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우상 이데올로기
하웃즈 바르트 지음, 김재영 옮김 / IVP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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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가권력 획득의 방법인, 선거에서 승리의 공식은 의외로 단순해 보인다. 자신이 더 각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물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든다는 뜻은 나에게 돌아오는 혜택도 크다는 뜻이다. 당연히 번영을 약속하는 이미지가 표에는 절대유리하다. 발전이 아니면 다수를 차지하는 비 자본가 계층의 차별에 대한 느낌을 자극하여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늘리는 분배정책을 약속하는 것도 돈 안드는 좋은 전략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에게 표를 준다는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일이 중요하다. 적들은 주위에 많다. 일본도 가능하고 중국도 좋다. 반일, 반중, 반미, 민족적 정서를 그 당시의 대중적 기류와 맞추어 자극한다면 일제강점기가 아니어도, 북한이 처내려오지 않아도 마음으로부터 표들은 가까이 온다. 부시도 번영과 반이슬람 정서로 재선에 성공했고, 고이즈미도 불황돌파와 반중국, 신일본제국 건설의 정서로 다시 정권을 재창출했다. 압도적이다. 이런 공식만 잘 파악하면 국민의 여론에 힘입은 권력장악은 무척 쉬워 보인다.
 
이 책은 보통사람 대부분에 공통분모로 존재하는 이 생각들이, 처음에는 정당했던 목표들의 변질과 이데올로기화에 의해 생긴 것임을 드러낸다. 왜 번영과 안보, 혁명과 민족의 대의들은 우리의 손을 벗어나 우리를 조정하기에 이르렀는가? 하웃즈바르트는 이데올로기의 배후에 우상숭배를 보여준다. 자신을 위해 세웠으나 그것에 의해 죽임 당하는 우상숭배자의 모습. 번영, 안보, 혁명, 민족. 이들 네 가지 이데올로기의 전세계를 몰아치는 소용돌이는 결국 인간을 결단낼 때까지 그칠 듯 싶어 보이지 않는다.  군비경쟁을 그친 것은 기적이고, 이라크 침공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결론은 이들 우상에 의한 인류의 종말인 듯 보인다. 하지만 하웃즈바르트는 절망은 또 하나의 유혹이라고 규정한다. 새벽별과 같이 숨어있는 여명은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밝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변증적 파국이 아닌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본다. 인간에게는 희망 없음을 이야기하던, 절망적 몸짓으로서의 저항을 말하던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국민 다수는 줄기세포의 지속적 연구가 필요하고 황우석박사에게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연구에 있어 우위권을 지켜 최고 선두국가가 되어야하며, 또한 국익을 지켜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옳음과 우리가 믿어오던,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오던 기준들과는 다른 무엇인가에 우리 마음이 홀린 건 같다. 정직과 부끄러움이 이익과 민족감정과의 저울질에서 기울고 있는 일은 아무래도 이번 이 일로 끝날듯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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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민음사 세계시인선 9
릴케 지음, 김주연 옮김 / 민음사 / 197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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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릴케의 두 시집 [조형시집1902], [신시집1907]을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릴케의 시인으로서의 생애 중 2,3기에 속하는 이 시들은 그의 생애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릴케의 생애 중 제1기인 고향 프라하에서 그는 [인생과 소곡] [가신봉폐]로 시인의 삶을  시작했다.2기는 러시아 기행과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통해 종교에 눈뜨는 기간이었다. [구시집] [조형시집] [기도시집]이 이 때의 결과물이다.파리에서의 3기는 경제적 이유로 아내 클라라와 딸 룻과 떨어져 고독하게 보낸 시절이다. 당시 그는 인간 실존의 모습에 집중하고 죽음과 삶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시를 썼다.4기는 두이노성과 뮈조트에서 보낸 시절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성한다.
 

이 시집은 2기와 3기에 걸친 [말테의 수기] 이전의 릴케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비록 그가 목격하기는 하였으나 붙잡지는 못한 삶의 의미와 신적 존재에 대한 복합적 감정을 드러낸다. 너무도 세기말적인 당시의 유럽의 감정을 잘 반영하면서도, 릴케만의 섬세함과 어두운 진실에 대한 참담한 감정을 잘 드러내는 시집이다. 시인이란 결국 삶의 진정한 향기가 나는 곳의 냄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집요한 눈길의 [검은 고양이]와도 같은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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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5-11-0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품절?..! 이러다...품절, 절판 전문 서평자가 되시겠어요.
오랜 만에 올라온 서평 잘 읽었습니다. 요즘 릴케와 로댕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반가웠어요.
열심히 고전을 정복하시길...
고전 완전 정복의 그 날을 향하여...!

