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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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출판된 세가지 책을 평행 독서중이다.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장관을 지내게 된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기술문명에 대한 영국인다운 해학을 엮어낸 헉슬리의 [Brave New World], 그리고 미국인 신학자에 의해 쓰여진 이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 사회]이다.
 
이 책들은 인간이 20세기의 세계 안에서 어떤 불가항력적인 파멸앞에 서있는지를 보여준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가없는 팽창 앞에 가진자는 자기기만과 감상주의적 태도에 갇혀 살며, 가지지 못한자는 폭력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냉소적 정신을 강요당한다. 저마다 그 안에서 인간을 찾기 원하며 나 홀로의 인간이 아닌 다 같이 살 수 있는 공존의 공간에서의 인간됨을 소망한다.
 
그 중 이 책은 유독 사십대를 위한 책이란 느낌을 준다. 도덕적 이상주의와 확고한 폭력전복 혹은 비폭력적 원칙에 전념하는 이십대나, 이런 이상주의의 현실과의 괴리를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메꿀 방법론을 모색하는 삼십대와는 달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런 전제하에 원칙의 고수라는 중요한 가닥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 나이에 적합한 책이기 때문이다. 결코 이런 종류의 책을 주로 읽는 대학생 시절이나 석박사시절에 호감이 가는 방향은 아니다. 하지만 때묻은 세대의 바퀴 속을 굴러 가는 자로 자본주의의 젖을 먹지 않는 자가 있으며, 인간에 대한 거리낌없는 증오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사회에 대해 포기하자니 마음이 걸리고, 나서자니 손에 피를 묻혀도 아무 쓸모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앞을 가로막는 경험을 왜 모르겠는가?
 
사회주의적 성격의 정부, 도덕적 이상을 가졌던 인간들의 타협과 도덕적 오염, 비정규 노동자의 해고와 고급 노동자의 파업, 자본소유자의 선전과 경제적 분배에 대한 중간층의 동요, 평화를 인질로 한 강대국의 기만과 자국내 경제위기에 의한 실권의 위기를 대외긴장 형성과 미국에 대한 의탁으로 해결하려는 일본, 수많은 정치와 경제와 도덕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이 거대한 흐름앞에 인간으로 서서 버티기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책은 여전히 건재하는 스승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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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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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견해가 지나친 것은 그의 예상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설득력을 갖게 하는 증거들이 많기 때문이다. 리프킨이 이야기한 석유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파국이 이 책이 나온지 26년이 지난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엔트로피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득세와 대전환도 모든 학문 분야에서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주와 합일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각과 삶의 개선도 미미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 에너지 사용이 그래도 줄어들고 그로 인해 파국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할까? 아니면 이미 석유값이 치솟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건 왠지 황우석의 논리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발생한 모든 사건을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게만 해석하려는 오류. 구절구절 옳은 리프킨의 주장이 왜 이런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는가.
 
그의 주장의 근거는 논리적으로 모두 옳다. 석유 에너지는 언젠가 아니 곧 고갈될 것이고 이것은 현재의 생활패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함은 물론 그 소용돌이속에서 수많은 전쟁과 기아와 무질서로 인한 나를 포함할 인류의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진행을 막을 방법은 오로지 세차게 브레이크를 밟는 방법 이외에는 없어보인다.
 
다만 그의 주장은 우주의 엔트로피가 상승하며 그 흐름은 가속화되고 가용 물질은 고갈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것으로 역사와 종교, 과학과 경제를 일반화하려하고 있다. 내가 그의 주장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이유는 이런 확장해석의 오류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근거로 이렇게 저렇게 신문기사와 과학논문 잡지와 자연의 이상현상을 증거로 점점 논리를 확장하여 어느때 어느 곳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다른 논리로 다음 휴거일시를 지정할 것이다.
 
너무 약한 근거위에 너무 큰 성을 쌓은 결과이다. 그의 방향이 틀린건 아니다. 재림도 있어야하고 줄기세포도 있어야 하고 환경보전도 있어야 한다. 다만 올바른 크기의 근거 위에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는 이미 첫번째 휴거일을 맞추는데 실패한 것 같다. 다음 날짜를 맞추려 하지 말고 더 포괄적 그림의 탄탄한 배경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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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프란시스 쉐퍼 20
프란시스 쉐퍼 지음, 박형용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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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의 1976년 저작인 이 책은 역사를 되집으며 그가 가진 기독교의 본질과 서양역사에 흐르는 철학,예술,문화의 변화에 대한 큰 흐름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그 흐름이 개괄적이고 일면을 다룰 수 밖에 없는 제한이 있는 반면 미쳐 생각지 못했던 각 사조와 철학자, 예술가의 역사적 배경하에서의 발전과 한계에 대한 통찰을 얻게 해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책 [이성에서의 도피]에 서술적으로 보여준 이성의 실패에 의한 비이성으로의 도피를 구체적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통해 보여줄 뿐 아니라 이러한 현상이 20세기말의 세게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까지를 보여준다. 

