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보들레르 지음, 김붕구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1. 독자에게
  도전적 서문, 너희도 알지 않니 죄악밖에 없는 인생의 허접함의 권태란...
 
우울과 이상
 
2. 알바트로스
  추락한 영혼을 인식하고 이 땅에 산다는 것

3. 상응
  인간의 구원은 예술을 통한 이념의 직관이며 주체로의 비상이다.
  예술은 정관의 대상을 고립시키며 그것을 둘러싼 시간의 바퀴를 멈추게 한다.
  아름다움은 인식의 의지없는 주체로 고양을 유도한다.(이념,쇼펜하우어)
  예술은 의식이 명석할수록 깊어지는 고뇌와 이질적 삶에서 느끼는 고독감을 보상한다

4, 원수
시간이 원수이며 권태가 원수인 것은, 시간이 한정하는 현상의 세계안에서는 절망의 무의미만 남는 때문이다. 원수는 우리를 현상에 머물게 한다.

5. 인간과 바다 (l'homme et la mer)
 바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발견케 한다. 파도처럼 사라지지만 끊임없이 영속적인 존재
6. 미 (la beute)

의지의 객관화로서의 이념을 인식하게 하는 각각의 사물은 아름답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의지의 가장 완전한 객관화이다. 인간의 조각을 통해 자연이 애쓴 것을 예견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권)


7. 패물 (le bijoux)
  잔느 뒤발에게서 느낀 관능미의 세계. 아름다움이 절대의지의 이념이라면 도덕은 없다.
 예술가에게 현재의 강렬한 인상이 그를 무분별,정열,격정으로 몰고간다.(역시 쇼펜하우어)

8. 이국 향기
  뒤발에게서 느끼는 열대의 아름다운 감각들
 
  Tamarindus indica: Tamarind flower
 
따마린느 꽃

9. 썩은 짐승 시체
  아름다움의 표상인 인간의 육체도 썩고 말 것이다. 오직 이념만이 이것을 간직한다.

10. 깊은 심연 속에서 외친다
   무의미의 권태 속에서, 시간의 실타래를 풀며 죽여가는 삶
11. 흡혈귀
   의미를 발견치 못하는 인생은 쾌락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12. 오늘저녁 무엇을 말하려는가
    Sabatier:  나를 위해 오직 美만을 사랑하라

13. 여행에의 초대 (l'invitation au voyage)
  Mon enfant, ma soeur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지고...거기선 일체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로움, 고요함과 쾌락 뿐. 

14. 가을의 노래
  사그러드는 삶에 있어, 마지막에 잠간의 위로가 되어주오.

15. 음울 (spleen)
   모든 일은 끝나고, 권태는 그대로 大氣로 남아 벗어나지 못한 내 위에 죽음의 깃발을 꽂을 것이다.

 
파리 풍경
16. 지나가는 여인에게
눈이 맞을수도 있었지...이것도 하나의 삶의 방법이지
 
술  
17. 살인자의 술 (le vin de l'assassin)
사랑이란 것의 잔유물을 사형선고하고, 남는건 술뿐인가?
 
악의 꽃(les fleurs du mal)
18. 흡혈귀의 변신
피를 빨아먹고 가죽푸대, 해골로 변한 쾌락
 
반항
19. 성베드로의 부인
꿈이 현실이 될 수 없는 세상이란 집어 치워버리겠어 (1848년 혁명)
 
죽음
20. 애인들의 죽음
그들의 불꽃이 사그러드는 자리에, 흐린 거울과 죽은 불길을 되살려주는 은총이 임하리
 
보를레르에게 예술이란, 또한 쾌락과 아름다움에 대한 탐미란, 의지 곧 절대 보편성을 무시하게 만들며, 자유 곧 無로의 탈출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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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29세) 월든 호숫가 통나무집 시절, 감옥에 다녀온 후
 
