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수다를 떨지 않을 수 없는 주제. 세상에, 나에게 이 절판된 책을 

글쎄나 제본까지 떠서 읽어보라 권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기에 
글로 남겨 놔야지. 

그런데 서문부터 너무 찰싹 피부에 붙어와서 으음 할말넘많.. 
그래서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게 될 나를 알지만, 읽어야지.
읽고 느끼고 또 다시 읽는 수 밖에 없다.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을 배우는 시기를 지나, 정말로 일을 하면서 부터는 일 빼고 별다른 생각이 안생길 정도로 일이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떻게든 내 선에서 마무리가 되어야하는 프로젝트들. 더 책임감을 키우고, 비판에는 귀를 열어야 한다. 전에 비하면 많이 관대해진 편이지만 어쨌든 스스로를 볶아대는 스타일이라 이래저래 압박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열심히 성장하고 능숙해지면 수월해질 줄 알았는 데. 몹쓸. 나는 잊을뻔 했다. 나를 갈아(!) 고작 ‘생존’해야 하는 이곳은 자본주의라는 것을.

“(180)우리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곤 했지요. ‘남들이 너를 이용해 먹지 않도록 해라. 너의 권리를 힘주어 말하되 일은 제대로 해주어라. 그네들이 너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올바르게 대하도록 요구하거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을 그만두면 된단다’.”


내가 처리하는 업무의 난이도가 높아갈 수록 위에서 요구하는 것들도 커졌다. 일에 대한 통제는 동시에 사람에 대한 통제이기도 해서, 업무처리에 대한 태도를 포함해 이런저런 잡다한 것이 많이 섞여있는 평가의 말들을 끊임없이 듣게 된다. 말만 들을 뿐인가. (혼도 나고 욕도 먹고) 투사가 분명한 감정 표현들도 겪어내야 하고, 실제로 요구되는 어떤 모습은 당장 고쳐야만 하며, (이게 가장 힘든 데) 평소라면 빻아서 상대도 안할 (개)소리들을 허허 웃어넘기기도 한다. 어쨌든 “일은 제대로 해준”다. 언제든지 그만두면 되긴 하지만 그게 사실 어려우니, 권리를 말하지는 못해도 마음 속으로는 곱씹으면서.


*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빌런은 나의 일터에도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빌런들에 비하면 원체 대놓고 타노스급의 절대 빌런이라 나는 내심 다행이다 느꼈더란다. 이분법은 쉽고, 절대악을 굳이 에너지를 들여 이해할 필요도 없으므로. 너는 너. 나는 나. 일은 일. 삶은 삶. 당연히 걸러듣고, 원래처럼 적당히 연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것 역시 순진했다. 아무리 피아가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학대가 오랜시간 지속된다면 거기에 익숙해져 버린다는 걸.

길고 긴 5월 첫주의 연휴를 마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날의 저녁. 일찍 자려 누웠는 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몸이 떨렸다. 내 몸이 왜 이러지? 경미한 공황을 느끼면서 그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더란다. 

지금 나는 뭔가가 불안하다. 그건 대체 뭔가...? 답은 쉽게 나왔다.
“내일 일가기 싫어서.”
오랜만에 쉼을 맛본 내 몸이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튕겨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랑비 젖듯 스며든 나를 의심하게 하던 언어들.
잘못이 아닌 내 잘못들.

항상 피아를 의식하는 삶이라니, 언제나 전투상태인 몸이라니, 그것 역시 나에게는 몹쓸짓이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조금 울었다.
의지할 수 있다면 의지하고 싶고, 의존할 대상이 있으면 한껏 의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그게 얼마나 독이 되는 마음인지 알아서, 안돼 안돼 머리 저으면서.
혼자서 씩씩한 것은 가끔 너무 힘들어.

