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샐러드 레시피 - 매일매일 테이크아웃 샐러드
린 히로코 지음, 김보화 옮김 / 푸른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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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오늘이 여태까지 중에 제일 더운 거 같애.”

“어? 자기 어제도 똑같이 말했는데. 오늘이 제일 덥다고. 알아?”

“그런가? 아우, 어쨌든 덥다 더워.”

휴일, 점심 먹은 그릇을 씻으면서 남편과 주고받은 말이다. 사실 요즘은 매일매일 똑같은 기사를 만나게 된다. ‘폭염’ ‘곳곳 폭염 기승’ ‘오늘밤도 열대야’ ‘폭염 속 일사, 화재사고 속출’. 하루 최고기온이 사람의 체온에 육박하는 날이 이어지면서 가족들은 점점 입맛을 잃었다. 지금 시기가 방학이란 점이 악조건으로 작용했다. 아이들은 늦게, 때론 점심이 가까운 시각에 일어나면서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때일수록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건강을 생각해서 더 제대로 먹어야 한다고 말해도 그저 잔소리로만 여길 뿐. 한마디로 특단의 조치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 됐다. 뭔가 참신한 거 없을까?

<병 샐러드 레시피> 표지에서 투명한 유리병에 작게 썬 야채가 켜켜이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컵밥을 떠올렸다. 평소에 아이스커피를 테이크아웃한 투명한 컵에 밥이랑 반찬 몇 개로 층을 쌓거나 과일 두세 가지를 넣어 아이들이 학원가기 전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도록 챙겨주곤 했는데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샐러드 위주라는 것과 내가 만든 것보다 영양이나 모양에서 더 뛰어나고 더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점. 이거라면 아이들이 가뿐하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잘 먹는 걸 넣어서 만들면 색다른 기분도 느끼고 재밌게 먹을 수 있을거야. 틀림없이.

책은 병 샐러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밀폐식 뚜껑이 있는, 입구가 넓은 유리병에 손질한 채소와 재료를 층층 쌓아 담는’ 것이 병 샐러드인데 1인분은 대략 240ml 정도. 본문에 소개된 레시피는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1인분을 기준으로 되어 있지만 분량을 2배 정도로 넉넉하게 하면 2~3명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단, 병을 선택할 때 높이가 낮은 병은 드레싱이 위로 올라와서 채소가 물러질 수 있으니 적합하지 않다는 것만 기억하면 될 듯하다.

병 샐러드는 네 번의 과정을 거치면 된다. 병에 드레싱(1인분에 1큰술)을 넣는다. ㅡ> 토마토나 양파처럼 즙이 나오는 재료 혹은 콩이나 아보카도처럼 드레싱이 잘 스며들지 않는 재료를 넣는다. ㅡ> 옥수수나 파프리카처럼 날 것 그대로 드레싱으로도 쓸 수 있는 재료를 넣는다. ㅡ> 양상추 같은 잎채소처럼 아삭아삭한 식감을 살리고 싶거나 드레싱에 절이면 안 되는 재료를 넣는다. 병의 높이보다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재료를 담은 다음 손으로 꾹 눌러 공기를 빼가면서 뚜껑을 닫아서 병째로 냉장고에 넣어두면 장기 보관할 수 있다니 자투리 야채가 있을 때 만들어두면 급할 때 요긴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럼 병 샐러드는 어떻게 먹을까? 병째로 들고 포크로 떠서? 아니다. 먹기 직전에 병을 잘 흔들어서 드레싱이 재료에 고루고루 스며들게 한 다음 조금 우묵한 볼이나 접시에 그대로 거꾸로 쏟아놓으면 끝!

간단하면서도 보기 좋고 맛도 좋은 병 샐러드를 만드는데 필요한 드레싱으로 마요네즈 드레싱, 식초와 오일을 넣어 만든 프렌치 비네그레트, 간장 드레싱, 한식 드레싱 이 네 가지를 소개해놓았다. 웬만한 가정에 구비되어 있는 양념이나 채소를 기본으로 한두 가지 재료가 첨가된 샐러드가 대부분이어서 금방 해먹을 수 있는 것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마요네즈 드레싱을 기본으로 한 옥수수 샐러드나 게살과 옥수수 마카로니를 넣어 만든 샐러드는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고 짭조름한 간장 드레싱은 일식에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코울슬로 샐러드나 팽이버섯과 유부 샐러드는 간단하게 별미로 먹기에 제격인 것 같다. 고추장을 넣어 매콤한 맛의 한식 드레싱으로는 콩나물이나 어린잎채소, 배추, 오이, 미역 등 평소에 반찬으로 자주 먹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매콤달콤한 구운 가지 샐러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해먹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매콤한 맛을 즐기는 우리 부부에게는 술안주로도 딱이다.

