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전까지 루이즈 페니의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내게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섬세했지만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저 케나다 작은 마을의 눈덮인 풍경만이 마음에 남았다.

 다시 겨울이 오고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두뇌를 지닌 가마슈 경감이 돌아왔다. 그러나 네 시체를 묻어라의 가마슈는 우리가 알던 침착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 남자가 아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상처를 입었다.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는 리더로서 실수했고, 앞으로 더 실수할 수 있다는 공포가 그의 마음을 좀 먹고 있다. 

 

 네 시체를 묻어라는 크게 두가지 이야기로 구성된다. 하나는 가마슈의 몸과 마음을 찢어놓은 테러 사건의 실체고 두번째는 전편인 냉혹한 이야기에 등장한 살인사건의 재수사다. 두 사건 모두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수와 후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읽을 거리는 루이즈가 묘사하는 아름다운 겨울 풍경과 섬세하게 어긋나는 사람들의 마음속 이야기다.  


 가마슈가 어떤 남자인지 보자.

(전략)가마슈를 몇 초간 지그시 응시하더니 자신에게 자리를 권하고 지혜로 이끄는 네가지 말을 일러 주었다. (후략)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잘 모르겠습니다.

(후략)

그러나 그 네 문장은 아르망 가마슈의 삶을 바꾸었다.


- 네 시체를 묻어라 256쪽

그렇다. 이 남자가 심문을 할때 조차 가벼운 환담을 나누는 것처럼 편안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저 네 문장을 진심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 모자란 부분에 도움을 청하는 것, 사과할 줄 아는 것. 그래서 그는 참 좋은 리더가 됐고 부하들은 그에게 목숨을 맡긴 것이다. 비록 모두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는 악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욕망에 매달려 삶이 찌그러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남다른 인간이고 싶었던 한남자는 한평생 헌신과 봉사로 살아 성자라 불리는데 성공하지만 가족들에겐 그저 그들을 버린대다 성미조차 남달랐던 개자식이다. 다정하며 음식솜씨도 남다른 한남자는 돈욕심이 지나쳐 자신을 믿는 이웃들의 등도 쳐먹는다. 이성적이고 예술가로도 일찍이 성공했지만 아내가 자신보다 재능있는 예술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남자도 있다. 그리고 가마슈, 안간힘을 써도 막을 수 없었던 실수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생사를 함께 넘은 동지들의 리더는 자신이었고, 자신은 살아돌아왔고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 책을 두번째 기회에 바칩니다.

두번째 기회를 준 사람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를 가져간 사람들에게

책의 첫페이지에 있는 이 문장이야 말로 책의 주제다. 거칠게 올드보이식으로 말해본다. 아무리 개자식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게 아니냐고. 그리고 한번더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리더도 가족을 제외하면 마을도 사회보장시스템도 재취업 프로그램도 없는 이곳에서 조금은 부러운 눈으로 이 글을 읽고 만다.... 제길...

"의심이란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경감님.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망가진 곳이 가장 강한가요?" 경감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고 믿습니다" 핸콕 목사가 말했다.


- 네 시체를 묻어라 353쪽

가마슈는 네 시체를 묻어라에서 부서졌다. 그러나 단단해졌다. 이 시리즈는 주인공과 함께 점점 더 굉장해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니까 이 시리즈는 생각한 것과 사뭇 다르다. 내 예상은 이랬다. 작은 마을,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지은 집, 벽에는 쾌쾌 묵은 사진과 이웃들이 어딘가 단체 여행가서 사온 기념품 스푼들이 붙어 있고,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할머니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면서 동네에 벌어지는 홍차 속에 들어있던 독극물 사건 같은 걸 파헤치는 이야기 말이다. 


어찌보면 미스터리가 중심인 이야기가 아니다. 섬세하게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을 그린다.. 작은 마을내 사람들의 관계, 부부사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자신. 내가 이 작가 같은 사람을 모른다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 앞에 서면 나같은 건 투명하게 벗겨지고 말것이다. 소소한 욕심, 질투, 어쩌지 못한 미련 등등. (그리고 그녀는 미련둥이 인간하나를 소설에 등장시키는거다. 당신이 장화를 고의로 던져 2년 연속 남편을 맞춘 이야기 같은게 세대를 이어 남을지도 모른다... 예술가 친구는 무섭다...)


댄디한 사이좋은 예술가 부부. 먼저 성공한 쪽은 더 재능있는 쪽을 질투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애쓴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두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한 남자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음식, 공간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응큼함과 욕심이 있다고.


 인간을 파이에 비유하자면 아무리 향긋한 냄새가 나도 먹어보면 어느 구석 시큼하기 마련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이다. 


