼다. 그 틈을 타 뱃속 깊이 눌러두었던 기억들이 혀뿌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누군가는 여자들이 진실을 말하면 세상은 터져버린다고 했다. 세상이 터질 기미를 불안해한, 대학에서 만난 철학과 남자 선배는 ‘비이성적으로 구는’ 주변 여성들을 진정시키겠답시고 ‘우리의 적은 남자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벼운 에세이가 아니라 이론서다’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다 올렸다.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 에세이가 인기를 끈 무렵이었다. 몸속에서 울컥 올라온 물질을 글자로 담아 남자에게 전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분명히 처음이 맞을 것이다. 짧은 한 줄에도 그는 아주 놀라 내게 따로 연락을 해 왔으니까.

이날 시작한 응수는 보름쯤 지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내 책 첫 제목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론서가 아니다”라는 설명 문구에 담기게 되었다. 실용 회화 매뉴얼!


- <꼬리를 문 뱀>, 이민경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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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0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후 시원해!

공쟝쟝 2023-11-20 20: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ㅋㅋㅋ 모처럼 사이다.

yamoo 2023-11-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야 말로. 식민화 된 영역...이라고 하셨는데..
몰라서 그러는데 말씀하신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공쟝쟝 2023-11-20 13:33   좋아요 1 | URL
서울대 나온 검사가 공부를 못해서 이런 대통령이 되었겠습니까? 책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이겠지만.
‘언어-지식-상징계 질서‘가 이미 권력이라는 소리고, 그 권력에 진입하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는 게 한국 사회 아닙니까?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알려지기에는 서울대 아니면 미국박사 학위 말고 필요한 인정, 권위가 또 있나요? 그런 책들 읽다보면 그런 사람들 생각을 내면화 하겠죠.
야무님의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읽었던 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을 권합니다.
˝난디는 그들에게 내재된 식민주의, 곧 서구 지배자에게 봉사하거나 인정받은 서구 방식의 개념, 문화적 우선순위, 계층화, 지배적 자아를 ‘우리 안의 적‘ 곧 ‘친밀한 적‘이라고 불렀다. 난디의 논리를 따르면 ‘친밀한 적‘을 다정하게 껴안은, 식민지배를 경험한 나라의 엘리트들은 정신의 식민화를 겪고 있는 셈이다.˝
뭐 그렇다고 제가 서구를 벗어나서 우리나라 최고여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게 된 지식을 간단한 문장들로 한꺼번에 정확하게 설명해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열공하세요~

2023-11-20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3-11-20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리를 문 뱀....이 마침 집에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랍니까. 제가 함 읽어볼게요!

공쟝쟝 2023-11-20 21:13   좋아요 2 | URL
저를 영어공부의 길로 떠민 (그리고 붙잡지는 못한...ㅋㅋㅋㅋ)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페미니즘이 키우고 페미니즘을 키운 또래의 동료 여성의 거침없는 행보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큰 일은 여자가 합니다!! 참, 단발머리님 저도 그 병 앓고 있어요. 너무 좋으면. 너무 좋아서. 책 읽고 독후감 못쓰는 병.

단발머리 2023-11-20 21:23   좋아요 1 | URL
그거 불치병이고 난치병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가장 심하게 앓았을 때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나서였죠. 한 문장 쓰고 멈추고 또 한 문장 쓰고 멈추고.... 치료제 찾아봅시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1-21 07:32   좋아요 1 | URL
그거 치료제는요,
이책 너무 좋아 별 오십 개야. 꼭 꼭 읽어, 라고 리뷰로 친구들 꼬셔서 전염시키기 뿐이에요. 근데 잠시 낫다가 (친구랑 그 책 얘길 할 수 있다면) 재발함.

2023-11-20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11-20 21:14   좋아요 0 | URL
어떤 질문은 통제가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지만. 잘난 척 하고 싶으니까 한다 ㅋㅋㅋ

2023-11-21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2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의 약속>과 같은 질문 방식이다. 감정은 무엇인가. 가 아니라 감정은 무슨 일을 하는가. 

(41)

감정은 단순히 ‘나’ 혹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다. 감정을 통해서 혹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대상이나 타자에게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서 표면과 경계가 만들어진다. 즉 ‘나’ 혹은 ‘우리’는 타자와의 접촉으로 형성되고 더 나아가 접촉의 모습을 취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몸의 표면surfaces은 타자가 남긴 인상의 효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surface’. 나는 타자가 남긴 인상을 통해서 개인의 몸의 표면뿐만 아니라 몸으로 형상화된 집단의 표면이 어떻게 모습을 갖추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다만 감정이 안과 밖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해서 감정이 그저 심리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라거나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제시하는 감정의 사회성 모델은 ‘동시에’라는 말로 에두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대상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감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라는 ‘객관적 실재’가 [감정의] 원인이 아니라 효과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감정은 개인이나 사회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마치 대상인 것처럼 구분해 내는 표면과 경계 자체를 생산한다. 나는 감정이 여러 대상을 서로 구분해내는 경계와 표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45)

서로 다른 전통을 지닌 이론을 함께 엮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 이론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는 ‘무엇이 끈적이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이 책 전체에 녹아 있다. 이 질문은 어떤 면에서 더욱 익숙한 질문, 그러니까 ‘왜 사회적 변화를 성취하기 어려운가’ ‘왜 권력관계는 집단적인 저항에도 완고하게 지속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심리학 모델과 감정 사회학 연구에서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전제하게 되는 관점에 대해 아메드가 거리를 두며 내놓는 분석 틀은 감정이 지닌 ‘방향성 + 대상과의 접촉(관계맺음)’이다. 감정이 표면과 경계 자체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끈적인다’라는 말을 곰곰 생각했다. 나의 관계를 바꾸고 나의 몸을 바꾸고 나의 감정 반응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딱 달라 붙어 있어 끈끈하고 어려운 지에 대해서. 어쩌면 아직도 과정 중인 나는 그것을 쓰면서 가두기 위해, 사후적인 해석으로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다만. 책들을 읽다가 내가 만나는 어려움일지도 모르겠는(기존의 독서 습관을 바꿔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던) 부분은. 나였던. 나인. 나였을. 나일.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더욱 열렬히 동조하고 싶어했던 관계들과 온기들. (언제나 헤어지는 게 어렵다. 애초에 너무 붙으려고 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만류를 나는 한가하게 여긴다. 현재의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어졌다는 상태와는 별개로.)

