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운 세상 속 부서진 나를 위한 책 - 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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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에서 데비 텅은 자신에게 찾아왔던 우울증과 불안, 자책, 그로 인해 괴로웠던 경험과 상담을 받으며 서서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고, 세상에 자신의 경험을 알렸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저같은 사람이 또 있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이란 부제가 붙었으니 아마도 우울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데비텅이 언제나 내세우는 MBTI 인 INFJ 인 사람들은 더 공감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그간 데비텅 읽고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 책은 그중 제일 별로였다. 내가 우울하지 않아서 그런건지 성격이 너무 달라서 그런건지 읽는 내내 친구라면 관계 끊고 싶어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가 됐든 살을 붙이지 않고 뼈대만 말하자면, 그러니까 인정사정 없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아픈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싫다.



자기가 가진 부정적 감정들 혹은 고통스러운 감정들, 그것이 크던 작던 표현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감추고 쌓다가 우울증으로 터져나온 걸로 데비 텅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데비 텅이 자기 자신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몫의 행동들을 해내지 못함으로써 자신을 혹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행동들이 분명 사소하게 나타나는데-그래서 내가 친구하기 싫은거임- 자기가 표현을 안한다고 혹은 감춘다고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영 수긍이 되질 않는 거다. 중간까지는 읽다가 그냥 팔아버릴까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한 사람이 1인분의 몫을 살아가는게 제일 좋고, 그게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가끔 이렇게 우울증이든 뭐든 어떤 연유로 채 1인분을 못해낼 때, 0.7인분 정도의 몫만 해내고 있을 때, 그럴 때에 짜증내거나 돌아서는 게 아니라 부족한 0.3인분을 채워갈 수 있도록 옆에서 머물고 들어주고 감싸 안아주는 것. 데비 텅이 서서히 세상 속에 다시 섞여들어가고 자기를 돌볼 수 있게 된 건, 너 상담 선생님 찾아가면 어때? 너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오늘은 기분이 어때? 라고 물어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은 거다. 한결같이 옆을 지켜주는 사람, 0.7인분이 되어도 떠나지 않는 사람.


데비 텅은 전작에서도 INFJ 인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건 자신의 애인이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연결해줘야만 세상과 이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그 때에도 그 연결을 내가 해주고 싶진 않다는 생각을 했다.

또 이번 책에서 데비 텅 보면서 데비 텅 옆에 나는 못있겠다 싶은거다. 


역시 나는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군,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야,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자신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옆을 지켜주는 애인이 데비 텅 옆에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데비 텅이 보냈던 시간을 마찬가지로 보내는 사람들이라면, 성향이 데비 텅 같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맞춤한 연인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나 말고. 나는 그런 사람 아님. 



아무튼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저마다 다른 사람들과 친구하고 사랑도 하고 그래서 천만다행이다. 0.7인분 한다고 떠나버리는 나같이 싸가지 없는 사람만 있으면 세상 각박해서 어찌 사누.. 온정없는 월드가 되겠지. 데비 텅 같은 사람이 더 많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으로 감싸주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데비 텅의 작품이 한국에 번역도 되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겠지. 



조카가 데비 텅 좋아해서 신간 나왔다길래 주려고 산거였는데 나는 여태 읽은 데비 텅 중에 제일 별로였다. ㅎㅎ

그래도 조카는 내가 아니고 내가 조카도 아니고, 조카 엠비티아이 뭔지 모르겠지만(다른 사람꺼 들어도 까먹고 내꺼 외우는 것도 3년 걸림), 조카는 또 좋아할 수 있으니,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임을 존중하며 조카에게 역시 계획대로 주도록 하겠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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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4-06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하도 MBTI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종종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서 해봤는데 (결과 INT*) 해설을 보면 꼭 다 맞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리고 살아가면서 성격은 변하기 마련이니 재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 ^^

다락방 2023-04-07 15:12   좋아요 2 | URL
저는 하긴 했지만 딱히 관심도 없었고 그리고 해봤자 ‘이걸로 나를 어떻게 알아, 나는 나다!!‘ 이런 마인드여 가지고 ㅋㅋㅋ 아무튼 데비 텅은 제 타입이 아닙니다. 흠흠.