“(211) 흑인 페미니즘의 사상은 자립의 중요한 측면인 경제적 자립성을 존중의 요구와 연결한다.예를 들어, <존중하라>에서 아레타는 “당신의 키스는 꿀보다 달콤해요. 그렇지만 내 돈도 그렇지요”라고 노래하면서 흑인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고 흑인 여성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한다.”

*

아직은 일터를 당장 박차고 나올 만큼의 능력이 내게는 없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만족할 만한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생각 이상의 노력을 해야겠지만,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류의 방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가까운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괴롭히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통해 얻게된 생각이다. 나는 사회생활의 괴로움을 이유로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가부장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힘들어도 열심히 일을 할 거고, 그래서 결국은 일을 잘하게 될거고, 또 그 와중에 악착같이 책을 읽을 거고, 삶을 해석하기 위한 능력을 키울 거다.

조금 울고 난 그날 밤에 나는 일기장에 두가지 문장을 적었다.
- 학대에 익숙해지지 말자.
- 너는 나를 망칠 수 없다.



“(213) 주인공이 자신에게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더욱 의미심장하게는 자신의 무능을 존중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 그렇다고 그녀가 완전히 환경 제약과 자신의 한계에 구속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오로지 이전에 구획된 경계가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직접 인식하게 됨으로써 그녀는 바로 그 경계를 뛰어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혼동과 우연성의 한가운데에서, 오로지 자신의 지성과 감정을 가지고서만, 유의미한 삶을 건설하는 법을 독자에게 가르쳐준다.”

흑인 페미니즘의 사상의 5장, 특히나 이 구절이 좋아서 나는 몇번이고 읽었다.
삼십살이 훌쩍 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의 무능을 존중하게 된 것 같다.
비록 어떤 경계를 뛰어넘지는 못했고, 유의미한 삶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하나도 모르게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책에서 말하는 “자기존중과 타인존중”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리고 너무나도 정확한 문장을 찾았다.

“(214)[그녀는]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부서지지 않은 인물”

그러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부서지지 않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20-05-29 0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또르르..... 쟝쟝님의 일의 기쁨과 슬픔...

공쟝쟝 2020-05-29 08:12   좋아요 1 | URL
저는 격렬한 표현이 좋으니까, 일의 환희(...그런게?)와 좌절로 하자...

다락방 2020-05-29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은 고통을 거쳐서 비로소 창작이 되고 또 아름다워지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쟝쟝님의 글을 보니 노동의 고통 때문에 글이 더 좋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몹쓸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글 따위, 필요없이 고통이 없는 삶이 가장 좋을텐데요...

쟝쟝님, 오늘은 금요일. 힘냅시다. 화이팅!

공쟝쟝 2020-05-29 08:15   좋아요 0 | URL
요즈음의 괴로움은 괴로움을 느낄새가 없는 류의 고통이라......흑흑.... 오늘은 금요일 흑페상을 다 읽어야 한다!! 화륵🔥

비연 2020-05-29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생활의 비애와 고통은... 흑.

공쟝쟝 2020-05-29 20:51   좋아요 1 | URL
부서지지 말아요 우리, 비연님❤️

수이 2020-05-29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흑페상 페이퍼 중에 제일 심금을 울리는! 저도 좋아서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페이퍼. 공장쟝님 힘.

공쟝쟝 2020-05-29 20:52   좋아요 0 | URL
힘이 아니날리 없는 댓글과 금요일 저녁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주 행복감만땅입니다. 수연님도 힘! (코로나 물럿거라)

감은빛 2020-05-30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터라는 건 일의 객관적인 노동강도와 관계없이 노동자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구나 일요일 저녁에는 우울감과 압박감을 느끼고, 월요병을 견디고, 무기력한 수요일을 버티고, 금요일의 해방감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스스로 원하는 일을 선택해왔고, 비교적 일을 즐기는 편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 잘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그냥 일은 일이고, 아무리 상대적으로 좋은 일터라도 일터니까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더라구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멈출 수 없는 입장에서 늘 압박감과 우울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삶은 현대인의 큰 불행이 아닐까 싶어요.

