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최진석 지음 / 북루덴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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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됐을까. 5~6년 정도 된 것 같다. 인문고전 독서토론모임을 시작하면서 인문학이 대체 뭔지 궁금했다. ‘그냥 문..이에요,라고 말하는 지인이 있는가 하면 두 말 않고 철학!’이라고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종합해보면 철학은 기본적으로 포함된 것 같은데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져봤다. 그때 읽었던 책이 <인간이 그린 무늬/최진석>였다.



저자는 인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골치 아프고 난해한 이론이나 고차원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도구 같은 것이라면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간의 동선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명쾌한 설명이었다. 지인이 인문학을 ..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후로 저자의 책은 챙겨서 읽게 됐다. 노자와 [도덕경]을 바탕으로 인류가 철학을 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던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인류 역사에 언제나 위기는 있었다면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철학이 필요함을, 그러려면 먼저 철학을 고리타분한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며 일침을 가한 <탁월한 사유의 시선>까지. 저자의 글을 읽을 때면 느슨하게 늘어지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출간 소식이 누구보다 반가웠다. 이번엔 어떤 걸 가르쳐주시려나 기대가 됐다. ‘이제는 건너가자.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라고 적힌 띠지를 벗기고 표지를 살펴보면서 깜짝 놀랐다. 왼쪽 아래 귀퉁이에 국회의사당이 뒤집혀 있었다. 비스듬히 그어진 은 단순히 선이 아니라 예리한 칼로 베어버린 것 같았다. 띠지의 건너가자라는 것의 의미가 대체 뭘까 더욱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에는 정치 공작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지금은 정치가 사라졌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사회 통합이 이상적인 일로 간주되지만,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데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면 차라리 분열을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해버리는 것이죠. - 9~10.



삼십대 초반의 저자가 홍콩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 책은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건이 어떠한지, 중국과의 관계,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강조한다. 친일 청산 문제에서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처럼 전쟁으로 주권을 빼앗긴 게 아니라 눈만 꿈뻑이다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우린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줄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일을 진영의 논리로 다루니, 국가는 표류할 수밖에 없다. 종속적이고 집단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를 독립적인 사고 능력으로 집요하게 다루지 못하고 바로 반대편을 선택해버리거나 논리를 임의대로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88.



촛불집회로 탄생한 정부,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도 풀어놓았다. 대통령이 처음 내세웠던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약속했던 인사 5대 원칙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통령의 고유함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말한다. 과거와 결별하려면 먼저 내 과거와 결별해야 하듯이 적폐 청산도 내 안의 적폐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고. 저자의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는 글이 발표되고 나서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던 때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글이 오히려 왜곡 해석되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가 놀랄 정도로 눈부신 초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은 매우 짙다. 나라의 모든 정책과 노선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재건과 성장에 맞춰져 있다 보니 인권이나 참된 민주화에 대한 의식은 그에 비해 성장하지 못했다. 이미 예전에 폐기했어야 할 낡은 프레임을 갖고 목청 높이는 정치세력이야말로 자기 탈피를 못하는 사람이라며 꼬집는다.



문제 없는 부부도 없고, 문제 없는 국가도 없다. 문제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미래적으로 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능력이다. 모든 발전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노력의 결과다. -175.



목차에 상관없이 매일 조금씩 끌리는 대목부터 읽어나갔다. 뒤표지의 철학자가 낱낱이 짚어낸 대한민국의 문제라는 문구처럼 저자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잘 드러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저자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나로선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다. 진정한 민주화를 쟁취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정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 저자는 매우 답답했던 듯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일개 전업주부인 나조차 지금의 우리 정치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왠지 고개를 젓게 된다.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저자의 생각이 미래인가?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 239.



내겐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중학생 아들이 있다. 온라인 수업에 농땡이를 치고 시험을 곱게 말아먹는 아들을 보면 난 답답하기만 하다. 아들 인생이니 내비둬,하고 싶지만 아들의 미래가 어떨지 경험상 그려지기 때문에 자꾸만 다그치게 된다. 중학생을 거쳐온 선배로서 조언과 충고를 한다. 하지만 아들은 나의 모든 얘기가 그저 지겨운 잔소리에 불과하다.



