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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환멸은 출발점이다. 실망과 패배는 다르다.
백래시 -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Philos Feminism 1
수전 팔루디 지음, 황성원 옮김, 손희정 해제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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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영화 “비밀은 없다”는 인상적이었다. 아주 여러 부분에서 ‘존띵작’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특히 영화가 소녀들을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어 왔으므로, 아주 잘안다. 소녀들의 세계는 우리의 많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 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며,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 못됐고, 잔혹하고, 거칠고, 영악하고, 또 복수심에 들끓지. 그게 반항처럼 보이기도 하고. 음.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페미니즘 적인 대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스포가 될 것 같아 여기다 적지는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면 나의 소녀시절은 ‘백래시’의 시절이었다. 그것이 가부장제라는 어떤 구체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가족- 정확히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반항과 저항/ 그리고 거기에 딸려오는 폭력(반격)/ 그러게 왜 ‘맞을 짓’을 하냐는 (그러나 지켜주고 싶었던) ‘엄마(동생들)’의 만류. 혼자 싸우는 느낌. 무력감. 정말 내가 유별나서 그런건가. 자책.

그렇다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독기를 참지는 않았다. 때문에 두어달에 한 번쯤은 매번 파국이었고, 끝끝내 몸에 든 멍을 감추고 탈출하듯 대학으로 피신했으며,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 아버지의 세계로 상징되는 ‘세상’과도 싸우느라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세상과 싸우다 보니 아빠를 향했던 독기가 분산되고, 아빠도 늙었는지 많이 너그러워져서 요즘의 집은 평화 아닌 평화..)

몇 달도 전에 본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참 책을 열심히 읽다가 잠든 날 아마도 ‘비밀은 없다’의 영상을 덧입힌 것 같은 장면들이 꿈속에서 리플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악몽이었다. 비닐 속에 결박 당해 죽어있던 소녀의 얼굴로 나타난 그 이미지는 아마도 노화를 막고 결혼을 하기위해 가슴 확대수술을 하고, 지방을 긁어내던 <백래시>속 증언자, 다이애나에 대한 내 날 것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

페미니즘이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가던 1970년대가가고 찾아온 미국의 1980년대는 백래시=반격의 시대였다. 
동시에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불황의 시대였다.

미국의 신뢰할만한 “‘양켈로비치 모니터’의 조사 요원들은 20년간 대상자들에게 남성성에 대해 정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20년간 압도적으로 우세한 정의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이는 지도자나 운동선수, 바람둥이, 의사 결정자가 되는 것도, 심지어는 단순히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을 잘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른다면 “1980년대의 경제적 상황에서 반격이 분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남성의 실질임금이 급격히 들었고 전통적인 남성부양자는 멸종위기에 처했다.(133)” 그러므로 “이 시대의 경제적 희생자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훔쳐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절도범이 여성이라고 의심한다. ...미국 인구조사국에서 공식적으로 가장을 남편으로 정의하지 않게 된 해가 1980년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남성들 중 일부가 보기에 분명 자신들을 일자리에서 밀어낸 것은 여성인 것 같았다.(136)”

현실에서 실직한 남성들의 생계까지 떠안으며 과로와 저임금 노동으로 더욱더 많은 경제적 희생을 감당해낸 것은 여성들이었지만. but 미국 남성들은 부양하던 것들에게 부양 당해서 이중적으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고 한다. (남자가 소심하기는..ㅉㅉ) 반페미니즘 테제의 창시자들은 경제적 불황으로 생겨나는 분노의 타겟을 페미니즘으로 돌렸고, 저소득층 남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여성들에게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팔루디는 말한다. 오늘 날(80년대) 진행 중인 반격의 본질이란 “(사회가 여성이라는 대상에 공포를 한 번 투사하고 나면)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문화적 상상 속에서 여성을 관리 가능한 크기로 축소시키고 편안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규범에 여성들이 순응하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이런 공포를 차단하려는 시도”라고. 80년대의 미디어는 끊임없이 “침묵당하는, 어린애 취급당하는, 꼼짝 달싹 못하는, 혹은 생명의 기운이 없는, 말없는, 조신하고 내성적인 아이-여성을 떠받들었다(140-1)” 동시에 살아있는, 말하는, 적극적인, 싸우는 여성들을 악마화하기도 했다. 이 두꺼운 책은 미국사회가 얼마나 다양하고 구차한 방식들로 그 시도들을 이어갔는 지에 대한 각주 모음이라 할 수 있다.