역사를 되집으며 쉐퍼는 초월과 현실이 하나되는 이성의 범위 내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기반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절대자와 그의 말씀인 계시의 일치만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와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자의 존재와, 그 존재와 일치하는 그의 말씀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져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진단은 말씀의 상실로 인한 인간 이성의 절망이며, 나아가 비이성으로의 도피이다. 그 결국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권위주의와 임의로 휩쓸려 다니는 대중주의이며, 또한 혼란과 가없는 논쟁 그리고 잔인함이다. 그의 처방은 종교를 비이성의 영역에 국한하는 도피가 아닌 말씀에 근거한 이성의 이해와 말씀에 근거한 인간과 세계의 파악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유대인이 에스겔에게 던진 질문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에 대해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악인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 법과 의를 따라서 살면, 그것 때문에, 그는 살 것이다."라고 대답하신다. 현대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과연 말씀은 이 세상의 혼란의 대답이 되어줄 수 있다고 나는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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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지음, 정인섭 옮김 / 민족문화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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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종종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기어,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그리고 우리의 지나간 날들은 우매한 자들에게
먼지뿐인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추어 왔도다. 꺼져라, 꺼져,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기껏해야 걸어다니는 그림자,
자신의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뽐내고 안달하다가
그리고 영영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헛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에 가득 차,
아무런 뜻없이. [맥베드]

부서지는 가정, 부서지는 가치, 혼돈의 세계. 그것은 남부의 몰락이고 인간사회의 몰락이며 근본적으론 서구 도덕과 가치의 몰락이다. 아무도 이런 가치의 전복과 까발려진 더러움을 수습하지 못한다. 여기서 인생은 이제 헛소리와 분노에 찬 외침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벤지의 통곡 앞에서 작가는 깊은 절망과 연민을 느낀다고 말한다. 서구의 몰락한 가치 위에 사는 이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으나 그리 살 수 밖에 없다. 그 앞에 서서 시간을 부정할 수도, 양심을 부정할 수도,  심지어는 동료인간의 모든 면을 저급한 것으로 몰아부칠 수도 있다. 포크너가 본 것은 그 시초와 종말의 모두였고 깊은 연민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구원의 가능성을 가진 이 서구의 전통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억압받으며 노동을 부당하게 요구받는 흑인노예들이다. 백인의 사회가 거부하며 섞이려 들지 않는 존재. 아직도 백인들은 백인 이민들을 통한 백인들끼리의 근친상간만이 그들을 지킬 길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백인의 자멸을 불러올 것이다. [나는 처음과 끝을 모두 보았다.] 이제 포기하거나 악착같이 살아가거나 멍하니 응시하거나...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치를 잃은 존재들이다.

어쩌면 결국 백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다. 벤지의 후각과 관련된 슬픔, 아버지의 냉소적 불가지론적 알콜중독, 어머니의 도피적 무기력증, 퀸틴의 자의식적 고통과 자기정죄와 자포자기, 제이슨의 현실적 이기주의적 비양심적 처세술. 이제는 무기력한 그러나 잔인한 이 세상의 일상이 된 모습들이다. 그 무엇도 이 가족의, 남부의, 이 나라의, 또 세계의 파멸을 저지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딜시는 [나는 시작과 끝을 모두 보았다.]고 말한다. 깊은 연민으로 챙겨주는 일 밖에 남지 않은 세상. 우리도 이미 그 길에 들어서 있다. 들어선 자에게 파국적인 끝은 불가피하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일하지 않아도 됨이 저주라면 누가 믿을까? 나 자신에 대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일하지 않고 사는 삶에 대한 벌거벗겨짐...노예를 부리는 자는 스스로의 타락과 스포일링을 막을 수 없다. 만약 자신이 하여야 할 일들을 하려들지 않는다면 그 댓가를 각오해야 한다.  나에게 책임이 주어진 직업과 관계로 짜여진 역할들. 부모, 가족, 선생, 제자, 아들, 인간으로서의 일들은 사실은 축복이었다.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이면에는 노동하는 자의 고통이, 나의 스포일링이 있었다. 그대로 둔다면 끝은 파국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포조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안락을 댓가로 한 생명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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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에 집중하라
래리 보시디 외 지음, 김광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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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동기로 이 책을 읽은 사람도 있을까? 도산 안창호 때문이다. 도산은 나로 정말 심각하게 실행의 문제를 고민케 한 사람이다. 그가 본 1920년대의 우리의 문제는 한마디로 전략의 부재와 실행의 부재였다.갑론을박에 빠지다보니 점점 더 해버리면 될 것, 하고 지나가야 할 것들은 해 놓지 못하고 일본에게 먹히고 말았다. 일본이 악한 까닭도 있지만 우리가 약한 까닭을 놓치지 않았던 도산의 통찰은 우리 민족을 강하게 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힘]을 꼽았다. 힘은 재력에서, 지력에서, 사랑에서 나온다고 본 그에게 [올바른 뜻]만큼 중요한 것은 [실행]이었다.  
 
