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료되었습니다 - 모든 미해결 사건이 풀리는 세상, 제6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대상작
박하익 지음 / 노블마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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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일이 몇 년 전부터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진홍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해당해 죽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처벌한 뒤 홀연히 사라지는 현상이었다. 이들은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거나, 가해자가 사법 기관에 의해 온당한 처벌을 받지 못한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오직 가해자만 노렸으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원한을 갚은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p.11)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처벌한다는 소재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일까.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다. 한 번 손에 들고나니 끝장을 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것처럼 빨리 뒷장을 넘기고 결말에 이르고 싶다. 현실에서는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미 죽은 자가 살아돌아와서 자신을 죽인 가해자를 처벌한다니, 오, 나는 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서 속으로 바랐다. 정말 이런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윤리적으로 옳든 그르든간에 강간을 저지르고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그 피해자들이 나타나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통쾌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바람일뿐, 현실이 된다면 아마도 나는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그러니까 내가 뭘 바랐든 혹은 바라지 않든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다. 근래 읽었던 한국 소설중에서 가장 재미있다. 이야기적으로 완벽하다고 회자되는 다른 많은 한국 소설들에 대해서 나는 감탄을 할지언정 감동은 받을 수 없다고 종종 생각해왔는데, 이 책 안에는 처음부터 감탄이 존재하며 그 사이사이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던 죄책감을 모르던 범죄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은 사랑을 알게하는 거라니, 아. 책장을 덮고나면 어쩐지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 책에 문학적 기교나 세련됨은 없다. 그러나 이야기의 재미로서는 충분하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더 좋을 결말에 대해서라면 나는 살짝 아쉬워하는 독자이긴 하지만, 그렇다한들 이 책의 결말에 나는 만족했다.



책장에 꽂아두고 간혹 꺼내어 아무데나 펼칠 수 있는 그런 책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몰입해서 읽고 재미를 느끼기에는 아주아주아주 충분하다. 대단히 재미있다.



그런데 뭐지, 이 콕콕 찌르는 기분은. 왜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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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표지부터도 그렇고 장르소설 같잖아요. 이런 책에 대해선 편견이 있는 거 같아요. 바로 어제 팟캐스트에서 장르소설, 순수소설 나누는 건 멍청하다고 꾸중들었는데 오늘 이러고 있네요. 표지만 보면, 그거 아세요? <어느날 갑자기> 시리즈. 그거 같아요. 그래서 감탄은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감탄과 감동이 존재하는군요, 이 책에는. 새로운걸요.

다락방 2012-06-14 09:10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 맞아요, 소이진님. sf미스테리 라고 하면 이 책의 장르가 설명이 되려나요. 전 sf 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엄청 재미있어요. 소이진님도 읽으면 엄청 좋아할것 같아요. 결말까지 다 읽고나면 소이진님은 울지 않을까...하는 짐작을 해봅니다. 훗.

레와 2012-06-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또 주문해야되는겨?! ㅋㅋㅋㅋ

다락방 2012-06-14 09:43   좋아요 0 | URL
이거 재미있어요, 레와님. ㅎㅎㅎㅎㅎ
 
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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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두께가 얇다고해서 그 안의 내용까지 얄팍한것은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그 사실을 가장 잘 증명해준다. 이 얇은 책 한 권이, 마음만 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금세 읽어낼 수 있는 이 가벼운 책 한 권이, 마음을 아주 묵직하게 만들어줬다.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 이어 이 책, 『한 여자』에서도 몇 번이고 나를 울컥하게 했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보다 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가장 나를 속속들이 잘 아는 것도 내 어머니이고 내 짜증을 가장 빈번하게 받아낸 것도 내 어머니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미 죽은 어머니를, 죽기 전에 2년 간 알츠하이머를 앓던 어머니를, 그리고 그 훨씬 전, 자신의 유년기의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두렵고 슬펐다. 나의 어머니도 언젠가는 죽을테니까. 나 역시도 언젠가는 늙고 초라해지고 힘이 없어질테니까. 문장 곳곳에서 아니 에르노는 내게 두려움과 슬픔을 가득 안겨준다.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는데, 몇 달 전부터 늘 그래오던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p.8)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리고 교양을 갖추려는 욕망과 실제로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깊은 구렁텅이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p.63)



4월의 어느 저녁, 아직 6시 반밖에 안 되었는데 그녀는 벌써 슬립 바람으로 시트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잠이 든 통에 성기가 내보임. 방 안이 무척 더웠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내 유년기의 그 여자와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가슴팍이 파란 실핏줄들로 덮여 있었다. (pp.98-99)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삶을 꾸며 냈다. 파리에 가기도 했고, 금붕어 한 마리를 사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남편의 무덤으로 데려가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p.102)



나는 그녀의 방에서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종종, 그녀는 내 치맛자락을 쥐고 고급 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듯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턱에 힘을 주고 과자 포장지를 힘차게 찢어발겼다. 돈과 고객 이야기를 했고,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웃어 댔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보여줬던 몸짓들이었고, 그녀의 인생 전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말들이었다. 나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먹이고, 만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p.105)





간혹 뚝뚝 끊어지는 문장들이 낯설지만, 그 문장들이야말로 이 책이 담고 있는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이 책은 이만큼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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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6-1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뚝뚝 끊어지는 문장이어서 더 낫네요. 가족 이야기는 언제나 뚝뚝 끊어지는 법이니까요. 상상력이 파고들 여지가 없는 이야기...

다락방 2012-06-13 14:11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에서만큼은 뚝뚝 끊어지는 문장들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 같다는 생각을했어요. 마음이 다 들어가있는 것 같아요. 그 마음이 실리는 사실들까지도 말이지요.

Jeanne_Hebuterne 2012-06-1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벼랑 끝에서 내가 잡던 글.
그러나 결국은 내 머리는 달리 움직이곤 했어요.
형용사와 부사를 빼면 무엇이 남는지를 아니 에르노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모두에게 그럴지는 미지수이지만요.
정작 이 책은 읽지 못하고, 읽은 다락방님이 부럽다는 말을 이리 길게 남깁니다.

다락방 2012-06-13 18:14   좋아요 0 | URL
아니 에르노를 다시 보게됐어요. 아니, 이건 좀 부적절한 표현이고. 아니 에르노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읽고싶어졌어요. 이미 한 권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답니다.