1.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
정부는 기껏해야 하나의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쉽게 남요되거나 악용되기 쉬운 것이다.
미국정부라는 짧은 전통은 그 순수성을 조금씩 잃어가는 하나의 전통이다.
정부는 자체적으로 어떤 좋은 사업을 촉진시킨 적이 없다. 방해하지 않고 얼른 비켜준 적은 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로 정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장 더 나은 정부를 요구하고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존경을 받을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한다.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는 없는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은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이 없다.
현명한 사람은 국가에 저항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으로 쓰이길 바라고 진흙이 되어 바람구멍 막는데나 쓰이길 바라지 않는다
 
2. 오늘날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 올바른가?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국민의 1/6은 노예이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짓밟고 군법으로 다스리고 있다. 미국민이 하나의 국민으로 존재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더라도 이것을 중단해야만 한다.
 
대중은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소수자들도 실질적으로 다수 대중보다 더 현명하지도 훌륭하지도 않다. 실효를 거둘 아무 일도 않기 때문이다. 다수의 뜻에 맡기는 투표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이다. 소수자들은 이 상황의 절망감에서 결국 다른 후보를 내는 대안 밖에는 모른다.
 
모두가 이런 악을 근절키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악을 계속 돕는 일은 중지해야 한다. 질서와 시민정부, 애국심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무분별한 지원을 중지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범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이웃보다 더 의롭다면 그는 [한사람으로서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방조를 그치면 제도는 폐지될 수 있다.작은 듯 보여도 한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3.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감옥이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소수가 전력하여 막으면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공무원이 자리를 내놓을 때 혁명은 완수되는 것이다.
부자는 순응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불복종하는 경우 재산과 가정에 미치는 결과를 두려워한다. 정직하면서 외면적으로 안락하게 사는 것은 이런 정부에선 불가능하다
 
[나의 감방생활]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수백만의 사람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의 힘에 저항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4. 세상은 정책이나 편법으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웹스터(1782-1852)는 절대적 진리보다는 편의나 신중함을 택하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의 연방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내의 상호 노예에 대한 제도의 인정이라는 편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근본적 질문을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노예제도에 대해 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의 빛을 활용할만한 지혜와 실용적 재능을 지닌 입법자는 과연 없는가?
 
정부의 권위는 기꺼이 순종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가 없는 어떠한 권리도 시민정부는 가질 수 없다. 민주주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국가의 권력은 독립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할때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가 된다.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 생각하지 않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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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 시민의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from 512 2012-02-06 18:48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과 몇 편의 수필 모음.저는 그의 글이 참 좋습니다. 솔직하고 유머가 풍부해요. 그가 추구하는 삶을 적은 몇 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죠. <월든>과 이번에 읽은 <시민의 불복종>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모든 책이 널리 알려진 건 아니에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
 
 
 

1843년(30세)
 
I.  서언-사람들은 너무 쉽게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간다.이제 철학은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II. 조율-아브라함 이야기의 이런저런 버전
 
III. 아브라함에게 드리는 찬사-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부조리를 넘어서 하나님을 믿었다.
 
IV. 문제제기
  1. 토로하고 싶은 심정
     무한한 체념의 완성-부조리의 힘- 유한성으로의 복귀의 운동
     무한한 체념 가운데 안식과 평화가 있다.
     이 운동에는 필연성이 아닌 영이 필요하다.
     무한한 체념(절망)은 신앙에 선행하는 최후의 단계이다.
     오성을 포기하게 되는 그의 단계에서,믿음을 통해 부조리를 얻으며 부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음.
     체념하는데는 신앙이 필요없다. 오성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시간성과 유한성이다. 인간은 체념으로 아무런 유한성도 얻지 못한다.
     체념의 고통에서 평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기적이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 안에 있는 빈정거림과 익살도 사실 무한한 체념이다.
    마지막 운동, 신앙으로의 운동 그것은 인간이 실행할 수 없다.
    우리가 묘사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싸구려 시험의 통과가 아닌,시험의 고통이어야 한다.
   신앙의 역설, 하나의 살인과 하나님의 뜻,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준다는 역설이 이 책의 목적
    
* 체념의 고통으로 몰고간 사람들: 파스칼, 피히테,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엘룰
 
