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우등생은 10살 전에 키워진다
전평국 지음, 홍승우 그림 / 삼성출판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국제적 우등생을 만들기 위해 10살 전에 시행하여야 할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10살까지 부모가 해야 할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습관을 기르도록, 즐겁게 배우는 기쁨을 익히도록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주위 부모의 학습지와 전집구매에 흔들리지 않기가 어디 쉬운가? 하지만, 그건 아니잖아 하면서도 아이의 학습의욕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부모가 되어왔음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천론. 모순론 외 범우문고 117
모택동 지음, 김승일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순론]

1937년 44세의 모택동은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위한 2차 국공합작의 와중에  변증법적 관점에서의 중국 상황의 이해와 앞으로의 투쟁 방향을 보이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그의 모순론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교로서 쓰여졌다기보다는, 실천적 공산주의 입장에서 교조주의적 색채를 띠거나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였던 공산주의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고 단일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중국적 상황을 타개하고자하는 의도로 쓰여진 고찰이며 반성이다.

변증적 유물론 사고가 가지는 모순의 절대성과 보편성 이외에 모택동은 시대 상황과 충돌하는 힘의 다양성으로 인한 특수성을 제시한다. 이 특수성은 자칫 혼란스런 무원칙성을 초래할 수 있으나 모택동은 이 미로에서도 한 가닥 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주요모순과 모순의 주요 측면의 파악의 길을 보여준다. 사물의 성질은 주로 지배모순의 주요측면에 의해 규정되므로 이것을 붙잡음으로써 혁명적 당이 정치적 군사상 전략전술의 방침을 결정하는 중요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의 두 대상은 그 위치가 바뀔 수도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일을 하는자와 노동의 대가를 누리는 자. 그러나 변함 없는 것은 그 과정의 투쟁이다. 이 끝없는 투쟁이라는 것이 꼭 항상 적대적 관계와 전쟁의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모순의 양측에 선 국공은 서로 투쟁의 단계에 있음에도 서로 일본이라는 주요모순 앞에서 서로 합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제거된다면 그들간의 적대의 표출이 불가피함도 당연한 역사발전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택동의 상황이해와 이론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1930년대의 중국 상황을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명쾌히 설명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역사와 사회란 해석하는 자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임을 다시금 보여준다. 한국의 2000년대는 어떤 해석을 필요로 하는가? 1930년대의 중국해석이나 1960년대의 미국해석이 보편성과 절대성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현대의 중국과 미국이 매달리지 않는 이런 해석보다 우리에겐 우리를 살리는 역사에 대한 맑은 물에 씻기운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라한 몽파르나스 바빌론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이 연극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53년 [피가로]지에 장 아누이가 쓴 [광대들의 팡세]라는 논평이었다. 고도를 누구로 여기느냐는 베게트의 말처럼 관객 자신의 몫이지만 나 역시 아누이와 같은 느낌으로 고도를 본다.
 
삶의 질곡을 담아낸 구두와 이성적 사고의 모자로 대변되는 고고와 디디가 처음 등장하는 1막은 십자가 옆의 두 도둑들의 구원의 가능성에 관심이 모아진다. 죄인됨을 수락하는 회개로서 이분의 일의 구원의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가? 디디는 회의적이고 고고는 긍정적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회개의 문제에는 다르다. 이들은 인본주의와 전통, 혹은 구교와 신교, 자유주의와 오소독시를 보여주는 대비의 재미가 있다.
 
이들 앞에 등장하는 20세기적 삶의 조건, 자본주의. 땅의 주인인 포조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 앞에 자본가의 잔혹함으로 나타난다.  포조는 럭키에 기생하며 럭키의 이론(자본론이라 할 수 있을까)에서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배워낸존재이다. 그는 군림하나 정작 자신의 중요한 면들이 소모되어짐을 깨닫지 못하는 자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 2막은 자못 심각한 주제를 논하며 시작한다.  분주함과 말장난, 혹은 이데올로기는 죽음 앞에 선 존재들로 죽음을 잊게 하는 파스칼적 회피이다. 이런 무가치한 시간 보냄에서 확실한 것은 기다림뿐. 시간이라는 가혹한 운명에 기다림조차 없다면 까뮈의 말처럼 나무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걸. 포조는 고도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포조를 고도로 믿고 싶어하는 고고와 디디가 비록 몇 있을지라도...포조가 가는 길은 눈이 멀고 귀가 머는 길이다. 일상의 습관과 투쟁의 변증법 속에 길을 잃고 마는 존재들.
 