이 책 참 좋았어요, 쟌님.

2012-06-13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서관에서 선 채로 다 읽어버렸어요.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아니 에르노의 책 몇 권을 사버렸고요.
'엄마를 부탁해' 읽으면선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는데 그보다 훨씬 담담하게 쓴 엄마, 아빠 얘기에 질질 짜버렸어요.

다락방 2012-06-14 09:12   좋아요 0 | URL
엄마를 부탁해는 의도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려는 글이었다면 이 책은 오히려 담담하게 기술했는데도 생각과 감정을 모두 건드리죠. 부모에 대해 가장 담담하게 그러나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아니 에르노는 써낸 것 같아요. 정말 좋았습니다, 횽님.

2012-06-14 10:3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의도적으로 눈물 흘리게 하려는 글222
그래서 별로 안 좋아한다는; ㅋ..ㅋ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랑 도서관 처음 갔을 때 얘기도 먹먹했어요. 울 아부지 생각도 나고ㅠㅠ

다락방 2012-06-14 10:35   좋아요 0 | URL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전 [남자의 자리]에서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좋았어요. 저 역시도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결국은 날 이렇게 만들어준 아버지를 내가 무시하진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말이죠.

Alicia 2012-06-1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저 문장 때문에 점심 때 이 글 읽고 울었어요.

저는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어요.

다락방 2012-06-14 09: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문장이 훅, 하고 다가오더라구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가슴에 와닿는 말이에요.

남자의 자리도 좋아요, 알리샤님. 한 여자도 그만큼 좋을까, 싶었는데 한 여자는 더 좋네요, 알리샤님. 엄마 얘기라 그런가봐요.

blanca 2012-06-1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 가끔 아니 자주 우리 부모님이 노쇠해지고 그 최후를 제가 지킬 자신이 없음에 절망하고 사는 게 너무 무서워져요. 친구들의 지인들의 가족들의 부음을 들을 때 그들의 고통도 그러하지만 내가 그 고통을 겪을 지도 모른다는 게 너무 두렵고요. 이 책은 그래서 차마 못 읽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12-06-14 09:15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께 이 책을 읽으시라고 차마 권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블랑카님이 댓글로 적어주신 바로 그런 이유로 말이죠. 작가는 외려 담담하게 써냈지만 읽는 저는 아주 뜨거워지고 말았거든요. 이 얇은 책 한 권이 너무 깊이 박히네요.

레와 2012-06-14 09:42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저도 그래요. ㅡ.ㅜ

다락방 2012-06-14 09:43   좋아요 0 | URL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비로그인 2012-06-14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꼭 읽어볼게요, 다락방님. 오랜만에 와서 더 읽고 싶은 책이 많네요. 밀린 다락방님 서재글만 읽어도 보관리스트가 꽉꽉 찰 것 같아요 ( '')ㅎㅎ~

다락방 2012-06-14 09:16   좋아요 0 | URL
그동안 어디다녀온거에요? 응?
이 책 좋아요, 수다쟁이님. 수다쟁이님은 이 책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비로그인 2012-06-14 12:28   좋아요 0 | URL
잠시 마음의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좀 식상하네요 ㅋㅋ 그냥 이래저래 지쳤나봐요. 그래서 싹 다 비우고 싶었어요.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게 하리라고 다짐하면서~ 다시 책을 꼭 쥐었답니다. 오늘 점심은 건너 뛰어야 해요. 시험이 한 시간 뒤라서 ㅠ ㅠ 그럼 맛난 점심하시길.

다락방 2012-06-14 13:29   좋아요 0 | URL
오, 이제 시험 보러 들어갔겠군요! 시험 잘 봐요, 수다쟁이님. 너무나 식상하지만 시험 보러 간다는 사람한테 시험 잘 보라는 말을 안 해줄 수가 없네요. ㅎㅎ

당고 2012-06-1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확실히 엄마한테는 아빠보다 특별한 뭔가가 있어요.
아니 에르노의 연애 소설(논픽션?ㅎㅎ)들도 나쁘지 않았지만, 저한테는 확실히 이 책이 베스트.

다락방 2012-06-14 14:12   좋아요 0 | URL
저는 아니 에르노 연애 소설 한 권 읽고 오오, 이 여자는 이제 안읽어, 하고 내쳤는데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 읽고서는 이제 그녀의 연애 소설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벌써 한 권 장바구니에 넣어뒀답니다. 흣.

그렇죠, 엄마한테는 특별한 뭔가가 있죠. 이게 딸한테만 그런건지, 아들한테도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엄마는 특별해요. 그리고 이 책은 정말 좋구요.

달사르 2012-06-1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선 리뷰 <남자의 자리>도 잘 읽었는데 이번 리뷰도 뭔가 먹먹하네요. 이 책들은 읽으면 막 펑펑 울까봐 아끼게 되요. 일단 사놓기만 해놓을까봐요.

다락방 2012-06-18 11:29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남자의 자리가 울컥 거리게 했다면 한 여자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거에요. 어휴.
 
에피톤 프로젝트 - 정규 2집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노래 / 파스텔뮤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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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에피톤 프로젝트의 「눈을 뜨면」을 아주 좋아하는 여동생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대체 이사람은 어떤 사랑을 한걸까, 하고. 나는 동생에게 그가 별다른 사랑을 한게 아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같은 혹은 너같은 여자를 사랑했을 것이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음악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라고. 사랑이란게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비슷비슷하다. 별다를게 없다. 그러나 그 사랑에 빠진 당사자, 그리고 그 사랑을 끝낸 당사자에게는 특별하다. 그걸 표현해내는 걸 에피톤프로젝트가 한다.


이번 앨범을 받아들고 시디를 재생시키고서 처음엔 좀 당황했다. 내가 전(前)앨범에서 좋아했던 「눈을 뜨면」이나 「이화동」만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는 곡이 없어서. 전체적인 만족도로 기존 앨범에 못미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피톤프로젝트에 실망을 했다거나 앞으로 좋아하지 않겠다거나 하는건 결코 아니다. 아마도 반복해서 듣다보면 내 귀에 특별히 더 좋은 노래가 생길것이고 더 익숙한 노래가 생길것이다. 아직까지는 대표곡인 「새벽녘」만 좋아서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방안에 이 앨범을 걸어두면 전체적으로 만족도는 높다.