 2. 문제1: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유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보편적이 되기 위해선 단독성을 지양해야 한다. 윤리의 보편성은 개별자가 자신을 보편성 안에 해소함으로써 완성되는 목적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적인 것보다 고차원적이라는 역설이다. 이런 신앙의 입장은 매개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신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교환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윤리적인 보편성에 대한 목적론적 유보를 포함한다. 윤리적 표현이라면 그것은 자식에 대한 고차적 사랑이어야 했다(이피게네이아,입다의 딸, 브루터스의 아들처럼) 이것은 윤리의 범위내에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그의 의무 곧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고자하는 그를 막는 유혹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은 동정도 공감도 시로 표현도 되지 않는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 보류될 때 개별자는 어떠한 방식으로 실존하는가? 보편자에 대한 모순은 곧 죄이다. 그는 믿었다. 그는 단독자로 절대자에 대한 절대관계 안으로 들어갔다. 단독자로 이런 권리를 얻었다. 이것은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브라함과 마리아는 불안과 고난을 지났다. 비난과 조롱, 몰이해와 이해시킬 수 없슴, 이런 고통과 역설 속에서 비극의 영웅이나 여장부 이상의 것이 되었다.그들은 단독자로 보편성을 넘어 지나갔다.
 아브라함은 비극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보편자로 볼 때 살인자일 뿐이다. 이것은 말하여질 수 없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도 충고하고 설득할 사람도 없다. 그는 역설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의 신앙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다. 모든 인생의 유대는 정열이며, 신앙도 하나의 정열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3. 문제2: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모든 윤리적 의무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성으로 이끌며 이 안에서 하나님은 극히 희미한 점이 되고 무력한 사상이 되고 만다.
윤리에서 단독자의 과제는 내면성의 규정을 소외하여 외적으로 표현(헤겔)하는 것이다. 신앙은 외적인 것으로 헤아려질 수 없는 내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며 그와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에 따라 보편적인 것과의 관게를 규정하지, 그와 보편적인 것과의 관계를 통해 그와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은 보편자를 상실한다. 즉 하나님을 위해 그 두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절대적 의무)
보편자로 설명되는 기독교를 만들려는 것, 주해나 히브리어 원문, 비평이나 신학,싸구려 신앙을 만들어 기독교를 가장 가련한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단독자로 실존하고 교회이념의 보편성 안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또한 위대한 일이다. 보편자 안에 사는 일은 훌륭하고 존경 받을만하고 모범이 될만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그것은 시험이요 유혹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려한다. 그는 머뭇거리며 가고 있다. 이 무서운 일의 끝은 하나님과 친밀한 자가 되며, 주님의 친구로 그분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보편자 안에 행하는 영웅은 윤리적인 것을 목적론적으로 넘어설 때 보편자에 의지하며, 그것을 행하고 난 뒤 보편자 속에서 안식을 발견한다. 신앙의 기사는 오직 홀로 이 경계를 넘어가며 행하고 난 후 부단한 긴장 가운데 살게 된다.그리고 다시 하나의 운동을 행하여 기적을 향한다. 홀로인 기사는 독립되어있고 서로를 지지하는 종파적 동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한 인도자가 된다는 헛된 욕망을 품지도 않으며, 증인이지 선생이 되려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무가 존재하든지, 인간끼리 서로 만족하며 사는 것(보편성)이 끝이든지 어느 하나이다.
 
** 그는 교회를 부인하거나 교제의 필요성, 공동체로서의 부름을 부정하고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 회원이 됨과 성도가 됨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류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교회에 속하는 것이 아닌 교회로 모이되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실존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윤리됨에서 벗어나게 해야만 가능하다. 기독교가 윤리라면 그것은 철학이지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각성 때문이다. 신앙을 헤겔의 철학과 같은 싸구려 보편성으로 만드는데 이 사람은 분노한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결국 파스칼의 도박의 비유와 같은 것은 아닌가?
 