아일랜드인다운, 조이스를 연상케 하는 예술에 대한 견해와 파스칼과 까뮈를 보는 듯한 프랑스적 사변 속에서 베게트는 20세기를 관통한 기독교 사회의 한 질문을 던진다. 슈바이처가 말한 영원히 [연기된 종말]인가 아니면, 자비로우신 오래참음인가. 대답은 사색이나 토론에 있지 않고 오리라 약속한 이에 대한 신뢰와, 나 자신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겸손함 안에 있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1927년의 중국을 무대로 한다. 장제스의 군대가 들어오기 전날인 1927 321일부터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공산당원들을 학살한 412일까지의 상하이가 배경이다. 중국은 1차 대전을 계기로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형성되었으며, 그 후 신문화 운동으로 베이징대를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사상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1921년 좌파는 천두슈를 서기장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을 창립하였으나, 쑨원의 중화혁명당에서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한 우파 진영이 주류인 상황에서 좌파 진영은 스스로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공산당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함으로  국민당과의 연합(국공합작)을 통해 중국 공산당은 취약한 조직기반의 강화를 모색하였다.  4 12일은 이렇게 유지되어오던 1차 국공합작이 장제스의 공산당에 대한 공격과 난징정부 수립으로 결렬된 날이다.

 

이런 격동의 와중에서 말로는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대가 중국임에도 특이하게 주인공들은 대부분 외국인이나 혼혈들이다. 그들을 통해 Malraux는 극단적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으로서 서있으려는 주변인들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들은 결국 러시아에서, 일본에서 밀려들어온 서양적 사고의 대리인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서양이 4억 중국인민의 운명을, 어쩌면 서양자신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는 이 도시에서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적 사고와 공산주의의 격돌은 결국 서양문명의 변방인 이곳에서 중국인의 목숨을 처참히 빼앗아간다. 이런 잔혹극의 이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주장의 충돌, 비인간화의 저지과 복수라는 명분, 피흘림의 반복과 위선에 대한 미움으로 인한 격화이다. 18,19세기 서양철학이 만든 갈등은 도리어 동양의 이곳 중국과 그리고 바로 1950년의 우리에게 더 지독한 고통으로 남아있는지 모른다. 동양인인 우리가 결국 서양사상에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왔고 그 대리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왔다는 것인가?

 

이런 사상의 표현으로서의 주인공들. 테러를 통해 인생의 구원을 찾으려는 첸첸은 삶의 무의미를 도덕적 이상주의의 명분아래 폭력으로 승화하는 정신적 일탈과 같은 테러에 의한 구원을 꿈꾼다. 그들 시대의 일탈. 우리시대의 일상인 테러.[자기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기 위해서 그들은 죽어가는 것이다.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받아들일 만한 인생이 아니라면 대체 그런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첸이 바라보는 자본주의 세계는 유일한 인간의 존엄성인 죽음마저도 인간에게서 박탈해버린 곳이다. 죽을 수가 없는 인간 조건. 테러리스트에게 인생은 살인의 중독이며 죽음의 추구. 그 중독은 의미에 대한 강렬한 추구와 경험이 만들어내고 있다.

 

또 다른 인물 기요. 그는 조직 행동을 통한 보편적 가치의 역사적 실현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지조르가 프랑스 자본가 페랄과의 대면에서 말하듯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참을 수 있기란 쉽지 않을 일이다.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그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모든 사상은 인간 조건의 토대를 존엄성 위에 세움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나타낸다. 인간조건에 존엄성을 주는 것으로, 이를테면 예전에는 기독교가, 근대시민에게는 국민이란 개념이 그리고 노동자에겐 코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늘 중독되어 있어야 한다.첸과 살인, 클라피크와 괴벽,카토프와 혁명, 메이와 사랑, 지조르 자신과 아편, 기요만이 어딘가 중독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독없는 기요의 조직 세계는 해답은 가지고 있는가? [행동만이 인생을 정당화하고, 백인에게 만족을 줄 수있는 것도 결국 행동뿐이다. 본질적인 것을 행동으로 끌어넣으면 삶을 보다 강렬히 느낄 수 있다. 자본주의는 권력에의 의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직에의 의지이다.권력의지라는 것도 결국 자기자신을 소유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조직의 의지를 파괴하려는 또 다른 조직 속의 인간도 결국 자기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 안에 갇히고 만다.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조직 속의 서로를 해치는 행동의 연속들.[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자기가 괴물이며, 저마다 자기 가슴 속으로 파고 들 때는 헤아릴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자기자신에게서 해방될 수 없는 미치광이 같은 인류.]

