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
에티엔 바랄 지음, 송지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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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맨 앞의 장자크 베넥스의 서문을 접하고는, 아무런 주저함없이 고르게 된 책이다. 장자크 베넥스는 서문에서, '어린 시절과 성년 사이에 머물러 있는 퇴행적인 면모를 보이는' 오타쿠들을 보다 생산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한다. 그들은 소프트웨어의 혁명이 낳은 새로운 풍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존재들로서, 고안하고 검증하고 수집하면서 종종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해에 필요한 열쇠를 제공하는 인물들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서문 다음에 이 책의 진짜 저자인 에티엔 바랄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이 책의 정체는, 일본의 근대화의 산물이며, 근대화의 피해자이기도 한 '오타쿠'들을 일례로 들어 일본 사회의 천태만상의 현상들에 대해 조목조목 칼을 들이대고 있는 날카로운 비판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는 글을 재밌게 쓰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냉소적이며, 필요 이상으로 신랄함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 신랄한 지적들 중에서 한국 사회에도 해당이 되기에, '남의 얘기하는구나'라며 흘려 들을 수 없었던 한가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일본의 학력 경쟁은 '헨사치', 곧 '편차값'이 없다면 그렇게까지 첨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한다. 이 시험은 일본의 중고등 학생들의 성적을 국가적 차원에서 측정하는 시스템인바 공사립 구별 없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시행되는 월말 시험의 평균 산출 수치이다. 이 헨사치에 따라 각 학생은 같은 학년에 속한 전체 학생들 가운데서 자기 학력을 가늠하고, 또 상급 학교 합격 가능성을 예상한다. 헨사치의 처음의 의도는 모든 학생들이 시험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 셈이 되었고 아이들은 단순한 학력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서 경쟁심을 키우게 되고 전국적 단위에서 평가된 점수가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학생들은 자기보다 나은 점수를 얻은 다른 학생들에게 잔혹한 태도를 취한다. 즉, 일본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던 이지메, 즉 왕따 현상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에티엔 바랄의 또한가지 그럴싸한 분석이 있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야오이 만화에 열광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여성들은 야오이 만화(남자들의 동성 연애를 주제한 만화)를 열광적으로 읽거나 줄거리를 만듦으로써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회에 대해 항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오이 만화는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는 천편일률적인 여성의 이미지(육감적이게 예쁘고, 착한 소녀들)에 대한 반항인 것이다.

하지만 에티엔 바랄이 말한 다음과 같은 부분은 좀 다르게 억지스러운 도식화가 느껴진다. '일본인들은 집단 생활을 좋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집단을 벗어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이건 앞의 이야기와 조금 다른 경우지만, 얼마전에 출장을 갔던 동경, 시부야 역 근처에서 늦은 밤에 일행들과 라면에 간단히 맥주 한 잔씩 들기 위해 간이 음식점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식당 내부의 구조가 한 사람씩 먹을 수 있도록 각각 칸막이가 되어 있어 꼭 사설 독서실을 연상시켰다. 혼자씩 와서 각각의 칸막이 안에 들어가 앉아 무언가를 후루룩거리며 들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식당에서 밥도 혼자 못 먹는 사람이 일본인인양 기술하고 있는데 말이다. 난 이 식당에서 고독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본 거 같다.

다시 오타쿠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미쳐 있는 이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한 사회적 에너지로 전환될 가능성이 많음에도, 이들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의식은 '비정상적이고 병적이며 퇴페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들의 겉모습은 정말로'운동 부족으로 인해 비만하고 여드름투성이에 돗수높은 안경을 끼고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정작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야 말로,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아직도 신뢰할 만한 유일한 세계, 유년기의 세계와 거기에서의 감동으로 계속 살고 싶은 순수한(?)사람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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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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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겨울이었나보다. 'TV 책을 말한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조너선D 스펜서의 저작 <현대 중국을 찾아서1, 2>를 소개해 준 적이 있다. 그때 잠깐 저자의 인터뷰도 함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량하고 성실해 뵈는 학자의 모습을 한 조너선D 스펜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중국의 장구하고 도도한 현대 역사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는 사람이 중국인도 아니고, 동양인도 아니고, 한 서양 역사학자라는 것, 그 학자가 중국의 현대사를 시원시원하고도 문학적인 필치로 서술한 이 책을 읽어내는 일은 정말이지 아이러니였던 것이다.

중국이 이웃 나라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너무나도 중국에 대해서 몰랐던 듯 싶다. 예를 들면, 태평천국의 난은 왜 일어났는지, 청나라는 어째서 그토록 무기력하게 서양 열강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에게 왜 패하여 타이완으로 쫓겨났는지, 뿐만 아니라 신해 혁명이나 5, 4 운동 또는 사회주의 혁명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도.