앨범의 타이틀이 『낯선 도시로의 여행』인데, 아,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걸까. 아니면 사랑하고 헤어졌던 연인이 먼 곳으로 가버린걸까. 그녀가 먼 곳에 있음을 나타내는 가사들이 귀에 들어온다.


우연히 들은 소리를 괜히 흥얼대듯
무심코 접한 한 줄의 글에 이끌리듯
손닿은 모든 것들이, 시간에 바래지 않길
나는 너에게 진심을 다해 말해
너를 끌어안고 순간에 맺힌 기억,
열 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
어떤 모습일지, 잊혀 지진 않았을지
이제 여기에서 어떤 말들을 시작할까?   - 「이제, 여기에서」 中



언젠가 먼 훗날의 나도 먼 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갈거라는 막연한 다짐때문인지 '열 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 하는 가사를 그냥 넘길수가 없다. 이 노래를 듣고 났더니 「새벽녘」의 가사도 예사로 들리지가 않는다.


밤새 내린 빗줄기는
소리 없이 마름을 적시고
구름 걷힌 하늘 위로
어딘가 향해 떠나는 비행기
막연함도 불안도
혹시 모를 눈물도
때로는 당연한 시간인 걸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함께했던 시간을 꺼내놓고
오랜만에 웃고 있는 날 보며,
잘 지냈었냐고 물어 보네     - 「새벽녘」 中



어딘가 향해 떠나는 비행기, 를 그는 허투루 넣은게 아닐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빗줄기가 '그녀를 혹은 그시간'을 떠올리게 했다면 비행기는 '먼 곳에 있는' 그녀를 떠올리는게 아닌가. 


역시 한 가수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곡을 듣기 보다는 앨범 전체를 듣는게 도움이 된다는 당연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여행'이라는 앨범 타이틀에 걸맞게 제목들도 먼 곳에 있는 누군가를 혹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나타낸다. 「터미널」, 「초보비행」, 「국경을 넘는 기차」, 「떠나자」등이 그렇다. 「믿을게」란 제목을 가진 노래도 있는데, 새삼 에피톤프로젝트란 얼마나 믿을만한 음악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하고, 그 앨범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 듯하다. 그는 전 앨범에서도 아팠고 이번 앨범에서도 아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둘 사이에 놓여있는 물리적 거리도 또 마음의 거리도 감당하기 힘들다. 열 한시간을 걸려 그곳으로 날아가도 그가 할 수 있는건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일 뿐이다.


나는 아직 이 앨범의 모든 노래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앨범에 실린 노래들의 가사들을 가만히 읽어보노라면,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노래로 듣지 않아도 나는 이미 공감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아름다운 음악에 아름다운 가사로 듣는이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것, 하나의 스토리가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 그래서 앨범의 발매소식만 들어도 가슴 떨린다. 이게 에피톤프로젝트의 능력이며 힘이다. 내가 그의 음악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아주 오랜만에 시디에 딸려온 포스터를 버리지 않았다. 방 문에 붙여둘 것이다. 나는 이 앨범을 오래오래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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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아직까진 '새벽녘'만 귀에 들어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데 동의! :)
가사도 물론이거니와 아련한 사랑 내음이 나는 보컬, 정말 애정합니다. >.<

다락방 2012-06-11 15:49   좋아요 0 | URL
아, 횽님도 그러시군요!(횽님 이라고 하니 어쩐지 형님의 뉘앙스가.. ㅎㅎ)
참 이상하죠? 모든 노래가 다 무지하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게 아닌데도 제가 이 앨범을 가지고 있고 또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되니 말예요.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요!!! 저도 완전 애정합니다! ♡

2012-06-11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1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2 0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2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1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2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06-1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눈을 뜨면을 참 좋게 들었는데, 이 앨범에서는 새벽녘말고는 확 끌리는 곡이 없더군요ㅠ ㅎㅎ 듣다가 보면 또 끌리고 그렇게 되겠죠?

다락방 2012-06-12 08:3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좀 아쉬워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믿을게]를 들었거든요. 아 그런데 갑자기 왜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걸으면서 울 뻔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dreamout 2012-06-1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린킨파크의 새앨범이 6월말에 나올 예정이어서,, 그때 한꺼번에 사려고 담아놨어요.
그런데 어제 제이슨 므라즈.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앨범 모두를 mp3로 사는 바람에.. 한 동안은 그 노래들만으로도 버틸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다락방 2012-06-12 08:39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님 제이슨 므라즈 공연 보고 오시더니 아주 흠뻑 빠지셨군요! 히히히히히. 저는 라이브를 보지는 못했지만 암스테르담 라이브앨범에서 mudhouse 듣고 아주 쑝 가가지고 그 노래를 한동안 엄청 반복해 들었었어요. 그노래도 들어보세요, 드림아웃님! 제이슨 므라즈는 랩도 할 줄 아는 섹시한 남자 ㅠㅠ

건조기후 2012-06-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라디오에서 새벽녘이 나왔어요. 불시에 들으니 더 미치게 좋더군요 ㅜ
음. 성시경이 틀어줘서 더 좋은 걸까요? ㅎㅎ

저도 저 노래 저 구절 좋아요.. 널 찾아왔어, 라고 내뱉을 때 특히.

다락방 2012-06-12 15:5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에피톤이 대세인듯 ㅎㅎ
차세정이 저를 좀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건조기후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얼음장수 2012-06-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유난히 가사가 잘 들리는 음악들인 것 같아요.
심규선의 목소리를 이번 앨범에서 들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다락방 2012-06-13 08:25   좋아요 0 | URL
우앗, 얼음장수님! 완전 반가워요! ㅎㅎㅎㅎㅎ 닉네임과 이미지를 보는데 반가움이 와락 달려드네요. 훗.

저도 심규선의 목소리를 이번 앨범에서 들을 수 없는게 아쉽긴 한데요, 에피톤 프로젝트에게 '심규선'은 저 혼자 부를때 빛나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 '한희정'은 함께 했을 때 더 빛나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한희정과는 듀엣을 하고 심규선에게는 노래를 주니까요.
아, 갑자기 심규선 말씀하시니 심규선의 노래를 마구 듣고 싶어지네요.