*

돌아와서. 난 왜 하필 고분고분하지(ㅋㅋ) 않아서 얻어 맞았을까. 딱히 탈선을 하지 않았고, 공부도 그럭저럭 했고, 가끔 내 주장을 하고 눈을 내리 깔지 않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책과 연관되어서 조금 재밌게 생각되는 건, 그 시기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는 거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와 그 무렵 엄마가 앓게된 병 소식은 아버지에게 가장으로서의 심각한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나의 갈등은 내가 그의 노동에 기대지 않으면서 급속도로 해결되기도 했다.)

훗날의 나는 (자본주의를 공부하며) 그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지만, 또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 분노의 타겟이 하필 ‘말하는 딸’인 ‘나’여야 하는 이유를 한번 더 이해하며 (페미니즘-그 폭력에 엄연히도 ‘가부장제’가 끼어있다는 사실) 몸서리 칠 뿐이다.

*

백래시(반격)는 모든 층위의 ‘여성혐오’를 뜻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진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반격이다. “반격이 가지는 대응이라는 본질, 다른 힘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존재하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 적당한 언어를 붙인다는 것은 때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팔루디가 1980년대의 반페미니즘현상을 분석하며 ‘백래시’라고 이름 붙인 것은 - 여성들이 힘있게 싸워왔음을 잊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 부분을 읽으며 더욱더 그 생각에 확신이 갔다. 싸우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 밖에 없는 ‘막막한 피로감, 무력감’이 ‘파괴적 자기분열’이나 ‘자기부정으로서의 투항’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싸움의 의미와 성과를 짚는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다.

*

반격이 반격이므로 - 80년대 반페미니즘에 추가된 전술이 하나 더 있었다. 이른바 “다 안다는 듯한 냉소와 거리두기”: “대중문화에 냉소를 퍼뜨리는 치들은 하품을 참아가며 페미니즘은 “대단히 1970년대적”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우린 ‘포스트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다. 그건 여성이 평등한 정의에 도달했고 그걸 넘어섰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관심있는 척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미국 여성의 권리에 가장 파괴적인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것은 이런 심드렁함이다.(143)”
음음. 이분은 밑줄을 슥 그어두자. 그렇다. 그렇다!!!

*

개인적으로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12장 ‘심리-그건 모두 당신의 마음속에 있어요’챕터였다. ..넘나 할말이 많은 데, 더 길게 적고 싶지 않아서..줄이려 하는데........ 그래도 한마디 적자면 진심 오늘날의 심리학자나 상담가들에게 페미니즘 꼭,꼭 투약해야한다. 애초에 ‘사회’를 다루지 않는 ‘심리학’이나 심리치료라는게 가능한 건지도 의문.

*

시간이 난다면 100개는 좀 모자라게 붙인 듯한 ㅋㅋ 플래그를 다 뜯어내면서 발암구절들을 정리하고,
먹지 말고 입지 말고 쓰지 말아야할 반페미니즘 브랜드(도미노 피자, 게스 청바지... 또....무슨 향수 음.. 기억이...ㅠㅠ)들도 체크해두고 싶었지만. 아마 시간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고, 12월에 같이 읽기로 한 벽돌책 페미사이드가 배송 완료되었으므로 영영 못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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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2-04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좋은 책 읽고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비록 몇 장 안읽김 했지만 어젯밤부터 페미사이드 시작했습니다. 자, 갑시다!
 


