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브라질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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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전이 되는 책과 괜히 길지도 않은 삶의 시간을 낭비케 하는 책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전은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갖는다. 비록 때로는 혐오스런 인간과 그 갈등을 그리더라도 작가가 가진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과 동일시를 지울순 없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면과 그것을 갖는 소수의 인간이 아닌 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것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다.
 
고전은 새로움이 있다.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등장하기는 어렵다해도 새롭다는 것은 깊다는 뜻이다. 남들이 겉핥기만 할때 작가는 깊이를 뚫고 내려가 우리를 놀라고 또 공감케 한다. 그들은 이런저런 상상의 짜깁기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어떤 것을 풀어보여준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발견한 것은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진심이 아닌 것이 어떻게 인간을 위로할 수 있으랴?]
 
그래서 고전은 기쁨을 준다. 이 기쁨은 삶에 대한 의욕이고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며 또한 나른하기만한 나의 삶에 대한 상쾌한 각성이기도 하다. 책장을 덮을때 간지러움이든 무거움이든 가슴저미는 슬픔이든 고전은 사무치는 기쁨을 준다. 
 
조이스는 욕망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부적절한 예술이라고 명명했다. 우리가 막연하게 부르는 고전이란 이런 부적절한 예술과 이념을 떠나 아름다움의 진실에로 접근하는 기쁨을 주는 것들일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는 스토리와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엑스칼리버]류를 연상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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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VS 프로이트 C.S. 루이스 연구서
아맨드 M. 니콜라이 지음, 홍승기 옮김 / 홍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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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맨드 니콜라이 교수의 하버드 대학에서의 강의를 엮어낸 이 책은 현대의 지성인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갖는 괴로움에 대한 대답으로 씌여진 책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관에는 결국 두가지가 있다. 절대주의적인 독단적 세계관. 유신론적이며 종교적이고 목적이 있는 우주에 대한 주장이다. 그리고 멋있어 보이는 유물적이고 경험론적인 세계관. 진화론적 force의 우주, 회의론적 우주에 대한 주장이다. 있는대로 설명하는 경험론적 우주관은 다 좋은데 체스터튼이 보여주듯 [가없는 절망]이 문제이다. 의미를 인간이 소유한다는 것, 만물의 척도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 인간도 만물도 의미가 없다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고통도 선행도 도덕도 아무런 의미와 기준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깊은 무의미의 절망이 밀려온다. 우린 이걸 부조리라고 부른다. 시치프스의 신화
 
절망적 우주가 아니라면 목적론적 우주관인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큰 문제는 이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것을 [고의적 무지]라고 주장한다. 파스칼이 말하듯 인간은 열려있는 마음으로 신을 찾을때 그를 당연히 발견하고 놀라와하며 기뻐할 수 있는 이성을 지녔다. 그러나 인간은 고의로 그것을 찾고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문제의 본질에는 주인이 되려는 인간의 의식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지도 유지하지도 발전시키지도 않은 우주, 발전의 계획을 가질 수도 없는 우주를 자신의 소유로 선언하고자 한다. 그리고 깊은 고독과 우울과 무의미와 슬픔을 견디어내고자 한다.
 
