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입문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총서 9
S.프로이트 지음, 오태환 옮김 / 선영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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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꽤 유명해진 선배가 정신과 의사가 된 이유가 학생시절 자신을 좇아다니며 스토킹하던 남학생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 경험으로도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성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가장 효과가 없는 방법]으로 성적 문제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자에 대한 스토킹, 우회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이나 망상에 사로잡히고 상대를 오해하며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 이런 문제를 갖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프로이트의 이런 환자들에 관한 관찰은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정립되어있지 않던 정신의 세계에 대한 전체적 윤곽과 그 작용기전에 대한 가설을 세우게 했다. 이런 체계가 그가 주장하듯 코페르니쿠스, 다윈 이후 세번째 위대한 인간의 위치에 대한 발견이랄 것까진 없지만 분명 인간에 대한 접근의 새로운 장을 연 것만은 틀림없다. 이제 인간은 과거의 기억에 의해, 더 엄밀히는 과거의 [잊혀진 기억]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수동적 존재로 비추어진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실수들과 꿈 그리고 정신병리는 이런 인간의 수동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숨겨진 기억들은 들추어지고 의식으로 떠올려지며 강인해진 자아에 의해 수용되거나 도피에 의한 왜곡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 새롭고 유효한 접근법과 해결방안이었지만 현재의 관점에선 의문점들도 있다.
 
첫째는 현재의 정신질환 치유의 대부분을 이루는 방법이 이제는 이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많은 신경전달물질의 조절이 이런 질병의 증상을 변화시키고 조기 치매, 즉 분열증과 같은 질환의 성적 과대망상이 기질적 뇌질환과 연관됨을 본다. 프로이트가 치유가 어려운 질환으로 제시한 그러나 그 작동기제는 정신역동적으로 설명한 질환들이 사실은 다른 원인이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이다.
 
둘째, 이 가설은 검증과 반박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스스로의 방어체계를 갖는다. 그는 오류와 꿈, 신경증 환자의 증상과 과거력을 통해 하나의 정신체계를 가정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체계에 반대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은 반대자 자신의 무의식의 저항 때문이며 이 체계 자체의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부감을 일으킬 수 박에 없는 새로운 가설의 설득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이런 방어는 결국 이 체계의 진정한 발전, 임상적 직감과 경험적 대응에 대한 검증을 차단하고 있다. 의사가 경험상 좋았다, 잘 낫는다고 주장하는 치료자 오류는 반드시 객관적 검증을 통해 확인받도록 허용되어야만 한다.
 
셋째, 융에게서 더욱 확장된 집단 무의식에 의해 문화의 설명이 억지스럽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인류사적으로 태고적부터 누적된 성적 거부의 기억이 이런 집단 무의식을 형성한다고 본다. 인류의 역사적 기억이 개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가정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경험이라는 것이 유전자 안에 새겨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환경에 의해 유전자가 선택되어 그런 경향을 갖는 사람만이 남았다 설명한다해도, 각 개인이 구체적 성적 체험을 반복하여 영상으로 그 개인의 무의식에 그려내는 것은 너무 큰 비약을 필요로 하는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집단 무의식은 집단의식의 덩어리들이 만들어낸 틈새는 아닐까. 즉 집단 내에서 옳다고 문화적으로 교육되어진 것들 틈새에서 저절로 인식하게 되는 금기나 터부에 대한 은밀한 깨달음은 아닐까.
 
여전히 아니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신경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디알렌이나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그들의 문제의 원인은 유아기의 성적 고착이라고 정신과의사가 알려주었을때 이것은 그들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했을까, 그들은 그들의 성적 문제를 인지하여 자유로와지는가? 과연 문제는 성적 이해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치료로 가중되는 성적 이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인가? 사람들은 점점더 성적 억압에서 자유로와지고 있고 또 점점더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다. 환자에게 약이라고 준 것이 점점 그들을 중독시키고 있는 꼴이다. 프로이트가 이해한 유아기적 성적 고착이라는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은 그래서 과학적 정신이해라는 새로운 조류에 밀려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번역은 읽기에 수월한 장점이 있다. 다만 전문용어에 있어서는 일본어 중역 같은 느낌을 주며, 용어로 인한 오독의 위험성이 있다. 용어에서는 열린책들의 [정신분석 강의]가 더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그 책은 번역이 독일어 직역이라 그런지 입안이 껄끄럽다. 읽기수월하고 올바른 용어사용이 같이 어울어진 책도 언젠가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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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창비신서 119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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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이 말하는 세계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근본 성격에 있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해에 뿌리를 둔다. 만물의 상품화를 향해 진행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자기확장 위한 연쇄체계를 완성하였으나 이 관계안에 내재적 모순을 가지고 있어 이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확장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화되어 왔으나 이는 도리어 이윤하락을 가져왔고, 지리적 팽창으로 새로운 노동력을 편입하여 상쇄해 나가야만 했다. 이런  절대 불합리한 체제가 자리 잡은 이유는 이 체제에 의해 이득을 얻는 1450년대 위기의 지배층에서 그대로 1650년대  자본주의 체제의 상부층된 계급의 의지에 있다. 
 