얼음장수 2012-06-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눈팅은 했습니다만, 지레 혼자서 겁 먹고선 흔적은 남기지 못했어요.
너무 공감 가는 글이라 도리없이 댓글을 남겼는데, 열렬히(?) 반겨주셔서 혼자서 몸둘 바를 몰라 하고 있습니다. 풉.

심규선과 한희정에 대한 생각도 무한 공감입니다.
이번 앨범에서의 듀엣곡이 이화동이나 그대는 어디에만큼 확 끌리지는 않지만,
둘 목소리의 어울림 자체는 언제나 와닿는 것 같아요.

심규선은 lucia로 낸 솔로 앨범의 곡들보다
에피톤 프로젝트 앨범에 셋방 들어가서 불렀던 곡들이 더 좋은 것 같네요. 선인장이나 오늘은 문득 생각이 나는데
솔로 앨범은 한창 들은 뒤로는 좀 뜸해지네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아무쪼록 건승하시길.

다락방 2012-06-13 14:01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심규선의 솔로 앨범이 무척 좋아요. [부디]는 압권이고 다른 곡들도 모두 좋아요. 요즘에도 가끔 들어요. ㅎㅎ 부디는 듣다가 막 울 것 같고 그래요. 에피톤 콘서트 가서 심규선 노래 부르는 거 봤는데요, 와, 엄청 노래 잘하더라구요. 게다가 젊고 예뻐요! 그때 당시에 사귀던 남자랑 함께 갔었는데 심규선한테 홀딱 반하더라구요. 노래 진짜 잘해요. 실제로 듣는데 반했어요! ㅎㅎ

이번 앨범에서 한희정과의 듀엣곡은 저도 이화동이나 그대는 어디에만큼 확 좋지는 않은데 어쩐지 계속 듣다보면 나름대로 좋아질 것 같아요.

그런데 왜 혼자서 겁 먹고 계셨던겁니까? 제가 겁줬습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전 해치지 않아요. 비폭력주의자입니다.(대체 무슨말;;) 네, 종종 들르세요, 얼음장수님.
:)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p.127)

 

나에겐 최근까지도 부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것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가끔씩 툭 튀어나오곤 했다. 남동생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닐때면 왜 우리 아빠는 당신의 아들을 아무 직장에나 툭 꽂아줄만큼 사회적 위치가 단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부모가 사회적으로 단단한 위치에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 부모님은 그만큼 배우지 못해서 문화적 차이가 있을테니 저 남자와는 금세 끝내버려야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는 것, 내가 알파벳을 알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들으면서 이러저러한 의견과 생각을 보탤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을 글로 써낼 수 있다는 것, 그 교육의 과정 모두는 영어단어를 읽을 줄 모르고 사회적으로도 소시민의 위치에 놓인 우리 부모가 한 일이라는 것. 그런 부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것을 아주 늦게야 알게됐다.

 

한때는 그런 원망도 했다. 나의 부모가 조금 더 잘났다면 그러니까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부자였다면 어릴때 내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 줄 미리 발견하고 더 큰 사람으로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빠는 '김연아 부모는 좋겠다, 김연아가 잘나서'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남동생은 아빠께 이렇게 대꾸했다. '김연아가 우리집에서 태어났으면 어차피 우리가 다닌 회사에 다녔을걸' 이라고.

 

그 말은 그때 우리 부모님의 가슴을 찢어 놓았을까? 우린 모두 그 때 웃었지만 그 말은 부모에게 상처였을까? 나는 종종 엄마에게 왜 우리는 잘난 친척조차 없어서 내가 고작 이정도의 사람밖에 되지 못하게 한거냐고, 왜 엄마는 엄마와 똑같은 처지의 남자와 결혼했느냐고 내뱉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러게 말이다, 내가 좀 더 잘난 사람과 결혼했다면 너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하셨더랬다.

 

 

작년에 사주를 보았을 때, 사주를 보아주셨던 분이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부모가 참 좋다고, 부모자리를 정말 잘 만났다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모한테 크게 위로 받은 기억도 없는 것 같고 그저 나는 부모를 원망했던 순간들만이 떠오르는데, 그런데 내가 부모를 잘만났다고?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잘난 엄마의 글을 읽게 됐다. 본인이 많이 배우고 본인이 이미 돈이 많았던 엄마. 그런 엄마의 일상이었는데 나는 갑자기 내가 그런 부모를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거다. 내 성격에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부모를 만났다면 나는 자식이지만 늘 기가 죽었을 것 같은거다. 우리 부모는 이만큼인데 나는 왜이렇게 못난 딸로 태어났을까 하는 자책에 시달릴 것만 같은거다. 실제 그런 환경이 된다면 내가 어떤 성격을 형성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나에게는 우리 부모가 최상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나를 이만큼 키워내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가 존재해야 했다. 더 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더 비약하지 않기 위해서, 더 모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내 부모는 나에게 필요한 최상의 보호자였던 거구나. 내게는 정말이지 이런 부모여야 했구나, 하고. 그래서 친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때 사주 보시는 분이 내게 부모를 잘 만났다고 했는데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정말 최상의 부모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러자 내 말을 들었던 친구는 너는 정말 최상의 부모를 두었는데 너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나는 너를 보고 너와 이야기하다 보면 정말 좋은 부모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오히려 내가 모르고 있었던거다.

 

 

내가 부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나에겐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내 남편'에의 로망이 아니라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한 로망. 그는 양복을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출퇴근을 해야할 것, 단단한 어깨와 팔로 아이를 한 손에 안고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교과서나 참고서 혹은 소설책을 내게 들고와서 '이건 왜 그런거에요?' 라고 물었을 때 "네 아빠에게 물어보렴" 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그게 내가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해 요구한 것이었다. 내가 그런 아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아빠를 내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조금씩 바뀌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 그 로망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 로망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씩 하나씩 나는 바뀌어가고 깨달아가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일전에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소설은 남자와의 연애를 풀어 쓴 것이었는데 너무나도 솔직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이상 아니 에르노를 읽고 싶어지지 않아졌다. 그래서 이 책이 아니 에르노의 책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른분의 리뷰에서 위에 인용한 저 문장을 보았다. 아, 그녀도 그녀를 이만큼 키워내준 아버지가 가난했구나, 소시민이었구나, 배움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마저 가진 사람이었구나, 하는걸 깨닫는 순간 그녀가 지독하게 솔직히 써냈을것이 분명한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써낸 글은 내가 읽기에 적절했다.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솔직히 말해준것이 내게는 무척 유용했고 고마웠다. 그녀같은 여자가-내게는 꽤 큰 위치에 있다고 느껴지는-, 나와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자라는 동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위안이되었고 또 문제의 해결로까지 느껴졌다.