 4. 문제3: 아브라함이 사라나 엘리자나 이삭 앞에서 자기의 계획을 침묵에 붙여버린 것을 그가 윤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것일까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이며 현시적이다. 단독자는 직접 감성적, 심령적이며 은폐자이다. 은폐성이 없이 아브라함은 변호될 수 없다. 신앙은 최초의 직접성이 아니라 최후의 직접성이다. 최초의 직접성은 심미적이다. 미학과 윤리학의 한계영역에서 흥미가 존재한다.(심미-윤리-신앙)
미학의 반전과 재발견은 해소이며 은폐는 극적 긴장을 주는 요소이다.은폐성은 자유로운 행위이며 미학의 책임이 있다.윤리학은 경험도 우연도 모른다. 미학은 은폐성을 요구하고 이에 보답하며 윤리학은 드러남을 요구하고 은폐를 처벌한다.
미학의 드러남은 우연에 맡겨진다. 윤리학은 직접 비극적 영웅이 드러냄을 통해 만족을 발견한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비밀과 침묵은 본래부터 있는 것. 즉 내면성의 규정들임. 델피 신랑의 침묵은 윤리적 요구에 노출되어있다. 물의 요정은 아그네테에게 후회를 은폐함으로써 단독자로서 악마적인 것과의 절대관계에 들어가지 않고 구출된다. 역설로의 도피이다. 죄 때문에 단독자가 된 요정은 더 나아가는 운동인 역설을 통해 보편자를 실현한다.이것이 미학의 영역이다.토비아서의 사라는 동정을 견딜 수 없는 존재이다. 보편자 밖에 놓이는 것은 악마적인 것의 시초일 수 있다. 천재는 이런 보편자의 테두리에서 악마적 안식을 찾든 종교적으로 귀의하든 할 수 밖에 없다. 파우스트는 회의자로 침묵은 그를 오만에 대한 회의로 몰고가며, 발설은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절대적 관계 속의 단독자가 된다면 침묵의 이유를 소유할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미학적 침묵의 범주가 아니다. 미학은 타인을 구할때 침묵을 허락한다. 아브라함의 침묵은 이삭을 죽이는 침묵이다. 윤리학은 우연적 단독성을 가진 그의 침묵을 정죄한다. 그는 비극적 영웅도 심미적 영웅도 아니다. 결국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확신하는 자는 신앙의 기사가 아니다. 그는 고난과 불안 속에 침묵하고 있다.이삭을 포기하는 무한한 체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조리한 결과를 믿었다.
 
단 한마디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얘야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친히 예비할 것이다] 그는 알지 못한다. 신앙의 부조리의 운동이 수행된다. 그는 이삭의 희생을 알았다. 그는 주저주저하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다.우리는 그를 역설을 이해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렀다. 그는 자기의 고뇌를 잊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헤아리신다. 개별자로서 단독자가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선다는 역설이 있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니든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 부활의 역설도 마찬가지로 보편성이 아닌 미학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포함한다. 이것 역시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V. 끝맺는 말
어느 세대나 정열은 새로이 시작하는 과제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정열이다. 누구도 이것을 뛰어넘어보지는 못한다. 신앙에 이른 사람은 거기에 빠져있다는 말을 싫어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 보려한다.
[사람은 두번 다시 같은 냇물을 건널 수 없다]고 말한 스승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더 나아간 제자는 [사람은 한번도 동일한 냇물을 건널 수 없다]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가 되고자했던 그는 스승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 실존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 보편성 앞에 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에게 유한성을 약속하시고 인간존재 자체의 부조리의 산실인 보편성은 지양된다.
아브라함은 단독자로서 보편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조리에 불과한, 심미적 직접성으로 비치는 것을 절대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신앙의 비밀이다. 그는 할 말이 없다. 오직 눈물과 고통 모든걸 헤아리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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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머리말: 절망은 구원의 시작이다.
서론: 그리스도가 같이 계심으로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의 두려움을 안다.
 