#백래시의 첫인상

11월에 뽀갤(?) 벽돌책. 각주 포함 800페이지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무려 양장본 임에도 이책 되게 가볍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국 책은 돌가루를 섞어서 종이에 손 베고 살인무기로 쓸 수 있다고 비판한 기억이 있는 데, 프로그램 이후로 어쩐지 요즘 나오는 책들은 점점 가벼워지는 모양새다. 덕분에 내 손가락은 안전할 예정. 그래도 부피가 있으므로, 들고 다니다가 발등을 찍을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집 식탁위에서만 읽기로 한다. 요즘 식탁을 책들에게 내주고 정작 식사는 동생한테 얻은 티테이블(밥상)에서 하고 있다 ㅋㅋㅋ

“ (p.10)팔루디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진행되는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반동에 ‘백래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분석의 대상으로 객관화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둘러싼 오해와 거짓말을 분쇄할 수 있는 관점과 언어를 제공했다. “사회 진보와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뜻하는 ‘백래시’야 말로 페미니즘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표현이었던 셈이다.“

모든 혁명에는 반혁명이 따른다. 모든 항쟁 뒤에는 거센 탄압이 따라온다. 가까운 우리 현대사에서 “광우병 반대 촛불”이 “촛불좀비”로 “518 항쟁”이 “광주폭동”으로 프레임 씌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항쟁은 변화에 대한 열망이므로, 기득권을 잃게 되는 이들은 이를 저지시켜야 한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는 이들의 간절함보다 잃지 않기 위한 자들의 발악이 더 거센 법이다. 때문에 역사는 종종 역진한다.

그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 반페미니즘적 공격이 “여성의 불행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면서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p.10)”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운동과 항쟁은 이기는 것이 변수고 지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안다.
때때로 ‘정신 승리’라고 손가락질 받더라도,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때는 힘과 실력이 부족했다’고 이야기는 할지언정 ‘싸움 자체를 자책(부정)’하는 현상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따라오는 반동은 후자의 정서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이는 때리는 남편을 증오하기보다는 ‘자책’을 더 많이하는 가부장제하의 여성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묘하게 겹치는 것 같다. 그게 가슴 아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말로 믿게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싸움이 필요하고, 또 그 역사가 축적되어야 하는 것일까.

“(p.15)하지만 여성 노동자의 고통과 과로는 페미니즘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기획의 산물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하다. 팔루디의 말처럼, 여성들의 비참과 불행은 페미니즘 탓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충분하지 않은 탓일 뿐이다.”

2006년 백래시 15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팔루디는 우익(공화당)계열의 네오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즘 탈취보다 “시장이 페미니즘으로 구사한 유인 상술(p.27)”을 더 걱정한다.

음. 나 역시 그렇다. 엄마부대(그러고 보니 요즘 안보이네요. 주옥순 대표님)는 안무서운데, 확실히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류의 언설이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어정쩡하게 불안한 것이다.

“(p.27)경제적 독립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구매력이라는 황금사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구매력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카드빚과, 터져 나갈 것 같은 옷장,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는 허기를 안겨줄 뿐이다. 허기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건 물질적인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결정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자기 계발’이라는 황금 사과로 변신했다. 이 자기 계발은 주로 외모와 자부심, 그리고 젊음을 되찾으려는 헛수고에 바쳐진다. 그리고 공적 주체라는 페미니즘의 윤리는 언론의 관심이라는 황금 사과로 탈바꿈 했다.”

얼마 전 페미계의 머모님 정희진 왈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 같은 것은 없다”고 하셔서 대절망(?)했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많은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닦아놓은 길을 되짚는 것이 새로운 길을 찾아헤메는 불안감을 조금은 덜어주지 않을까 하며 읽어갈 생각이다.

멋진 해제글을 써주신 손희정님 말대로 “페미니즘에 모두를 거는 열정보다는 나가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기술(p.17)”을 되새기며...첫날이므로 서문까지만. (응?)
책도 나가 떨어지지 않고 읽어보겠습니다. 내일/월요일은 좀 바쁘고 화요일엔 1장 읽어야지. (라고 쓰면 읽겠지?)