책읽는나무 2023-04-07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우울할 땐 뇌과학>을 읽고 있는데요. 뭔가 죄다 내 얘기인 것 같아 급 우울하다가, 우울증 예방법? 치료법 같은 얘기들이 뒤에 나올 것 같아 귀 쫑긋입니다.
다락방 님은 긍정적인 뇌 회로가 발전되어 있는 사람이시군요? 뇌 회로쪽이 발달되어 있는 구조가 긍정적, 부정적으로 발달된 부분이 다르다는군요. 부정적인 편향이 심한 사람들이 당연히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크구요. 예방하는 방법은 낮에 햇볕 보고 밤에 잘 자야 한다던데 다락방 님은 매일 예방하고 계시기에 우울증을 앓지 않으시는 건가?싶습니다ㅋㅋㅋ
그런 영향을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우울하려다가도 우울증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23-04-10 09:37   좋아요 1 | URL
저는 부정적인 사람들하고 얘기하면 피로해집니다.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기보다 안될 가능성을 품고 얘기하는 건 정말 기빨리고요, 그렇게 안된다는 생각만 하는데 될게 뭐람 싶어서요. 말씀하신 대로 긍정적인 뇌 회로와 부정적이 뇌 회로가 있는거라면 저는 긍정적인 쪽만 발달한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낮에 부지런히 햇빛도 보고 밤에도 잘 자네요. 책만 펼치면 잠이 쏟아지는... ㅋㅋㅋㅋㅋ

책나무님 해 좋을 때 부지런히 걸읍시다. 걷는게 최고인 것 같아요! >.<
 
버거운 세상 속 부서진 나를 위한 책 - 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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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내가 우울하지 않아서 그런건지 영 별로였다. 중간까지 너무 짜증났네. 친구였으면 서서히 연락 끊었을 것 같고 만남을 피했을 것 같다.
데비 텅이 내세우는 본인의 MBTI 인 INFJ 가 나랑 안맞는건지, 사실 그게 뭔상관이야, 걍 데비 텅 나랑 안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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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4-06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장님 INTJ랑은 맞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4-06 17:18   좋아요 2 | URL
전 사실 엠비티아이에 대해서라면 잘 모르겠고 데비 텅 같은 사람이랑 친구하기가 너무 싫으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관찰자 2023-04-07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남편이, 너는 너무 너랑 안 맞는 사람이 많다며 한소리 했는데,
내가 안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왜 친해져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다니는 골프장에 같은 시간대에 마주치는 여자 사람 2명이 있는데
한 명은 핑크색 골프채를 치는 20대 여자아이(일단 핑크색 채가 싫고, 너무 젊어서 싫...어..?)
한 명은 저랑 비슷한 나이인데, 골프 프로님에게 (단단한 남자?) 자꾸 반말을 해서 싫어요.

아니, 대체 골프 레슨을 받는데, 얘기 할 게 뭐가 있나요? 치라고 하면 치고, 다시 하라면 다시 하고 하는거지.
어차피 혼자 꾸준히 연습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을.

그랬더니 우리 남편은 너무 저더러 너무 별나다면서, 세상 사람 다 싫어서 대체 누가 좋냐며.ㅠㅠ
저는.... 제가 제일 좋은 건가봐요.


다락방 2023-04-07 12:16   좋아요 1 | URL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딱히 관심이 없어서 저 사람 싫다 라는 감정은 잘 안느끼는 편인데요 그냥 무관심에 가까운데, 그런데 이렇게 책이나 영화에서 만나는 인물들을 보다보면 ‘으 친해지기 싫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대체적으로 그게 정신적으로 약하거나 아픈 혹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부정적인 사람들이더라고요, 이 문장만으로 되게 별로잖아요. 세상 나쁜인간의 느낌? 약자 혐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같이 있으면 제 기가 빨려버려가지고 .. 어휴.. 제가 만나기 싫어하는, 친해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다른사람 에너지 빨아먹고 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에너지 빨리기 싫어요 ㅠㅠ

책읽는나무 2023-04-07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행이네요. 전 INFP에요^^

다락방 2023-04-08 17:07   좋아요 1 | URL
엠비티아이로 저런 우울증이 느타날 것 같진 않고요 개인 성향인 것 같아요. 아픈거잖아요. 이 작가가 저랑 안맞는 타입같아요. 책나무님은 제타입 ㅎㅎ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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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이 강의라면 이 책은 그 강의에 따른 교재나 다름없다. 셋뚜셋뚜!!
선생님의 관점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책에서 선생님도 이미 그럴 수밖에 없다 언급하신 바,
어쨌든 많이 배웁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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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28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셋뚜셋뚜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28 19:0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3-28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사표 던지고 공부 매거진 내신 샘!! 어준이떠중이들 물리치고 가자 가자 ㅋㅋㅋ 그전에 용산석열… 이 생각나서 갑자기 기운이….

