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귀 맞은 영혼 -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장현숙 옮김 / 궁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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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이엠의 'everybody hurts'라는 노래를 들으면,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고 나직이 읊조린다. 굳이 이 노래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잘 안다. 사람이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가를.서평에 대놓고 돌이켜 보기엔 좀 뭣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나온 상황들과 이론들을, 골백번도 더 나의 지난 경우들에 대입해 보게 되었다. 내가 대인 관계에서 가장 '맘 상하기'를 곧잘 했던 시절은 대학 다닐 적이었다. 이상하게도 매사에 자신이 없던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는 말은 아예 입 밖으로 내지를 않았고, 그래서 말수는 당연히 적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해 주었을 법한 친구의 충고에도 쉽게 맘이 상했다. '이런 나의 모남과 여림을 가장 잘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던 너조차 나에게 비판을 하다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당시 나의 '친구'에 대한 정의는 '나에 대해 무조건 동조해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자신감 없음과 열등감으로 뭉쳐 있던 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 마저 버린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보기에 자존심이 무척 세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굳은 확신을 갖고 있어서, 마음을 다치는 일도 상대적으로 적은 '진정한 자존심'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동정하고 마음 다칠까봐 두려워 맘을 꽁꽁 애워싸기 일수인 '자기애적 자존감(이 책에서 말하는)'이었다.
나 또한 이 세상에 흔하게 있는 환자 중에 하나였다. (지금은 극복하려 노력 중이고,) 이렇게 마음 상함을 상습적으로 겪곤 하는지라, 이 책의 저자가 내 이웃의 잘 아는 언니 같았다면, 아마 문지방 닳도록 이 댁을 방문해 조언을 얻었을 법하다.

저자는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의 성인으로 굳어지는 것의 최초 원인을 어린 시절의 경험에 둔다. 아이는 엄마와의 유대감을 경험하면서 자신에 대한 좋은 인상, 자존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생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선하며 그들이 자신을 도와 줄 거라는 믿음이 뿌리내리게 된다고 한다. 인성은 바로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이 적부터 착취당하거나 경멸받고 냉대받거나 무심하게 홀대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이 어린 영혼은 앞의 예와 반대 현상을 나타내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부모 노릇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 점 때문에 또 한가지 의혹이 들기도 한다. 저자는 지나치게 모든 인성 장애의 요인을 그 사람의 어린 시절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그녀의 임상 사례의 유형은 대체로 이렇다.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의 애인이 갑자기 그녀를 떠나버린 것이다.(물론 이 여자의 입장에서의 해석이 그렇다.) 이 여자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조금만 무심해도 화를 낸다. 그런데 상담자(저자)가 진단한 그 내상의 원인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는 끊임없이 그녀를 통제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게 했다. 이런 어린 시절 겪었던 실망감 때문에 정도 이상의 상처를 받고 심하게 화를 내는 인격 장애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설혹 유년 시절을 잘못 보내, 인성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지나온 유년 시절이 아닌가. 비디오테이프처럼 되감기를 해서 당시로 돌아가, '엄마 아빠에게 저를 이렇게 홀대하거나 엄하게 윽박지르지 말아 주세요...제 인성에 이러이러하게 좋질 않네요...' 라고 조언을 해 주고 다시 새로운 유년기를 보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상처받은 영혼을 어떻게 치유해 주나, 저자는 말한다. 상대에게 '마음 상했음'을 말로 고백하는 것, 관계를 끊는 대신 거리를 두기, 자존감을 확립하기, 공감과 화해를 이루기, 그리고 희망...느긋함....