이 마을 괴짜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런지 후편격인 네시체를 묻어라까지 읽고나서 같이 리뷰를 써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곱시 덜컹이는 지하철 안

네가 왔다.


뜨거운 여름방학의 마지막날 버스정류장 열여덟 너와 내가

이제 당분간 못보겠다.

너는 말하고 나는 버스에 오르고 손을 흔들고 울었어.

버스에서 내려 내가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너는 내집앞에 와있고 내게 말해

미안해 보고싶었어.

우리는 손을 잡아.


존 버거와 그의 아들 이브 버거는 2013년 7월 30일 그들 곁을 떠난 

베벌리 밴크로프트 버거를 데려와.


존은 아내의 코트와 치마와 신발을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던 스푼을 이야기하고

그녀가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날렵하게 가로지르는 스케이트 선수였는지 말해.


이브는 그와 그의 그림속 그녀를 말해.


이 책속에 그녀가 다시 돌아와. 그들이 주술을 걸어.


그녀는 이런 사람이야.


우리에겐 결코 없을 시간들.


사랑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14-10-2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버거의 책은 화장대에 놓여있었다.
 


많은 이들처럼 스무살에 상실의 시대로 하루키를 만났다. 에세이까지 포함한다면 내가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작가들 중 하나다. 늘 좋기만 했던건 아니지만 상실과 고독, 공허를 그려내는데 참으로 탁월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시간도 음악도 그는 공간으로 멋들어지게 그려낸다.     


이 책 여자없는 남자들에서 


조용한 바닷속 물에 산란된 빛은 가지가지 색으로 반짝이고 바다바닥에 빨판을 붙이고 물구나무서서 송어가 오기를 기다리며 하늘거리는 칠갑장어.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진 고독이다. 


이런건 어떤가. 어느날 눈을 떠보니 인간이 된 애벌래. 먹고 움직이는 것 자체도 고되고 낯설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같은 공간을 오가던 어느날 문득 자신은 이 세상에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고, 익숙한 공간은 낯설고 위험한 곳임을 인식하게 된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헤어진 옛연인을 14살에 만났어야만 하는 인연이었다고 말하고, 그녀를 잃자 자신의 14살을 잃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순간 만져지는 마음속 빈구멍을 기가 막히게 그리는 것이다.


이 부유하며 지적인 중년의 작가는 자꾸만 커지는 마음의 구멍을 참으로 성실하게 써내고, 나는 이렇게 바람이 휑하게 부는 날이면 그의 글을 읽고 내 구멍을 만져본다. 곱게 달이 뜬 밤 숭어를 기다리는 칠갑장어처럼 고요하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4-10-1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하루키의 저 책은 안읽었지만 휘모리님의 이 글도 참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가요.

무해한모리군 2014-10-16 11:51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읽을만하게 느껴졌다면 워낙 글발이 좋은 하루키의 글을 발췌한 때문이지 싶습니다. 얇고 술술 읽히는 단편을 꽤나 길게 읽었네요.
 

이번주 읽은 책은 모두 제법 괜찮았다.드문 일이다.


김영하 작가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에서 새로 에세이를 낸다는 소식을 듣고 '보다'를 읽어보게 됐다. 그의 팟캐스트에서 그가 낭독해주는 책들은 내 취향이고 그가 읽어주면 더 좋아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김영하 작가는 나의 독서 역사의 매우 처음을 장식했고, 그를 통해 서울이라는 같은 공간에 사는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읽는 재미를 알았으며, 낯선 작품에 도전하는 독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몹시 사랑하는 척 말하지만 사실 한때 뜨거웠지만 만난지 꽤 오래된 사이다. '보다'는 씨네21에 연재했던 것을 묶어낸 모양인데 나는 씨네21을 읽은 적이 없어 모두 처음 보는 글이였다. 에세이가, 특히 연재했던 에세이를 모아 묶은 책에서 모든 글이 좋은 경우는 마리여사나 서경식 선생등 딱 내스타일인 아주 드문 작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이 책은 설국열차 같은 몇몇 글은 아주 좋았고, 주로는 내용과 관계없이 그의 문장을 읽는 맛이 있었다. 이상하게 내게 김영하의 에세이는 그의 목소리로 들린다. 아마 내가 그의 목소리를 좋아해서 그럴 것이다. (한문단에 너무 많은 그라는 대명사를 쓰고 말았다 이런)  


같이 읽고 있는 열대야는 단편의 매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단지 너무 얇다는 것은 아쉬움이다. 


최근 이동진씨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 한자어를 열심히 공부해봐야지 다짐한다. 정확하게 간결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쏟았다. 


아 이런 여기까지 썼는데 어여쁜 알리샤님과 데이트 할 시간이 되어서 투비컨티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iore 2014-10-1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21이었군요. 저도 모두 처음 보는 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