도산의 길을 따라 읽은 이 책은 나에게 [조직으로서의 실행력]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개인의 실행력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이 책은 조직 실행의 3대프로세스로 인력, 전략, 운영을 들고 이 프로세스는 행동수칙을 준수하는 리더와, 정의로우며 의견의 자유가 보장된 문화와, 적합한 인재의 배치라는 방법을 통해 올바로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나 가장 최종점인 운영에서조차 그 요체는 리더의 책임감과 헌신,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공유코자 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우리가 좋은 리더를 많이 갖지 못하고 훌륭한 일을 힘모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의 약점은 결국 개인적 실행이 아닌 조직적 실행이다. 웃음의 실행, 정직의 실행, 겸손의 실행, 검소의 실행 이것이 조직의 것이 되지 못함이 또한 우리 실행의 현주소이다. 조직적 실행은 인력을 전략을 운영을 필요로 하며 반성과 동의와 확인과 지속성과 점검과 자신의 지속적 변화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실행력이 일시적 감정과 분위기에 의한 것이기 쉬운 우리가 이제는 냉정한 현실에서도 사회적 실행력을 길러야할 때가 왔다. 감정적 신바람 경영은 단기적 응집력이 있지만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학습되어 발전해 나갈 수 없다. 반복되는 우리의 역사는 늘상 어느정도 살게되면 서로간의 싸움질과 소모적 흠내기로 주저앉고 말지 않았던가? 우리는 감정으로 일이 되므로 상대를 감정으로 알고 감정으로 대하길 좋아한다. 혹 회식의 음주가무와 서로의 약점알기를 통해서가 아닌 서로의 꿈과 아름다운 마음들을 알아감으로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지금껏 감정으로 알던 상대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동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우리는 더 이상 길거리에 부딪히는 사람에게도 저놈은 또 어떤 더러운 생각을 가진 놈인가하는 마음보다 저 사람안에는 어떤 꿈, 어떤 희망, 어떤 고귀함이 들어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진 않을까? 월드컵의 대한민국이 아닌 자랑스런 민족정신의 대한민국이 도산이 꿈에도 그려 그의 뼈와 살을 갈아바친 이 땅위에 생겨나길 바란다. 서로를 자랑스러운 한국사람으로 여기는 우리들이 되길 원한다.
 
이 책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가는 목적이 이윤이라는데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배척할 것만은 아니다. 나는 물론 이윤이 선이라 믿지 않고 이윤의 창출이 삶의 목적, 인류의 공헌할바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선이 삶의 목적, 이윤은 경영의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선을 경영함에 있어 조직적이고 전략적이라면 선을 더 잘 이룰 수있지 않을까? 문제는 목적지를 잊지않음에 있다, 이윤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업적도 목적이 될 수 없다. 드러커는 결국 비영리단체와 같은 경영기법으로 전략적 접근을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은 진정한 목적에만 삶을 헌신한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극대화가 동기라면 이것은 이미 17,8세기에 형성된 로크와 스미스의 세계관의 틀 안에 있을 뿐이다. 공자는 먼저 배불리 먹이고 도를 가르치라 했다. 도를 따르는 자는 배골치 않는 것에서 너무 나아가서 그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선 안된다. 더욱이 진정한 협력과 상대방(고용자,동업자 혹은 경쟁자)의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삶과 그 와중에 낀 각 개인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에게 이윤적 미끼가 아닌 의미를 발견케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균형은 이윤과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일지 모른다.  이것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닌 도리어 의미를 통해 열정을, 열정을 통해 실행을 얻어낼 수 있다. 도산과 공자가 생각하는 실행이란 결국 의미를 고려하는 실행이다. 기계론적 실행은 파국에 치달음은 살아보지 않아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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