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찰스 다윈 지음, 박영목 옮김 / 한길사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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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최근 새로 써진 [종의 기원]의 번역판으로, 다윈의 원문을 살리면서도 현대생물학적 관점에서 본 [종의 기원]의 오류와 현대생물학에 의해 증명된 점들에 대한 코멘트를 같이 실었다. 원문의 차례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축약할 부분은 축약되어 있고, 새로운 증명자료나 오류에 대한 설명과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과 사진이 풍부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그래서, 원본보다 짧지만 도리어 책 전체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다윈의 원래 의도들과 그 가치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다윈은 모든 생물이 한 생명체에서 분지되어 환경에 적응하며 다양화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다양한 생명체들은 유전을 통해 일정한 성질을 지닌 종을 구성하게 된다. 수많은 조상종과 분지되어 나온 종들, 혹은 다른 속에 속한 생물들끼리도 환경 안에서 서로 경쟁하며 조금이라도 유리한 형질을 가진 종들은 생존하여 번영하고 작은 차이라도 이 경쟁에서 뒤쳐지기 시작하면 결국 멸절하게 된다. 실제로 조상종의 대부분이 멸절한 것은 후손종이 훨씬 특이한 형태로 환경에 유리한 기관이나 조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현대생물학은 종 내부에서 적응에 따른 변화는 가능해도, 염색체 수가 다른 종으로의 변화는 설명이 힘들다는 의견이 여전히 많은 편이다. 생쥐의 조상이 사람으로까지 변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연금술에서 말하는 납으로 금을 만드는 원소의 변화만큼 염색체수의 변화는 가능성이 낮은 일이다. 하지만 당시 이런 종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포괄적 그림은 기존의 세계관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이로 인해 점진적 개량과 진보에 의한 완성, 자연의 내재적 생명에너지에 대한 생각들이 그 이후 철학과 인간 사회의 가치에 영향을 주었음은 틀림없다. 인간은 진화의 와중에 나타난 생명체 중 유리한 두뇌시스템으로 인해 타종을 물리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된 가장 최근의 발달된 동물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회내에서도 삶살이의 방법을  결정한다. 진정한 생존의 법칙은 더욱 강하고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최적자만이 번성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무기이든 사회시스템이든, 한정된 자원의 독점자만이 미래에 존재하며, 약자에게 미래는 없다. 이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진실의 일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에서 유추되는 인간의 존재의 의미, 그리고 삶의 방법은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생물학의 더 많은 검증을 요구하고픈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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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gmatism
William James 지음 / 대양서적 /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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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란 책은 1906년 로웰협회에서 몇번의 연속 강의한 것을 다음해인 1907년 출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일반인에게 서술하는 형태를 띄고, 또 그 당시 강의 사이에 청중의 반응들에 답하여 강의를 이끌어가는 형식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여기서 프래그머티즘이 아닌 것을 말한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기존의 어느형태도 프래그머티즘은 아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오히려 절대주의와 사실주의의 중재자로서 존재한다. 그가 설명하는 것은 절대주의적인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독단적 주장도 피하고, 유물적이고 경험론적인 절망적 세계관도 피하는 [현실적]이며 [진행형인 진리관]을 제시하는데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극단적 경험론]이 보여주듯 그는 기본적으로 다원주의적이며 경험론적인 생각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다만 이들 사상이 가진 절망성과 소수주의,배타성을 극복하고 일반인의 [상식]에 맞는 형태로, 또한 기존의 미국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 형태로 제시되도록 다듬어낸다.
 
그의 진리관은 그래서 다수의 인간이 노력하여 이끌어내는, 만드어져가는 진리이다. 다수의 인간이 이 진리의 연합과정을 통해 [평화롭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는 절대주의에 의한 충돌도 상대주의에 의한 공허와 절망도 원치 않는다. 진리란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은 신뢰할만큼 상식적 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분명 미국의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사상의 한 흐름과, 현대 과학과 종교, 다문화와 다종교를 묶어내고자하는 미국적 사회통합의 사고에 주요한 철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번역판이라곤 절판된 1978년 사상전집 일부로밖에는 구할 수 없었다. 어떤 뜻이건 미국이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라면 이제 좋은 새번역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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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5
에리히 레마르크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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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 20주년 전날인 1938년 11월 10일, 퐁드 랄마에서 라빅은 자살하려는 한 여자를 구한다. 그녀의 이름은 조앙. 독일에서 피난온 불법체류 의사인 라빅은 조앙과의 관계에 혼란스러워 한다. 라빅은 피난민으로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 그리고 빚어지는 갈등과 줄다리기들...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다시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 조앙은 우발적으로 쏜 어느 남자배우의 총에 죽어가고, 라빅은 다음날 프랑스 피난민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는 독일에서 존경받는 의사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자존심으로인해 그는 자신의 국가로부터 버림받는다. 자신의 존재에 충실하고자하나 국가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힘앞에 절대 무기력한 한 개인의 삶이다. 레마르크가 그린 1,2차 대전 사이의 인간의 존재란 철저히 국가라는 체계가 만들어낸 부조리앞에 희생당하는 인간들이다. 사랑과 삶의 이유 또는 인생의 보람이라는 개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행복들이, 개선문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승리 앞에 철저히 유린당하는 어두움이다.

그의 사랑하는 여인을 죽였던 게슈타포 하아케를 파리에서 만나고, 집요하게 좇아 살해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는 하아케를 죽여 그를 얽어맨 압박에서 놓임을 받는다. 심지어 자신의 도피나 또다른 이어질 생존의 추구의 끈을 놓아버릴 정도로...그는 성공했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했을 뿐이다. 국가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폭력앞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국가에 대한 우리 저항의 한계조차도 개인적인 원한의 갚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보호아래 의사라면 당연히 느꼈을, 의사로서의 불치병환자에 대한 허탈감조차도, 암으로 죽어가는 한 미국인을 부러워하게 만드는 피난민의 존재에 압도당한다.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파리의 이방인인 그는 부조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에 홀로 맞서야 하며, 또한 자기힘이 미치지 못하면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난민인 자신에게 지쳤다.