공쟝쟝 2020-05-31 21:14   좋아요 0 | URL
해방의 금요일이 가고, 슬픈 일요일 저녁입니다. 적당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책읽고 글쓰는 소소한 행복의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길! (ㅜ_ㅜ)
 

냉혹한 지금의 현실 인식
명확한 내 무능력에 대한 인식
그럼에도 세상에 훼절당하지 않고
나만의 내면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중
나의 삶이니까.
온전히 내 것은 그것 밖에 없으므로.
_
오늘도 어제처럼 세상이 뿜어내는 악독한 말들을 들은 귀를 씻으면서, 읊조린다.
너는 나를 망칠 수 없다
너는 나를 망칠 수 없다
너는 나를 절대 망칠 수 없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더욱 의미심장하게는 자신의 무능을 존중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 그렇다고 그녀가 완전히 환경 제약과 자신의 한계에 구속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오로지 이전에 구획된 경계가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직접 인식하게 됨으로써 그녀는 바로 그 경계를 뛰어넘는 법을 알게 된다. - P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은 사치일까? - 여유 없는 일상에서 자꾸만 감정이 생기는 당신에게
벨 훅스 지음, 양지하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수연님의 페이퍼에서 ‘사랑은 사치일까’ 리커버 판을 발견하고,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책장을 뒤졌다. 앗! 찾았다. 가만있어봐, 서른 다섯. 이었던가 스물 일곱 이었던가.

“(231) 내가 남자에 관해 글을 쓰고 여자인 친구들과 이 주제로 토론을 시작했을 때, 짝이 있든 없든 여성들이 종종 물어온 질문은 ‘좋은 남자가 존재하기는 하나요?’였다.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물론이죠’다.”
“(232) 많은 남성이 구식 성차별주의를 고수한다는 점은 우리를 낙담시키지만 예외적으로 여느 페미니스트 여성처럼 진보적인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헌데 이런 남성들은 게이 아니면 양성애자인 경우가 많으며 이성애자라면 나이가 서른다섯 이하인 경우가 많다.”


앍ㅋㅋ 서른 다섯이었구나... 벨훅스 대모님! 기준을 정해주시다!!!
아.. 그르니까, 서른 여섯살 이상인 남자에겐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는 소리인 거죠? ㅋㅋㅋㅋ

“(232) 나는 최근에 질의 응답 시간에 ‘당신이 어린 남자들을 좋아한다는 게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고 상대를 선택할 때 내가 가장 끌리는 남자는 진심으로 페미니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종종 이런 남자들은 나이가 어리다.”

넹? ㅋㅋㅋ
이건...ㅋㅋㅋ ...
확인..사살...이 잖아요, 대모님ㅋㅋㅋㅋㅋㅋ

여하튼 당시 이 책을 일말의(?) 기대를 하면서 읽을 때의 난 연애중이었고, 결혼 생각이 없지는 않았기에 자칫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그가 누구보다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랑은 사치가 아니라고 해줘요. 벨훅스님. 내가 잘하면, 내가 더 그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 가능한거죠?🥺 이러면서 아주우 열심히 12장까지 읽었는 데, 당시 그의 나이 만 서른 여섯이었으니.. “에이 텄네, 텄어.” ㅋㅋㅋㅋㅋ

그 역시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닐테지만 다음 문장에도 뽝, 형광펜 줄이 가 있었던 것을 보면 나는 결국 믿지 못했다.

“(232) 성 문제와 평등에 대한 문제로 싸우며 10년을 넘게 보낸 후 그 관계를 끝내고 나서 나는 내가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남자를 고르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남자의 변화가 내적 확신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대 여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상적인 변화에 그치기 쉽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성은 남자의 부정적 행동이 ‘고쳐졌다’고 생각했다가도 시간이 지나 갈등이나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 행동이 다시 떠오르는 걸 발견한다.”