그러나 단순히 이 책은 위의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책 속에서 빛나는 부분은 바로, 매우 복잡한 상황에 처해 매일 같이 대단히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는 데에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중심 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인물은 유교 교육을 받고 19세기말 청조가 쇠퇴할 무렵 급진적인 개혁의 대변자 노릇을 하다가 정치적 실패를 겪고 망명 생활을 한 뒤에 유토피아적 사변 속에서 삶의 애환을 달랬던 유학자 캉유웨이이며, 두번째 인물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에 빠져 든 뒤 1920년대 국민과 학생들의 좌절된 열망을 가장 또렷이 표출한 루쉰이다. 세번째 인물은 청조의 멸망으로 등장한 해방된 `새로운` 중국이라는 세계 속에서 성장한 딩링이다. 작가이자 정치행동주의자인 그녀는 국민당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강요한 창작활동의 기준이 자신의 창작 의욕과 얼마나 맞지 않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스펜서의 서문에서 발췌

위의 세 인물을 중심으로 또다른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 중국 역사에 대한 웬만한 관심이 아니었다면 알수 없었을 많은 빛나는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여 중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면 관통한다. 아!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힘주어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이 갖는 통찰력이다. 쏠티디자인 스튜디오의 작품이라는 이 책 표지는 다음에 이어지는 이 책의 구성 방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미리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천안문 광장을 멀리 뒷배경으로 하고, 루신과 딩링 캉유웨이의 사진을 크게 배치하였다. 셋의 주변으로 쑨원, 량치차오, 원이둬, 추진 등의 인물 사진을 곳곳에 배치한 것이다.

나는 역사서를 읽는데 확실히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드라마도 사극은 보질 않는다. 현재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고루함에서 쉽게 흥미를 잃고 마는 것일텐데, 그런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던지. 이 책에서는 중국 현대 인물사가 시와 소설의 인용 글들 즉, 문학과 만난다. 게다가 단 몇 줄로 소개되는 인물이더라도 실체를 만나 눈빛을 주고 받은 것과 같은 실존감을 불어넣고 있다는 데에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울러 문학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으면 이렇게 훌륭한 저서가 나올 수 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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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레기네 슈나이더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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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본 <시사 매거진 2580>의 내용 중 하나는 우리 서민들의 일확천금의 꿈에 대한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시작은 요즘 텔레비전 광고 중에서 모 신용카트 회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을 언급한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는 꿈을 꾼다. 그것이 설령 꿈에서 그칠지언정.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서도 나왔지만 연봉 2300의 어느 평범한 가장이 한 달에 30만원씩 적금을 붓는다고 했을 때 그 가정이 한국 사회에서 부자가 될 가능성이란 아주 희박한 것이었다. 한편 얼마 전 주택복권에 억대의 돈이 당첨된 사람이 지금은 그 돈을 흥청망청 탕진하고 파멸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부자의 삶은 행복한 것일까. 즉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자. 보잘 것 없는 수입을 가지고도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높은 소득을 올리고도 불행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은 소득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이 책은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을 위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라고.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돈을 버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전파하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대중 매체이다. 싸구려 잡지에는 부유층에 대한 얘기가 넘쳐 나고, 그들이 사는 멋진 집과 멋진 차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호화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이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중 일부는 매체의 위력에 발맞추어 폼나는(?) 인생을 연출하기 위해 살아가고자 애쓸 것이고, 그러다 보면 개개인의 부채는 점점 늘어나며 그 끝은 파멸의 길일 것이다. 끝도 없는 소비 세계에서의 만족에 한계점이라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만의 소비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 그 스타일이 이 책에서 말하듯 소박함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풍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으로 '소비'에 대한 자신만의 방식을 정립하고, 보다 소박한 삶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적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여유로워지는 길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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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기와 삶 읽기 1 -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바로 여기 교실에서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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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한혜정이라는 이름의 이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자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한때 신문을 열독해서 읽는 취미를 가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되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대문 모 아파트 옥상에서 네명의 여중생이 비관 동반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때 처음 그 사건에 대해서 조혜정 교수가 쓴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었던 것이다. 그 후에 찾아 읽은 조혜정 교수의 이 책 시리즈. 난 그의 이 책을 읽고 단순하고도 속된 말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류의 주장을 피력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학자가 한 열 명만 더 있어도 우리 나라 학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지.

나는 안타깝게도 이 책을 대학 시절에 읽지 않았다. 만약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의 생활에서 글읽기와 삶 읽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졸업 후에 알았더라도 이 책을 읽고 많이 느끼고 반성하며 삶에 적용시켜 보도록 노력하였으니 정말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두 가지의 경향으로 읽어 낼 수 있다. 하나는 일반 문화 읽기의 사회학적 저서로서, 또하나는 책읽기 방식 지도서로서 말이다. 특히, 나는 조혜정 교수의 한 학기 강의 진행과 학생들의 발표 및 회의 내용 기록 부분을 가장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제목은 왜 '삶 읽기 글읽기'인가? 산업 사회에 들어서면서, 더더욱 우리는 문자 매체와 많은 연관을 두며 살아가게 되었다. 삶의 한 방식이기도 한, 이 읽기 행위가 대한민국 우리 삶에서는 이상하게 굴절되어 있다. 이 부분을 조혜정 교수는 식민지성과 관련지어 이야기한다. 그렇다.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모순되게도, 어릴 적부터 공부를 위한 말과 생활을 위한 말을 분리시키며, 삶과 따로 노는 지식이 공식적 지식으로 군림하게 된다.