“환멸은 출발점이다. 실망과 패배는 다르다(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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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소녀시절 그리고 [백래시]
    from 게으른 독서생활자의 수기 2018-12-06 17:38 
    확실히 영화 “비밀은 없다”는 인상적이었다. 아주 여러 부분에서 ‘존띵작’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특히 영화가 소녀들을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어 왔으므로, 아주 잘안다. 소녀들의 세계는 우리의 많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 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며,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 못됐고, 잔혹하고, 거칠고, 영악하고, 또 복수심에 들끓지. 그게 반항처럼 보이기도 하고. 음.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페미니즘 적인 대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다락방 2018-11-0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작이 좋습니다! 저도 오늘 내에 가능하면 작성할 예정이에요. 자, 쭉쭉 나아갑시다!!

공쟝쟝 2018-11-04 12:13   좋아요 0 | URL
락방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영차영차~
 



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다녀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벨훅스의 사랑은사치일까를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다. 

내 분열의 어딘가를 매만지는 글씨들 속에서 위로받고 있는 데, 옆자리의 시선이 느껴진다. 티비를 보다가, 창밖을 보다가, 가방을 뒤적이다가, 사실은 읽는 나에게 무언가 말걸고 싶어하는 눈치의 스마트 폰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 

나는 엄마가 생각나서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페미니즘을 읽는 것의 다른 말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주 눈물이 난다. 다섯시간의 버스. 다섯시간의 고독. 종종 서울을 올라오던 우리 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_

평범한 노동계급이었던 벨훅스의 엄마는 독서를 장려하다가도 책에서 그녀를 떼어놓고 싶어했다. “책들이 그녀를 망치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하며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한 여성적 덕목을 파괴”할 수도 있다며.

사실 맞는 말 이다. 
언제부턴가 나와 우리 자매들은 처지에 비해 ‘너무 과계몽 된거 같아 힘들다’며 스스로의 앎을 비아냥 거리곤 하니까. 슬프게도.
_

똑똑한 여자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걸까. 확실히 독서는 나를 “인간”이게 하고 동시에 주변의 인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유롭게 하고 그래서 불안하게 한다. 숨쉬게 하고 아프게 한다.

곁의 속도가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을 때, 괴로웠지만 분리와 고독을 자처해서라도 스스로의 속도를 선택했었다. 
관계를 조율할 수 없을 때, 어쩌면 그 관계를 (떠나 보낼 수 없이) 너무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일종의 자아분열을 겪으며 너무 진지하게 너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사실 요즘이 그러하다.

“반항할 힘은 있었으나 자유로울 힘은 없었던” 젊은 날의 벨훅스. 이 불안을 이기고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선 더 힘이 커져야 하는 것이겠지. 
_

여자는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똑똑하면 미친다는 

저주는 오래부터 있었다. 여전히 그 저주는 힘이 세다.
무시하기 어렵다.

나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똑똑해지고 싶다.
다행이 아직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더 똑똑/사랑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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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15 1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똑똑한 여자는 생각이 많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생각들이 부딪히게 되면 내적 갈등에 겪게 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내적 상황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똑똑한 여자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공쟝쟝 2018-04-16 08:41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읽을 수록 남친이랑 멀어지고 있어요 힘드네요 ㅠㅠ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무타 카즈에 지음, 박선영 외 옮김 / 나름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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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알못의페미니즘책추천 

3번째 책은 역대급으로 쉬운책이다
.......... 음..... 난이도 별반개(☆). 

요즈음의 미투에서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실수하지 말아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은 남자들(부장급의 중년 뿐만 아니라도 남자라면 누구라도)이 읽고 공부하기 좋다.