월러스틴의 주제는 이런 자본의 확장과 계층의 이행이라는 주제하에 국가가 어떻게 역사적 자본주의를 지지해 왔으며, 국가간의 견제와 무역관계가 이 체계에서의 탈피를 불가능하게 하면서 점점더 많은 국가들을 그 하부조직의 한 분업자로 끌여들였는지를 설명해 나간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  민족, 반제국주의,민주주의,진보지향을 보였던 투쟁들은 그 의미에서 결국 결국 가진자와 못 가진 자의 투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흔히 반체제 운동이라는 것도 결국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한 개량에 목적있으며, 결국 권력획득 후 역사적 자본주의 분업체계의 일부 기능을 맡게 되었다.  여러 세력들은 역사를 통해 부글거렸으나 결국 끊임없는 자본 축적을 이롭게 하고, 실질적인 격차의 끊임없는 확대를 돕는 역할만을 해 왔다는 것이다.
 
흔히 이런 사상적 파행의 감시자 역할을 기대해 왔던 지식층과 여론의 역할은 도리어 이런 체제를 공고히하고 확산되도록 도왔다. 인종차별주의는 노동력을 계층화하고 재생산시켜 하부층을 지배하기 편리케 했으며,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보편주의는 중간층을 회유하고, 부의 소유를 합리화하여 자본을 방어하며, 능력주의라는 미명하에 교묘한 계층을 만드는 구실이 되어왔다. 진보의 이념이 결국 반자본주의를 타도하여왔다. 아무도 진보를 반대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반대자도 진보를 찬양하는 가운데 공산주의 역시 진보의 그늘아래 있었고 또 실패의 길을 내달았다.
 
아무도 진보를 반대치 못하는 이유는 진보가 인간을 부유하게 했고 빈곤을 몰아냈다는 환상때문이다. 실제 20세기 인간의 대다수는 오히려 절대빈곤에 떨어지게 되고 합리화의 계층인 10-15%만이 서로 합리화 시키며 이를 부정하고 있다. 진보이데올로기는 부르조와지로 변신한 토지귀족의 창작품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껍질만 벗는 새로운 차별수단의 지속이 될 수 있다. 이제 반체제 투쟁이란 자본주의가 평등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데 기여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투쟁의 장은 사실 반체제세력 자신의 내부, 즉 그 진보에 대한 애착과 이권에 대한 집착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내 안에 자본주의의 이해에 대한 또 하나의 벽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중산 지식계급이 도저히 경험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세계의 모습을 들이대고 옳음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더 많은 동료 인간들이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삶으로 버텨내야하는 피라미드의 윗층에서, 장난감 놀이 같은 피라미드 상층부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말 것인가라고...나의 연구가 자본주의가 원하는 연구가 되지 않고 더 많은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선 결국 거슬러 일해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강을 거슬러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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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 2004년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4
프로이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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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초판이 나오고 1929년 8판에 이르도록 개정되어온 이 책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작품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작품이다. 놀랍게도 이 책은 [꿈의 해석]에 목적이 있는 책이 아니다. 그 자신도 이 책에서 밝히듯이 그에게 꿈이 어떤 의미를 갖으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그의 주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꿈의 발현에 있어서 무의식이 작용한다고 하는 것도 그의 독특한 주장은 아니다. 만약 꿈해석만이 그의 관심이었다면 이 책은 프로이트의 중심서적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프로이트에게 꿈의 해석은 정상적 심리기관 내에 작용하는 무의식의 성격과 그 프로세스를, 귀납적으로 도출하게 하는 자료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그가 밝혀내고 확신한 무의식의 작용기전은 두 개의 단계로 구분된다. 즉 무의식에는 지각의 부분과 전의식의 부분이 존재하며, 지각과 억압 혹은 검열의 균형 아래에 정상적 심리적 배출의 경로와 억압에 의한 퇴행 혹은 전이의 이탈된 경로를 나타낼 수 있음을 보인다. 그의 꿈 해석은 그래서 신경증 이해와 맞물려 있으며 동시에 이들 꿈이나 히스테리 같은 정신작용이 발생하는 정신기제 자체의 작용 메카니즘을 보이는데로 진행하여 간다. 