앗, 그러고 보니 페미니스트 남성도 만나기 어렵지만, 대충 페미니즘을 거들떠라도 보려는 마음을 먹는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서른다섯살 이하였던 것 같아.... ‘남페미가 되기에는 적정한 나이가 있다’라고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겠지만, 어렴풋이 벨훅스가 그 나이를 서른 다섯 이라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35인지 책에서 자세하게 부연하지는 않았다.)

어떤 세계에서 사회화되기 35년. 즉, ‘중년’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 구조의 공모자/가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뜻 인듯. 그래서 “(238)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로 돌아가 스스로를 다시 양육”하는 것 만큼 변화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말한게 아닐까.

서른 다섯.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막연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매우 실감하게 되는 나이. 스스로 구조의 ‘피해자’이기만 하다고 단정짓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다.

정말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안했다 하더라도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35년이 지났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었을 테니까. 남이 버린 쓰레기도 그렇지만, 자기가 남긴 쓰레기를 자기가 치우는 것도 실은 어려운 법이다. (꼭 가부장제라는 쓰레기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치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다면, 어느날 불현듯 회심이 와서 뽝! 하고 쓰레기를 치우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서른 다섯이전이어야 되는 거지 이후에는 앞으로 계속 치운다해도 생산하게 될 쓰레기 딱 그만큼만 치우는 셈이라 그냥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것을 택한다...... 뭐.......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불현듯 나이의 무게를 실감.

누군가가 서른 다섯 이후에도 계속 바뀌어가고 있다면, 그는 서른 다섯이전에 계속 바뀌기 위해 노력해왔던 사람이리라. 그러므로 서른 다섯이 되기전에 내 쓰레기는 내가 치우는 것을 습관화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점심에 먹은 설거지를 하려고 엉덩이를 떼려 하는 일요일 저녁 열시 삼십분.


***


“(227) 무엇보다 페미니즘 운동은 남성들에게 온전한 인간성을 되찾고 자신들의 감정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감정을 표현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가 간과하는 사실은 페미니즘 운동의 진정한 원동력이 여성 개개인의 남성일반에 대한 실망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과 생식권의 문제가 중심에 자리 잡았지만, 여성의 가장 큰 분노는 남녀관계에서 비롯했다. 여성은 남성에게 친구든 연인이든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운동의 초기부터 선견지명을 지닌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남성의 삶도 개선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나이든 강경파 가부장주의자들은 성차별주의를 고수했지만, 많은 남성이 남성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놀랄것 없이, 페미니스트 여성과 연인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들이 첫 개종자였다. 의미 있는 관계를 잃을까봐 두려워한 그들은 자발적이지는 않더라도 기꺼이 과거의 관습을 재고했다. 그렇게 그들은 페미니즘 운동과 성 해방의 옹호자가 되었다. 많은 남성이 가부장제의 남성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거나 최소한 그러는 척 하는 것에 이득(가정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자유분방한 여성들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자유를 옹호했던 내 파트너는 페니미즘에 대한 내 헌신을 지지하고 그 자신도 페미니스트가 되었지만, 새로운 남성성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상을 그리지 못했다.”


“(235) 나는 거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는 남자들이 바뀌기를 원하지만, 막상 그들이 변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요구했던 자유를 받아들이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234) 대부분의 가부장적 남성은 여성과 솔직하게 대화하기를 어려워하며 남성들 사이에서도 대화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들은 들어주는 데 실패하고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통 대화하기보다 연설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한다”

“(239) 우리는 화성에서 온 남자가 아니라 바로 이 지구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남자들이 쓴 책을 읽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20-05-11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공쟝쟝 2020-05-11 22:31   좋아요 0 | URL
분노의 포도알님이 점만찍으니 무섭자냐요! 😭

감은빛 2020-05-21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비록 스스로 페미니스트 남성이라고 자부하긴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긴 하지만, 서른 다섯을 훌쩍 넘긴 저는 가망이 없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주제가 약간 다르지만 <아직은 저항의 나이>라는 시가 생각나네요. 아직 30대였던 시절에 왜 386 선배들이 나이를 먹고 보수화 되어가는지 무척 궁금했거든요.