제1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
  A. 절망은 정신의 병이며 세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는 경우
     자아는 자기자신에 관계하는 관계이다.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는 경우는 더욱 절망에 매몰된다(의지의 긍정?)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절망은 가능에서 현실로 나아갈때 추락한다
     절망하고 있지 않으려면 절망의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
     절망한 사람은 모든 순간에 절망의 가능성을 끌어들이고 있다.
     고통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온다(쇼펜하우어)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고통이 극대화될 때, 절망은 죽을 수 있는 희망까지 빼앗는다.
    절망은 자기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그래서 자기를 벗고자 한다. 즉 자기자신이고자 하지 않는다
    자기의 참자아를 벗어나 그 자신이 발견한 힌두적 자아로 있기 원한다. 그러나 원래 자기에 억류되어 있음에 그의 고뇌가 있다.
    철저히 자아를 상실하는데 성공한다해도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은 드러나고만다.(!)
    자아를 갖는 것은 인간에 허용된 최대의 것인 동시에 영원히 인간에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 절망의 보편성
    서너가지 병명을 붙힐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절망을 겪지 않는 인간이란 없다.
    불안의 절망은 걸리지 않는 자에게 불행이고 걸린 자에게 신의 선물이다. 치유를 원치 않는다면 이는 위험한 병이다. 나아야 한다. 병 자체는 불행인 때문이다.
    절망을 통해서만 일상의 사람은 자신이 정신임을 깨닫는다.
    절망을 모른 체 살아가도 영원은 너의 자아를 통해 너를 절망에 못박아 놓은 것이다.
 
독후감) 쇼펜하우어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의 고통은 인간 안에 보편적 요소 혹은 기회로서의 축복이다. 이것은 우리 삶이 치유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치유자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어둠에 거하는 백성에게 빛이 비추니라]
 
제3장 절망의 형태들
   의지를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많은 자기의식을 갖는다. 자기의식은 절망의 의식이다.
 
 A. 절망의 의식 여부에 관계없는 절망(종합의 계기 점검)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 아래 볼 수 있는 절망
    - 자기가 자기되지 못하면 절망한다. 자기의 자기됨은 무한화하여 해방되고 유한화하여 자기자신에게 돌아옴이다.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
       α.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
            상상력은 무한화의 매개이며, 자아의 가능성, 반성의 가능성이다
            감정,인식,의지가 공상적이 되면 자아는 희박해진다.
            그에게 절대이성, 내세종교, 초월적 의지란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β.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
            정신에 대한 무시와 무가치한 것에 대한 이슈화
            편협성-근원성(정신)의 결핍, 다른 인간에게 맞추어가다가 자기를 잃음
            고루함-모험하지 않으면 잃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세상은 세상에 몸을 파는 사람들로만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소유하나 그들자신은 아니다. 정신적 의미의 아무런 자아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b.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 아래 볼 수 있는 절망 (가능과 필연의 변증법)
     α.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
      가능성만 남으면 추상이 된다. 부족한 것은 필연에 대한 복종이다
      이로 인해 자아는 상실되며 경로는 동경(희망)의 추구와 우수(공포와 불안)의 매몰이 있다.
     β.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
      가능성이 사라진 인간의 구원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이것이 믿음, 곧 절망 가운데 구원이다.
      믿는 자는 인간적 계산에 의해 자신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믿는다.그래서 파멸을 면한다.(공포와 전율)
     절망의 온전한 해독제, 신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이것이 모순을 해결한다.
     결정론자,숙명론자는 필연성으로 인해 절망한다. 그들은 기도할 수 없다.
     속물성은 무정신성이고, 경험에 국한된 세계의 해석이다. 경험울 뛰어넘어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속물성은 상상력을 혐오하며 그래서 절망이며 신앙의 가능성이 없다.
      결정론,숙명론은 필연성의 긴장을 늦추는 완화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하며 속물성에는 무정신성에서의 각성작용의 가능성이 결핍하다.
 
