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VS 프로이트 C.S. 루이스 연구서
아맨드 M. 니콜라이 지음, 홍승기 옮김 / 홍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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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맨드 니콜라이 교수의 하버드 대학에서의 강의를 엮어낸 이 책은 현대의 지성인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갖는 괴로움에 대한 대답으로 씌여진 책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관에는 결국 두가지가 있다. 절대주의적인 독단적 세계관. 유신론적이며 종교적이고 목적이 있는 우주에 대한 주장이다. 그리고 멋있어 보이는 유물적이고 경험론적인 세계관. 진화론적 force의 우주, 회의론적 우주에 대한 주장이다. 있는대로 설명하는 경험론적 우주관은 다 좋은데 체스터튼이 보여주듯 [가없는 절망]이 문제이다. 의미를 인간이 소유한다는 것, 만물의 척도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 인간도 만물도 의미가 없다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고통도 선행도 도덕도 아무런 의미와 기준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깊은 무의미의 절망이 밀려온다. 우린 이걸 부조리라고 부른다. 시치프스의 신화
 
절망적 우주가 아니라면 목적론적 우주관인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큰 문제는 이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것을 [고의적 무지]라고 주장한다. 파스칼이 말하듯 인간은 열려있는 마음으로 신을 찾을때 그를 당연히 발견하고 놀라와하며 기뻐할 수 있는 이성을 지녔다. 그러나 인간은 고의로 그것을 찾고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문제의 본질에는 주인이 되려는 인간의 의식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지도 유지하지도 발전시키지도 않은 우주, 발전의 계획을 가질 수도 없는 우주를 자신의 소유로 선언하고자 한다. 그리고 깊은 고독과 우울과 무의미와 슬픔을 견디어내고자 한다.
 
루이스는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인간 안의 빈곳을 기쁨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찾아간다. 그리고 그 핵심에 이천년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창조자의 기록을 보며 전율한다. 그가 우리의 이런 주인되고자 하는 고집을 위해 인간이 되었고, 죽었고 다시 살았으며, 용서하고 사랑했다. 루이스는 이 일을 통해 새로운 우주를 발견한 인간이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과 불행은 프로이트와 같았으나 그가 다다른 길은 달랐다. 고통의 끝에서 한 사람은 절망을, 한사람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신 세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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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서해클래식 4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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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 포르투갈 스페인의 패권과 새로운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득세의 와중에 영국은 본격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16세기초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제4차 항해후 [신세계]를 발표하였고, 여러나라들은 비등한 힘을 가지고 서로 동맹국을 바꾸어가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후스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종교의 기운은 이 책의 다음해인 1517년에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며, 왕권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이미 1513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사람들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해 옛것을 뒤엎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이런 부글거리는 시대에, 토마스 모어는 플랑드르에 사절로 파견되어가 있던 와중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화와 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가 그린 유토피아는, 당시의 영국처럼 필요없는 유한 계급과 독점적 양모산업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범죄자로 나서야하는 그런 국가가 아닌, 정치적 이상국가이다. 모양은 영국과 흡사하나 사유재산이 없고 놀고먹는 사람이 없는 이 나라에선 누구나 여가를 즐기며 사치와 호사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가치는 진정 정신과 영적 세계에 있으며, 외교는 어리석은 주위국가로부터의 전쟁을 막고자 하는 노력일뿐 스스로를 다른 국가에 의존치 않는 나라이다. 박노자가 언뜻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모어의 세계는 우선 철저히 물질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국에 비일비재한 굶주림과 범죄, 비인간적인 의식주에 내몰린 빈민들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방향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삶의 형태를 떠받치는 힘이 그리고 이런 공산사회가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제도로 자리 잡은 이유가 그 주민의 영적 세계관에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에 그렇게 안달하지 않음으로해서 공산사회를 즐겁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강요되지 않으며 비교에 농락당하지 않는다. 과연 이 책이 500년전의 책인가? 우리는 아직도 이 일들을 스스로 겪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나종일 번역의 이 책은 화보로 가득하고 책 표지가 마치 청소년용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음에도, 번역에도 충실하다. 번역자의 다른 책인 윌러스틴의 [자본주의 문명]도 이런 다채로운 화보가 곁들여지면 혹 청소년들도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읽기에 좋은 시절이다. 마음에 여유만 없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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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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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엘리엇의 나이 27살인 1915년에 낸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전주곡들 Preludes, 우는 처녀 La figlia che piange와 34살의 나이에 쓴 황무지 The waste land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시는 많은 고전들로부터 나온 인용구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외래어, 엘리엇 당시의 음악, 가극, 유행어를 담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 고전에 대한 이해와 이 책의 주석들이 도움을 얻으면 아예 감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엘리엇이 이 시의 독자로 여긴 영미 지식인보다 이 책의 한 부분인 불교적 이해로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이런 드러난 참고문헌 이외에 또 시대의 여러 조류와 인물들을 반영한다.  약한 자들의 순종에서 도리어 희망을 보는 것이나 신에 대한 기다림은 예이츠를,  무의미한 이 인생을 죽고 싶어하는 마음에선 보들레르, 여성에 대한 폭력 속에서 이 시대의 어둠을 보는 것은 밀, 쇼, 입센을, 성과 죽음의 무의식 위에 서 있는 노동과 오락의 건강성은 프로이트를 보게 한다. 어떻게 엘리엇은 20-30대에 인생을 이러한 깊이로 볼 수 있었던가?
  