 

'우리는 서로에게 과도한 기대로서 존재한다. 과도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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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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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피에 비해 무척 가볍고, 종이질은 투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재생 종이인 모양이다. 이 책의 메시지를 반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된 미래'에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과연 뭘 배우게 되는 것일까. 글쎄, 특별히 뭘 배웠다기보다는 솔직히 이런 저런 씁쓸한 생각들이 들었다. 앞부분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라다크가 관광이다 뭐다 해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기 이전, 제 1부 '전통' 읽을 때는 마음 속에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

저자는 라다크인들의 얼굴엔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토록 험악한 환경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안락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다크 사람에게 웃음이 많고, 분노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종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점차로 그 사회를 형성하는 외부 구조, 규모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한 구조는 개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또 그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강화하며, 가족과 이웃에서부터 다른 마을 사람들과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라다크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까지가 행복이다. 그 다음은?

그런 라다크가 개발과 관광 개방 따위의 정책에 노출되면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그렇다. 또한 교육의 패턴이 바뀌었다. 라다크의 교육은 아이들을 서구화된 도시 환경 속에서 좁은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있었다. 결국 라다크인들은 점차로 그들의 문화와 자연으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 현대 교육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주위 상황을 거의 보지 못하도록 하는 눈가리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원을 사용할 줄 모르고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학교를 마친다. 그들이 받는 교육은 뉴욕 사람들이 받아야 할 교육의 빈약한 변형이다.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는 부모 세대를 부끄럽게 여기고, 농사가 아닌 도시에 나가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불안정한 현금 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리게 된다. 이는 곧 삶의 질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한다.

지구촌에서 떠받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문화와 뿌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거기에 따른 소외는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폭력이 잔재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모습의 뒤에는 바로 소외가 있다.

라다크보다는 조금 더 산업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 또한 상투화된 대중 매체가 주는 이미지의 피해자가 되어 있지만, 현실과 서구적 이상과의 간격이 훨씬 더 넓은 제 3세계에서는 절망적인 느낌이 그만큼 더 강한 것이다.

물론 개발 도상 국가의 사람들 또한 이런 현대화가 종족 간의 적대 관계를 악화시킨다던지 하는 악재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진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 부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17년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간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 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에 기초를 둔 전통적인 사회가 여러 가지 결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선진 사회보다 더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도의 기술 문명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인 생명력과 그것의 다양성이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잘 알며,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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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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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쓰는데 꼬박 6년이 걸렸다고 했다. 350권의 책과 1천여 편의 논문 등이 동원됐다하니 말이다. 그러니 독자 또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기에는 양으로보나 질로보나 무리가 따를 법.

이 책은 리프킨이 펴낸 '미래 사회 가상 시나리오'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인데, 이 글이 본래의 시나리오라는 장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래 사회를 내다 보는 그의 상상의 밑바탕에는 바로, 조목조목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의 현 상황을 들어 그의 가상을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들과 실천적 지식들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는 더 이상 소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온갖 물건을 빌려 쓰고 인간의 경험 세계까지 돈을 주고 사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리프킨의 말대로 '더 이상 일해서 번 돈을 재산의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서 얻었던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거' 라는 생각을 하면 웬지 세상이 재미없어질 것 같기도 하다.

독자의 이런 볼멘소리가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 리프킨은 다음과 같이 또 말한다. '접속의 삶의 양식으로 변화하면서 재산을 축적하는 데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다시 놀이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이다. 산업 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 경제에서는 놀이가점점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인생을 미완의 예술품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접속의 사회에서는 이래저래 쇼가 횡행하게 되는 셈이다. 모든 기업들은 쇼비지니스를 하고, 각 개인은 연기자가 되어 인생의 매 상황을 연기로 구현하며 사는 삶을 즐기게 된다고 말이다.

얼마 전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아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베트남 여행에서 배낭 여행족들은 크게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양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그런데 두 부류 간에는 여행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미국인들은 주로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몸으로 하는 리조트를 일테면 엿을 직접 고아 본다든지, 뗏목을 직접 몰아 본다든지 하는 것들에 열광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기념품들을 구경하고 그것들을 사들이며 챙기는 것에 유독 흥미를 보인다고 했다.