 

그의 아버지 지조르, 아편을 통해 찾으려는 해방, 덧없이 죽은 자기희망의 자취인 아들 기요을 통해, 사상의 힘도 죽음이 한 인간에게 일으키는 변화에 대해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생각. 그에게 더 이상 현실이란 없는 것이다. 노년이 허무한 것은 인생이란 원래 허무한 때문이라는 고백. 후일 Malraux가 도가적 현실도피의 인생관을 가졌음을 보면 지조르는 사실 작가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결국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것이 인생의 결론인가[인간답다는 것은 죽음과 의미 사이의 고뇌이다.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달이 아니라 6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한거다.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때, 정말로 그가 한 인간이 되었을 때,그 때는 이미 죽는 것 밖에 남지 않는거다.]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의미를 찾기 위한 간절함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고 인생을 던지고 싶은 열망이다. For many are invited, but few are chosen. 그것이 일탈이든, 사상이든, 의미의 포기이든 인간은 자기를 넘어서는 가치를 위해 살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때로 가장 처절한 시간 속에서 더 잘 드러난다. 간절함, 처절함,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함이 드물어지는 풍요의 시절에는 오히려 인간은 인간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 끝으로 이 책의 미덕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책의 말미에 덧붙인 김붕구 교수의 [앙드레 말로의 연구]이다. 어떤 글보다 전반적인 말로의 기조와 [인간의 조건]과 다른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말로의 인물의 가공과 주제의 진행을 잘 보여준 뛰어난 작가해설이었다. 말로의 이해와 이 책의 깊은 공감을 위해 꼭 같이 읽기를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에게 그의 어머니에게서 말로만 듣던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구세대적 인간인 그에게 이 새로운 멋진 세계는 무엇을 희생해야만 얻어지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인간다움과 자유를 댓가로 얻어지는 안정과 쾌락, 소마soma휴일과 감각적 만족의 삶은 부모와 예술, 종교와 지성에 대한 추구, 결국 모든 인간다움을 담보로 한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늙어 추해질 권리,굶을 권리, 질병에 걸릴 권리, 내일 일로 불안에 떨 권리, 온갖 고민에 시달릴 권리 그 모든 것을 원합니다. ”

헉슬리가 보여주는 안정을 목표로 하는 세계의 구도는 생물학적 방법론의 가능성과 공리적 행복의 추구라는 20세기의 두 빛의 천사가 만나 만들게 될 지옥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개인으로의 인간은 사라지고 기능으로서의 인간단위만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족주의든 집단적 인간이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시대정신이 몰고갈 종착역이다.

"[멋진 신세계]의 주제는 과학의 진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물질의 과학화는 삶을 파괴하거나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적용될 수 있다. 유토피아는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근접해 있다. 나는 이를 향후 600년이라는 미래에 투영시켰지만 그 공포는 1세기 안에 다가올 것처럼 보인다.” (헉슬리)

2032년안에 우리를 몰고가리라던 이 세계는 벌써 그 냄새를 풍긴다. 소비를 위한 선전과 대중의 세뇌, 노동자계층을 만족시켜 편입시키는 세계구조. 인간됨과 신,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생각들과 추구에 대한 조소 혹은 무플. 멋진 이 세계는 훨씬 강력한 프로스페로의 마법으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할 길로 몰아가고 있다. 사회안정은 우리의 모든 권리의 박탈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 안정과 번영이라는 허여멀건허니 비대한 짐승 앞에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내려놓고 주입된 유치한 구호를 되뇌는 백치로 살아가든지, 죽고 싶어할만큼 지독한 고통의 인간됨을 선택하든지를 강요받는 계시록적 전경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