뉴욕과 일본을 사로잡은 72가지의 병 샐러드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한식 드레싱은 가짓수가 가장 적은데 아무래도 저자가 일본인이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레시피가 아니다. 재료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레시피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껏 응용해서 나만의 병 샐러드 레시피를 하나씩 쌓아가는 거. 그게 바로 요리하는 재미가 아닐까. 이번 여름, 내게 신나는 도전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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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인성사전 - 김용택 선생님이 들려주는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이마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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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진흥법이란 걸 아세요? 유치원은 물론이고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계획하고 실시하도록 하는 법안인데요. 지난달인 7월 2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반세기쯤 살다보니 별의별 희한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인성교육을 일정시간 정해놓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점수화해서 입시에 반영한다는 것도 그렇고. 한자에 해박하지 않아 여기에 딱 맞는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순 없는 게 아쉬운데요. 이것이 아이들의 인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과연 지금보다 나아질까요? 오히려 이 어처구니없는 법 때문에 또 하나의 사교육이 생겨나는 건 아닐까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압니다. 아랫물이 탁하네, 더럽네 탓하기 이전에 우선 윗물이 맑아야 한다는 거.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님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린이 인성사전>인데요.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가슴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낱말을 선정한 다음 그 낱말과 어울리는 김용택님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의 시를 함께 수록해놓은 책입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너를 이해합니다’ ‘함께 라서 행복합니다’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구요. 하나의 주제마다 여러 개의 낱말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긍정, 당당함, 도전, 만족, 부끄러움, 성실, 솔직함, 양심, 여유, 자존, 절제, 책임, 후회, 걱정, 관용, 배려, 우정, 이해, 존경, 친절, 협동, 효도, 감동, 공존, 나눔, 소통, 용서, 인정, 진심, 화해, 희망... 낱말 하나하나마다 지닌 의미가 모두 깊지요?

 

이를테면 제일 먼저 소개된 ‘긍정’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시를 수록해 놓았습니다. ‘달리기를 했다. / 다해 1등, 재석이 2등, 나 3등 / 우리 반은 모두 세 명이다.’ 이어서 김용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최선을 다하면, 있는 힘을 다하면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게 긍정입니다.’라고 말이지요. ‘절제’에 관한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 ‘누가 내 머리에서/ 컴퓨터 좀 꺼 주세요. / 눈 감아도 / 꿈 속에서도 / 꺼지지 않는 컴퓨터 화면 / 컴퓨터 화면 속 전사들은 계속 싸우고 있어요,’ 컴퓨터 게임에 빠지다보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머릿속에선 게임이 계속되곤 하는데요. 이렇게 하루에도 여러 번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려주고 스스로 절제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심리이해 감정표현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생각납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 여러 감정들이 올라오는데 그때마다 그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희.노.애.락. 단순하게 네 가지로 끝낼 게 아니라 더욱 세분화해서 말이지요. ‘기쁘다’는 감정도 그것이 감동적인 기쁨인지, 반가움에서 오는 기쁨인지, 가슴 벅찬 뿌듯함인지 돌아보라는 건데요.

 

 

인성에 관한 낱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이해’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기 위해 언제나 가슴에 지니고 다녀야 할 낱말과 생각들이 책 한권에 가득합니다. 개중에는 어른인 저도 일상에 쫓겨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고 잊고 있던 것들도 있어서 부끄럽기도 했구요. 아이에게 읽혀주려고 마련한 책인데 오히려 제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성은 누가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것보다 아이들 스스로 깨달음에 젖어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란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각을 넓히고 표현하는 습관을 기르다 보면 내가 생각하고 쓰는 말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새롭고, 신비롭고, 감동을 주는 나의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을 만날 때 우리는 바르고 곧고 크게 자랍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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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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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시다 슈이치. 일본소설을 즐겨 읽는 내겐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여기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 이름에 대한 친숙도에 비해 그의 작품과의 친숙도는 정반대라고나 할까? 집안 책장 어딘가엔 분명 그의 소설들이 자리잡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작품은 겨우 두 개 정도? 그마저 승률은 1승 1패. 썩 좋지 않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대히트작이라고 손꼽히는 <악인>을 늘 노려만 보고 정작 읽지 않은 내가 그의 작품이 어떠하다고 평가할 순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난 해마다 여름이 다가오면 다짐을 한다. “올해는 꼭 보고야 말리. <악인>을!” 근데 올해야말로 정말 보게 될 것 같다.