난 저자의 글이 잔소리로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온라인에서 검색만 하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정치논평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글에 가득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철학자의 냉철함으로 짧으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단 하나의 화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각각의 글마다 발표된 시점을 수록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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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구둣방 - 소리 없이 세상을 바꾸는 구두 한 켤레의 기적
아지오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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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족저근막염 진단을 받았다. 평소에도 운동삼아 많이 

       걷기는 해도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8년 전에 친정엄마가 병원                 에 입원하시면서 집과 병원을 매일 왕복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볼일을 마치기 위해 발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발에 무리가 간 상               태로 오래 지속된 탓이었을까. 걷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리

       는 통증에 밤잠을 설치는 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다. X레이                를 찍니 발꿈치에 뿔 같은 게 삐죽 돋아난 게 보였다. 의사는 

       “너무 부지해서 생기는 병”이라며 치료와 더불어 두 가지를 당부                했다. 걷는 걸 줄이고 편한 신발을 신으라고.

가격과 착용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운동화를 찾기란 어려웠다. 적당한 가격에 예쁘게 빠진 운동화는 대체로 발볼이 좁았다. 발볼에 맞추기 위해 치수를 크게 하면 오히려 발이 더 피곤하고 다리도 부었다. 엄청난 소음과 따끔따끔한 통증을 참고 체외충격파 치료를 받고 미친 듯이 가렵다는 봉침도 맞으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은 거의 반포기 상태라고나 할까. 걸으면서 짬짬이 스트레칭 하고 저녁엔 아킬레스로 이어지는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면서 통증이 더 심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는 게 전부다.


‘아지오’를 알게 된 건 문재인 대통령의 신발을 통해서였다. 닳을대로 닳아버린 신발 밑창을 보고 저 신발은 도대체 얼마나 편하길래 저렇게 되도록 오래 신으셨나 궁금했다. 대통령의 신발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당연히 신발을 제작한 업체 ‘아지오’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시각장애인이 대표로 있는 업체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신발을 제작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그때 ‘아지오’는 이미, 폐업한 상태였다.

여기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직원들에게 호기롭게 말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그 약속은 희망고문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멀쩡한 얼굴로 직원들을 볼 낯이 없었다. (……)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에 유석영은 마음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16쪽.

한 땀 한 땀 실과 바늘을 놀려 구두를 짓듯 제작된 책 <꿈꾸는 구둣방>. ‘아지오’가 궁금해서 선택한 책의 ‘첫인상’은 ‘정성’이었다. 아지오의 구두는 천연가죽으로 된 신발이라는 걸 드러내듯 가죽 질감의 표지에서, ‘당신이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산 사람 치고 발이 무사한 사람이 없다’는 속지의 문구까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감동이란 것이 훅 치고 들어왔다. 난 정치인도 아니고 유명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50대의 전업주부일 뿐인데 이런 나에게 공감해주고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며 위로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지오의 대표 유석영씨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앞을 볼 수 없다는 악조건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에서 방송인으로,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며 ‘신발만드는풍경’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빨리, 많이’가 아닌 ‘제대로 만든 수제 고급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이야기가 <꿈꾸는 구둣방>에 수록되어 있다. 첫주문으로 ‘수녀화 300켤레’를 받고 나는 듯 기뻤지만 제작과정은 험난했으며 아지오를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야기, 대선후보였던 문재인과의 만남과 낙선 후 아지오가 문을 닫은 것까지.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있었던 것이다. 5.18 묘역에서 무릎 꿇고 참배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낡은 구두 사진 한 장.

‘대통령의 구두’로 대박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는 업체일거라 생각했던 아지오는 개업 3년 만에 폐업이라는 실패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구두’로 인해 경영에 대한 지식도 탄탄한 자본도 없이 출발한 아지오가 어떤 목적과 마음으로 신발을 만들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아지오는 기적적으로 다시 재기를 한다.

‘아지오’란 이름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책을 읽기 전에 난 ‘아지오’가 ‘알지요’는 아닐까 생각했는데 본문에 이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아지오’란 이탈리아어로 ‘편안한’ ‘안락한’이란 뜻이라고. 아지오는 알지요. 어떤 구두가 진짜 편안한지 알지요.

      패자는 말이 없다지만 우리는 실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실패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있다. 우리의 실패와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을 나누면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고도 실패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실패가 누군가에게는 교훈

      과 지혜가 될수 있지 않을까. -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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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
박한선.구형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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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이었다. 지구의 역사 중에서 감염병으로 인한 팬데믹을 다룬 기사를 읽었다. 지구의 나이를 45억년으로 봤을 때, 박테리아는 35억년, 바이러스는 45억년과 35억년 사이쯤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런 다음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감염병이 있었는지 짚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언급된 아테네 역병(장티푸스 추정), 로마제국의 안토니우스 역병(천연두, 홍역) 같은 감염병을 비롯해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최대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신대륙 정복에 나선 유럽인들에게 묻어간 천연두로 인해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95%가 사라졌으며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은 1년 조금 넘는 동안 세계인구의 5천만~1억명이 희생된 역사상 최단기간에 최대 사망자를 낸 팬데믹이었다.