 

별것도 아닌 일들을 가지고 식탁에서 입씨름이 벌어지곤 했다. 그는 토론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난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또 그가 먹고 말하는 방식에 대해 이것저것을 지적했다. (p.91)

 

나도 나의 부모와 의견충돌이 있을 때 얼마나 많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는지, 얼마나 많이 '그들은 몰라' 라고 생각했던지. 위 문장을 읽다가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지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교육을 받게끔한게, 누가 한 일이란 말인가.

 

그는 덮고 있던 이불을 잡아당겨 내가 매트리스를 볼 수 있게끔 해주었다. 쓰러지고 나서 처음으로 주위에 있는 무언가에 관심을 보인 거였다. 돌이켜보면 그때 난 아직 모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세가 그렇게 깊지 않다는 걸 보여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였지만, 이렇게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달라붙으려는 노력 자체가 거기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p.121)

 

내가 나의 부모의 죽음의 시간을 늦출 수 있을까? 그 시간이 닥쳤을 때 내가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이 편히 눈감을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나에겐 어떤 식으로든 많은 후회가 존재하겠지. 앞으로도 또 후회할 일을 만들겠지.

 

 

마지막 페이지들을 늦추고 싶다. 그것들이 항상 내 앞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p.114)

 

 

 

 

 

나도 마지막 페이지들을 늦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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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05-20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도 친구분처럼 늘 다락방 님은 부모 복 있구나 하고 느꼈던 걸 보면, 안 그랬다 하시지만 그 좋은 점 잘 아셔서 글에 나타난 것 같아요. :)

다락방 2012-05-21 13:14   좋아요 0 | URL
앗,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니, 제가 뭔가 잘한것 같아서 뿌듯해져요, 치니님. 힛.
:)

2012-05-21 0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1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5-20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쯤 전엔가 <아버지의 자리>라는 제목으로 읽었더랬는데, 제목이 바뀌었군요. 당시 박일문이라는 젊은 작가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자신의 소설에서 거론하는 바람에 찾아 읽었더랬죠. <남자의 자리>라. 영 다른 소설을 대하듯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다락방 2012-05-21 13:12   좋아요 0 | URL
책의 분량으로 보면 얇은데 내용까지 가볍진 않더라구요. 간혹 들춰보게 될 것 같아요, 후와님. 아니 에르노를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거부감이 좀 옅어졌어요. :)

당고 2012-05-2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에르노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 대해서 쓴 일기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도 좋았어요.

다락방님의 부모님이 좋은 분들이라는 거, 전 알고 있었는걸요 :) 치니님 말씀처럼 글에 나타남 :)

다락방 2012-05-21 13:0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이 책의 책날개에 어머니에 대해 쓴 책이 근간으로 나온다고 되어있더라구요. 말씀하신 책이 개정판으로 나오려는가봐요. 저는 당연히, 그 책도 읽기로 불끈 결심했어요!

그런데 우리 당고님은 오와- 그 책도 벌써 읽으셨군요!

프레이야 2012-05-2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부모님 자리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봐요. 제가요.
오랜 애증의 세월을 지나 이젠 인간적으로 애잔하고 연민이 드니까요.
부모 덕(물질적인 게 모두가 아니라요) 있는 다락방님은 복덩이에요^^
저도 부모 덕 없지는 않다 생각해요. 히히~ 그냥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라 생각하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다락방 2012-05-21 13:08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요, 프레이야님.
나를 어떻게 이만큼 키워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해요. 키워오면서 얼마나 많이 마음을 졸였을까 속을 태웠을까 싶더라구요. 어린 조카를 볼때마다 저 아이가 다치지는 않을까 상처입진 않을까 아프진 않을까, 이모인 제가 그렇게 걱정을 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우리 삼남매를 이렇게 어른이 되도록 키워왔을까요. 그 속을 제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것 같아요.

네, 이렇게 된건, 프레이야님도 저도, 부모덕이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레와 2012-05-2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 만큼 우리 부모님한테 하면, 엄마 아빠 얼굴에 웃음이 떠날날이 없을텐데.
왜 그렇게 모질게 대할까.. 반성하는 아침.


다락방 2012-05-21 13:07   좋아요 0 | URL
그러게말예요. 친구들한테는 간혹 하루에도 수차례 문자메세지를 보내면서 왜 아빠 엄마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저 역시도 잘한게 하나도 없어요, 레와님.

blanca 2012-05-2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극복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면에서 다락방님을 다시 한번 부러워하게 됩니다. 저도 요새 부모님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불가능해, 하며 괴로워하는 중이랍니다. 그런 면에서 나이드는 게 참 무서워요. 어제 최근 어머니를 잃은 지인을 만났는데 그 어떤 적절한 위로도 할 수가 없었어요. 자꾸 어머니와 부둥켜 안고 행복해하던 그 분 모습이 떠올라서. 상실에 결핍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다락방 2012-05-21 13:06   좋아요 0 | URL
저는 뭐 아픔이라고 말할만큼 대단한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간혹 터져나오는 원망 같은것이었죠. 부모에 대한 원망은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돈이 많든 적든 학벌이 높든 낮든 그것들과는 별개로 가지지 못한 다른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블랑카님 덕에, 정확히는 블랑카님이 이 책의 인용을 아주 적절하게 해주신덕에 제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어요. 블랑카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숱한 리뷰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거에요. 고마워요, 블랑카님.

테레사 2012-05-2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을 어제 읽었어요. 다락방님과 똑같이 아니 에르노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지라 큰 기대 없었는데, 읽고 나서 참, 마음이 떨렸어요. 무어라 말할 수 없는..정말이지 이 세상의 언어는 몸짓과 느낌에 한참 못미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어요.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너무 적어요. 그것들에 비해..

다락방 2012-05-21 13:05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테레사님의 [브로덱의 보고서] 리뷰를 보고 [남자의 자리]는 어떻게 읽으셨을까 궁금했어요. 주말에 읽은 두 권의 책 모두 테레사님께 특별했군요. 좋은 경험이었겠어요.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가끔 꺼내 읽고 싶어요. 그런 책이 되고 말았어요.