B. 의식의 규정 아래 볼수 있는 절망
  의식이 증가할 수록 절망은 증가한다.악마의 절망은 절대의 반항이며 최저의 절망은 천진한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a.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모르는 절망-자신이 자아이며 영원적 자아임에 무지
    감성적인 것에 지배되는 보편적 인간은 비소크라테스적인 오류안에 살기를 즐겨한다
    절망에 대한 이런 무지는 절망을 더욱 증가시킨다.
    진리로부터 떨어진 절망보다 절망에 대한 무지는 한 단계 더 떨어져 있다(절망의 통과가 필요)
    가장 보편적인 절망임. 심미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오직 무정신성으로 절망을 판단한다
    즉 절망은 신 앞에 자기를 개인적 정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외관이 찬란하고 행복하고 선하게 살고  타인에게 헌신적이며 보편자를 인정하고 기독교회에 몸담고 있어도 무정신성 안에서 절망이다.
 
독후감) 현대사회의 바쁨과 물질성, 기술문명과 과학주의의 자기 맹목성은 인간을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쾌락에 마취시켜서라도 절망에 잠들게 한다. 절망이 그를 최후에 집어삼킬 때까지
 
 b.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아는 절망-자신이 자아임을 아나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신이려 함
   의식의 정도가 높고 명료한 절망의 관념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이 절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더욱 절망적이다. 신앙은 자아와의 관계에 자기로 남으며 자기를 정립하는 힘 가운데 자기자신을 의식적으로 기초두어 확고케 한다.
 
  α.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는 경우-애니마적 절망
 
  1. 지상적인 것에 관계하는 절망
      불쾌해지고 불행해지면 그는 절망한다.(직접적 인간) 외부적 도움이 오면 절망은 끝난다.
      결코 진정한 절망의 탈출인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웃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자아로 바꿔입길 원한다(헨리 애덤스)
      반성에 의해 이런 절망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나 어느 한계가 있다.
      직접성과의 절연을 하지 못하고 만다. 추상적 자아에 대한 인식과 윤리적 반성의 부족 때문.
      젊을 때나 그러하다는 변명은 절망을 소유케 된 상태를 나이로 얻은 소득으로 생각한 때문.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지상적인 것 자체(전체규정)에 대한 절망으로 바뀐다.
 
  2. 영원적인 것에 관계하는 절망
      지상적인 것에 절망하는 자는 영원적인 것에 절망적이다.
      차이는 지상적 절망이 [약함의 절망]이라면 이 절망은 [자기의 약함에 대한 절망]
      지상적인 것에 절망하는 자신의 약함에 절망, 영원한 자아를 인식하나 헤어나오지 못함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벗어나고자 함.내향성으로 빠져들어가고 고독을 갈망함.
      폐쇄성이 교만 때문이나 그런 자기를 깨뜨리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열정으로 바뀌면 [안식을 모르는 일중독]의 정신이 되기도 하고, 절대 폐쇄로 나아가면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자살]로 치닫는다. 
 
  β.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는 경우-애니무스적 절망
    자아의 의식적인 상승으로 자기에 머무르려한다. 이런 자아는 가장 추상적 가능성일 뿐이다.
    부정적 자아를 무한형태로 상승시켜 자신이 원하는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에 남음
    행동적일때는 자신의 일을 신이 아닌 자기가 주시하고 있는 실험적인 것으로 만든다. 모든일은 평정과 부동 가운데 만족을 향해 치닫다 갑자기 無가 된다.(쇼펜하우어)
    수동적일때는 지상적 고뇌 앞에 이것을 제거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버린다.
    구걸하여 이 고뇌를 제거하느니 차라리 이것을 지닌 채로 자기자신으로 남겠다는 반항이다.
    고뇌는 받아들여도 구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다.
    이 demon적 사고는 이것을 빼앗을 영원자 앞에 불안으로 떤다. 절망은 폐쇄성안에 감추이고 차라리 자기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원자에 대해 비난하길 원한다.
    
[제2편]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죄는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기로 남아있으려 하는 것(가중된 절망)   
 
 A. 자아의식의 여러단계(코람데오)
    척도는 質이며 윤리적 목표이며 사물의 본성이다. 인간은 신을 척도로 한다.
    신을 척도로 하면서 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인간적 자아만을 척도로 하면 죄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 자체가 죄이다.
    눈에 보이는 죄의 모습은 결국 이 정신적인 죄(죄는 정신이다)가 동의한 행위이다.
    그 반대인 신앙은 자아가 자기자신되며, 자기자신되고자 하여 신의 기초 위에 두게 하는 것.
 