 더욱이 그의 임상의로서 균형 감각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그가 이런 프로세스 자체의 규명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전의식과 의식 사이의 통로에는 집중한 반면 무의식과 전의식 사이의 검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이런 실용적 사용체계로서 그의 가설을 비유적으로 정립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결국 우리가 인식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의식의 과정에서 이런 무의식의 이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찾고자 한다. 그에게 결코 전의식적 검열관은 적이 아니며 인간의 균형을 위한 안전장치이며 의식은 그 반영물과 같은 역할임을 보인다. 의식은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리비도의 집중을 조절함으로서 무의식과의 충돌을 피하고 안정적 정신기관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코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비행선과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통해 정신의 윤곽을 가설하고, 그 가설아래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낸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을 쾌락의 체계에 맞추라]가 정답인가?

 그의 독창적 체계는 명확히 근간을 과학적 이해라는 패러다임 안에 둔다. 자신의 환자의 병리와 자신의 꿈의 해석을 어울어 그가 석사와 박사를 거치며 겪었던 [바보처럼 묵묵히 진행하는] 생리학 실험처럼, 그는 가설의 검증과 수정을 통해 이 체계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체계는 프로이트 시대의 유행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무의식의 진화적 발달의 축적에 대한 가설은 다윈을, 도덕적 계보의 형성과 무의식과의 충돌은 니체를, 무의식의 지각조직의 유일한 특성으로 불쾌와 쾌를 잡는 것은 스피노자로부터 내려온 공리적 흐름의 한 부분을 비친다. 과연 무의식은 의식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일까? 더 나아가 무의식은 의식을 깨닫게 하는 보조자로서가 아니라 의미의 진정한 해석자인가? 또한 그 의미는 결국 쾌감의 원칙일까? 현대적 생물학 이해는 이 체계에 수정을 가할 것이다. 한편으론 지나치게 인간의 능력을 확신하던 당시의 반종교적 유행 또한 이 체계의 고려할 면임을 알 수 있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체계는 꿈과 신경증 이외에도 존재하므로, 이에 대한 결정적 해답은 유보적이다. 하지만 분명 프로이트 이전의 세계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의식의 세계에 국한되었던 반면, 프로이트로 인해 아무 의미가 없어보이는 단편들 안에 오히려 억압되지 않는 진정한 무의식의 모습들이 나타남을 깨닫기 시작하고 문학,철학,예술의 이해 수단으로 발전해 왔음은 현대의 이해에 있어 이 책의 가치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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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 희곡선 범우희곡선 3
몰리에르 지음, 민희식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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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귀족]
 
부르조아 젠틀맨은 2006년 부요해진 우리 삶살이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주위사람의 시선과 벌어들인 돈을 대접받는 사회적인 계층으로 변화시키려는 모습이다. 아파트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즐기는 오락은 골프로, 아이들은 비싼 브랜드의 옷과 음악,미술,철학 공부로 자신들의 위치를 보여주려한다. 돈이 있다면 누구나 이렇게 살고 싶어하는 사회가 되어왔다. 
 
혹 이런 삶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귀족이 지배하던 전근대적 프랑스에서야 돈 좀 있다고 귀족 행세하려는 상인이 우스웠겠지만, 돈이 있으면 되는(!) 우리사회는 더 이상 부르조와 젠틀맨이 경멸과 조롱거리가 아니다. 어쩌면 자본주의 민주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고 과거의 프랑스가 전근대적이며 귀족위주의 건강치 못한 우월주의를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누린다는 것이 과연 적당한 수준인가는 생각해 보아야한다.
 
고급품 소비의 열병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를 통해 중국으로 들불 번지듯 퍼져간다. 이제 명품가방들은 공장처럼 찍어내도 동아시아의 수요에는 모자랄 판이다. 동아시아 수요. 이거 내가 한몫하지 않는가? 명품 브랜드가 서민귀족에게 점령당한 지금 이제 현대의 귀족층들은 전문지식과 호사취미로 눈을 돌린다고 한다. 17세기와 무엇이 달라졌나? 우리 고상한 주르댕 역시 음악,미술, 검술, 철학 선생을 두고 열심히 내적 호사취미의 연마에 정진했는걸...
 