한편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제가 후배들 보기에 보수화 되어버린 사람으로 보이는지도 궁금해지네요.

공쟝쟝 2020-05-21 20:42   좋아요 0 | URL
하하ㅡ 서운하실 수 있겠지만, 가망없다고 포기는 마세요. 저는 왜 서른 다섯일까가 궁금했거든요. 서른 다섯 이후에는 반성이 습관이 된 사람도 낡아질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반성이란 걸 하게되는 건 점점 어려워질테니 미리 반성하는 습관을 들이자는 뜻으로.. ^.^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의 일이다.
소주는 취하기 위해 마시고, 맥주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마시던 (지금은 둘다 맛있어서 마심) 이십대의 초반이었다. 막 사회 초년생의 길에 진입한 선배가 술자리에 와서 ‘딱 한입짜리(중요하다)’로 쏘맥을 말아서 마시면서 말했다. “빨리먹고, 빨리취하게.” 어린 나는 그 쏘맥이 어쩐지 비윤리적으로 느껴졌다. 왜 빨리먹고 빨리 취해야 한단 말인가. 기왕이면 술자리를 오래오래 즐기고 취할거면 천천히 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행복한 술자리를 왜 빨리 취해 급히 끝맺으려 한단 말인가!!!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 얼토당토 않은 윤리의식은 정말인지 젊었기 때문이다. 소비할 시간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며, 모부님들께서 다달이 용돈을 줬기 때문이며, 쌩쌩 놀수 있는 체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다. “빨리먹고, 빨리취하”고 난 후 “빨리 집에가서/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 빨리 일하러 가야한다” 뭐 그런 의무의 언어들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렇군요. 그 후딱 취해버리는(?) 딱 한입짜리 쏘맥은 압축적 근대화라는 한국의 현대사가 오롯이 담긴(!) 밀도 있는 한잔이었군요. (당시 술자리는 아마 근현대사 동아리 술자리 뒤풀이었던 것으로 기억...) 아아, 선배님. 오랜시간이 흘렀는 데, 당신의 간은 안녕하신지.

정말인지. 그 과학적 까닭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쏘맥은 빨리 취한다. 소주만 먹을 때보다, 맥주만 먹을 때 보다 세배 정도 빨리 취하는 것 같다. 특히 오래 전 그 선배가 말아마시던 쏘맥은 진짜 최고👍 마시는 과정 마저도 한입 탁~ 연거푸 석잔 정도면 뿅~ 여러모로 가성비 좋은 ‘압축 근대화 쏘맥’이렸다.

이후 그 압.근 쏘맥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수년 후 회식자리였다ㅋㅋㅋ 회식자리에서 나는 빨리 취하고 싶다. 어서어서 정신줄을 놓고, 취기에 딸려오는 희노애락을 즐긴다음, 그렇게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흘려보내고, 빠르고 진하게 술자리를 끝내고, 얼른 집에가서 발닦고 잠자고 싶은 것이다. 술마시는 시간도 아까워서 ‘빨리’ 취하기 까지 해야한다니. 이 얼마나 애잔한 월급쟁이의 삶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음. 이 책을 탁 덮는 순간 공교롭게도 난 그 쏘맥이 생각났다. (절대 술이 마시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리고 취하는 시간도 아까워져버린 ‘일에 매인 삶’에 숙연해졌다.

나에게 탈노동- 일에서 벗어남-이란, 아주 천천히 취해도 되는 시간이 아닐까. 천천히 기울이는 술잔과, 꼭꼭 씹어먹는 안주와, 중간중간 끊겨도 어색하지 않은 대화 혹은 너무 열심히 읽을 필요는 없는 책, 스르르 이완되는 몸과, 도란도란 재잘재잘 시시콜콜 이야기를 느끼는 시간들. 음미하는 삶. 아, 여기 내 삶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구나를 감각할 수있는 여유.