    附論) 죄의 정의가 좌절을 포함함
        기독교의 척도가 신이라는 사실이 인간을 좌절케 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신앞에 설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그 신이 그에게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하는 현실이 그를 당황하고 좌절케 한다.
        좌절 이 불행한 경탄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경탄하여 헌신할 수 없다면 질투하듯, 신에 대하여 예배할 수 없다면 좌절케 된다. 
       그래서 이 역설과 비논리의 기독교는 변호될 수 없다. 신앙의 감격은 변호가 아니라 공격이며 승리일 뿐이다.
 
  B.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죄는 무지이다
    무지가 죄라면 죄는 없다. 죄는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지와 반항이 빠져있다.
    하지만, [안다면 그의 생활이 그렇지는 않을 것, 그는 모른다]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해한 것에서 행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죄가 의지안에 존재함이 그리고 원죄가 있다.
    개인에게 이해에서 행위로의 이행에는 지연이 끼어든다. 인식의 쇠퇴와 악한 의지의 승리!
    인간의 생각의 범주는 소크라테스까지이다. 그 이상은 신의 계시에 따른다. 죄는 의지에 있다
    죄는 [신의 계시에 의해 어디에 죄가 존재하는지 인간에게 밝혀진 후] 신 앞에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기로 남아있으려 하는 것
   
   C. 죄는 소극성이 아니고 적극성이다
      개념적으로 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변적 교의학은 결국 죄는 부정이라는 소극성으로 만든다.
      신앙은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의 무지를 인정한다. 그래서 오직 죄는 절망의 도가 심해짐으로 인해 점차 강해진 자아와, 행위로서의 죄에 관한 최대한의 의식으로 구성됨으로 인해 적극성임을 안다.
 
제1장의 부론) 죄는 어떤 의미에서 드문 것은 아닐까?
강한 도의 절망은 드물다. 죄란 것은 절망의 도가 높아진 것이니 결국 드문 것이 아닌가?
절망해 있지 않다고 절망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절망해 있다.
그렇다고 높은 정도의 절망이 공적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심미적 우월이다. 윤리적으로 보다 더 절망하는 것은 낮은 절망보다 구원에서 더 멀다.(기독교-유대교-이교)
인간의 생활은 하도 신앙과 떨어져 무정신이어서 죄라고 아니 절망이라 부를 수도 없다. (철저한 절망)
기독교를 변호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변호되어야 한다는 무정신적인 것이다.
 
제2장 죄의 계속
   죄에 머무는 상태는 새로운 죄이다.
 
    A. 자기의 죄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죄는 선에 대한 단절이다. 죄에 대한 절망은 선으로부터의 더욱 심한 제2의 단절(회개와의 단절)이다
       그는 선한자로 가장하거나 격정적으로 자기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위장된 자기애와 교만)
        자기의 죄에 대해 고뇌한 후 필요한 것은 머무는 것이 아닌 올바른 방향전환이다
 
    B.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그리스도 앞의 자아, 죄인인 자기자신이려 하지 않는 반항이나, 죄용서는 없으므로 죄인인 자기자신으로 남겠다는 약함이 있다.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것은 사실 가장 가까이 신에게 접근했을때나 가능하다(기독교안에서)
      이제 기독교 사회 안에선 이런 걸 멋있다고 한다
      인간의 군집으로서 교회는 신을 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의 필요를 희석
      죄의 범주는 개체성의 범주이지 집단의 범주가 아니다.죄는 사유의 일반화 범주가 아닌 현실성이다.
      개체가 신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면 공포와 전율 속에 느끼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 중압 가운데 좌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물 즉 개념을 통한 신의 이해는 이런 중압감이 없는 천박하고 공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하여 죄만이 신에 대하여 부정으로나 긍정으로나 말하여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각 사람을 개체로, 개체적인 죄인으로 하는데서 좌절은 시작되고 기독교는 시작된다.
    심판은 오직 개체를 상대로 한다.각 사람은 자신의 죄의 보고서를 개체로 지닌다
    좌절은 이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강화된 죄이다.
 
