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과학 상식, 동물편 - 과학 도우미 03
최은영 지음, 류수영 그림, 이창열 감수 / 효리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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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벌은 꿀이 있는 곳을 어떻게 찾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어떻게 알릴까?, 반딧불이는 어떻게 빛을 낼까? 닭은 왜 그리 이른 새벽마다 '꼬끼오' 하고 울까?, 토끼 눈은 왜 빨갈까?, 하루살이는 정말로 하루만 살까?, 올빼미와 부엉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지렁이가 비만 오면 밖으로 기어나오는 이유는?, 박쥐는 왜 거꾸로 매달릴까? 코브라는 정말 음악을 좋아해서 춤을 추는 것일까? 개가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이유는?, 고양이의 눈이 밤에는 반짝이는 이유는?  등등등

 이 책에는 동물들에 대한 88가지 재미난 지식들이 담겨 있습니다. 살면서 한번쯤은 '왜 그럴까?'하고 의문을 가져보았거나 아이들에게 질문을 들었을 법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일부는 알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왜 그럴까?'라고 묻게 되는 내용들입니다. '아하! 그래서 그러겠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는 내용도 있고, '그런 이유가 있었네!'하고 감탄사를 발하게 하는 내용도 있고, '정말 그런가?'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우리가 보고 사는 동물 세상의 모습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무심히 바라보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과학적인 모습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들도 알게 됩니다. 한편으론 아이들이 이러한 작은 지식들을 쌓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씩 넓히다 보면 아마도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한 흥미와 관심, 그리고 소중함이 조금씩 더 자라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만화형식 -저는 만화형식의 학습서를 별로 반기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이라고는 하지만 책의 내용에 흥미를 북돋기 위한 삽화정도의 역할을 하게 꾸민 부분이 대부분이고, 아이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화만 보고는 알수 없기에 내용도 유심히 볼 수 밖에 없는 형식이고, 글자체나 글씨의 크기 그리고 분량이 아이들이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보통 학습만화의 경우 우리 아이들은 만화만 보고 정작 중요한 내용에 대한 것들은 외면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는데,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작고 빽빽히 채워진 글씨 때문이었습니다 -. 그리고 앞에서 말한대로 여러가지 과학적인 상식을 쉽고 흥미롭게 알아가는 기회가 되기도 할 듯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을 대하며 느끼는 아쉬움은 너무 호기심 위주로 진행되는 내용과 단편적인 지식으로 끝나버리는 점, 그래서 통합된 지식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나열된 토막 지식에서 더 발전하고 고민할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지 못한다는 점 등입니다. 물론 대상으로 삼는 어린들의 눈높이와 흥미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 책의 분량상의 한계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 아들은 이 책을 보자마자 재미있겠다고 구미를 당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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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고대왕조실록 - 고대사, 감춰진 역사의 놀라운 풍경들
황근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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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고대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재구성했다.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가벼운 책으로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고대 역사의 진실을 생생하게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베일에 싸인 고대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면 글 쓴 사람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가벼운 책', 저자는 나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저자후기에 위의 글처럼 썼을 것입니다. 처음 읽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생각한 것이 바로 '역사를 너무 가볍게 다룬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저자가 생각한 것보다 더 엽기적인 상황과 장면들 속에서 탄생한 역사적 사실들도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상황을 너무 희화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내가 우리역사에 대한 특별한 식견이나 지식을 갖춘것은 아닙니다. 내가 배웠던 교과서적인 역사나 웅장하고 기백이 넘치기를 바라는, 내가 바라는 우리 역사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른 접근방식에 대한 뜻모를 거부감 비슷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바른 고백일 듯 합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마냥 가볍고 웃기게만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 자신의 확고한 역사관이 바탕이 된 것 위에, 역사라는 이미지가 주는 딱딱함을 피하기 위해 과도한 상상력이 가미된 유머를 사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는 역사를 대하는 저자의 자세가 진지함을 넘어서 비장하다고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라의 외교를 두고 무조건 굴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실은 사실대로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통일신라의 위치가 중국의 한 군현과 같은 입장으로 전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무려 1300년 동안 한반도의 여러 나라는 한 번도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어본 적이 없다.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던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통일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중국과 우리의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것은 신라고, 한번 흘러간 강물에는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 -p136- 