자, 이제 <분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치오지 교외의 한 주택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낮 기온이 37도를 넘어서는 몹시도 무더운 날, 유치원 보육교사인 아내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입자에게 변을 당한다. 얼마 후 집으로 들어선 남편 역시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만다.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범인의 행각이다. 짧은 시간동안 순식간에 두 사람을 살해한 범인은 사건현장에 머물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해결하고 피해자의 자전거를 타고 도주하는 대담성을 보인다. 물론 멀리가지 못해서 경찰의 검문을 받고 달아나는 바람에 범인의 몽타주와 함께 ‘야마가미 가즈야’라는 그의 이름이 밝혀져서 지명수배에 오른다. 그런데 그가 도주한지 1년이 지났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대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 걸까? 사건당일 그가 피해자의 피를 묻혀 쓴 ‘분노’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풀리지 않은 의문만을 남겨놓은 채 소설은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 개월 전 가출한 딸 아이코가 심신이 망가진 채로 도쿄의 유흥업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고 마키 요헤이가 딸을 찾아 데려오면서 마키네 부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얼마전 동네에 왔다는 다시로 데쓰야라는 청년이 아이코와 가깝게 지낸다는 거였다. 후지타 유마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가까운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가족에게도 감추고 지낸다. 호스피스 전문 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를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들른 사우나에서 나오토를 만나 관계를 갖는다. 툭하면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엄마 때문에 여고생 고미야마 이즈미는 어쩔 수 없이 야밤도주 해서 오키나와의 외딴섬에서 살게 되는데 전학 간 학교의 동급생 지넨 다쓰야와 인근 섬을 찾았다가 폐가에서 지내는 의문투성이 남자 다나카를 만나게 되는데...

한편, 경찰 수사팀은 사건발생 1년이 지난 시점에 텔레비전 공개수사 프로그램에 ‘하치오지 부부 살인사건’의 범인을 공개수배하기에 이른다. 이전과는 다르게 컴퓨터 크래픽으로 야마가미 가즈야가 변장하거나 여장한 모습을 내보내는데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경찰서의 제보전화가 계속해서 울리기 시작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불안한 파장을 불러왔다. 저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수배사진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이른다.

아이들의 여름방학과 함께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날에 만난 <분노>.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범인이 누구일까 짐작해가면서 읽었다. 살해동기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라 자연히 관심은 무엇 하나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데쓰야, 나오토, 다나카 이 세 남자의 행적에 집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치오지 부부를 살해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알고 싶어서 끝까지 내달렸는데 정작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살인사건이나 범인 검거보다는 우리의 ‘삶’에 있었던 것 같다. 예전보다 편리하지만 그만큼 복잡하고 현란함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우리가 얼마나 진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지, 오히려 독자들에게 되물어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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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터 10까지 비룡소 아기 그림책 36
척 머피 지음 / 비룡소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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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친구가 놀러오면 얼른 이 책부터 감춰야 해요
신기한 플랩북 보고 아이 친구는 자기 집에 가져가려고 떼쓰고
아이는 안 뺏기려고 울고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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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존 -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 이야기
레이첼 서스만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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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산의 인문학 소모임에서 담양으로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남도문화의 이해를 돕는 일환으로 가사문학관을 시작으로 식영정, 소쇄원, 명옥헌 원림을 탐방했는데요. 제게 있어 이번 워크숍이 남도의 첫 방문이기 때문에 기대가 컸습니다. 여행서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던 곳을 드디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담양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느티나무였어요. 수령이 600년이나 된 이 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하는데요. 저희 일행 9명이 두 손을 옆으로 벌려야할 만큼 크고 웅장했습니다.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한 일행들은 저마다 휴대폰과 카메라를 꺼내 추억을 남기고 있을 때 전 그저 나무기둥에 기대어 서서 머리 위로 드넓게 펼쳐진 나무를 바라보면서 영상으로 담았는데요. 바람소리인지, 빗소리인지 모를 소리와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나뭇잎 영상은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그날의 그 곳, 느티나무가 빚어내는 웅대함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묵직한 양장본에 가로 판형, 드넓은 평원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에서 꼿꼿함과 고독함이 느껴지는 책 <위대한 생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인 레이첼 서스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초고령 생명체들을 찾기 위해 십여 년에 걸쳐 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남극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나무를 비롯해 균류, 산호 등을 카메라에 담고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데요. 기준이 최소 2,000살 이상입니다. 600년 느티나무보다 3배 이상의 수령이라, 엄청나지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과거의 기념이자 기록이고, 현재의 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이며, 미래를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다. - 13쪽.