카를 2005-11-0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어느덧 20세기초까지 왔군요
우리가 갖는 사고의 협소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믿음의 중요성에 더 놀라게 됩니다
 
오소독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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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앙이라면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이 아닌가? 서양철학의 19세기는 정통신앙이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낡았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규정과 함께 19세기의 인간은 삶의 기쁨과 의미, 자유와 행복을 위한 근거를 잃었고, 지금 21세기까지 계속되어오는 [작은 조각배처럼 부유하는] 의미없는 삶을... 이런 목적지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표류를...과연 자유라고 불러야할지 난파한 삶이라 불러야할지 고민하고있다.
 
체스터턴의 시대는 버나드쇼와 스펜서의 시대, 니체와 다윈의 제자들의 시대였다. 인간은 [결정적 발견들] 앞에 들떠있었다. 인간은 동물의 한 변종이었던 것이다. 모든 도덕은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이었고 이제 모두 벗어던져도 되는 것이었다. 모든 제도는 항상 불완전하며 무한한 진화를 향한 길 위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인간은 갑작스레 자살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사는건, 개인은, 이웃은 아무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아름답다고 하는 모든 것은 정글의 한 모습인 더럽고 추하고 구역질나는 것들이었다. 사는건 무의미했고 내 주위의 인간은 모두 적이었으며 나는 강물 위에 부유하는 쓰레기 정도의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죽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20세기초, 이런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체스터턴의 질문이 시작된다.그는 인간이 빠진 이 어이없는 자기학대와 무의미성의 처참함에 대해 따뜻하다. 당시 철학의 이성적 결말의 파멸을 지적한다. 이성은 인간을 너무나 [이성적으로] 파멸로 인도했다. 니체와 다윈에게 감탄하며 다다른 길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이었다. 유머와 촌철살인의 비유로, 체스터터은 인간이 너무 스스로의 지적 유희에 흥분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자료라는 것이 임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이성이라고 균형과 전인이어야지 단지 theory와 evidences라면 이것들은 도리어 이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20세기초 유행하던 사고는 결국 인간을 현재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이는 것들. 맛있는 것들. 최고급의 것들을 향유하도록 이끌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무의미하니까. 빤짝이로 치장한 인생의 속내는 너무도 처참하리만큼 어둡다. 어두운 빛깔옷의 그들 선조의 우주가 무한한 광휘와 뚜렷한 희망과 절대적 기쁨의 약속으로 가득찼던 것과는 반대로...그들은 그들의 놀이에서 너무 큰 뱃팅을 했고 그는 금칠된 시계(무한히 돌아가기만 하는 반짝이는 인생의 상징물인...)를 상품으로 얻고 [돌아갈 집]을 잃었다. 
 
체스터턴은 나에게 스스로를 테스트해보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자유한가? 즐거운가? 가벼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러한가? 아니면 그렇다고 믿고 싶고 아직도 그걸 찾아 헐떡거리고 있는가? [항상 기뻐한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마음속 한 가운데 기쁨이 있는 사람. 그 기쁨의 근거가 조각배에 탄 자신이 아닌 사람은 정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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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코.초상화 범우 사르비아 총서 603
고골리 지음, 김영국 옮김 / 범우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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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고골리의 [외투]는 19세기 중엽 러시아가 배경이다. 말단 관리인 아카키는 어느날 어렵사리 마련한 새 외투 한벌로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에 들떴었다. 주위의 부러워하는 눈빛과 다시 봐야겠다는 반응에 행복했던 그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기고 좌절한다. 되찾고자 백방 노력하다 되찾아줄 힘이 있는 사람을 만나 부탁해보나 결국 거절 당한뒤 상심하여 죽어버리고 만다. 인생의 의미를 같이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19세기, 산업혁명후 인간의 삶이 소유물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물질이 인간에게 끼치는 놀랄만한 혜택에 기뻐하던 사람들은 점차 물질 자체에 휩쓸리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것은 읽는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런 놀음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꺼리지만, 이것이 인간이 당한 현실인걸. 이제 옷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건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허름한 옷의 고객은, 혹은 동료들은 차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우대하도록 이미 포맷되어져 있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의 옷, 머리 스타일과 장신구에 주목하도록 짜여진 틀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그의 시계는, 핸드폰은, 차는 무엇인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자신한다. 우리는 사람 그 자신에게는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 인간은 어디에 있을까? 고귀한 성품, 뜨거운 사랑, 부드러운 마음이 들어있는 인간. 나도 너도 서로에게 인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존경받기 위해 갖추어져야 할 것은  성품이 아니라 명품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행복의 기준도 물론 [소유]이다. 더욱이 그런 소유를 사람들이 부러워해 주어야 인간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이면 외투는 이미 아카키를 집어삼킬 지경에 이른 셈이다.
 