루이스는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인간 안의 빈곳을 기쁨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찾아간다. 그리고 그 핵심에 이천년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창조자의 기록을 보며 전율한다. 그가 우리의 이런 주인되고자 하는 고집을 위해 인간이 되었고, 죽었고 다시 살았으며, 용서하고 사랑했다. 루이스는 이 일을 통해 새로운 우주를 발견한 인간이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과 불행은 프로이트와 같았으나 그가 다다른 길은 달랐다. 고통의 끝에서 한 사람은 절망을, 한사람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신 세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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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서해클래식 4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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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 포르투갈 스페인의 패권과 새로운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득세의 와중에 영국은 본격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16세기초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제4차 항해후 [신세계]를 발표하였고, 여러나라들은 비등한 힘을 가지고 서로 동맹국을 바꾸어가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후스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종교의 기운은 이 책의 다음해인 1517년에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며, 왕권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이미 1513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사람들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해 옛것을 뒤엎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이런 부글거리는 시대에, 토마스 모어는 플랑드르에 사절로 파견되어가 있던 와중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화와 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가 그린 유토피아는, 당시의 영국처럼 필요없는 유한 계급과 독점적 양모산업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범죄자로 나서야하는 그런 국가가 아닌, 정치적 이상국가이다. 모양은 영국과 흡사하나 사유재산이 없고 놀고먹는 사람이 없는 이 나라에선 누구나 여가를 즐기며 사치와 호사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가치는 진정 정신과 영적 세계에 있으며, 외교는 어리석은 주위국가로부터의 전쟁을 막고자 하는 노력일뿐 스스로를 다른 국가에 의존치 않는 나라이다. 박노자가 언뜻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모어의 세계는 우선 철저히 물질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국에 비일비재한 굶주림과 범죄, 비인간적인 의식주에 내몰린 빈민들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방향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삶의 형태를 떠받치는 힘이 그리고 이런 공산사회가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제도로 자리 잡은 이유가 그 주민의 영적 세계관에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에 그렇게 안달하지 않음으로해서 공산사회를 즐겁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강요되지 않으며 비교에 농락당하지 않는다. 과연 이 책이 500년전의 책인가? 우리는 아직도 이 일들을 스스로 겪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나종일 번역의 이 책은 화보로 가득하고 책 표지가 마치 청소년용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음에도, 번역에도 충실하다. 번역자의 다른 책인 윌러스틴의 [자본주의 문명]도 이런 다채로운 화보가 곁들여지면 혹 청소년들도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읽기에 좋은 시절이다. 마음에 여유만 없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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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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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엘리엇의 나이 27살인 1915년에 낸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전주곡들 Preludes, 우는 처녀 La figlia che piange와 34살의 나이에 쓴 황무지 The waste land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시는 많은 고전들로부터 나온 인용구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외래어, 엘리엇 당시의 음악, 가극, 유행어를 담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 고전에 대한 이해와 이 책의 주석들이 도움을 얻으면 아예 감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엘리엇이 이 시의 독자로 여긴 영미 지식인보다 이 책의 한 부분인 불교적 이해로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이런 드러난 참고문헌 이외에 또 시대의 여러 조류와 인물들을 반영한다.  약한 자들의 순종에서 도리어 희망을 보는 것이나 신에 대한 기다림은 예이츠를,  무의미한 이 인생을 죽고 싶어하는 마음에선 보들레르, 여성에 대한 폭력 속에서 이 시대의 어둠을 보는 것은 밀, 쇼, 입센을, 성과 죽음의 무의식 위에 서 있는 노동과 오락의 건강성은 프로이트를 보게 한다. 어떻게 엘리엇은 20-30대에 인생을 이러한 깊이로 볼 수 있었던가?
  
엘리엇은 황무지의 끝을 세마디의 천둥의 소리(Ta)로 맺는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탸-자제하라. [이걸로 나는 겨우 내 폐허를 지켜왔다]는 고백처럼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이곳 황무지에서의 삶은 참음을 요구한다. 무엇을 위한 인내인가? 암살당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천둥은 요란하나 물은 없는, 마른 바위산엔 언설만 난무할뿐인 시대에 천둥의 소리처럼 정말 생명은 올 것이라는, 과연 지금은 시험의 때에 불과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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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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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 입장에서 해석되어질만큼 그 가닥을 잡기 어려운 작품이다. 꿈꾼 내용을 이야기 하는 듯한 분위기, 디테일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자세하다. 수많은 알레고리적 요소들이 정신분석적 구조를 형상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결코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나 심리적 접근으로는 풀 수 없는 카프카만의 세계에 있다. 그는 기억의 창조를 통해 무언가 자기가 싫은 것을 지우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적으로 인간의 문화사가 만들어온 외면적 억압일수도 있고, 자본주의적 비인간화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의 관심은 이런 특정 운동의 하수인으로 종결되지 않는 내적 자유를 지닌다.
 
마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판관의 비유와 같이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는 대성당에서 만나는 재판소에 소속된 교도소 신부를 통해 들려주는 한 비유를 통해 이 소설과 그의 작가관에 빛을 던진다. 법률 앞에 서 있는 한 문지기는 찾아온 시골남자에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해준다. 허가를 얻도록 기다리던 시골사람은 문 앞에서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리고 죽음 직전 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 문에는 나만이 기다리고 있는가? 문지기는 이 문이 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고 문을 닫는다.
 
이 비유에는 작가가 제시한 것 이외에도 수많은 해석이 독자의 몫으로 주어진다. 사실은 그 사람의 인생이라는 길에 주어진 경험 가능한 한번의 삶이 지독하게도 그에게 빛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다운 말상대 역할의 문지기는 그를 지연시키고 그 문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카프카는 이 결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개와 같구나, 그는 죽어도 치욕은 남는 것 같았다]라고...
 
실존적 인간의 절망의 표현이라는 쪽이 더 맞겠다. 어떤 이해와 포괄적 지식을 거부하고 기준으로 주어진 것 앞에서의 인간의 자가당착을 보여준다. 법률이라는 빛은 인간을 거부하며 빛난다. 그는 결코 그 곳에 이를 수 없다. 소모만이 있을 것이다. 일도 놀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가 어쩌면 신경증적 리비도를 닮아있는지 모른다. 다다르지 못하면 엉뚱한 대상에 들러붙고 마는 리비도처럼 인간의 개 같은 인생도 엉뚱한 소모거리에 배회하고 자기를 소진하거나 이리저리 솔깃하여 기웃거리며 배회하고 정작 살아야 할 삶은 살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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