'여자들은 도대체 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지 않는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부터, '이런것도 성희롱이라고??' 풍부한 예시(남자 입장-여자입장 비교), 심지어 성희롱 가해자로 연루되었을 때 대처법과 (소송까지 안당하려면 이렇게 해라) 좋은 변호사를 고르는 법까지.. 이쯤되면 거의 가해자 입장(!)에서 썼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친절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떠먹여줘야 하나 싶을 정도지만, 그래 모른다는 데(!) 정말로 잘 모른다는 데.. 알려줘야지. (한숨) 가해자가 끝까지 몰라서 제2,3의 피해자가 생기면 안되니까. 지인 중에 미투지목 당하면 어쩌나 걱정되는 사람이 있다면, 사서 손에 쥐어주면 좋겠다. (난 남친에게 주기 위해 읽었다. 응???..)

"(p. 58) 관리자나 교사는 직장 환경, 학습환경을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감정을 ‘이상하다’,‘지나친 생각’이라며 전적으로 부정해버리면 그야말로 성희롱이 되고 맙니다."
"(p. 270)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당사자도 관계자도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겐 어떤 문제도 없었다, 나는 ‘누명‘을 쓴 피해자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은 당사자. 당사자 이상으로 사태를 낙관하는 관계자, 멀직이 떨어져 제삼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립‘이고 바른태도라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 실제로 그들은 악의나 이해심과 상관없이 성희롱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자는 후기에 본인이 성희롱 2차 피해자 였던 체험을 적고 있다.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으로 일을 중도 하차하게 되면서 본인이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역시 피해 당사자가 아닌 상황을 수습해야하는 중간자의 입장에서 속시원하지 못하게 대처했던 경험이 있다. 무지해서 부족했고, 부족해서 무지했었다. 당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몇년이 흐른 후, 페미니즘에 자꾸 눈이 갔던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그리고 미투를 통해 알게되었다.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p. 73-75) 둘만 있을 때는 “좋아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뒤에서 껴안는 상사. 그런데 이 여성은 애처가인데다 아이들도 잘 돌보고 일도 자라는 그 상사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의 고민이란 “그가 고백을 하거나 몸을 만져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고, 마치 남의 일처럼 사태를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 성희롱이라고 느껴 혐오감이 일었다면, 이를 거절할 강하나 의지가 생겼을 텐데…. 자신의 ‘경박함’이 이 여성의 고민입니다.
이 상담에서 우에노씨는 “그것은 성희롱”이라고 딱 잘라 답변했습니다. “이 여성은 의지할 상사를 잃을까 두려워 싫은 일을 싫다고 느끼지 않도록 감각을 차단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뿌리깊은 문제”라고.
(...) 이렇게 “나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여성이 특별히 자존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흔한 일입니다. 여성은 정말 ‘성희롱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겁니다. (...) 아마도 이 사례엔 복잡 미묘한 심리가 작동할 겁니다. 이 여성은 스스로 걱정하고 있듯 “무의식중에 상사에게 존경 이상의 마음을 가져 자신의 매력을 알아줬다는 사실에 기쁜”마음이 있는 겁니다. (...) 따라서 이 경우는 객관적으로 보면 성희롱, 하지만 당사자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는 회색지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달라질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상사의 행동이 점점 강도가 세져서 “모르겠다”로 그치지 않게 될지도 모르고, 상사에게 환멸을 느낄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성에게도 똑같이 행동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흔한 계기입니다). 그 때 여성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내게 해온 것은 성희롱이었다”고 느끼게 되겠죠."