네꼬 2012-05-2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자체가, 다락님한테 좋은 부모님이 계시다는 증거예요.

다락방 2012-05-21 13:04   좋아요 0 | URL
네꼬님도 참...부끄럽게..... ( '')

마노아 2012-05-2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볼 때마다 가족들 부럽다고 얘기했잖아요. 그런 가족과 어우러진 다락님 자체가 부러워요. 아주 아주 따뜻하거든요.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요!!

다락방 2012-05-22 13:54   좋아요 0 | URL
언젠가 제가 사랑하는 친구가 제게 "부모에 대한 컴플렉스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는 그걸 극복할 나이가 됐다"고 말한적이 있어요. 그게 벌써 몇년전인데, 저는 남들보다 좀 늦된가봐요.

2012-05-21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2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05-21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는 제 부모님을 또는 현재의 제 자신을 부정하지도 않고,
환경탓 부모탓 하는 이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1인이지만,
그래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제가 태어나고 자랐더라면 분명 지금보다는 다른 인성과 재주를 지니고 다르게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다를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생각하는 거겠지만요.

밝고 건강한 웃음을 지닌 10대, 20대의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그 아이들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남 얘기가 아니라 가슴 한 번 쓸어보고 가요. ^^

다락방 2012-05-22 13:58   좋아요 0 | URL
김연아에겐 김연아의 재주를 알아봐주는 부모가 있었다, 부모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자식의 재주를 알아봐주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부모지만 내가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질 않다면 나는 또 어디에 서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면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맞는 부모를 가지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은 환상이 가미된 생각이요. 그러나 이것도 그때뿐, 또 어떤일로 부모님한테 툴툴거릴지 알 수 없죠.

그런데 이런 생각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것 같아요. 누가 알려줘봤자 잘 받아들여지질 않으니까요.

moonnight 2012-05-2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전에 읽으신 작가의 책을 저도 읽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니 에르노는 이제 그만.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실린 신간서평을 읽고 읽어볼까 어쩔까 망설이던 차였어요. 다락방님 리뷰에 의심없이 보관함으로 넣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제 느낌은, 많은 분들이 그러하겠지만 '애증'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없이 안스럽고 미안하고 가슴아프게 생각되다가도 왜 나를 태어나게 한 건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_-;에 대한 원망 같은 게 있어요. 성인이 되고 제가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가장이 되고 난 이후에는 그 원망이 조금은 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가끔 (술 한 잔 하고 나면-_-;;) 그 원망이 다시 고개를 들 때가 있어요. 그런 마음을 가지는 내가 또 더 싫어져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고. 좌우지간 풀 수 없는 매듭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쨌든, 이 책을 꼭 읽겠습니다. 고마워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12-05-22 14: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인가봐요. 어느날은 한없이 원망스럽고 어느날은 한없이 안타깝고 그래요. 나는 스마트폰을 쓰고 레스토랑을 가고 와인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데 이 모든걸 누리게 된게 누구덕인가, 그런데 그들은 정작 그것들을 왜 누리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저도 이제 원망을 덜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내 부모도 누리고 살게 해주자 싶지만, 이게 늘 생각뿐이네요.

이 책은 못난 제가 쓴 것 같아요, 문나잇님. 읽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생각하는 ABC -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사전 그림책은 내 친구 15
이지원 기획,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논장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일요일 엄마와 뒷동산을 산책하는데 엄마가 내게 sunny day 의 뜻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햇볕이 좋은 날을 써니데이라고 한다고 대답해드렸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다섯 살짜리 꼬마도 아는 단어를 엄마는 몰랐다며 꽤 울적해 하셨다. 그리고 곧 기본적인 영어 단어 몇개를 외우고 싶다고 하셨다. 


사연은 이랬다. 며칠전 엄마는 이웃집 아주머니 댁에 놀러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 아주머니의 다섯 살짜리 손자를 만나게 됐다. 이 손자는 우리 엄마께 인사를 드리고는 오늘은 써니 데이라고 했다는거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 당황했고 이내 꼬마는 우리 엄마한테 아줌마는 써니 데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냐고 했다는 거다. 그동안 영어를 몰랐던 것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셨던 엄마지만 그 아이와의 대화 후 영어를 못하는 것이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에겐 지금 22개월 된 손녀가 있다. 이 아이도 곧 어린이집과 유아원 유치원을 가게 될 것이고, 거기서 기본적인 영어 단어 몇 개를 배워올 것이다. 그때 손녀랑 놀다가 손녀가 내뱉는 단어 정도는 할머니도 뜻을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손녀가 말하는 애플 같은 단어를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엄마는 몹시도 챙피할것 같다, 는 것이었다.



간단한 영어조차 모르는 엄마지만 그동안 잘 지내오셨다. 그러나 잘 지내오셨다고 해서 영어를 모르는 삶 자체가 완벽하고 행복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계에 급급하다 보니 자식들을 교사로, 무역회사 직원으로 키워낼 수는 있었지만 정작 본인의 배움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셨던거다. 젠장. 나는 뒷동산에서 그 얘기를 듣고 초록은 그린이라고 태양은 썬이라고 하늘은 스카이라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계속 따라하셨다. 옐로우, 브라운, 바이올렛, 마운틴. 엄마는 단어를 외우고 싶어 하셨고, 나는 산에서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기도 전에 컴퓨터를 켜고 단어 몇 개를 적어드렸다. 일단 색깔을 외우고 싶다고 하셔서 색깔을 몇 개 적어드리고 이내 동물 그림과 단어를 출력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막막해지는거다. 동물 그림은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데, 그걸 오려내서 그 옆에 영어 단어를 쓰고 어떻게 읽는지를 써서 출력해내는 일이 결코 만만하질 않은거다. 그때 나는 영어그림책 같은게 분명 존재할테니 그걸 사드리자 싶었다. 책이 닳도록 보시면 되지 않을까. 마침 이럴 때 적절한 추천을 해줄 수 있는 마노아님이 생각났고 나는 마노아님께 이 책을 추천받았다.