 

 

그리고 2020,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현대 의학과 과학은 과거에 비해 눈부시게 발달했는데도 감염병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감염병 인류>는 검은 옷에 날카로운 부리 모양의 마스크를 뒤집어쓴 페스트 치료사가 그려진 표지에서 까뮈의 <페스트>를 연상시켰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란 부제와 띠지에 적힌 코로나19 팬데믹의 이정표 같은 책이라는 이재갑 교수의 문장이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감염병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는데 <감염병 인류>로 그것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책은 신경인류학자 박한선과 인지종교학자 구형찬의 공동저술로 이루어졌다. 코로나-19가 시작되었을 때의 혼란을 언급하는데 202012월 말 전세계 사망자가 170만 명이라는 대목에서 놀랐다. 2021424일 현재 전세계 확진자는 14천 명을 훌쩍 넘었고 사망자는 3백만 명이 넘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코로나-19는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기세를 떨치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인류를 괴롭히는 1400여종의 병원체 대부분은 인류 스스로 불러들인 녀석들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진화사는 곧 감염병의 진화사입니다. - 8

 

 

책은 1장에서 인류의 진화와 감염병의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언급하는데 두 저자의 전공과 관련있는 부분이어서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특히 코로나-19에 대해 너의 이름은’ ‘너의 정체는’ ‘너의 치료는으로 나누어 차분하게 코로나-19에 접근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술혁신은 늘 대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신석기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은 모두 인류를 큰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감염균은 새롭게 변화한 환경에 재빨리 적응했고, 수많은 사람과 가족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사실 기술혁신은 역설적으로 인류사적 퇴보에 가깝습니다. -37

 

 

코로나-19 상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조상의 삶, 우리 조상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시의 인류가 역병을 접했을 때 보이던 행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는 우리 안의 원시인입니다. - 69

 

 

인류의 역사에는 주기적으로 바이러스 유행이 있었다고 하는데 인류가 수렵과 채집활동을 하면서 쥐와 파리 같은 불청객과 함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함께 반갑지 않은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의 첫 단추로 짐작되는 인수공통감염병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갈수록 점점 지독하고 심각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는 늘 팬데믹 지구에서 살아왔습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팬데믹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팬데믹에 낯선 목록이 하나 더해진 것뿐이죠. - 91.

 

 

기생체와 숙주, 면역체계에 관해서는 미생물, 기생충,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쪽으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면역을 수비하는 쪽으로 설명해놓았다. 인류의 역사는 불의 발견으로 획기적으로 발전했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게 아니었단다. 불과 옷의 발명으로 인해 인간은 결핵과 발진티푸스 같은 신종 감염병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종 감염균은 도표로 된 병원체 피라미드을 수록해 놓아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수비팀인 면역이 고장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알레르기의 역습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하니 놀라웠다.

 

 

기생충은 기생충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끝없는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애매한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 오랜 세월 동안 감염균과 면역계는 공진화했습니다. 너무 약한 면역도 좋지 않지만, 너무 면역도 좋지 않습니다. (……) 그런데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도 감염병과 공진화했습니다. - 174.

 

 

이후부터는 인간의 면역체계가 감염병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지만 단점도 많아서 혐오와 회피, 두려움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고 치료도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혐오와 편견 때문에 그들에게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대목은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합니다. ‘말고는 다 더럽답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감염병 상황에 부닥치면 모두 불안합니다. 누가 감염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가속화됩니다. 고리를 끊지 않으면 끔찍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이미 무수하게 겪어온 일입니다. - 261

 