프랑스 엘리트 지식인들의 위선과 도덕적 이중성을 문제삼으며, 그들의 사유가 지닌 내적 타당성에까지 타격을 가하는 신자유주의(우파)자들의 수법은 ‘반지성주의’다 라는 지적(그렇다. 나는 기 소르망의 페도필리아 공작 때문에 푸코를 읽으려다 때려치운 전적이 있다. 그렇게치면 페미니즘도 그랬고. 나는 언제나 대중을 더 알게하려하지 않는 자들의 획책(?)에 놀아나는 무식한 독자인 것이다! 어쩌라고? 매번 말하지만 계속해서 인식을 깨트려야 하는 데 있어, 앞으로도 계속 할 예정이지만 그래도 적응 안될 때가 많아. 하여튼 개소리🐶를 경계하는 참다운 지성인의 태도를 연마하려면 폴 벤느의 책 개정판 후기를 읽으세요.)을 읽으면서는 되물었었다. 그렇다면 나의 도덕적임-_-;;은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이란 말인가?🤔 (흠흠. 한참 루틴 뭉개고 있던 반백수 주제에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패스.) 

아무리 어떤 계기로 인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어쩌면 독서의 양과 질은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내가 길고 긴 그 역자 해제를 꼼꼼 읽은 까닭은 푸코를 옹호하고 싶었으니까.다. 애당초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푸코가 소아성애했냐고 안 했느냐고 만 궁금하고 그래? 아니면 말고. 하게 되었을 거란 소리.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지성을 연마시켜준 푸코는 나의 사랑. 트루 럽. 사랑은 나를 공부시킨다!! 😤 때문에 사랑에서 대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언니의 지적은 백퍼 옳다. 사랑은 아아무나 하나. 아니 사랑은 아무와 하면 안 됨... 기왕이면 전 세계 엘리트 지식인들이 밀어주는 남자를 사랑하...(그만햇!) 

그러니까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일련의 주장들을 머리로. 머리로만 이해하면서 와닿지 않았던 까닭.은 결국. 이론이 가진 정확성 보다는 이론이 보여주는 맥락 안에서의 마음🧡🩷. 마음으로. 어떤 정체성들은 정말로 나를 살려주는 것 같았으니까. (동시에 나를 질식시키며.)

깊고 복잡하게 사유하지 못함을 반지성주의라고 말하는. 나와 같은 (읽을 여력이 없었던) 대중들에 대한 어떤 <괴로움 없이> 논의 되는 듯한 ‘(너무 잘난)이론의 글’들이 조금은 아팠었다. (내게는 대략 짜증스러움으로 표현된다.) 받아들이기 싫은 감정을 일으켰다. 

그래서 “(45)무엇이 끈적이는가” 라는. 아메드의 정동에 관한 문장들은. 

나의 반지성주의를 (조금은 흔쾌하게) 인정하게 하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서도 어루만져 준다. 사람이 마음(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메드 식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내 몸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닌 물성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 내 감정은 오랜 기간의 내 삶의 역사가 축적된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무엇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언제나 더 구체적으로 ‘나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것이 우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옹호받는 느낌. 그의 연구는 계속 나를 훌쩍이게 한다. 하~ 완전히 투항한다. 정체성을 정당화하고 싶어서 안주하려 했던 나의 읽기는 반지성주의 맞다. (흥!!)

“(46) 감정에 주목하는 일은 개인이 특정한 구조에 투자하게 되는 문제에 답하도록 이끈다. 주체는 특정 구조가 해체되는 일을 자신이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로 느끼기도 한다.” 

나는 죽었고. 다시 살아난다.

짠!!! 다시 살아났다~!! ㅋㅋㅋ 

아니 근데 사라 아메드 이야기하면서, 관습적 이성애 각본을 차마 다 못 버려서... 게이 남자 철학자만 사랑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쓰고 나니. 퀴어는 내가. 내가 퀴어다. 혼종은 내가 혼종이네. 어후. 한숨. 푹~


아마 올해의 책이 될 듯. <감정의 문화정치> 강추!👍🏻



퀴어 정치와 페미니즘 정치에서 애착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권력관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감정은 ‘끈적이며’ 우리가 투자를 철회하려고 할 때도 우리는 끈적이는 감정에 달라붙을 수 있다. 다만 끈적임이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은 당연히 존재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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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1-20 12:48 
    월요일 아침부터 내 페이퍼에 <좋아요>로 발작 눌리게 하는 *철학 책 읽는 미소지니 남*에게 감정 한뭉탱이 섞어서 인용 문장 가져온다.가방 끈. 때로는 독립 연구자. 지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론에 특별히 재능이 있었던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살게 된 것이던가. 이론이라는 리그 안에서 이론으로 다투면서 세상을 덜 망칠 해석을 얻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써 왔다는 거 이해했음. 지성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더 치열하
 
 
공쟝쟝 2023-11-20 11: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기 추풍오장원씨 좋아요 반대합니다. 당신은 여성주의자들의 반지성주의 조롱하는 행태가 본인의 초월적이며 우월한 무의식 자랑의 발로임을 정말로 모른단 말입니까? 책 그딴 식으로 읽지 말고, 미소지니 반성문 백 장 쓰고 오세요. 아 진짜. 저자의 지적 권위 뒤에 숨어서, 자기가 사유한 줄 아는 지가 철학하는(줄 아는) 남자들 다 쥐어 패고 싶다...

건수하 2023-11-20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뭔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나 봅니다. 쟝님 멋짐!

공쟝쟝 2023-11-20 20:31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한국에 여성주의 정체성의 정치가 제대로 있었던 적도 없는데, 그거가 생기기도 전에 정체성의 정치 넘어서야함을 걱정해주시는 분들의 의견. 이제는 그래. 이마저마한 역사적, 이론적(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맥락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게 되는 시점이고요. (사실은 이미 외국의 여성주의 운동에서는 <페미니즘의 도전(2005)>나오기 이전부터 페미니즘 이론이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었을 테고요. 아마도 아카데믹한 강단 내의 여성학에서는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지 싶습니다만. 여튼. 저는 잘 모르는 데다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내가 가진 해석의 부족함을 공부해서 반성하고, 넘어서는 것은 제 읽고 쓰기가 넘어서야 하는 거지. 자기 미소지니에 논리를 부여해주는 걸로 확대 해석해서 <좋아요> 누르면 제가 너무 화나죠. 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알은 체 하고 싶은 모양인데. 바로 그런 식의 읽기가 문제 적이란 것을 철학책 백날 읽어봐라. 너는 모르겠지.