요즘의 일상에선 쉽게 도모하기는 어려운 순간이고, 혹여 그런 여가(!)스러운 날이 온대도 한 이틀은 그저 잠만 잘 것 같지만. 어쨌든 취하고 싶다. 아주 아주 천천히. 편하게. 그리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나서도 일어나 또 취하고 싶다. 으하하. 그렇게 닷새 정신줄을 놓고 나면, 분명히 나는 생각할 거다.

이제 생산적(!)인 일을 하자.
그게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227) 우리는 우리가 이미 원하는 것을 하고자, 또는 원하는 존재가 되고자 기본 소득을 요구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기본소득은 다른 것을 원하고 행하고 다른 존재가 되는 사람, 다른 종류의 삶을 고려하고 실험할 수 있게 허락하기 때문이다.”
“(264) 기본소득 요구에 대한 많은 반발 역시 비용보다는 윤리를 중심에 두며, 노동시간 단축의 가능성도 비슷한 우려를 일으킨다. ... 늘어난 비노동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할까 뿐만 아니라 무엇이 될까를 걱정하는 것이다.”



노동단축과 기본소득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통상 임금으로 정리되는) 일하는 시간, 혹은 일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한 재생산의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일에서 나를 빼면 나에게서 일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는 데, 불현듯 책을 읽고 있다는 게 떠올라 안도감 들었다.

아아, 다행이다. 삶에서 일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가 했더니, 책 읽는 내가 남는다.
요즘은 무려 함께 책읽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니까. 나, 정말. 필요해.
일을 제외한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들이.



*

회사에서 종종 라디오를 켜놓을 때가 있는 데, 코로나19를 맞이한 요즘 낮시간 라디오의 가장 핫한 주제는 가족과의 시간을 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인 모양새다. 모부의 재생산 노동을 놀이로 대체하는 유리창 닦기 놀이와 집안일 놀이 등의 발명부터, 수백번을 저어야 한다는 달고나 커피함께 만들기까지.... 끝나지 않는 방학 때문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육아맘들은 육아맘들대로, 또 가족과의 시간을 늘려야하는 아버지들은 아버지들 대로 힘든 모양새다. 차라리 일하러 가고 싶다는 일상을 돌려달라는 사연들이 빗발친다.
관련해서 재밌는 일화가 책에 있었는 데, 뭔가 쓴웃음을 짓게 만든 부분이라 공유해온다.

“(244 ) 난제는 이랬다. “가족 친화적인” 포춘 500대 기업 한 곳에서 일하는 부모를 위해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데도, 그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직원은 왜 이렇게 적은가? 많은 직원이 일과 집안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 한계치까지 혹사당한다고 느낀다고 답했으면서도 말이다. 회사 정책에 대한 연구와 직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혹실드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인터뷰한 사람들은 일터가 점점 집같아지고 집이 점점 일터 같아지기 때문에 일터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집에서 시간을 덜보내는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혹실드는 미국인들이 무급 육아노동의 가치는 점점 폄훼되고 돈 받는 일은 과대평가되어, 결국 가족보다는 일의 상대적 매력이 높아지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실드는 이런 시간 구속은 부모들에게 당연히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을 지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특히 더 해롭다고 말한다.”