다락방 2023-03-29 07:39   좋아요 0 | URL
<용산통신>을 뉴스처럼 매일 해주셧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건 힘드실테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흑흑 ㅠㅠ

얼음장수 2023-03-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저도 사서 읽고 있는데, 오디오 매거진 소식 얻어갑니다. 운전할 때 (듣기에는 밀도가 너무 높을 것 같지만) 잘 들어보겠습니다. (듣다가 운전이 위험해질 것 같긴 하네요.)

다락방 2023-03-29 13:46   좋아요 0 | URL
얼음장수 님, 정희진 선생님의 오디오매거진 정말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사실 밥먹으면서 어떤 영상을 보는 것은 다소 산만한 느낌인데 들으면서 밥 먹는 건 좋더라고요. 전 주로 밥 먹을 때랑 걸을 때 듣곤 합니다. 운전은 그렇지만 항상 조심하셔요!!

햇살과함께 2023-03-2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야 하는데 말이죠. 셋뚜라니 빨리
읽도 싶네요~!!

다락방 2023-03-29 16:45   좋아요 0 | URL
오디오 매거진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매거진 쪽이 강의처럼 더 잘 풀어진 것 같아요. 그래도 그걸 듣고난 후 읽으니 더 좋았어요.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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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는 마술사다. 마술사였던 아버지가 쓴 책을 교본으로 삼아 언제나 몸에 지니면서 마술의 기술을 터득하고 연습하고 그리고 쇼를 한다. 아직 관객이 많지도 않고 무대라고 해봐야 시장에서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게 전부이지만, 마술을 사랑한다. 그런 제니에게 탐정 '로버트'가 찾아와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종교로 자리잡은 심령학에 대한 비밀을 함께 파헤치자는 것. 폭스 자매들이 이끄는 강력한 심령학회 회원이 되어 영매를 만나 상담도 받고 그렇게 죽은 남편을 불러내달라고 하면서 그들의 사기 행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조사해달라는 거다. 게다가 그렇게 이 탐정회사의 직원이 되면 수당도 크게 받는 터라, 그 돈이라면 생활비는 물론 마술 쇼도 더 해볼수 있고 게다가 심령이라니 호기심도 생겨 제안을 수락한다.


그러나 제니가 도대체 어떤 사기가 벌어지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어쩌면 심령을 정말 만날 수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이 심령을 본다는 세 자매에게 이끌린다.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죽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찾았건만, 엉뚱한 병사가 찾아와 말을 거는거다. 제니는 그 병사가 자신이 본 적 없던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걸까 궁금해한다. 자매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비밀을 알아보고자 하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나고, 이에 그녀는 세자매의 대장인 언니 리아를 찾아가 '나도 영매가 될게' 라고 한다. 그렇게 계약서를 쓰고 나서야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심령과 만날 수 있었는지를 듣게 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처음 제니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했던 탐정 로버트와 그리고 자매들에 얽힌 사연들이 차차 드러나면서 책은 결말을 향해 간다. 죽은 영혼을 불러내 대화를 한다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틈에 나도 제니처럼 '아니 잠깐만,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되어버린다. 이야기는 흥미롭게 진행되고 게다가 영화 <사랑과 영혼GHOST>를 몇번이나 보았으므로 영혼과 대화하고 빙의되는 것도 머릿속에 너무 잘 그려졌다. 대수롭지 않았던 하나의 작은 일이 그러나 큰 일로 닥쳐오고 그 일들이 여기와 저기에서 얽혀있고 어릴 적의 죄책감이 시간이 오래 지난후에도 여전히 남아있고 하는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펼쳐진다. 읽으면서 영화화 되어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이야기로도 재미있고 캐릭터로도 아주 매력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는 내내, 그들이 정말로 죽은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 넓은 지구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좀 있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거다. 