단발머리 2023-11-20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화끈하고 너무 시원하네요. 글, 댓글 모두요.
잘난 척, 비아냥, 수근거림을 모두 헤치고 찬찬히 읽어가 봅시다. 앞으로 재미있을 일만 남았네요!!

공쟝쟝 2023-11-22 10:43   좋아요 2 | URL
제가 우치다도 이퀄리스트라 패가면서 읽는 상여자입니다 ㅋㅋㅋ
남성 독자를 <여성이라는 제도에 묶여본 적 없이 한가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퉁치고 싶지 않은데, 편한 몸에서는 저토록 편한 평가의 자세가 나오게 마련인가 봅니다.
아. 그 말이 하고 싶었구나. 네가. 전 세계의 반지성주의를 한탄하고 싶은 그 미소지니 남이 읽는 책들을 그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아요>였습니다. 모르는 게 부끄러울 일은 아닌데, 그의 모름은 악의적 모름이기에 부끄럽기를 바라며.
 
성의 변증법 -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하여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지음, 김민예숙.유숙열 옮김 / 꾸리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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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컴백한 기념 1일 1페이퍼 할까… 말 꺼내기 무섭게 ‘사랑’에 대해 글을 쓰라는 요청을 받았고. 나는 나의 사랑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불돌 언니. 너무 좋아하게 될까 봐(급박한 동일시를 한 나머지 저도 삶을 병동에서 보내게 될까 봐… 아무리 정상성의 폭력을 의문시한다 한들 난 거기까지가고 싶지는 않…) 읽기를 꺼렸던. 나의 최애 페미니스트.


일찍이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 없는 유토피아*(아니, 그렇다면 모든 남성은 이미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ㅋ 남자한테 열폭하지 말라고 자주 지적 받는데. 태어나자마자 유토피아 사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박탈감을 니들이 아냐?)를 제안해 주신 성림의 책 <성의 변증법>은 왜 섹스가 계급인지를 세 가지 층위에서 분석 하신다.


지난주에 1장까지만 읽었고. 다 까먹기 전에 써두기.



1장 노트. 제 멘트 보이나요? “큰일 났다. 너무 재밌다. 망함.”


나는 너무 재밌으면 망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재밌는걸, 읽으려면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한데. 집중하고 나면 체력이 떨어져서 잠을 많이 자야 하기 때문이다. 잠을 많이 자고 나면, 텐션이 쳐져서 근로 의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돈 버는 게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서 너.무. 재밌으면 안 됨. 누가 책 실컷 읽으라고 방에 가둬주고 밥 주고 돈 주면 좋겠다. 이따가 로또 사야지.


자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설명 가겠다.


불돌 언니는 이 저서를 통해


1. 엥겔스가 경제 환원주의(남자라서) 때문에 다 못 본 것 !!

2. 보부아르가 넘나 철학자(명예 남..읍읍)여서 못 본 것 !! [**이 부분은 뒤에서 설명]

3. 프로이트가 (변퇴라서…) 남자라서 못 본 것!!


을 자기는 봤다고 주장하고 계신다.


거칠게 한마디로 정리하면. 생식단위 👨‍👩‍👧 즉 생물학적 가족(인간 종의 착취와 폭력의 재생산 구조)의 압제…. 당신은 웃을 것이다. 압제라고? 오바육바칠바. 그리고 묻겠지. 그렇다면, 공쟝쟝 너는 이게 보이냐?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이 압제와 구속을 찢고 자유-해방을 위한 대의적 결심으로 혼자 삽니다. 절.대.고.독… (은 뻥!)


누누이 말하지만 처음에 결혼 때려치울 때 섹스까지 끊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페미니즘 읽다 보니. 섹스가 클라스여. sex class 성적 계급. 철폐 만세. 어어, 이거 아닌데?ㅋㅋ 이거 아닙니다. 으아아, 지금 내가 뭘 쓰고 있냐. 이런 거 안 써야 하는 데. 나도 모르게 내 손꾸락이 이걸 쓰고 있…으아아악. 섹스 철… 으아악 아니, 나는 불돌 언니를 사랑하고요. 울 언니, 힘죠!!


간단한 도식화를 해보자.

엥겔스의 가족[노동]분업은

남편(소유자) - 아내(생산수단) 그리고 그사이의

                    ||

자식(노동)에서


일어나는 이들 사이의 (섹슈얼리티 실천과 따로 떼 놓을 수 없는) 생식reproduction을 생산 수단과 구별되는 경제 체계로 보았다. 보긴했는 데. 노-자간의 계급 분석하느라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못 봤다. 자궁은 인간 생산 수단. 노동자 계급을 재생산하는 것은 여성. 계급 모순 보다 일차적인 *성적 계급 모순*. 일단 아직까지 생식 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으니까 ㅋㅋㅋ 생식 단위🥹가 사회의 기본 구성이라고 치고요. 섹슈얼리티까지도 경제환원주의로 봐 버려서 생기는 자본주의 분석의 오작동들은 아마도 분석자인 맑-엥의 몸은 생식에 매여(그들의 성욕은 난 모르고요) 본 적이 별로 없었을 남자 몸이라서란 것이 내 생각.


엥겔스 님하. 나도 일 년 365일 중에 60일 씩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에라이. 쓰지도 못할 거. 왜 이리 아프고 귀찮은가. 퉷퉷.) 근데 인류 절반은 그래요. 성인 남자 몸을 기본 값으로 한 분석은 아무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해도 ‘부분적 분석’이라고요. 여성 노동자가 단결하느라 바깥일 하면 밥은 누가 차리나? 그러니. 페미니즘 개 무시하는 좌파들. 닥쳐랏. 아, 옆으로 새지 말자.


여기 서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생식단위.

여-남 그 사이에 생겨버린 유아.

이 세 사람에게서 자본가-노동자 보다 더 원초적인 ‘근본적 압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또 정리를 해보자.