엘리엇은 황무지의 끝을 세마디의 천둥의 소리(Ta)로 맺는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탸-자제하라. [이걸로 나는 겨우 내 폐허를 지켜왔다]는 고백처럼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이곳 황무지에서의 삶은 참음을 요구한다. 무엇을 위한 인내인가? 암살당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천둥은 요란하나 물은 없는, 마른 바위산엔 언설만 난무할뿐인 시대에 천둥의 소리처럼 정말 생명은 올 것이라는, 과연 지금은 시험의 때에 불과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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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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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 입장에서 해석되어질만큼 그 가닥을 잡기 어려운 작품이다. 꿈꾼 내용을 이야기 하는 듯한 분위기, 디테일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자세하다. 수많은 알레고리적 요소들이 정신분석적 구조를 형상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결코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나 심리적 접근으로는 풀 수 없는 카프카만의 세계에 있다. 그는 기억의 창조를 통해 무언가 자기가 싫은 것을 지우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적으로 인간의 문화사가 만들어온 외면적 억압일수도 있고, 자본주의적 비인간화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의 관심은 이런 특정 운동의 하수인으로 종결되지 않는 내적 자유를 지닌다.
 
마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판관의 비유와 같이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는 대성당에서 만나는 재판소에 소속된 교도소 신부를 통해 들려주는 한 비유를 통해 이 소설과 그의 작가관에 빛을 던진다. 법률 앞에 서 있는 한 문지기는 찾아온 시골남자에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해준다. 허가를 얻도록 기다리던 시골사람은 문 앞에서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리고 죽음 직전 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 문에는 나만이 기다리고 있는가? 문지기는 이 문이 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고 문을 닫는다.
 
이 비유에는 작가가 제시한 것 이외에도 수많은 해석이 독자의 몫으로 주어진다. 사실은 그 사람의 인생이라는 길에 주어진 경험 가능한 한번의 삶이 지독하게도 그에게 빛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다운 말상대 역할의 문지기는 그를 지연시키고 그 문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카프카는 이 결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개와 같구나, 그는 죽어도 치욕은 남는 것 같았다]라고...
 