ㅋㅋㅋㅋㅋㅋㅋ기껏 저녁이 있는 삶 만들어줬더니 차라리 일터가 좋다는 모순.....ㅋㅋㅋㅋ 

코로나 시대의 우리네 삶ㅋㅋ

나 역시 내 생계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순간부터는 시간을 돈으로 계산하는 셈 방법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 일하지 않는 시간 - 결국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 시간- 들은 버리는 시간이고, 버리는 시간들이 버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가끔은 휴일도 짬을 내 악착같이 알바를 하거나, 그게 아니면 조금이라도 가성비있는 소비를 하기 위해 분투했던 듯. 안그러면 괜히 손해보는 느낌이랄까. (가성비 찾다가 귀한 시간을 더 쓰기도 하는 모순) 혹실드가 불러내온 일화는, 돈받는 일을 과대평가하는 사회 속에서의 가정과 재생산 노동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 볼 거리를 안겨준다.

“(253) 오늘날 사회적 재생산이 사유화되고 무급 가사노동의 젠더 분업이 여전한 것을 감안하면, 고용된 여성의 노동시간이 줄어든다 해도 그녀의 가정 내 노동 -집안일, 장보기, 육아, 노인돌봄-이 늘어나 추가 시간을 금새 채워버릴 수 있다. 현재의 가정 내노동이 조직화된 방식이 문제시 되지 않고, 고용주들이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책임을 지는지 여부로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차별할 수 있다면, 모든 노동자를 위한 노동시간 단축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저 긴 노동시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던져 주는 것들 - 파트타임, 유연근무, 시간외근무, 복수의 불안정 노동 등의 증가-을 손에 들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부족과 젠더 분업 문제 모두를 직면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259) 노동윤리와 가족윤리가 여전히 일체의 역사적‧정치적‧문화적 타래들로 한데 엮여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무급 재생산노동의 조직화와 분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임금노동의 시간제에 맞서는 시도는 언제나 근시안적인 것이 된다.”


중요한 지적이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착취와 소외를, 페미니즘은 자본주의가 은폐해온 재생산 노동과 노동의 위계(젠더화된 노동)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나에게 이 이론들에 포섭되기 쉬운 또 다른이면 -노동윤리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일에 맞선 삶. 노동해방이 아닌, 노동(윤리)으로 부터의 해방.

단순히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읽기전 나의 오만이었다. 소득이나 재분배, 평등의 시각을 넘어 ‘일’과 ‘일의 윤리’에 대한 관점에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꼭 필요한 작업이며, 어쩌면 이 세계의 변화를 위해 보다 근본적으로 논파되어야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지금의 노동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가족윤리(혹은 사회적 재생산의 사유화)/ 무급 재생산 노동 / 젠더분업화를 함께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193)델라코스타는 가족을 임금시스템과 연결지어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이루는 한 축으로 설명함으로써 가족 제도가 노동 형태를 제공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게 사회적 재생산 비용의 책임을 상당부분 면제해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02) 여성이 요구하지 않는다면 가족은 계속해서 자본을 위해 기능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노동과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페미니즘이 너무도, 너무나도 절박하게 필요한 이유다.

일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져서 울고 싶었던 요 몇달 동안, 꼼꼼히 읽었던 이 책에 대해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다. 언제나처럼 첨부하는 아래의 두 단락은 어떤 다짐들로.


***

“(181) 정치적 전망들은 깨지기 쉽다. 전망들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한 세대에서 생겨난 사상은 다음 세대에서 흔히 잊히고, 또는 제지 당한다. 한 시대의 진보적 사상가에게 불가피하고 현실적으로 보였던 목표들을 이후에 온 이들은 공상적이라거나 유토피아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선반으로 치워버린다. 급진적 시도가 이루어지는 특정한 시기에는 목소리를 찾았던 열망이 다른 시기로 가면 사그라지거나 심지어 완전히 침묵한다. 모든 진보운동의 역사는 절반쯤 기억되는 그런 희망들과 실패한 꿈들로 어질러져있다. - 바버라 테일러 <이브와새로운 예루살렘>”

어질러진 실패한 꿈들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내어 다시 이어 붙이는 것.

“(348) 아마도 더큰 위험은 우리가 너무 많이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잇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은 덜이 아니라 더 요구하게 되기를 고려해야 한다.”

더 요구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