1. (피임의 등장 이전까지) 여성은 생식에 종속

2. 유아는 성인에게 종속

3. 여성(엄마)- 아이의 상호 의존적인 심리의 형성(여기는 프로이트 필요)

4. 여-남 생식의 차이는 최초의 분업


멀리 윤석열 팰 필요 없이(아, 근데 패고 싶네). 우리가 최초로 경험하는 부조리는 바로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사랑(이라고 온 사회가 주입한)의 제도. 대체로 가족 안에서 임금을 벌어다 주는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분.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합시다)하며, 아이는 여남 모부에게 종속(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충이 곧 효이며 효가 곧 도리인 유교 걸로서는 매우 어려운 인식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된. 이것은 너무도 당연해 마치 생물학적 조건처럼 보이지만 생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발전되어온 사회적 조건이기에 곧 정치적인 조건인 것이며. 파이어스톤의 말대로 계급. 그것도 성적 계급sex class이다.


기존의 계급class을 타파하자는 것이 혁명이라면. 그 클라스의 원천인 클라스(가족)를 부수자는 파이어스톤식 급진 페미니즘 주장은 “(13) 만약 혁명보다 더 포괄적인 말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


ㅜㅅㅜ 저 문장 읽는 데. 제가 영화 <레미제라블> 정말 좋아하는 데. 갑자기 그 노래… 뒤에서 들려왔음. (그러고 보면 가족의 압제는 세상의 그토록 많은 혁명들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신자유주의가 박살내 주고 계신 듯.)


다시 돌아가서. 성적 계급 타파하기 위한 최후의 파업은 섹스 파업인데.

네? 뭐라고요? 2020년대의 한녀들은 그걸 걍 한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


자, 그렇다면 2. 보부아르는 뭘 못 본 것일까요?


이건 앞으로 계속 등장하니까 개념 정리 한번 하고 가겠습니다. 철학이 까탈스러운 것은 개념으로 사유하기 때문인 데 철학자들은 개념을 다시 자신의 개념화 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예용. 철학자마다 개념의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아 프리오리 a priori>라는 서양 철학 고유의 개념은. 이렇게 이해를 해보아요. 푸코에도 등장하고, 뭐 칸트에서도 등장하는 데. 우리에게는 BTS 정국이가 있다.



"너는 내 삶에 다시 뜬 햇빛 어린 시절 내 꿈들의 재림

모르겠어, 이 감정이 뭔지 혹시 여기도 꿈속인 건지

꿈은 사막의 푸른 신기루 내 안 깊은 곳에 a priori

숨이 막힐 듯이 행복해져 주변이 점점 더 투명해져"

- 정국의 노래 <유포리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고 썼는지 모르고 썼는지 모를 정국이 안의 깊은 곳의 아 프리오리를 한국말로 하면 ‘선험’. 경험 이전에 있는 것.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데… 푸코는 그런 건 없다고 봤고, (역사적 아프리오리는 있음. 해당 시기의 사람들이 미리 합의하는 지도와 달력 안에서 질서 지어진 조건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우리의 불돌 언니는 ‘선험적인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아프리오리에 적대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자(빨갱이…)!! 임ㅋㅋㅋ 그녀의 기본적인 렌즈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모든 것은 사회,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했다.인 것입니다.


불돌 언니의 변유 렌즈로 보기엔. 철학자 보부아르가 상정한 기본적인 ‘동일자-타자’라는 개념조차 개념화가 가능하게 된 역사적 조건에 기인한다는 거죠. 어쩌면 이 근본적 이원론은 생식에 대한 분업을 원천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까지 생각을 밀어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단순하게. 더더 단순하게. 전 그런 추상화 작업이 철학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철학의 나쁜 점이죠 ㅋㅋ)


근데 프로이트 마저도 인간 무의식의 역동을 타나토스(죽음충동)-에로스(생,성충동)라는 일종의 아프리오리 적 도식으로 해결 봤다고 까는 것이 서문까지 (제가 이해한) 파이어스톤의 주장인 것 같고. 이 세 가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 내용들이 이 책 <성의 변증법>의 주되는 내용일 것이라고 사료되는 가운데.


2019년에 도전했을 당시에는 도저히 읽을 수 없었던 책을

다시 펴보니 이제는 좀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글을 통해서 제가 하고 싶었던 자랑이었습니다. 헤헷. 나 많이 읽을 수 있어졌다.


점심 먹고 잠시 짬 내서 휘리릭 뚝딱뚝딱 썼는데.

사실 저는 사랑에 대해서 쓰라는 요구를 받은 바 ㅋㅋㅋㅋㅋ


그래서 불돌을 왜 사랑하냐고요?


천재니까. 이걸 25살에 썼으니까.


… ….


전 사랑은 내 안에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무의식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는 자기애적인 거죠. 그런데 대상이 가지고 있다고 여깁니다.)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쉽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정말 싫지만. 늙고 있을 거 다 있는 아재들이 젊은 여성에게 느끼는 사랑도 일정 정도 그런 부분(사실 아름답고 젊은 여성이란 트로피…이기 때문인데. 지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홍상수-김민희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ㅋㅋㅋㅋ


자, 여기서 라캉 도식을 추가해 볼까 했는데.

벌써 두시 반.


사랑할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 지에 집중하는 사람이 사랑을 참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 사실 사랑은 대상에 푹빠져 나를 잊어버리는 경험이기도 한 것 같고요. 나를 잊고, 나를 변화시키면서 살아가는 삶이. 나를 갱신하지 않기 위해 타인들을 멋대로 억압하는 삶 보다 훨씬 근사하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내가 원했던 변화이니, 그러니 간절한 사랑만큼. 내 안에 많은 것을 넣어주는 경험도 없죠.


앞서서 보부아르도, 엥겔스도, 프로이트도 못 본 것을 파이어스톤은 봤다고 제가 써잖아요.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도 그 스스로는 그 스스로를 못 봐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을 느끼는 타자는 중요합니다. 내가 삶에 치여 보지 못했던 던 것을 보여주는 나와 다른 세계니까요.


다른 사람은 못 보는 데 내게 만 보이는 것.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내가 보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성분이라 내게‘만’ 보여요. 다양한 고정관념들로 개별 인간의 고유한 부분을 지워버리는 세상에서. 사랑에 빠지면 그런 것도 있잖아여. 나는 왜 나 인가. 너는 왜 너 인가. 하는 고유해지는 질문. 그건 질문일 뿐. 대답할 수 없어서 그래서 사랑은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반한 너가 왜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이고, 그게 왜 지금 이 순간인가 하는 건. 어쩌면 그건 내 준비와는 상관없이 우연이고. 그런 우연은 인간의 의식으로는 규명, 해명되지 않는 것이라.