실존적 인간의 절망의 표현이라는 쪽이 더 맞겠다. 어떤 이해와 포괄적 지식을 거부하고 기준으로 주어진 것 앞에서의 인간의 자가당착을 보여준다. 법률이라는 빛은 인간을 거부하며 빛난다. 그는 결코 그 곳에 이를 수 없다. 소모만이 있을 것이다. 일도 놀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가 어쩌면 신경증적 리비도를 닮아있는지 모른다. 다다르지 못하면 엉뚱한 대상에 들러붙고 마는 리비도처럼 인간의 개 같은 인생도 엉뚱한 소모거리에 배회하고 자기를 소진하거나 이리저리 솔깃하여 기웃거리며 배회하고 정작 살아야 할 삶은 살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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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입문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총서 9
S.프로이트 지음, 오태환 옮김 / 선영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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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꽤 유명해진 선배가 정신과 의사가 된 이유가 학생시절 자신을 좇아다니며 스토킹하던 남학생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 경험으로도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성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가장 효과가 없는 방법]으로 성적 문제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자에 대한 스토킹, 우회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이나 망상에 사로잡히고 상대를 오해하며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 이런 문제를 갖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프로이트의 이런 환자들에 관한 관찰은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정립되어있지 않던 정신의 세계에 대한 전체적 윤곽과 그 작용기전에 대한 가설을 세우게 했다. 이런 체계가 그가 주장하듯 코페르니쿠스, 다윈 이후 세번째 위대한 인간의 위치에 대한 발견이랄 것까진 없지만 분명 인간에 대한 접근의 새로운 장을 연 것만은 틀림없다. 이제 인간은 과거의 기억에 의해, 더 엄밀히는 과거의 [잊혀진 기억]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수동적 존재로 비추어진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실수들과 꿈 그리고 정신병리는 이런 인간의 수동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숨겨진 기억들은 들추어지고 의식으로 떠올려지며 강인해진 자아에 의해 수용되거나 도피에 의한 왜곡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 새롭고 유효한 접근법과 해결방안이었지만 현재의 관점에선 의문점들도 있다.
 
첫째는 현재의 정신질환 치유의 대부분을 이루는 방법이 이제는 이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많은 신경전달물질의 조절이 이런 질병의 증상을 변화시키고 조기 치매, 즉 분열증과 같은 질환의 성적 과대망상이 기질적 뇌질환과 연관됨을 본다. 프로이트가 치유가 어려운 질환으로 제시한 그러나 그 작동기제는 정신역동적으로 설명한 질환들이 사실은 다른 원인이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이다.
 
둘째, 이 가설은 검증과 반박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스스로의 방어체계를 갖는다. 그는 오류와 꿈, 신경증 환자의 증상과 과거력을 통해 하나의 정신체계를 가정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체계에 반대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은 반대자 자신의 무의식의 저항 때문이며 이 체계 자체의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부감을 일으킬 수 박에 없는 새로운 가설의 설득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이런 방어는 결국 이 체계의 진정한 발전, 임상적 직감과 경험적 대응에 대한 검증을 차단하고 있다. 의사가 경험상 좋았다, 잘 낫는다고 주장하는 치료자 오류는 반드시 객관적 검증을 통해 확인받도록 허용되어야만 한다.
 
셋째, 융에게서 더욱 확장된 집단 무의식에 의해 문화의 설명이 억지스럽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인류사적으로 태고적부터 누적된 성적 거부의 기억이 이런 집단 무의식을 형성한다고 본다. 인류의 역사적 기억이 개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가정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경험이라는 것이 유전자 안에 새겨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환경에 의해 유전자가 선택되어 그런 경향을 갖는 사람만이 남았다 설명한다해도, 각 개인이 구체적 성적 체험을 반복하여 영상으로 그 개인의 무의식에 그려내는 것은 너무 큰 비약을 필요로 하는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집단 무의식은 집단의식의 덩어리들이 만들어낸 틈새는 아닐까. 즉 집단 내에서 옳다고 문화적으로 교육되어진 것들 틈새에서 저절로 인식하게 되는 금기나 터부에 대한 은밀한 깨달음은 아닐까.
 
여전히 아니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신경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디알렌이나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그들의 문제의 원인은 유아기의 성적 고착이라고 정신과의사가 알려주었을때 이것은 그들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했을까, 그들은 그들의 성적 문제를 인지하여 자유로와지는가? 과연 문제는 성적 이해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치료로 가중되는 성적 이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인가? 사람들은 점점더 성적 억압에서 자유로와지고 있고 또 점점더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다. 환자에게 약이라고 준 것이 점점 그들을 중독시키고 있는 꼴이다. 프로이트가 이해한 유아기적 성적 고착이라는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은 그래서 과학적 정신이해라는 새로운 조류에 밀려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번역은 읽기에 수월한 장점이 있다. 다만 전문용어에 있어서는 일본어 중역 같은 느낌을 주며, 용어로 인한 오독의 위험성이 있다. 용어에서는 열린책들의 [정신분석 강의]가 더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그 책은 번역이 독일어 직역이라 그런지 입안이 껄끄럽다. 읽기수월하고 올바른 용어사용이 같이 어울어진 책도 언젠가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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