우리의 존재의 근거는 비참하게도 이제 국가임에 틀림없다. 국가는  생존과 행복, 존재이유의 탐구와 삶에 대한 정의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피해 도망할 수 없다. 어느곳에서든 우리를 지켜보며 일탈에 대해 냉혹하다. 이것은 무슨 체념과 도피가 아닌 현실 존재의 조건이다. 국가가 우리의 삶의 방식과 이유를 정의한다. 그래서 점점 개인으로서 의미를 찾는것과 옳음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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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2008-03-1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정말 멋진 서평이라서 다음의 주소로 허락도 없이 스크랩해 갑니다. 카를님께서 작성한 서평임을 밝히고, 작성하였습니다. 저도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읽고 저만의 서평을 작성할 예정입니다만, 카를 님께서 작성하시 것처럼 멋지하기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스크랩해가서 죄송합니다. http://blog.empas.com/rang2202/
 
자본론의 현대적 해석
김수행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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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은 힘겨운 책임에 틀림없다. 그 방대한 양 뿐 아니라 논리 전개의 세밀성, 폭넓은 예시와, 비교되고 있는 기존의 경제이론에 대한 이해 등이 이 책의 독파를 어렵게 하는 이유들이다. 김수행 교수의 이책은 이런 자본론읽기의 어려움을 넘어 자본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그 핵심적 내용을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마르크스는 비참한 인간 상황의 원인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일반이 접근하기 어려운 자본이라는 독점권으로 노동력에서 나오는 잉여가치를 빼앗아가는 생산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전체와 맞물리면서 인간의 생존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적 삶의 비참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치라는 댓가를 지불하고 얻어진다. 노동자와 자본가를 모두 천박하게 만들며 서로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지구라는 행성을 댓가로 얻어진다. 좀더 미친듯 지구를 파헤쳐 복구가 불능할 때까지 소비의 축제를 불사를 것이다.
 
한 사람의 임금노동자로서(드러커의 고상한 표현을 빌리면, 지식노동자) 살아가며 과연 임금 뿐 아닌 삶의 모든 양식에서 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생활방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한 인간을 효용가치 없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반드시 그의 포로로 만들고 말 것이다. 연대가 해결책인가? 헤게모니의 장악인가? 대안적 삶이 장기적 모델인가? 자본론의 쓰여지지 않은 부분인 국가자체나 주위국가의 압력은 이런 대안을 무색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아닌가? 지하철 옆자리에 지쳐 잠든 한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각 개인에 드리운 그늘과 나의 무력함을 본다. 잠든 아주머니와 나를 싣고 지하철은 계속 달린다. 자고있든 깨어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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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정편
존 바니언 지음, 황찬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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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의 신앙 속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빙자한 안이함과 뻔뻔스러움이 있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가라.] 성경은 늘 우리에게 머리가 쭈뻣하게 정신들도록 해 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소견에 좋은대로 살면서 걱정이 없다. 말로만 변명할 수 있다면... 신앙에 대한 것이면 모르는 것이 없지 않나? 이단적 위험의 감별과 新思潮의 맥락까지를 논한다면 아는 것으로야 수준급이라 할 수 있지. 그러나 과연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삶이 변하지 않으면서 판단만 드높은, 이 책에 나오는 '수다쟁이'가 빠진 오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다쟁이는 결국 하늘길이 아닌 곳을 향하던 인물이 아닌가? 
 
이런 삶은 신앙의 핵심은 피한체로 정말 나의 정신 건강, 해나가는 일의 위로, '내 일'의 성공적 진행을 위한 축복으로만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니체가 역겨워하던 신앙의 모습은 사실 이 책의 순례자도 고개를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의 축복과 땅의 지배권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마음. 금욕과 선행의 이유가 내 안에 있는 심리적 이유들과 그 해결책 때문이라면 이런 발걸음은 올바른 목적지에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하나님은 내 머리 안에 갇혀 계시고 그분에 대한 생생한 두려움과 기쁨의 마음은 記述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순례자의 길 어디에서 잘못 들어 이런 지경에 왔는지는 모른다. 슬금슬금 신앙의 길과 나란히 가는 어느 길에선가 길을 잘못든 것일거다. 내 믿음이 다만 [죽음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위로책에 불구했다면 어떻게 위로의 한 단편이라도 맛볼 수가 있었을까?
 
이 순례의 마지막에 순례자Christian과 동행자Hopeful이 하늘성에 들어갈 무렵, 뒤에 남겨진 한 사람이 잊혀지지 않는다. Ignorance. 번역은 무지, 그의 이름은 무시이기도 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사실은 뻔한 진실을 없는듯, 별것 아닌듯 하고 끝까지 살아버리는 삶이다. 그는 목적지의 바로 앞에서 나락의 구멍에 떨어뜨려지고 만다. 그리고 천로역정 정편은 순례자의 다음 독백으로 끝난다. [지옥을 가는 길은 멸망의 도시뿐만이 아니라, 천국의 문 옆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훌륭한 번역과 영문판의 삽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옛 번역판의 한복입은 삽화가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신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자기 삶을 되집어보기 위한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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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5-08-1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도란....힘들 때 선하신 하나님때문에 행복할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곤궁한 자임을 인정하는 자가 아닐까요? 교회의 이름으로 모여 열심히 섬기는 모습보다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자신의 현장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는 섬김의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 중에도 황우석 교수보다 더 뛰어난 전문인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카를 2005-08-16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