분명한 건.


2023년의 나는. 불돌을 사랑하고.

내 안에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않은 그것은.

나의 천재임….


내 안의 천재. 🔥


오늘의 페이퍼 끗.


제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에 혹 틀린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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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14 17: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쟝아 사랑 해! (여기서도 알 수 있는 띄어쓰기의 중요성)

공쟝쟝 2023-11-14 18:04   좋아요 3 | URL
제가 천재만 사랑하는 병에 걸렸어요…. 주변에 천재 없음.

잠자냥 2023-11-14 20:48   좋아요 1 | URL
쟝 은바오 사랑하잖아?!

공쟝쟝 2023-11-14 21:40   좋아요 0 | URL
누구만큼은 아닙니다! 그 누구는…

우끼 2023-11-14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론이 마음에 드네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3-11-14 19:19   좋아요 1 | URL
책을 손에 쥐는 순간 바로 사랑에 빠짐ㅋㅋㅋㅋㅋㅋ 내 안의 천재 자극 ㅋㅋㅋ

우끼 2023-11-14 19:22   좋아요 0 | URL
천재 쟝쟝님은 천재로서 뭘 제일 하고 싶나요?

공쟝쟝 2023-11-14 19:23   좋아요 0 | URL
이걸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

우끼 2023-11-14 19:24   좋아요 0 | URL
음??? 이걸..??? 이미 읽지 않으셨나요

공쟝쟝 2023-11-14 19:25   좋아요 0 | URL
1장 읽고 쓴건데요 ㅋㅋㅋ 이미 사랑에 빠짐 ㅋㅋ

우끼 2023-11-14 19:28   좋아요 0 | URL
아하 ㅎㅎ

건수하 2023-11-14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장이 전체를 총괄하는 내용이었던 것만 기억이 나는데….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보부아르가 그걸 몰라서 안 썼을까요?

(내 사랑 보부아르 언니… 물론 파이어스톤 언니도 멋지지만)

파이어스톤 언니가 엄청 당차고 똑똑한 사람인 건 인정!

공쟝쟝 2023-11-14 21:39   좋아요 1 | URL
ㅋㅋㅋ파이어스톤은 보부아르를 이해하고 보부아르는 파이어스톤을 이해할 겁니다. 실제로 보부아르 말년에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 빡세게 하셨으니까요. 저도 몰라서 안쓴게 아니라 보부아르는 이미 다 알고 결혼안함ㅋㅋㅋㅋ이라고 생각해요!

수이 2023-11-15 07: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쟝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문득 꽂힌 구절은 ‘대상에 푹 빠져 나를 잊어버리는 경험‘입니다. 자신을 잃고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건 뭘까요. 저는 결혼을 하고난 후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험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문제는 ‘대상에 푹 빠‘지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이 사람은 내 이상형이 아닌데_로 시작해서 어쩌다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면사포를 바로 입어야 할 그날 새벽에 온통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건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지 못하다_라는 느낌 (또 나오네 촉) 때문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낯선 지방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왜 자꾸 이 길이 아닌데_라는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지. 예상보다 아이가 일찍 찾아왔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대상에 푹 빠져 나를 잊어버리는 경험‘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이는 너무 사랑스럽고 이 생명체를 위해서 나의 목숨 따위 가볍게 내놓을 수 있지만 육아의 길은 생각보다 너무 낯설고 거대하고 프로페셔널함을 요구하더군요. 머뭇거리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맛보았고 그저 엄마들이란 모조리 위대해보였던 시기였습니다. 사춘기 아가를 키우는 것도 역시 낯설고 어마무시해 여전히 인내심의 한계치가 어디인지 체크당하지만 뭐 예전에 비하면야.

