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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 3.1운동부터 임시정부까지 그 길을 걸은 사람들 ㅣ 표석 시리즈
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 유씨북스 / 2019년 4월
평점 :
“그댄 계속 나아가시오. 난 한걸음 물러나니”
본방도 아니고 재방, 그것도 종영된지 한참 지난 드라마를 스치듯 우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서로가 서로를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두 남녀주인공이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아간다’느니, ‘물러난다’니. 대체 무슨 연유일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드라마를 즐겨서 보질 않지만 그 사연이 궁금해서 한동안 문제의 드라마를 찾아보고 알게 됐다. 드라마가 구한말 조선의 의병들의 이야기.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지만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던 이들의 이야기란 것을.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실존 인물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지고 말았던 의병과 독립투사, 그들의 이야기를...
일제 식민치하의 역사와 항일 독립운동을 담은 책 중에서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를 선택한 건 저자가 개인이 아니란 점이었다. 전국역사지도사모임에서 공동저자로 출간된 책이어서 신뢰도가 올라갔다. 제목에 있는 ‘표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려고 표지로 세우는 돌’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그 장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세워둔 것이다. 역사지도사들의 모임에서는 그런 표석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경성’과 ‘한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고 이번에는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담았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하는데,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 중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 31쪽
‘3.1운동부터 임시정부까지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이라는 표지의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은 3.1운동에서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그 길을 굳건히 걸었던 사람들의 현장의 기록을 담고 있다. 책은 독립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제가 탄생하는 과정와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뜨겁게 타올랐던 독립투사들로 나뉜다. 그런 다음 네 개의 장에 걸쳐 해당과정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내용이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매 장마다 본문에 언급된 표석의 위치를 상세도로 지도에 표시해두어서 직접 찾아가거나 답사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본문 중에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1919년 3.1 독립선언과 관련해서 ‘기미독립선언서’가 나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전하고 차분히 전하고 있는데 3.1만세운동의 이틀 전부터의 일들을 마치 일기처럼 기록해놓아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진행됐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명칭이 어떻게, 어떤 의미로 결정되었는지 전하고 있는데 작년 4월 11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었던지라 더 눈여겨보게 됐다.
3·1운동의 직접적 결과물인 임시정부는 상하이와 한성에서 수립한 두 개뿐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려 8개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그중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임시정부는 실체가 있고, 조선민국임시정부·대한민간정부·고려임시정부·임시대한공화정부·신한민국임시정부 등 나머지 5곳의 임시정부는 계획 단계에만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 160쪽.
그동안 학창시절 수업이나 역사서적으로도 접하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중에 여성들을 소개해놓은 점도 눈길을 끌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고 국경을 넘나들며 밀사 역할을 해내어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린 정정화를 비롯해서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란 수식어로 늘 따라다니는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저격수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삼은 인물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 하러 나가보세’라는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장려했던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등 독립운동에 관련한 역사나 인물들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김향화는 2개월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징역 6개월의 확정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를 보면, 8호실에 유관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수감된 모습이 나온다. - 297쪽
일제의 탄압과 핍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이들의 기록을 만날 수 있어 정말 유익했지만 더러 아쉬움도 있었다. 본문 곳곳에는 내용와 관련한 사진이 수록되어 있지만 ‘표석’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책 뒤쪽에 따로 표석만 모아놓았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서울편>이 아닌데 왜 지방에 관한 내용은 없을까. 의문이 들었다. 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덮자마자 ‘부산의 독립운동’을 검색했다. 그랬더니 동래사적공원에는 ‘부산 3.1 독립운동 기념탑’, 중앙공원에는 ‘부산광복기념관‘이 있고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란 곳도 있었다.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있는 날이 되면 시간 내어 가족들과 한번 방문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