   C. 기독교를 폐기하며 거짓이라고 말하는 죄
     자아의 절망적 강화
     어쩌면 이토록 가까이 우리를 부르는 신의 근접감에 좌절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좌절하지 않은 자만이 믿음으로 예배한다.
     좌절의 이유는[너는 믿어야 한다]에 있다.
     이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택하는 것도 좌절이다.
     관심은 가지나 이제나저제나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도 또 다른 좌절이다
     적극적으로는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실이 假現說이거나 합리주의로 부정하는 것이 있다.
     현재 이 사실이 중요치 않게 취급되는 이유는 죄와 신앙을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자아가 자기자신에 관계하여 자기자신이길 원할때 , 자기를 정립한 힘안에서 자각적으로 자신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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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움이 되었습니다.

ellul@naver.com 2017-02-04 10: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Ewedu14 2017-12-3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정리를 잘 하셨네요!! 많은 도움 얻고 갑니다 :D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키이츠





너는 더럽혀지지 않은 그대로인 정적의 신부

너는 침묵과 기나긴 세월 속에 자라난 양자

너는 숲속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노래보다 더 멋있게 꽃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이렇듯 전해 줄 수 있다니-.

네 둘레에 감도는 것은 어떤 전설인가?

죽음에 관해선가, 영원한 것인가? 그 모두에 관해선가?

템페 골짜기인가, 아카디아 언덕의 일인가?

사람들의 일인가, 신들의 일인가, 신과 인간 모두의 일인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신들일까? 도망치려는 것은 어떤 소녀일까?

이 얼마나 미친 듯한 구애인가, 도망치려는 몸부림인가?

어떤 피리이며 어떤 북인가?  얼마나 미친 듯한 환희인가?

 

귀에 들리는 선율 아름다우나 귀에 울리지 않는 선율은 더욱 아름답다.

, 네 부드러운 피리를 계속 불어라.

육신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친밀히

영혼을 향해 소리 없는 노래를 불러라.

나무 그늘에 있는 젊은이여, 네 노래는 멈추는 일이 없고

이 나무들의 잎도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아, 너는 결코 입맞출 수 없으리라.

목표 가까이에 닿긴 해도-.

그러나 슬퍼 말아라. 너 비록 크나큰 기쁨을 얻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빛바래는 일 없으매

영원히 사랑하라,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아아 너무나도 행복 겨운 나뭇가지들이여!

잎은 지는 일 없고, 봄에 작별을 고하는 일도 없다.

 

또한 행복 겨운 연주자여, 피곤할 줄 모르고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영원히 연주할지니

더욱 행복스런 사랑이여! 너무나 행복 겨운 사랑이여!

언제나 따스하고 영원히 즐거워라.

언제까지나 불타듯 추구하고 언제까지나 젊도다.

살아있는 인간의 정열이란

끊임없이 추구하여 가슴은 슬픔이 넘치고

이마는 불타며 혀는 타올라 네 사랑에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희생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오! 신비로운 사제여, 명주와 같은 몸에다 화환을 장식하고

하늘을 우러러 우는 송아지를 어떤 초록빛 제단으로 데려가는가?

 

이 거룩한 아침, 여기 모인 사람들이 남겨두고 온 것은

강변의 작은 마을이던가, 바닷가의 마을이던가?

아니면 평화로운 성채로 둘러싸인 산 위의 마을이던가?

조그만 마을이여, 네 거리는 영원히 조용해질 것이리라.

그리고 황폐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오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모습이여!

대리석 남자와 여자가 조각되어 있고

숲의 나뭇가지들과 밟혀진 갈대도 있구나.

 

너는 침묵의 모습, 차가운 전원이여!

우리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영원하구나.

사람이 나이 들어 한 세대를 마감할 때도 너는 남아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 이것이 너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것 전부이고, 알아야 할 것은 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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