리프킨의 말처럼 세계가 재산과 물질의 소유에 의미를 두는 사회에서 경험을 접속하는 사회로 나간다는 이론에 대입해 보았을 때, 일본인들이 더 세계화 되거나 문명화가 된다면 결국엔 미국인처럼 되게 된다는 공식이 나온다. 글쎄...'저자인 리프킨이야말로 미래 사회를 예언하는 저술가이기 이전에 전형적인 미국인이었군.'하는 본말이 전도된 생각부터 든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다. 이 관문 앞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나가 접속할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여 모든 이가 컴맹을 면하게 만든다고 해서, 접속의 시대가 갖고 있는 거시적인 문제(네트워크의 관문 앞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가 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접속을 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바로 누구냐는 문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리프킨은 이 주체를 '정치적, 상업적 영역'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고 여운을 남기며 끝내 단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나는 리프킨이 암시한, 이 '접속의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관(정치적 상업적 영역)' 때문에 그의 가상 시나리오에서 보여 지는 미래 세계가 어쩐지 디스토피아처럼 여겨진다.

나 독자는 앞으로 도래할 미래 사회에서 어떤 형태의 접속을 해야 할까. 리프킨 씨가 '깊은 심연'까지는 보여 주었는데, 나 독자에게는 그에 상응할 만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전망을 찾는 건 둘째치고, ... 이 책과 여러모로 닮은 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듯한 '노동의 종말'부터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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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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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집필되기 전, 우주비행사들이 표현한 우주 체험은 단순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경험이었다' 식의 서술로 일관되었었다고 한다. 우주 체험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조차 당시의 우주 비행사 자기의 내면에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었다고. 그러나 그들의 글의 행간에는 자신의 거대한 체험과 그 의미를 좀더 잘 전달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묻어났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은 이공계통의 전문가들이며, 그럴싸한 표현을 구사할 수 있는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폴로 11호의 우주 비행사 마이클 콜린스의 말처럼 만약 우주비행사가 시인이나 철학자라면 우주선은 우주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고, 도착했다고 해도 지구로 귀환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일리가 있다.)

이렇게 쓰고 있는 쪽도 답답하고 안타까울테지만 읽는 쪽은 더 답답한 우주 비행사 우주 체험기가 횡행한 와중에, 다치하바나 씨는 우주 비행사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체험을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이 책을 집필한다. 이 책을 통해서 보니, 정말로 우주 비행사들은 우주 체험 이후 사고 방식과 인생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 면에서 보았을 때는 귀환 후 정신 질환을 앓고, 우주 비행에 대해서 공개적인 언급을 꺼려하는 엘드린의 이야기가 제일 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우주 비행사들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내게 제일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지구상의 미래에는 밝은 전망이 없다고. 왜냐 하면 그건 인간이라는 종 내부에서 점점 획일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모두, 교통 통신의 발달과 환경의 획일화라는 문명이 초래한 현상에 의한 것이다. 하나의 종이 건전한 생명력을 보존해 가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구 위에서 인간의 환경은 획일적으로 온건하게 되어 간다. 이런 종은 종으로서 약해져 간다. 언제 어떤 일이 원인이 되어 대파멸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주에 진출한 인간은 우주라는 가혹한 환경에 단련되어 보다 강한 종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고.

9.11 테러 이후 미국 국민들의 애국심이 왜곡되어 나타난다.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거듭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극보수애국주의 성향의 미국인들이 이 시점에서 읽어 줘야 할 책이 바로 <우주로부터의 귀환>이 아닐까.

우주에 나가면 국가간의 대립 항쟁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가 하는 인식이 생긴단다. 그리고 혹독한 우주 환경이 우주로 진출한 인간끼리 서로 의존하도록 만들고, 살육하기 보단 서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단다.