마노아님의 추천은 틀림이 없었다. 이 책은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게 담겨있었다. 나는 눈물 날 정도로 이 책에 감동을 먹었다. 게다가 이 책은 풍성하다. 알파벳 별로 열 개씩의 단어가 나오는거다! 그림과 영어 단어 그리고 뜻이 나와 있어서 비명을 지를만큼 행복했지만, 엄마는 이 단어를 읽으실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외우기 좋게끔 소리나는대로 써서 포스트잇을 붙이기로 했다.




geometry (기하학)같은 단어는 사실 이 책에 좀 어울리지 않는듯 한데-나부터도 이 단어를 몰랐다 ㅎㅎ- 그래도 이 책이 아니면 또 이 단어를 접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좀 갸우뚱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지오메트리, 하고 적어 넣었다. 


단순히 그림에 영어 단어만 있어도 내게는 퍽 흡족한 책이었을텐데, 아,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기도 하지, 그림들이 무척 예쁘고 신선하고 개성있다. 어떤 단어들에 대해서는 센스가 넘친다.






우산을 쓰는 그림이 아니라 뒤집어서 비를 받고 있는 그림이라니! 쭉 늘어난 코가 꽃의 향기를 맡고 있다니! 사다리만 턱, 그려놓은게 아니라 사다리에서 쓰러진 사람을 그려놓다니.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면서 사다리에서 쓰러졌네 아프겠다, 라는 기억이 앞으로 사다리라는 단어를 외울 때 떠오르지 않을까.



내가 엄마에게 가장 알려드리고 싶었던 단어는 elephant 코끼리 였다. 현재 22개월된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 코끼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팔짝팔짝 뛰는 조카가 분명 얼마 되지 않아 엘리펀트를 말할 수 있게 될텐데 그때 엄마가 엘리펀트를 들으며 웃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데 이 책안에 있다. elephant 가. flower 가 있고 lion 이 있다. rain 이, umbrella 가, tree 가, mountain이, walk 와 red 가, sleep 과 pig 가 이 책 안에 다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심지어 단어 index 까지 있다.




고마운 일이다. 맞춤한 책이다. 손녀에게 쪽팔리지 않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 자신이 더 많은 것들을 알기 위해서, 그레이프를 달라고 말하면 포도를 건네주는것이 자연스러워질 수 있기 위해서, 엄마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엄마에게 이 책이 유용하기를, 이 책을 넘기며 하나하나 외우고 알아가는일이 기쁘기를, 스트레스가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단어들을 외우다가 엄마가 이 단어를 왜 이렇게 읽느냐고 물어보는 날이 올까, 그러면 나는 엄마를 마주 앉혀두고 이 알파벳은 이런 발음기호를 가지고 있고, 이 발음기호는 이렇게 소리난다고, 그렇게 설명해줄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래서 엄마가 영어에 재미를 붙여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지는 날이 올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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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 그냥 아닌거지.
    from 마지막 키스 2012-05-18 09:15 
    젠장, 사진을 올려도 어떻게 틀리게 적은걸 올렸을까. 제보가 들어왔다. height 는 [헤이트]가 아니라 [하이트]라고. 나는 영국발음은 헤이트니까 뭐 저것도 틀린건 아니겠지, 하고 멍- 했다가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영국이든 미국이든 저 단어는 [하이트]로 발음한다는 걸 알게됐다. 아 ... 쪽팔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그 글을 읽었는데...... 다들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height 가 헤이트라는것에 전혀,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건 강
 
 
... 2012-05-1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이 리뷰 정말 좋네요. 다락방님, 어머니께서 이 책을 마스터 하신 후엔 옥스포드 픽처 딕셔너리를 추천합니다.
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194740161 한글과 영어로 쓰여져 있구요.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가 그림과 함께 들어가 있어요. 오디오북도 따로 살 수 있다는 게 장점이구요, 낮은 레벨용 workbook 도 따로 팔아서 반복학습에 좋을 거예요.

우리 부모님들 나이가 기억력이 감퇴하는 시점이라 외국어 단어를 자꾸 (손으로 직접) 쓰고 외우고, 새로 배우는 게 정말 좋다던데, 그런 의미에서 다락방님 어머님 화이팅!!

다락방 2012-05-17 14:43   좋아요 0 | URL
링크해주신 책은 평들도 아주 좋네요! 그래서 저도 냉큼 보관함에 넣어두었어요. 꼭 사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히.

글쎄요, 엄마가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지만 잠깐 반짝 하고 충동적인 결심인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설사 그렇다해도 잔소리하진 않을거에요.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스트레스 대박이니깐요. 엄마 화이팅!

개인주의 2012-05-1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노아님께 여쭤본적 있는데 멋지게 추천해주셨어요.
마노아님은 여러가지 재능을 가진 분 같아요.

다락방 2012-05-17 14:43   좋아요 0 | URL
네, 스누피님. 제겐 정말이지 꼭 맞춤한 추천이었어요!

웽스북스 2012-05-1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다락방 2012-05-17 14:44   좋아요 0 | URL
정말...뭐요? 다락방 예쁘다는 거에요?

아....정말 예뻐! 뭐 이런거? ㅎㅎㅎㅎㅎ

비로그인 2012-05-1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덕분에 어머님이 당분간은 즐겁게 영어를 배우시겠네요ㅎㅎ 그래도 나중에 그 꼬마친구가 또 "써니 데이" 운운하면 그 말도 맞지만 "햇볕 좋은 날" 혹은 "맑고 화창한 날"이라는 더 좋은 표현이 있다고 당당히 알려주시라고 말씀드려보세요. 아니면 어른들이 쓰는 재미있는 표현들을 알려줘도 좋구요. 아마도 그게 아이들한텐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안 그래도 고생하신 분들인데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까지 받아야 하다니...

다락방 2012-05-17 14:47   좋아요 0 | URL
그게 그러니까요, 후와님, 그게 무슨 뜻인줄을 알아야 엄마가 그건 이렇게 표현하렴, 하고 일러주실 수 있을거 아니겠습니까. ㅠㅠ
저도 후와님과 생각이 같아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외국어 습득이 훨씬 빠르다는건 알고 있는데요, 전 외국어를 좀 더 커서 배우는게 낫다고 생각해요. 일전에 굿모닝팝스 진행자인 오성식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갔는데요, 이 아이들이 엄마는 익히지 못한 외국어를 척척 배우더래요. 그런데 엄마랑 싸울일이 있었을 때 영어로 싸우더랍니다. 엄마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한국어로 얘기하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이 아이들이 한국어로는 감정 표현을 못하겠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그때 오성식이 아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싶어서 부랴부랴 한국으로 아이들을 다시 데리고 왔대요.

