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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펄 벅은 네 살 이후 정신적 성장을 멈춘 딸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중국에서 미국으로 백방으로 아이를 데리고 유명 정신과의를 찾아다닌다. 아이의 장애를 처음엔 받아들일 수 없어했다. 그리고 아이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고, 아이의 존재 그 자체가 인류에 무언가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아이들을 입양하고 그 중 한 아이가 펄벅이 죽어서 그 이후까지 살아 있을 그녀의 딸 캐롤을 돌볼 수 있게 연줄을 만들어 놓는다.
무엇보다도 펄 벅의 양녀이자, 펄 벅의 장애아 친딸 캐롤이 죽는 순간까지 지켜본 제니스의 후기를 보면, 그녀는 양모(펄 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위대한 여인, 나의 어머니는 그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런 한편 상처받은 삶을 남겨 두고 떠났다. 내 형제들과 내가, 생부와 생모에게 버림받은 우리들이 나중에는 우리 양모인 펄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사람이 환경의 동물인 게 맞긴 맞나보다. 아마 10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위와 같은 이야기들에 시선이 더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엄마로서 한 여인 펄 벅을 본다. 장애아를 둔 엄마의 마음. 그 어쩌지를 못하는 슬픔을 본다.
펄 벅의 행동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 심정을 십분은 들여다 볼 수 있다. 펄벅의 딸 캐롤이 다닌 학교에 몸은 40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부유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아들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죽었다. 누군가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새로운 연구를 위해 기부금을 요청하면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한 푼도 줄 수 없고! 내 돈은 정상적인 사람들한테만 쓸 거요!”
냉담하다고 할까? 그러나 펄 벅은 말한다. 그는 냉담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의 가슴은 찢어지고 자긍심은 무녀져 내리고 있을 것이기에 . 내 아들이 정박아라니, 내 아들이. 그는 내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아이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이가 발달 장애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부모들은 하나 같이 “왜”, “무엇이”라는 의문을 갖는다. 왜 내 아이가? 왜 하필 우리 가족에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나? 내가 어떻게 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이 책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도 펄 벅은 이 가슴 아픈 의문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젊은 부모들. 그들이 겪어오고 앞으로 겪어내야 할 고통과 절망감을 위로해 주고,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를 꺼내본다. 내 동생 중에 하나는 어릴 적에 유독 혀 짧은 소리를 했다. 나를 또영(소영) 언니라 불렀고 두통약 사리돈을 사이돈이라고 불렀다. 동생이 일곱 살 적 일이다. 이웃집에 동생과 또래 여자 아이가 살았는데 한번은 우리집에 놀러 와서 동생과 놀다가 우리 엄마에게 이러는거다. "우리 엄마는 xx(내동생)랑 놀지 말라고 그랬어요. xx가 바보처럼 말한다고요.“
그 때 무던하신 우리 엄마는 아주 많이 상심해하셨다는 것만 기억나고 다른 건 다 잊었다.
정상적인 아이도 어릴 적에 조금 지체되는 모습을 보이면, 대번 또래 친구 엄마들이 놀지 말아라 어쩌라 저 야단법석인데....!
장애아를 가진 부모는 아이가 무시당하고 거절당할까봐서 세상에 아이를 내놓는 일은 당연 주저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지체아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줌으로써 우리 모두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정상적인 아이도 누구나 다 자기만큼 운 좋은 것이 아님을 배워야 하고, 그 만큼 운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명성 뒤에 가리워진 펄 벅 개인의 삶도 조금 보았다. 여성으로서 최초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 모두를 받았던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완벽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의 개인 삶은 다른 입양자녀들에게 때론 냉담하게 느껴질 만큼, 아기자기함을 갖지 못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의미가 있었던 것은 보다 공적인 삶, 그러니까 스스로 발언할 수 없는 사람들을(그녀의 딸과 같은,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세상의 소수자나 억압받는 사람들) 대변하는 일이었던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