어느 교육학자가 입시 위주 교육을 극복하기 위한 세미나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아이들은 시험 답안에 '밥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항에 동그라미를 치도록 가르치지만 실제로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은 반복적인 공부 과정에서 엄청난 의지력과 참을성도 기르고 극심한 경쟁심도 갖추게 되며 자기 속의 소리를 듣기보다 항상 남(특히 입시 출제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는 기술을 배운다. 이런 모든 능력은 거대 규모의 생산 공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산업 역군이 가져야 할 가장 필요한 자질인지도 모른다. 상관의 마음을 잘 읽어 내고 경쟁심을 늦추지 않으며 시키는 일을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꾸역꾸역 해 내는 인내심을 가진 탈 정치화된 인력 양성의 차원에서 말이다.

나 또한 이 책에 별 다섯을 주고 싶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학이라는 좀더 넓은 학문 세계에 진입하려 하는 대학생들이 이 책부터 읽어보고, 일찍부터 책읽기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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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김봉중 지음 / 소나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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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이 왜 별다른가를 보여 주는 책이다. 이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역사적 이슈를 중심으로 설명을 끌어간다. 18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아메리카 땅에 이주를 하기 시작하고, 점차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미국의 북동부에 정착한다. 정착할 땅을 찾아 점차 서쪽으로 이동을 한다. 유럽은 기존의 영토에서 자국의 땅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에 골몰하였지만 미국은 그런 영역 지키기 싸움 대신 광활한 개방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주하고 또 정착한다. 이 점에서 변경 혹은, 국경 지대라는 의미에 프런티어 정신을 지은이는 설명한다.

미국을 이해하는 두 번째 코드 민주주의이다. 이들의 민주주의는 연방주의이다. 즉, 주권 중심이 아니라 귀족이나 봉건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한 단체가 권리를 독점하지 않는 형태인 지방 분권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성립 이유는 아메리카의 지형적 특수성이 크다. 유럽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간섭을 덜 받았으며, 유럽 국가들 사이의 분쟁 또한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초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3개의 주마다 각기 개별적인 생활을 했고, 자기네 영역 안에서 하나의 정부를 유지해 왔지만, 각 주는 서로 비슷한 이해 관계를 갖고 공통적인 언어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수준의 문명 단계를 밟고 있었다.

세 번째 코드는 지역 정서다. 비교적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토대로 둔 잘나가는 미국이었지만, 지역 정서상으로 남과 북이 크게 달랐다. 북쪽은 상공업 위주의 경제 정책을, 남쪽은 대단위 면화 농장 같은 농업 위주의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목화 산업은 독특한 남부의 귀족 문화를 가속시키면서 노예 제도가 자리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부는 산업화에 따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계몽주의가 한 단계 더 진전하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남과 북에 있어서 진보의 개념이 달랐다. 북부에서의 진보란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위해 자연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는 동적인 의미였고, 남부는 안정적인 자연 친화적인 정적인 진보를 원했다. 따라서, 북부의 계몽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남부의 노예 제도는 미국의 건국 이념에도 위배되는것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대치하며 결국에는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네 번째 코드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다분히 미국의 현재 모습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일찍이 인종, 민족, 종교가 달라서 국가간에 뼈아픈 아픔과 회한을 경험하는 경우를 무수
히 보아 왔다. 인간의 진보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는 현대만 보아도 히틀러의 인종 말살 정책, 구유고의 연방 현실, 아프리카와 남미의 인종 청소 등이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철저한 다인종, 민족, 종교로 시작했던 미국은 역사적 시험대였던 것이다. 그 역사적 시험이 성공이었나, 실패였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사란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나 흑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본명 부정적일테고 백인들간의 갈등에 염두에 둔다면 분명히 긍정적일 것이다.

유럽에서 숱한 박해를 받았던 민족 유태인은 미국에서 가장 득세를 하고 있는 민족이다. 법률, 의학, 과학을 비롯 영화 산업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인은? 아직 미국의 주류 정치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인 특유의 근면성, 성실성, 보수적 가치관이 미국의 청교도적 전통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으므로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점차로 인정을 받고 있는 추세이다. 히스페닉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결혼 문화만을 보아도 그러한데, 이들의 50%가 백인과 결혼을 한다. 히스페닉계와 백인의 인종 구별은 점차 모호해질 것이다. 결국 문제는 흑인이다. 미국 역사에서 소수 민족들은 어려운 고비를 넘긴 후에 미국 사회에 적응했다.

더불어 흑인들의 정치력 또한 급신장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다. 사회가 아무리 진보를 했다하더라도 검은 피부에 대한 편견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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