[외투]는 인간의 원래 의미, 행위의 원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인간의 희망은 무엇을 갖게 되느냐에 있고, 즐거움은 얼마나 비싼 미술, 음악, 요리를 소비하느냐에 있다. 학문도 상품가치로서 평가된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지식인가. 얼마에 팔 수 있는 특허인가. 21세기에 무한히 많은 돈을 벌어들일거라 큰 소리치는 학문만이 정부의 지원과 세인의 관심과 자기 명예를 벌어들인다. 몇년을 묵혀두면 얼마가 되는 그림, 악기, 와인인가. 인간은 왜 사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자기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는데 저항하지 않는다. 돈으로 환산된다면 그 가치는 인간의 가치는 아니다. 이런 짓거리가 우스꽝스럽게 비쳤던 고골리의 19세기는 차라리 얼마나 행복한가.
 
아카키는 외투만큼의 가치를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그가 진정 외투와 등가치인 것은 그가 죽어서도 혼백으로도 외투를 찾아다닐 때 더 극적으로 나타난다. 나의 등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죽어서도 찾아다닐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돈 혹은 명예인가? 자긍심 혹은 칭찬인가?  내안의 성품 혹은 깨끗하여진 영혼인가? 아니면 아직 다 닮을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닮고 싶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인가? 
 
P.S 주인공의 이름 아카키는 러시아인이 쓰는 이름이 아니다. 이 작품 속에만 등장하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는 복선이다. 그리스 어원은 [A-Kaki] 흠과 티가 없는 인간 이다, 그리고 전체 이름,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아카키의 아들, 아카키]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의미만을 같는 이름이다. 흠과 티가 없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아들. 고골리의 종교적 배경에서 이것은 곧 인간의 본래 형상, 아버지의 형상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그것은 곧 인간이 원래 기원한 신의 형상을 뜻한다. 그가 잃은 것은 인간성이고 그 인간성은 신성, 곧 하늘의 형상이다. 어쩌면 아카키는 마땅히 되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어버린, 신의 흠없는 모습을 닮아야할 자신의 목적도 상실한 현대인의 코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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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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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이해에 있어 이 두 책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한다. 서사시적이며 비유적인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이 책들에서야 비로소 그의 사상의 맥락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전집의 일부로 이런 번역본이 국내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혜택인 셈이다. 더욱이 [도덕의 계보]는 [선악의 저편]의 속편으로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써진 책이니만큼 [도덕의 계보]의 독서는 니체 이해에 중요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또 품절이다...흑

[도덕의 계보]

니체는 힘의 원리에 의해 세상을 본다. [좋다]라는 정의는 힘있는 자의 자기정체이고, [나쁘다]가 약한자들에 대한 강자의 정의라면, [악하다]는 약자의 강자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의 투영이고, [선하다]는 약자의 자기위로와 궤변적 인간이해라는 것이다. 니체는 현대사회의 모든 병리가 이 선악에 의한 인간사회 체제에 있다고 본다. 약자들이 개발해낸 궤변의 그물에 강자들은 얽매여, 병들어 죽어가는 사자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모든 선악을 논하는 도덕이라는 것, 어떤 의미가 인간에 있다는 주장,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모두 강자를 속여 무장해제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런 선악의 이해는 결국 니체로 진리자체를 문제 삼게까지 한다. 플라톤을 그리스도교를 문제삼는다. 진리의 원형, 도달점, 어떤 목적지가 있으리라는 인간역사의 오랜 개념 자체를 문제삼는다. 인간은 인간의 본능에 쓰여진 인간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적인 혹은 기독교적인 인간의 이해와 사회의 체계가 인간이 인간되지 못하고 자기의 단순한 생리적 문제를 해결치 못한 것을, 더욱 배배꼬이게 하여 복잡한 콤플렉스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목적이라는 것, 기준이라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아니 참된 긍정이란 없으므로 부정도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의 고통에 이유를 달지말고 해결하면 된다는 처방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편으로 그는 진화론도 반대한다. 인간의 자기멸시 즉 현재 있는 그대로가 아닌 과거의 동물이었던 인간으로 바라봄과, 이런 독단론으로 인간을 해석하는 것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 저편의 세계를 바라고 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란다. 이 모든 일체의 진리의 추구를 그는 썩은 공기를 뿜는 수천년의 거짓말이라고 규정한다. 결국 목적점이 없어야만 인간이 위대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아야만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이런 위버멘쉬(초인)이란 이런 도덕적 체계를 벗어난 창조적 인간이다.

진리란 없다. 목적이란 없는 셈이다. 오직 니체에게는 힘만이 있다. 증폭이 있다. 풀려난 힘의 의지와 위로의 상승이 있다. 그것은 더 높은(위버) 것인데 이제 허공 한가운데, 진리란 없다는 지점에 섰으니 어느쪽이 위인지는 모른다. 니체는 거꾸로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상관치 않는다. 그가 위라고 생각하는 위가 위다. 초인은 다른 인간이 보기에 동물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상관없다.  니체에게 더 강력한 비도덕적적 인간은 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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