나는 무엇을 놓쳤는가? 삶은 왜 이리도 피상적이고 우스꽝스러운가? 인간은 필요한 만큼에 만족하고 나눌 수 있어야하며, 견실한 생각과 남을 돕는 모습으로 아름답다고 생각은 하는데...귀족의 입장에서 보지 않아도 꼴 사나운 것이고, 여전히 스스로도 부끄러운 행태다. 인간의 삶은 굳이 호화로울 필요도 없고 복잡할 이유도 없는 너무 단순한 것인데... 우리는 돈을 벌어들이는데 애당초 목적이 있지 않았다. 더욱이  유세를 떨 때 드는 그리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싶진 않다. 무엇이 나를 이리로 몰고 가는가?
 
혹 자존감을 잃은 것이 이유는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그것에 대한 긍지. 자신의 고귀한 면이 주위사람의 유행을 좇는 것으로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는 자존심을 돈으로 사려들기에 항상 돈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나 스스로가 나니아의 피터처럼 이 세상의 왕이며 공정하고 의로운 판단으로 세상을 다스릴 자로 여기는 의엿한 자존심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존감이 있어도 힘든건 습관이 될 정도로 뿌리내리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습관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퍼붓는 자본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놀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습관은 훈련을 통해 가능하며 문화를 통해 가능한 것이니까. 만약 내가 휩쓸리지 않고 유행의 조류를 의연히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느덧 내 습관이 되고 우리 문화의 한부분으로까지 자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흐름을 거스르는 우리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까? 그런 삶의 모습에 힘과 지지를 보내는 우리의 믿음과 교회는 얼마나 가슴 뿌듯한 것일까? 문화란 결국 사람이 선택하여 가는 것이다. 여태껏 문화운동이 따분한 건 문화란 아름다와야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며 강요되지 않아야함을 몰랐던 때문은 아닐까? 문화운동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막상 문화를 바꾸는 사람의 변화에는 소홀한 때문은 아닐까? 문화는 사람에 의해서만 바뀌며,  바뀌는 정도 또한 문화를 습관으로 원하는 자가 선택하는 범위 정도이니까...
 
습관이 되도록까지 시간을 들이지 못하는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삶의 모습도 큰 역할을 한다. 소란들과 쓸데없는 인터넷 서핑,댓글, 기사들, 게임, 신문, 드라마, 남의 이야기들, 사소한 약속들과 행사, 시간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이 조바심은 내적 고요에 익숙치 않음 때문이다. 문은 때로 잠겨져야 하고 고요를 위한, 기도를 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만 한다. 위대함은 아니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고요에서 찾아지니까. 잡지 않는 생각이 표류하듯, 의도하지 않는 시간들은 분명 쓰레기들로 채워져 둥실둥실 큰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고 말 것이다. 내가 떠드는 기도가 아닌 침묵하며 듣는 기도가, 내 철학으로 해석하는 성경이 아닌 들려주시는 말씀이 삶을 바로 세우듯, 침묵 속에 정작 중요한 미세한 소리에 귀를 열리라. 적어도 서민귀족으로 살아가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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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1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마립간 2006-01-1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자본주의에 휩쓸리지 않은 저를 다른 사람과 차별하려는 자신의 성향은 서민 귀족이 서민과 구분지으려 했던 것과 같지만 차선책은 눈에 띄지 않고 최선책은 마음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현정 2006-01-1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사무엘처럼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며 살아가면 좋을 터인데....
그런데..예전부터 그 때의 사무엘 나이가 너무 궁금해요. 12살 정도?
 
첫사랑 민음사 세계시인선 11
예이츠 지음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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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예이츠의 나이 24살인 1889년시집 [Crossways]에서부터 그의 나이 73세때 마지막으로 나온 시집[Last Poems]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 전체를 포괄하여 발췌한 3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배열은 시대순이어서 예이츠의 시의 변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지만 그의 시세계를 깊이 이해하기에는 좀 적은 편수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시창작 시기 중 후기로 꼽히는  [The Wild Swans at Coole] 이후에도 200여편의 시를 썼으니까...
 
 예이츠의 시는 그에게서만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니스프리의 호도]는 소로우의 월든을 연상시키지만 아일랜드적 분위기가 강한, 자연주의적 민족적 색채를 갖는다.  후기의 시는 단순해지고 탈개성적이 되어,  마치 블레이크와  프로이트가 섞인 듯하다. 변증적 역사관과 신비주의, 육체와 무의식에 대한 관심은 어느 다른 시에서도 느끼기 힘든 그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다음 시대gyre는 예이츠의 바람대로 接神을 통해 찾아올까? 아니면 그가 예언한 짜라투스트라의 재림이란 결국 [마술피리]처럼 한바탕 즐거운 깃털로 장식한 상상의 나래일 뿐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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