수이 2023-11-15 07:54   좋아요 5 | URL
‘대상에 푹 빠져 나를 잊어버리는 경험‘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근사합니다. 나 자신을 온통 잊어버린다는 건 내가 지닌 상황들과 처지, 바운더리가 어디쯤인지 내가 쌓아온 성벽의 크기와 질감이 어떤지 체크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사랑이라는 걸 너무 대단한 걸로 치부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저는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 더 명확하게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던 거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바운더리가 가능한지 그걸 알아보고자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낯선 이들의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고 여깁니다.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나 사랑을 비웃는 이들이나 사랑 그건 뭘까 라고 살아가면서 가끔 묻곤 합니다.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쟝님이 말씀하셨죠. 전 한참동안 이 말을 똑똑하지 못한 머리로 저기로 굴렸다가 여기로 굴리고 다시 저기로 굴려보곤 했습니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 난 엑스와 사랑할 수 없을까, 라고 묻곤 했습니다. 사랑해달라고 구걸해본 적은 없다고 여기지만 어쩌면 구걸해보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해도 사랑이 있다면 무관하다고 여겼기에, 자존심 따위. 하지만 엑스는 그저 비웃거나 장난을 치거나 애엄마로서만 저를 바라보았지, 더 이상 사랑의 대상으로 봐주지는 않더군요. 지금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네 기회는 영영 날아가는 거라고_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장난만 쳤죠. 그 즈음 해서 저는 이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바운더리를 싹 갈아엎어버리자_라고 다짐 아닌 다짐을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사랑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 이 바운더리는 내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혼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말을 하는 입이 나의 입술인가 싶어 낯설어서 제 입술을 더듬으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수이 2023-11-15 08:15   좋아요 5 | URL
이 사람이 없이 내가 살아가는 일이 가능한가_라는 질문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이 사람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여겼으니까요. 엑스가 당연히 제 하나뿐인 숨구멍이라고 여기며 살았어요. 마찬가지로 저는 제 존재 역시 엑스에게 하나뿐인 숨구멍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이르게 서로를 비웃고 서로를 황당한 존재로 여기고 서로를 냉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르고 건조한 인간이 되어 시간을 보내다보니 중년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원한 적 없는데 꿈에서 그린 적도 없는데 그런 시니컬하고 평화로운 중년이 되고보니 저는 좀 이른 노인이 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어쩌면 추하고 어쩌면 낯설어_ 지하철이나 버스 안이나 길을 걷다가도 좀 기운이 있는 노인이 된 기분에 사로잡혀 나이든 여성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더 ‘대상에 푹 빠져‘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더 기운이 빠지면 더 주름이 짙어지면 더 이상 내 생에 사랑은 없겠구나 그런 걸 마주하고 있었는데 어설프게 젊고 어슬프게 나이든 나를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더 오래 나를 바라보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어요. 이 나이에 욕망을 품고 새롭게 다시 인생을 리셋하겠다는 건 크나큰 욕심일지도_ 그렇게 번민에 사로잡혀 오랜 시간을 앓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랬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계속 살아가야 한다, 가면을 쓰고_ 너무 오래 가면을 쓰고 얼굴을 잃어버린 채 살아서 마치 그 가면이 제 얼굴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 가면을 바라보면서 호기심에 사로잡혀 나를 응시하는 시선 아래 깨달은 건 가면을 벗고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_였어요. 그게 시작인 거 같습니다. 내 욕망을 응시하고 내가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깨닫고난 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고난 후에는 머뭇거릴 까닭이 없더군요. 사랑은 판타지일지도 모릅니다.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죠. 사랑이 판타지라는 설정 아래 종종 새벽 세시_ 소설이 떠올랐어요. 대상을 명확히 마주하지 않고 실체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몇 번의 온라인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 갖는 느낌이 더 커지면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소설 속에서 여자는 갈등합니다. 이렇게 온라인상에서만 느낌을 주고받는 것이 더 행복할 거 같은데. 남자의 간곡한 부탁에 그들은 만납니다. 만남 이후에 그 판타지는 어떤 식으로든 파편화되어버리고 그들은 또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수이 2023-11-15 08:32   좋아요 5 | URL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랑은 없습니다. 나를 잊고 대상에게 돌진한다는 건 쉽지 않지만 돌진하고픈 대상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죠. 나이가 들면 더더욱. 더구나 가진 것들이 적고 세상사 잣대로 따져보자면 너무 (사랑을 하기에) 그릇된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는 쟝님 친구로서 쟝님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사랑을 해본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쟝님만을 바라봐주고 쟝님이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 둘의 관계에서 파생되어 새롭게 나오는 것들이 있을 테니까. 그 경험은 쟝님을 더 온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사랑이 우리가 알고 있는 어설픈 상식들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벼락은 맞을 수 있을 때 맞는 게 존재 형식에 있어서는 이롭다고 여깁니다. 파멸시키면? 파멸된다면 또 그 파멸대로 하나의 과정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불이어서 모든 것들이 불타버린다면? 그래서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라는 질문에 기꺼이 불타서 소멸하겠습니다_ 라는 대답에 아득함을 느끼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시작하겠어_라는 마음이 들었기에. 홍상수와 김민희에 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이건 다음 기회에. 사랑에 대해서 글을 써줘_라는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불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릴 때 언니의 사랑에 집중해, 언니에게 집중해_라고 당신이 말해줘서 눈물을 그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땡큐.

공쟝쟝 2023-11-15 10:23   좋아요 5 | URL
제가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관습적인 가족, 이성애제도, 사랑, 국가… 세상에서 각본으로 만들어둔 대체적인 모든 것들을 흔들어본 건 사실이고, 내가 속았다는 느낌으로 번민한 것도 사실예요. 사회가 이게 삶이다 라고 말하는 삶에 충실히 따랐고, (모범생) 잘 못된 건 아니라고 해봤고 (반항), 남들 사는대로 그냥 살려고 해봤고 (결혼), 근데 다 아니었어요.

제게 필요한 건 자기만의 방, 생각할 시간, 생각을 생각한 사람들의 책 읽기 였는데… 그걸 안 주고 다른 걸로 채우려고 한 건, 내 안에 그런게 있다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만큼 나를 모르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줄을 몰랐어요. 착한 딸로 살려다가 삶을 망칠뻔 했죠. 제가 살던 세상에는 딸을 위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어요. 마녀 창녀 엄마. 그리고 미친여자. 이제는 아니죠. 저는 저를 해방시키기 위해 페미니즘 읽었어요. 읽기 전에도 저는 저였고, 어느 정도 이 책들에 익숙해진 지금도 저는 저 입니다. 다만, 페미니즘 없었으면 저를 사랑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온 사회가 내가 착한 딸과 엄마로 살 것을 요구하니까. 일단 그 역할을 수행해야 사회의 성원이 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걸 하고 나면 내 인생은 없구나. 근데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기에는 세상이 많이 바뀌어버렸죠. 여남을 정상가족제도로 묶어주던 안전감이 여남 모두에게요.

저는 지금의 저를 좀 많이 사랑해요. 이젠. 생각해보면… 내가 맞아!! 씩씩 이렇게 되는 순간 진짜 열공했고 그게 사랑이었어ㅋㅋㅋ 저는 여성주의 공부에 빠져 나를 잊어버리고 ㅋㅋㅋ 우울증까지 왔다!!!ㅋㅋ 근데 나에게는 페미니즘 너무 중요한 사랑인데 그거 안 중요한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내게만 보인다 ㅋㅋㅋ)

제도로서의 여성, 가족, 모성에 대한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정신병동에서 삶을 마감한 파이어스톤은 제게는 지동설 주장하다 화형된 브루노 같아요. 저는 그 사유에 빚지고 있고, 그녀가 맑시즘에 열렬했다는 걸 알아요. 그건 보부아르와도 다르고. 아렌트와도 다르죠. 불돌의 저서는 한 권. 이 책은 페미니즘 운동의 고전이 되었고요. 많은 여성이 아들과 딸은 다르다는 통찰을 얻었어요. 그전까진 내가 아들인 줄 알았던 거죠. 저도 비슷해요. 저도 혼기 꽉찰 때까진 제가 아들인 줄 알았음^^! 저의 극단적 남성혐오(ㅋㅋㅋ) 이번남에 대한 분노는 아들이 되지 못한 분노 맞습니다! 다만 이건 알아요. 아들에게 권력을 준 세상이 제게는 역했다는 것. 그런 엔번방, 일베 방식의 혐오를 냅둘 수는 없다는 것. 저는 끝까지 생각해보고 싶어요. 답은 없다는 걸 이젠 압니다.