빨리 익히는게 있다면 빨리 잊히는것도 있겠죠. 아이들일때 외국어를 흡수한다면 모국어의 쓰임을 어느정도 잊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안 그래도 고생하신 분들인데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까지 받아야 하다니...아! 정말 울컥하는 댓글이네요. ㅠㅠ 속상해요 ㅠㅠ

moonnight 2012-05-1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여뻐라 다락방님. ^^ 왠지 눈물이 핑 도는 글입니다. 참 많이 반성도 되고요. 저도 다락방님처럼 예쁜 딸이 되고파서 보관함에 넣습니다. 좀 아까 황금물고기 주문했는데(땡투도 했어욥!!! ^^) 오늘 또 주문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마노아님께도 감사드려요. ^^*

다락방 2012-05-18 09:32   좋아요 0 | URL
황금물고기는 문나잇님도 좋게 읽으실 수 있을것 같아요. 저도 오늘 만날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몇 권 샀습니다. 후훗.

저는 별로 예쁜 딸은 아니에요, 문나잇님. 제가 예쁜 딸이었다면 좀 더 일찍 엄마가 영어를 몰라서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걸 깨우치지 않았을까요. 엄마는 그냥 영어를 모르는 사람, 으로 단정짓고 말아버렸으니...답답하네요.

금요일이에요, 문나잇님! 오늘도 술독에 빠져봅시다!

heima 2012-05-1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리뷰 찡하고 또 너무 따뜻하네요. :)

다락방 2012-05-18 09:32   좋아요 0 | URL
헤헷 :)

기억의집 2012-05-1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읽은데 왜 이리 눈물이 나죠. 옆에서 울 딸이 왜 우네요

다락방 2012-05-18 09:33   좋아요 0 | URL
아니, 기억의집님 왜 우십니까. 오늘 날씨가 좋아요, 기억의집님.
:)

마노아 2012-05-1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아름다운 리뷰예요. 오늘 너무 바빠서 알라딘 접속도 못했는데 문자 받고 들어와서 지금 읽었어요.
다락방님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리뷰예요. 덩달아 제 기분도 마구 업되네요. 아이 좋아라. (^^♡)

덧)이거 읽다가 렌지 위의 밥솥이 딸랑거리는 걸 못 알아차렸어요. 지금 막 불껐는데 밥 탔을까 봐 막 긴장되네요.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좋아요. (^____________^)

다락방 2012-05-18 09:34   좋아요 0 | URL
밥은 탔어요, 마노아님? 밥이 맛있게 된건지, 밥은 잘 먹은건지...

요즘 정말 많이 바쁜가봐요, 마노아님. 좀처럼 알라딘에서 뵙기 힘드네요. 흑흑.
마노아님 이 책을 추천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찾던 책이었어요. 마노아님 진짜 짱이에요!

레와 2012-05-1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 다락방.

^^

다락방 2012-05-18 09:34   좋아요 0 | URL
천만에요!

icaru 2012-05-1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페이퍼네요. 음~ 어머님이 열정적이세요. 대다수 어머님들은 그런 게 각성의 계기로 연결된다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살아왔던 대로 사는 것도 방법이니...
이이의 책은 생각하는 ㄱ,ㄴ,ㄷ 으로 갖고 있는데, 같은형식으로 기발하죠! ㅎ

다락방 2012-05-18 09:35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말씀하신 책도 보관함에 넣어두었어요. 그건 조카를 위해서요. 히히.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공부하게 하고 싶은데, 공부가 즐거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엄마에게도 조카에게도 잘 될지 모르겠어요.

DORIBARI 2012-05-1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어 학원 한달을 넘긴 엄마가 공부가 재미있드라, 한 마디 하길래 약간 뜨끔했어요. 우리 어마마마도 초등학교 들어간 조카놈이 영어단어 숙제를 잔뜩 받아와서 할머니에게 물어보는 바람에 어머 뜨거라 학원에 등록하셨거든요. 모쪼록 조카놈보다 울 엄마의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존경받는 할머니의 자리를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

다락방 2012-05-18 09:36   좋아요 0 | URL
할머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거군요. 그냥 손자를 예뻐하고 용돈주고 맛있는 것만 해주는걸로 끝나는게 아니었어요. 세상에, 도리바리님의 어머님도 그렇고 제 어머님도 그렇고 다 늦게 공부를 해야 한다뇨! 뭔가 알아간다는 건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또 거기서 재미도 찾게 된다면 좋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해요. 약간 우울해지기도 하구요. 사는게 너무 피곤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죠.
아무쪼록 도리바리님의 어머님도 저희 엄마도 화이팅입니다!

당고 2012-05-1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흑흑ㅠ
나도 다락방님께 영어 단어 배우고 싶다ㅠ

물론 아이들은 악의 없이 그러곤 하지만, 아이들의 그 입을 때려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ㅎㅎㅎ
그리고 요즘 애들은 영어를 너무 잘해서 애들보다 영어를 모르는 건 절대 흠이 아니라고 이 연사, 강력히 외쳐 봅니다-_-;;;

다락방 2012-05-18 16:17   좋아요 0 | URL
영어는요 당고님, 장담하는데, 당고님이 저보다 훨씬 더 잘하실거에요. 저는 알파벳만 겨우 안다고 보시면 될 듯. ㅎㅎㅎㅎㅎㅎ 그러니까 저희 엄마처럼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께 단어를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영어를 이미 할 줄 아는 사람들 앞에서 저는 입도 뻥긋 못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ㅋㅋㅋㅋㅋ 갑자기 미국 여행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한 상점에 들어가서 쵸콜렛을 보고 있는데 남자 점원이 따라다니면서 뭐라고 자꾸 하는거에요. 그런데 뭔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너무 당황스런 거에요. 아 씨..왜 자꾸 따라다니면서 뭐라고 하는거야, 대체 뭐라는거야. 그래서 친구를 찾아서 저 남자가 대체 나한테 뭐라고 하는거냐, 라고 하니까 고른 물건을 바구니에 넣으라며 바구니를 준 거라고;; 아 놔 orz


저는 말이죠, 당고님, 꼬맹이들이 영어를 잘하는게 결코 예뻐보이질 않아요. 흥이에요, 흥!

2012-06-2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5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5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