"(p. 147) 존경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힘은 대놓고 보수와 징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말을 듣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를 만드니까요.
남성 쪽은 자신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성 신입사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는 여학생 입장에서는 그 남성이 뛰어난 수완가나 우수한 학자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 남성은 촌스러운 아저씨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샐러리맨 혹은 교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사장님이나 거래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가정에서는 그다지 존재감도 없습니다. 그런 자신이 상대방이 싫은 일이라도 무조건 따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에겐 그런 힘이 있다’고 평소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인의 자격이 없는 자아도취형 인간입니다). 더군다나 젊고 예쁜 여성이 자신에게 그렇게 생각해준다고는 미처 상상도 못합니다. 여기에서 합의를 둘러싼 착오가 생깁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존경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 존경의 시선을 ‘자신의 매력‘으로 셀프 착각해, 그 여성을 성적으로 취할 허락을 얻은 듯이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힘이란, 가지고 있는 쪽에서는 그것을 잘 모른다. 또한 상대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종종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선배고, 상사며, 금전을 더 가진 권력자다. 지위나 나이차를 이용한 은근한 내리누름. 혹은 그것에 따라 오는 선망의 시선. 공기처럼 포진 되어있는 위계에 ‘성‘이 개입되면 언제고, 문제는 생길 수 있다. 위계에 따른 갑질문화, 만인이 만인을 서열로 나누는 문화가 팽배해져버린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당신은 언제고 생각해야한다. 당신이 공기같이 누리고 있는 ‘힘‘을 어떤 존재를 침해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는 지.

물론, “전혀 객관성도 없이 단지 상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해서 성희롱이 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p.58)”다. 그러나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 해도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의 당연한 매너(p.58)”다.

이제 껏 눈치는 약자가 강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눈치는 강자가 약자에게 피치못하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먼저 조심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눈치 좀. 제발 눈치 좀.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진지하단' 소리좀 그만했으면...
너의 진지함이 여성이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자. 전국의 모든 부장들이여 적읍시다. 여성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p. 105)
이렇게 착각에서 연애 모드로 폭주하는 남성들이 하나 같이 하는 소리란 "나는 진지하다"입니다. .... 여성들을 침대에 밀쳐 넘어뜨릴 대도 "나는 진심이다", "장난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 진심이든 아니든 여성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 그런 쉬운 것을 왜 모르는지 여성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그러니 남성은 "나는 진심이다"라며 섹스만이 목적이 아니다, 너를 가볍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자신의 성실함을 어필합니다. 남성은 그걸로 상대 여성이 안심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성의 ‘진지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실제로는 속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 남성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 여성은 전혀 기쁠 리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 말할 것도 없이 남성이 진지하다고 그것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진심이다"라는 대사가 성희롱의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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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결혼이 위험 부담인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우에노 지즈코.미나시타 기류 지음, 조승미 옮김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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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띵문이 많았지만 사진 속 구절과 아래 구절이 와닿았다.

˝연애로 결혼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고른 남자와 그만한 커뮤니케이션도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아이와 마주할 수 있겠어요˝ (p.135)
“특별히 소통할 능력이 없어도 부부가 되고, 부부가 되어 부모가되는 결혼이 지금도 계속 되니까요.”(p.136)
˝부부관계는 성인 남녀의 관계니까 그 관계에서 어떤 결과가 돌아오든 자기 책임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아이는 안 됩니다. 자식과 관계를 잘 못하는 어른들이 나오면, 아이에게 영향을 미쳐요. 아이와의 관계는 귀찮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p.148)
˝소통을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게 되었다는 것은 소통 없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줄어든 다는 얘기죠. 이는 다음 세대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이에요. 소통을 안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되지 않는 게 나으니까˝ (p.154)


대체적으로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 중에서 소통을 어려워/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렇게 비혼을 많이 선택하면 국가적으로 손실 아니겠냐는 질문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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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부부가 될자격 부모가 될 자격은 “돈”이나 “자산” 보유량이 1차적 관문이다. 그래서 사랑할 줄 모르고 민주적이지도 않은 이들이 1차적 기준만 패스하면(패스 못해도 사랑한다는 근거로), 자연스럽게 부부와 부모가 되려한다.

쇼윈도우 부부, 남편을 설득하기는 포기하고 소통을 자식에게만 하려는 엄마, 사랑의 매를 때리며 인권을 삭제해 버린 부모-자식관계. 그런 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또 가족을 이룬다. 그런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그런 가족들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가히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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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소통능력이 있는가?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
아직 없다. 나의 배우자로 상정했던 그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소통능력, 있는 그대로 듣는 능력,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정확하게 요구하는 능력. 그것 부터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그때까지는 결혼할 생각도 부모가 될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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