지구에 있는 인간은 결국 지구 표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뿐이며, 사물을 평면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평면적으로 보는 한 평면적인 차이점만 자꾸 눈에 띈다. 왜 미국보다 훨씬 못사는 약한 나라가 철혈강국 미국에게 무모해보이는 테러를 자행하려 했었는지는 헤아려보려는 태도는 취할 생각도 없이, 그저 눈에는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이렇게 극보수애국주의자들에게 우주로 나가보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인생관에 큰 변화가 생기겠지. 그리고 자국의 강력한 에너지를 밖으로 향하기보다는 안으로 향하여 쏟게 될 것이다. 한 사회의 복지와 한 가정이나 가족, 더 좁게는 자신의 내적 정신 상태 같은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간 현실 속의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현실의 인간이 얼마나 에고 덩어리이며, 다양하고 저급한 욕망, 증오, 공포 등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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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밥 먹구 가 - 오한숙희의 자연주의 여성학
오한숙희 지음 / 여성신문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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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측면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매우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가르침이란 항상 따금한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고 유하게 만드는 스타일의 가르침도 있나보다.

첫째, 나에겐 물건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예전엔 엄마가 친척집에라도 방문을 하기 위해 여러 날을 비울 일이 생기게 되면 꼭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필요한 물건을 찾아 삼만리를 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가족끼리 살다보면 흔히 발생하는 문제이다. 무엇인가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자리에 두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

그런데 자리를 못 찾는 물건을 다 제자리 찾아 주시며, 물건을 찾느라 벌어지는 대혼란을 항상 소리없이(물론 잔소리로 들리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평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서랍에 무엇이 있고, 없음을 꿰뚫고 계시는 듯하다. 어머니는 물건 정리하는 게 사는 낙이라서 이 고생을 자처하시는 것일까?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이 미치었다. 생색도 안 나는 이런 노동을 항상 엄마라는 존재가 도맡아야 하다니.

일반 일리치라는 가톨릭 신부는 <젠더>라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갈수록 이런 그림자 노동이 늘어난다고 했단다. 그의 책에서는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부분이고, 꼭 필요한 일임에도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예를 들면 '시장 보기'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시장을 본다고 하면 돈만 있으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차를 타고 시장에 가야 하고, 사려는 물건을 둘러보고 가격을 비교해서 적합한 것을 선택하고 돈을 내고, 만약 돈이 모자라면 은행에 가서 찾아야 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 말이다. 이런 것뿐이랴. 집안일은 나날이 정교하고 세분화되어 간다. 그런데 이렇게 정교하게 세분화되어 가는 집안일을 완벽히 어렵다. 숙희는 이 부분에서 집안일을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 내는 인생의 '편집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집안일을 간략
화시키는 것이다.

둘째, 신영복님이 이 책의 저자 오한숙희씨가 들었던 어떤 강연에서 그런 말을 했단다.
냉장고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음식을 쌓아놓고 혼자 먹기 시작한 것 같다고. 냉장고가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이웃 사람들의 배가 냉장고라서, 내가 있을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눠주면 그 사람들이 언젠가 음식이 생겼을 때 내 몫을 챙겨 오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음식은 돌면서 정을 만든다. '빈 그릇 주는 법은 없다'고 뭐라도 담아 보낸다. 전기가 아니라 정으로 돌아가는 냉장고.

여성의 본질은 결국 자연과도 같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전제(시골살이의 일담)들을 통해서 보여 주고, 결국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게 서로를 끌어앉고, 감싸 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향해 간다. 그리고 그 구비구비에는 시골살이의 여러 일화들을 풀어놓는 것이 이 책의 스타일이다. 그렇다. 아줌마의 구수한 입담이 느껴지는 편안한 책이다.

상석도 없고 말석도 없는 누구라도 끼어않을 수 있는 여유로운 밥상, 두레반을 펼쳐 놓고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밥먹구 가. 라고. 이웃과 사는 지혜를 십분 발휘하는 것이 조금은 벅차게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함께 잘 사는 인생의 노하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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