언니들 이야기를 읽고, 듣고 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땡 제가 틀렸어요. 개인-개인 사랑에 대상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관계에서 서로 이해, 존중, 배려, 인정을 줄 수 있어야해요. (이건 우리 상담샘 출처입니다.) 여성의 주되는 미덕은 오랜기간 돌봄이었기에 그걸 습득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같이 살 남성에게 같은 높이의 이해, 존중, 배려, 인정을 기대했던 건 제가 기대가 컸기 때문이죠. 그(대상)가 줄 생각이 없는 데 내가 달라고 해도 그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안되는 사람도 있구나…ㅋㅋㅋ (거기엔 어떤 가부장 권력의 심급이 존재하나 이건 패스!) 그럼 헤어지면 되는 거더라고요. 내 기대가 잘못된거라 나를 자책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생식(내 새끼)에 매여있음 ㅠㅠ 나라도 참고 살았습니다.

이 글에서 제가 가장 스스로에게 똑똑이라고 느낀 부분은 여깁니다 ㅋㅋ “나를 잊고, 나를 변화시키면서 살아가는 삶이. 나를 갱신하지 않기 위해 타인들을 멋대로 억압하는 삶 보다 훨씬 근사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과거에 저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비난하는 짓을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냥 그 그릇이었건 거죠 내가. 나는 사랑했고. 제 때 헤어지지 못했을 뿐. 이제는 내가 달라지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all about love읽고 아마 올 초에 쓴 독후감이 있습니다. 지금 제 사랑은 읽고 쓰고 그걸로 이야기 나누는 행위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긴 해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인가요. 더는 당신을 이해하거나 인정해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들지 마세요. 나를 포함해 당신을 근사하게 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우리는 모두 깊이 상처 입었다. 우리는 부활이 아닌 갱생를 원한다.” 도나 해러웨이

공쟝쟝 2023-11-15 10:25   좋아요 4 | URL
나에게도 벼락같은 사랑이 찾아오기를! ㅋㅋㅋ 🙊🥰😁

수이 2023-11-15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도빨 어마무시한 그 분에게 제가 이미 부탁을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1-15 11:40   좋아요 1 | URL
그분 기도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격해서 두렵다…🤣

난티나무 2023-11-16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

공쟝쟝 2023-11-16 09:31   좋아요 0 | URL
먼저 읽으신 선생님 하뚜하뚜
 
매몰비용의 오류
글 쓰는 딸들 - 뒤라스, 보부아르, 콜레트와 그들의 어머니
소피 카르캥 지음, 임미경 옮김 / 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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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와 엄마의 관계가 궁금해서 읽었는데, 기억에 진하게 남은 것은 뒤라스 편이다. 소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으면서 느꼈던 ‘압도적인 엄마’가 실제 뒤라스 삶에서의 어떤 모습였는지 형체를 갖게 되니 마르그리트의 글쓰기가 아프게 느껴졌다. “(14) 글쓰기는 유일하게 어머니보다 힘이 센 것이었어요.”


편애하는 엄마, 아빠를 열렬히 사랑하는 엄마, 사랑받고 싶어하는 엄마.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 (이 책의 소피 카르캥에 따르면) 그런 엄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뒤라스에게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들을 낳고 난 후부터라고 한다. 나는 평생 엄마가 당하기만 하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엄마를 대신해서 말 하다 종종 얻어맞거나 유교적 풍이 강한 가족 내부의 공공의 적이 되곤 했는데, 페미니즘을 읽으면서는 엄마야말로 권력에 대한 열망이 엄청난 사람이었구나 한다. 아주 어릴 때 부터 내게 엄마는 피해자의 얼굴을 한 폭군 같았다. 어쩌면 나도 그런 엄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기를 썼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제 막 겨우 엄마를 미워하면서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엄마는 몸이 너무 아팠다. 미워하지도 못하게 아픈 엄마가 너무 밉다고 일기를 쓰면서, 돌이켜보면 엄마는 항상 그랬다고 나, 일기 썼었나? 


뒤라스는 글쓰기를 가리켜 “(14)글쓰기는 현실 옆에 놓인, 실선과 나란히 가는 점선 같은 삶”이라고 했다. 점선 같은 삶(일기쓰기)이 생겨나고, 엄마에게 하지 못한, 엄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나 역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뭐 그런 원망을 쓰면서 난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또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다시는 엄마처럼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 다짐, 또 다짐. 돌이켜보면 나는 관계가 아닌 권력 자체를 더 욕망할 줄 아는 똑똑한 아이였고, 이런 구조로 짜여진 세상에서 내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관계에 몰두했던 것 같기도 해. 이 역시 사후적 해석이고 글을 쓰면서 정의하는 나 자신일 뿐. 쓴다는 것이, 내가 나 스스로를 정의한다는 것이. 어떤 힘을 갖게 된다는 것 역시도. 그것까지도.   


“(94)*글쓰기는 늘 복수에서 비롯돼요.* 글 쓰는 행위 뒤편에는 매번 하나의 재판이 있기 마련이죠. 모두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요. 그래서 묵은 셈을 청산하려는 거예요. 그러고는 물론 책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하죠.” 문학 작품에 대한 탁월한 정의가 아닌가! *‘방향을 튼다’는 말은 독자를, 타인을 고려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불행의 비밀 더미에서 빠져나와 보편적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문체, 형식, 감정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복수에서 시작했으나 점점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는 내 글쓰기 때문에 와 닿았고, 음 이 말도. 


“(96) 글쓰기는 대개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요구하기 마련이니까. 뒤라스가 털어놓았듯이 “글을 쓰면 사람들과 멀어진다.” 


결국 끄덕... 끄덕해버리게 되는 것을 보면. 푸하하. 나는. 또 이렇게 나를 뒤라스의 반열에 올려놓고 마는 것인가라고 쓰다가 다른 자아가 올라온다. 아, 이 짓도 이젠 못하겠다. 드디어.... 내 독후감이 타인을 고려하기 시작하는 건가 봉가...🥲🥲🤦‍♀️🤦‍♀️🤷‍♀️🤷‍♀️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읽기 시작했... . 


글을 쓴다는 자의식이 생기면 확실히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내 경우 정확히 말하면 주변을 구성하던 사람들이 별로 필요가 없어진다. 고 보는 게 더 맞는 말. 그리고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시청역 광장에서 돌담길로 진입하는 길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는 떠나온 사람이 향수병을 앓으면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결국 본질이 변해버렸음을 깨닫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뿌리내려 살고 싶다는 욕망을 항상 가지고 있기도 해요. 그게 나의 미련한 지점인 것 같아요. 알면서도 자꾸 정착하고 싶은. 