<감염병 인류> 전체를 꿰뚫는 단어를 뭘까. 이 책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단어 하나를 선택했다. 본문에서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단어. 바로 공진화이다. 공진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둘 이상 혹은 여러 개의 종()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여 가는 것이다. 첨단정보가 돈이 되고 권력이 되면서부터 핵심 정보를 캐내려는 해커와 막고 보완하는 화이트 해커의 경쟁이 치열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듯이 감염균과 인간의 면역체계 또한 비슷한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 언제 끝이 날지 결론이 내는 건 섣부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무조건적인 두려움과 공포, 타인을 혐오하는 것으로는 팬데믹 사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철함이 아닐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각자가 자신의 도덕관, 윤리관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 즉 인간에 대한 투명하고 정직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불확실하고,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거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질병의 역사에 관한 인류학적 지혜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책의 앞부분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중간중간 비어 있으며, 찢어진 페이지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전입니다. 그 책을 한 손에 쥐고, 우리는 이제 출발점에 섰습니다.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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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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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대체 뭔가. 한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고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하고 한다. 명확한 것을 알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은 학문의 분야에 칼로 구분하듯 명확함을 바랬던 건 잘못된 접근이었다. 그저 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의 책이 출간됐다. 예전에 국내의 석학들과 교육, 종교, 사랑, 생명, 문화 등의 주제로 대담을 한 것을 책으로 출간한 것에서 도정일 선생의 글을 처음 만났다. 오래전이라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도정일 선생은 대담집에서 인문학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랍답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인문학적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이라는 부제의 <만인의 인문학>은 저자와 두 번째 만남이면서 동시에 처음 만나는 책이기도 하다.

 

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삶의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인문학은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 - 책머리에, 4.

 

<만인의 인문학>은 저자가 여러 잡지와 매체를 통해 발표한 글을 모아서 출간한 것이다. 책 뒤쪽에 기록된 날짜만으로 보면 대략 1992년부터로 시기만 보면 오래되지 않았나 싶지만 책을 읽어나갈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에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책은 만인의 시학’ ‘만인의 인문학’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만인의 시학에서는 대체로 언어와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하기를 즐기고 모든 것을 연결시킨 것이어서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거나 인간의 인생이 과연 문학과 별개이겠냐는 대목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이들의 반어적 언어사용을 얘기하는 대목에선 대중탕에서 흔히 겪는 일화가 생각났다.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근 어른이 어유, 시원하다를 연발하자 아이가 온탕에 한쪽 발을 담궜다가 얼른 빼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중얼댔다던가. 고놈 참 맹랑하네 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저자는 부모가 그런 아이를 북돋아줘서 그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반대로 말하고 돌러대며 말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 또한 길러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늘, 부단히, 거꾸로 생각하고 반대로 말하기를 연습시킬 필요가 있다. 창조적 사유와 관찰을 위한 교육,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게 하는 교육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62.

 

2만인의 인문학부터 하나의 글마다 해당 되는 키워드를 달아놓았는데 인문학적 탐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이다. 인간이 왜 동물과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잘먹고 잘사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소망인데 그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행복이라면 무엇이 행복인지. 인간은 어떨 때 행복한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근원적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근원적 질문을 잃어버린 개인과 사회는 근원적으로 불행하다.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의미의 틀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철학적 반성의 순간을 놓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 - 125.

 

로마황제인 아우렐리우스에게 특별임무를 띤 노예가 있었는데 그의 임무는 바로 하루 중에 몇 번씩 황제에게 폐하, 폐하는 인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장 높은 위치, 최고의 권력을 거머쥔 황제가 자신이 인간, 그것도 유한한 생명을 지닌 약한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도록 취해놓았다는 조치는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여행이 몹시 그리운 요즘이어선지 여행이란 키워드의 글도 인상적이다. 여행자는 흔히 두 가지 만남을 경험한다면서 여행지에서 아름답고 진기한 많은 것을 보지만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한다면서 여행이란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그리도 또 하나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문득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깨닫는다는데...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 152.

 

도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무엇이 인문학인가. 인문학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라는 인간은 무엇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인문학이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의미. 가치. 목적을 생각하고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때의 가치는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며 어떤 목표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도 아니다. ‘본질적인 가치는 수단적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가치라면서 일본에서 취객을 구하기 위해 철로로 뛰어든 의인 이수현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결국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나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좋은 삶, 행복한 삶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중요한 사회적 효용의 하나는 그것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진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실패하는 곳에서는 정치가 실패하고, 경제가 실패하고, 사업이 실패한다. () 수단과 목적의 자리가 뒤바뀌고, 어떤 것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인가를 따지는 토론도 불가능해진다. 인문학자를 정치인으로 뽑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 같은 것 잘 모른다고 공공연히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표를 줄 필요가 없다. - 192~3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탈레반을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사실 그 손가락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 속의 탈레반은 얼마나 많은가! - 211.

 

평소에 늘 접하는 일상의 예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놓은 곳에서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되지만 사회적인 문제, 세계적 아니 인류가 풀어야 하는 질문, 경고에서는 누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뜨끔해졌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 카톨릭 성직자들에게 보냈다는 질문을 보고선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질문들이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질문들. 나란 존재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 적어도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한동안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왜 이 지구에 있는가?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의 목적인 무엇인가? 애당초 인간이 지상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는 무엇이며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지구에 인간이 필요한가?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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