 

가장 먼저 소개된 나무는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2,150살 보초병 나무인데요. 흡사 코끼리의 발모양을 빼닮은 나무 밑둥치에서 초고령의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옵니다. 벼락을 정통으로 맞아 부서진 듯한 모습의 브리슬콘 파인은 생존을 위해 특별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극단적인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영양분을 필수적인 것만 빼고 모두 닫아버린다고 하는데요. 마치 우리 인간이 고열에 시달릴 때 유독 손, 발이 차가운 이유가 혈액이 심장이나 뇌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곳으로 흐르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열대 섬 야쿠시마에는 조몬 삼나무(2,180~7,000살)로 이뤄진 무성한 숲이 있는데요. 이 숲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표지에 소개된 나무는 큰 가문비 나무(9,550살)인데요. 이끼나 풀일거라 여겼던 것이 부분 사진으로 보니 생각보다 큰 관목이었는데요. 이것 역시 기후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장 전략이라고 하는군요.

 

사막에도 초고령 생명체가 산다는 거 아세요? 모하비 사막의 모하비 유카는 수령이 자그마치 12,000살에 이르구요.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장소로 꼽히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는 야레타라는 것이 있는데요. 바위에 초록의 이끼가 잔뜩 낀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속이 단단한 나무로 이뤄진 관목이라고 합니다. 파슬리나 샐러리 같은 향긋한 향이 나는 식물과 친척 관계라는 야레타의 수령은 최대 3,000살이라고 하네요. 균류의 수명도 어마어마합니다. 미국 오리건 주 맬히어 국유림의 거대 버섯균, 꿀버섯은 2,400살, 시베리아의 방선균은 무려 40만~60만 설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굉장히 긴 수명을 가진 생물들은 우리가 영원이라는 거짓 감각을 믿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변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장기적인 생각없이 현실의 일상에 쉽게 파묻혀버린다. 하지만 오래 살았다고 해서 불멸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가 있다 해도 그 기회가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ㅡ 96쪽

 

담양에서 만난 수령 600년 느티나무의 까마득한 조상격인 나무들을 줄줄이 만나고 책장을 덮는데 유독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건조하고 불이 잘 나는 곳의 나무들이 화재에 견딜 수 있도록 몸통을 땅 속으로 이동하는 지하 삼림으로 성장하는데 저자가 눈여겨 봐두었던 13,000년 된 지하삼림이 도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하는데요. 다행인 것은 지하 삼림의 다른 개체는 살아있다고 하니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파머 참나무(13,000살)입니다. 저자는 본문에 파머 참나무가 있는 곳 주변이 사람들이 마구 버린 쓰레기로 어지러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는데요. 이제야 겨우 100세 시대를 맞은 인간이 인류 문명의 탄생과 역사를 지켜본 초고령 생명체 앞에서 너무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사진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생명체가 담고 있는 과거의 이미지인 동시에 인간의 통상적인 시간 개념을 훨씬 넘어선 시간 영역으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생물들의 초상화다. - 10쪽.

 

작년 이맘때인 것 같습니다. 일간지에서 어이없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한 사진작가가 산림보호구역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 수령이 200년이 넘는 나무들을 잘라냈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무엇을 찍으려고 나무를 베어냈느냐? 바로 소나무 중에서도 금강석처럼 단단하다는 금강송입니다. 금강송 사진작가로 불리는 그는 대왕(금강)송을 찍기 위해 주변에 늘어선 신하송과 활엽수들을 베어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찍는 피사체, 대왕송의 가지도 톱으로 잘라냈다고 하는군요.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가 무단으로 벌목하여 찍은 사진이 프랑스와 국내 여러 곳에 전시되어 고가에 거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 사진들을 모아 사진집까지 펴냈다는 건데요. 나무를 찍으려고 나무를 찍어내다니...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 예술가가 이래도 되는건지...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위대한 생존>의 저자 레이첼 서스만이 이 기사를 봤다면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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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8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8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디언밥 2015-07-2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건 봐야해..

몽당연필 2015-07-31 12:40   좋아요 0 | URL
네,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은 책이지만 욕심내어 꼭 소장하면 좋을 책이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