언니는 사람들은 오고 가며 관계는 흔적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게 자유이며 뿌리내리지 않는 것이 세상이 넓다는 것이 그게 좋다고 했다. 

하지만 가능성, 역시 그게 좋지 않니? 


음. 가능성과 불안. 그 사이에서. 나는 그런 걸 써온 것 같기도 하다고.  


“(134) 그건 이 작가가 자신의 특이한 유년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 보편적인 유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 강간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타인의 위협, 가난의 지긋지긋함, 폭군 오빠의 몸서리나는 횡포, 불의가 행사하는 폭력...... (중략) 그러나 뒤라스의 작품들에서 무엇보다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추방과 유배라는 주제이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이별을 경험하기 마련이고 그러면서 내면에 버림받는 데 대한 강렬한 두려움을 품게 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유배 감정, 떠나간 것에 대한 향수, 인도차이나에 대한 그리움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가이다. 또 고향, 자신이 몸담았던 대지와의 이별을 뒤라스보다 더 강렬하게 그려낸 작가가 누가 있을까.* 뒤라스에게 그 이별은 말하자면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 ......(중략) 떠남은 본원적, 보편적 의미를 띤다. 이 보편적 분리 앞에서 인간은 영원히 고통스럽다. 아이가 겪는 어머니와의 분리도 여기에 포함된다.”

뒤라스가 자신의 글에 흘려 넣은 떠나고 싶고 떠나지 못하는 양가적인 마음에 대해서. 그 압도적임과 차마 어찌할 수밖에 없는 지긋지긋한 사랑과 몰이해와 이별에 대해서. 나는 단 한편의 소설을 읽었을 뿐이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글 쓰는 딸들> 이 책에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뒤라스, 보부아르, 콜레트의 엄마들과 그녀들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꼭 껴안고 싶었던 근사한 장면은 바로 아래 문장이다.❤️🙈 


“(17) 마르그리트는 시몬을 만나고, 시몬은 콜레트의 작품을 읽는다. 콜레트는 침대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뒤라스의 목소리를 듣고, 보부아르에게 헌정 받은 <제2의 성>을 훑어본다. 이런 연결을 통해 나는 여성의 연대를 환기하고 싶다.”


여성이 어머니에 대해서 품는 감정에 대한 글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혹은 남성이 남성 자기 자신에 관해서 쓴 5천 년 치에 글에 비하면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콜레트는 시도가 없었다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며 시몬이 콜레트를 읽듯 아니 에르노는 시몬과 뒤라스를 읽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여자들의 글을 읽는다. 아들 작가들이 쓰는 병약하게 죽어가는 소녀, 혹은 영원히 불쌍한 어머니, 아니면 나의 구원을 기다리는 창녀들 말고. (물론 그렇지 않은 글들도 많지만ㅋㅋㅋㅋ 이런 글들이 대부분 아닝교. 남자 작가들이여, 그래도 잘 쓰면 읽는다. 잘쓰도록 하여라!) 딸들이 쓴 압도적인 엄마. 아들만 사랑하는 엄마. 사마귀 같은 엄마. 기생충 같은 엄마. 나를 조종하는 엄마. 내가 보호해야 하는 엄마 그런 엄마를 내 엄마니까 사랑하지만 결국 그런 엄마가 *될까 봐* 글을 써야만 하는 그녀들의 글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

“(273) 시몬은 자신이 어머니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는 회한 때문에 운다. 벌써 어머니가 그리워서 운다. 어머니는 신념의 화신이었지만, 돌이켜보면 한 시대의 희생자이기에 운다. 자신이 글을 통해 어머니에게 고통을 가했다는걸. 시몬이 출간한 책들로 인해 어머니가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는 걸 알기에 운다. 성인이 되면 어느 순간 부모 곁을 떠나기 마련이고, 그런 다음에는 부모가 자식 곁을 떠나는 게 자연의 이치라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시몬은 어머니를 버렸기 때문에 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드디어 나는 엄마가 되지 않기로 한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어머니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딸을 때리고, 딸이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을 떠나 돌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뒤라스에게 모성은 늘 어떤 배반이다.
❤️뒤라스의 엄마 - P129

그런 식의 경직된 교육, 도덕을 내세워 육체의 약동에 철저히 재갈을 물리는 교육을 받게 되면, 몸의 감각은 미처 꽃피기도 전에 말살당한다. 시몬은 아주 명석한 아이지만, 자기 안의 세계를 해독하는 솜씨는 형편없다.
❤️보부아르의 엄마 - P221

이 글 속에서 미시가 읽어낸 건 콜레트가 글쓰기를 시작한 아이 때부터 30년 넘게 써온 것은 바로 콜레트 자신의 독립선언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말은 그가 여전히 어머니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콜레트의 엄마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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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4-29 2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공쟝쟝 2023-04-30 10:54   좋아요 1 | URL
배시시-------! 오래 고민했다고 합니다.

물감 2023-04-29 23: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침 읽은 <루시>와 쟝쟝님이 넘나 겹쳐서 소름..........

저도 별다섯개만 주는 인간들한테 빡쳐서 비평을 쓰기 시작했으니,
글쓰기는 복수에서 비롯되는 게 맞나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30 10:55   좋아요 1 | URL
킨케이드의 루시입니까? ㅋㅋㅋㅋ
저는 물감님의 올곧은(?) 심지있는(?) 별두개 비평에 감명 받아 친구 신청했어요!
(내용에 동의는 안하더라도 자세는 인정함)

2023-04-30 0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30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먼지 2023-04-30 1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쟝님 이 페이퍼 진짜 너무 좋아요.. 이 소름 돋게 똑똑한 성장캐 같으니!!! 두 번 세 번 읽으려고요ㅠㅠ

공쟝쟝 2023-04-30 12:47   좋아요 3 | URL
그녀들이 쓴 엄마들이 또 모두 내 엄마… 모녀 사이의 지독한 감정의 골은 모자 사이의 그것 보다 더 많이 읽히고 쓰여질 필요가 있죠.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해야 한다.’라는 희진 샘의 문장이 갑자기 생각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