얼마전에 '유키 하루오'의 《방주》라는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불쾌하고 짜증이 났더랬다. 1993년의 남자 작가가 쓰는 글은 이런거란 말인가. 나는 젊은 남자 작가들에 대한 편견이 생겨버렸다.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 팔리는 책을 쓸 순 있겠지만 그 책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윤리도 없고 철학도 없는 책을 써내다니. 필립 로스가 그리워지는 거다. 필립 로스는 안타깝게도 책 속에서 페미니스트를 비아냥 댈지언정, 글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썼거등? 그리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고! 그런데 젊은 남자 작가들은 늙은 남자 작가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거야? 막 이렇게 되었단 말이다. 화딱지가 났다. 그런데,


《심령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의 '조나탕 베르베르'는 달랐다. 이 1994년의 남자 작가는 무엇보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캐릭터도 생생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알고 그러나 역사도 공부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줄 분명히 알고 하는 이야기를 나는 읽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젊은 남자 작가들이 다 그런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아닌' 쪽에 있는 그런 작가였다. 그래서 기분이가 좋아졌다. 


일전에 '김영하'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느꼈지만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을 책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조나탕 베르베르의 책에서 그걸 느꼈다. 음, 정확히는 그것과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표현하고 있었던 문장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이거지! 했던 구절은 이거였다.



「내가 탐정 일을 시작하기전에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뭔가를 당신에게 알려 줘도 되겠소? 핑커턴 지침서」에서 읽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자비로 배워야만 했던 교훈이지. 모든말은 그 말을 믿는 사람만을 얽어맨다.」 - P228



나는 사람들이 각자가 믿는 것이 있고, 믿는다면 거기에는 힘이 실린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꿔 말하면, 그걸 믿는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의 결말이 좋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건 정말 읽는 독자인 내 몫의 만족감이었는데, 음, 그러니까 그런 거다. 내가 물잔에 새로운 물을 받고 싶다면 내 물잔을 비워야만 가능해진다는 것.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삶의 진리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이야기로 다시 만나야 하는 때가 온다. 새로운 물을 받아야 하는데 물잔이 가득 차서 받고 있지 못했고 나는 그러나 이미 가득찬 물잔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물을 받을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이제 내 물잔을 비워내야 한다고, 그리고 새로운 물을 받아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정을 넘겨있었고 자려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가, 그 물잔을 비워내는 일을 미룰게 뭐람, 하고 다시 불을 켜고 일어나, 침대 헤드에 오래 머물렀던 어떤 사진을 치웠다. 



「가장 힘든 일, 그건 놓아 버리는 거예요.」 마거릿이 말했다. -P.603


「가장 힘든 일, 그건 놓아 버리는 거예요.」 마거릿이말했다.
제니는 불길 위로 책을 갖다 댔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선택을 다그치는 열기가 곧 팔뚝을 휘감아옴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떨렸고, 제니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이 책을불길에 던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에 매달려 보려고 애를 썼다. 제니는 자기 자신만의길을 개척하는 유일한 방법이 남들이 다 갔던 길을 따라가기를 그만두는 것임을 깨닫고,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 P603

제니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응시했고, 그 손을, 벽난로의 오렌지 빛에 물든 장밋빛 손가락을, 처음으로발견한 듯했다. 그녀의 등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무게가 마침내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떨어져 나간것 같았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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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27 1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식 사진을 치웠군요.

다락방 2023-03-27 10:56   좋아요 1 | URL
그건.. 아닙니다. 음식 사진은 결코 치울 수 없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성 특권 - 여성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케이트 만 지음, 하인혜 옮김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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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발생시키는 건 그래도 된다는 자기 수긍이고 그것은 자신에게 특권이 있다는 착각에 다름 아니다.
케이트 만은 세상에 만연한 여성혐오가 어떻게 남성의 특권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잘 보여준다. 도대체 그 특권 누가 줬나 생각해보니 그냥 지들이 주고 지들이 가졌다.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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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3-24 2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분명 핵심적인 백자평인데, 마지막 문장에서 상상하다 갑자기 혼자 빵 터졌습니다.
그냥 지들이 주고 지들이 가졌다!!!

다락방 2023-03-27 09:0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그런데 마지막 결론 부분이 좀 별로였어요.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쓴 편지에서 좀..

책나무 님, 제가 일전에 댓글로 말씀드리려고 했었던건데요, 지금 말씀드리네요.
책나무 님이 이 책을 잘 넘기실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읽은 책으로 인한 근육이 쌓인게 맞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이 책이 쉬워서가 아닙니다. 저도 그리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로 책나무님도 역시! 그동안 차곡차곡 차근차근 관련 도서들을 읽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책나무 님의 독서 근육이 탄탄하다는 걸 결코 잊지 마세요!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