 저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기타 중국의 자료를 통해서 겨우 접할 수 있는 삼국시대를 비롯한 우리 고대국가의 형성과 왕권 확립, 고대국가간의 관계, 사회문화와 풍습, 기술과 제도 등에 대한 내용들 중에 추려낸 이야기들에 정말로 기발한 작가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현대적인 이야기의 살을 입혀 내놓습니다. 고대 역사책 속의 기록이 아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속의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들처럼, 유행에 뒤떨어진 흙냄새나 곰팡이 냄새 나는 고리타분함을 벗어버린 살아있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래서 우선은 재미있고, 그 다음은 역사와 현실이 조금 헷갈리는데, 그 상상력 가득한 입담이 실린 이야기 뒤에 붙은 작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리와 해석을 통해 기록된 역사의 실체와 의미를 이해하게 인도해 줍니다. 아마도 각 이야기 뒤에 붙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기록과 해석은 저자도 역사적 사실들이 한낱 웃음으로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웃음으로 친근해진 역사가 읽는 이들의 머릿속에 역사적인 사실과 의미로 남기를 바래서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읽으면서 그리 정리된 내용들이 저자가 제시한 역사의 사실들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열심히 연대를 외우고, 왕의 업적을 외우고, 사회 문화적 특징을 외우던 딱딱하고 하품 나오던 국사시간, 그리고 두툼하고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한국사 책, 한국사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면 제일 먼저 떠 오르곤 하는 기억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역사를 박제된 역사라고, 죽어 넘어진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역사는 너무도 생생하게 곁에 튀어나와서 희희덕거리고 있어서 생동감은 있지만 역사라는 의식을 흐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리도 흥미롭고 재미있게 접근하고 이해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찬사를 받을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찬사속에 묻혀 이리 가볍고 친근함만으로 끝나는 우리역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리 시작된 재미있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친근한 접근이 조금은 딱딱하고 두툼한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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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죽음 - 오래된 숲에서 펼쳐지는 소멸과 탄생의 위대한 드라마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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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세계는 죽어있는 세계를 토대로 세워집니다 (p262)
 
  연한 연두빛이던 가로수의 싹들이 어느새 잎사귀로 바뀌고, 빛깔도 더 짙어져 가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던 산과 숲들도 생명의 빛으로 넘쳐납니다. 그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만물이 살아있다는 것,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려주는 초록의 외침을 듣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되는 나무는 우리가 지금 보며 살아있다고, 생명이 넘쳐난다고 찬탄하며 바라보는 그런 나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봄이 왔으되 새싹이 나지 못하고, 잎사귀가 나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를 초록빛으로 가리지 못하고 그대로 맨살을 노출한 채 봄을 맞이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오래된 숲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러한 나무의 죽음을 통한 소멸과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거나 새로이 탄생하는 생명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래된 숲이란 보통 400-500년 된, 그리고 우리나라같은 온대낙엽수림에서는 200년 정도면 도달할 수도 있는 숲을 말합니다. 이런 숲의 특징은 평균수명을 넘긴 늙은 나무들이 많고, 죽어가는 나무와 죽은 채로 서있는 나무들이 많고, 죽은 나무가 숲의 바닥에 두껍게 쌓여있으며, 죽은 나무로 인한 여러 자연의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하지만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곳입니다. 어찌보면 음침한, 그러니까 전설속이나 신화속에 나오는 악령들이 나올 듯한 그런 모습의 음산함마저 느끼게 하는 그런 모습으로 먼저 다가올 수도 있는 곳일듯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이미지에 갇힌 숲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오래되고 음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 숲에서 선채로 죽어가는 나무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생물종들의 삶과 번성, 그리고 또 다른 죽음의 터전으로서의 죽은 나무, 그 나무가 땅에 쓰러져서 다시 땅속의 흙으로 분해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생태학적인 변화에 대해서 세밀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봄이 되어서도 새 잎을 내지 못하는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숲과 자연의 일부로 다시 되돌리는 해체의 과정을 거칩니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지난한 세월을 거치는 이 해체의 과정은 수백년에 걸쳐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장수하늘소 등의 산란터가 되기도 하고 곤충들에게 양식을 공급해주는 식량창고가 되기도 하고, 딱따구리 등의 사냥터, 곰팡이나 균들의 번식지, 이끼나 고사리 등의 새 삶터 등으로 거듭나는 선 채로 죽은 나무가 숲 바닥으로 쓰러지면 또 다른 생명체들 -족제비, 도마뱀, 양서류, 곤충류, 절지류, 균류, 세균류 등- 의 삶의 터전이 되고 번식지가 되고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굳건하던 나무의 외양은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고 결국은 미세한 양분 가루가 되어 숲속의 모든 생물들과 다음 세대의 나무를 위한  양분을 공급하게 됩니다. 실제로 살아서는 5퍼센트 정도의 살아있는 세포로 유지되던 나무가 죽어서는 40%이상의 살아있는 세포로 채워진다고 하니 저자가 말한대로 나무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 한편으로는 진실이 됩니다. 저자는 숲속에서 나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이어지는 사라지지 않고 연결되는 생명의 고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단순히 거대한 나무가 사라지고 죽어가는 일차원적인 시각이 아닌 생태계라는 큰 틀안에서 그러한 죽음이 갖는 의미를 보게 인도해 줍니다. 앙상하게 죽어가는 고사목의 모습이 전설속의 음산한 이미지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반쪽이고 숲을 건강하게 이끄는 위대한 유산임을 일깨워 줍니다.
 
 새싹이 돋는 나무를 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삶의 소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썩어가는 나무 밑둥을 보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찾기가 힘이 듭니다. 푸른 숲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구석구석에서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가는 고사목의 모습을 보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못해서 외면하는 것들의 의미를 살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래된 숲에서의 나무의 죽음과 그것을 매개로 진행되는 생태계의 활력넘치는 삶의 모습들은 통해서, 죽음은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시작과 그 끝이 닿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삶이란 다시 그 끝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그런 의미에서 나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삶으로 가는 통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책을 덮으며 또 다시 삶이란 죽음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살아있는 세계는 죽어있는 세계를 토대로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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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데이비드 웰스 4부작 시리즈
데이비드 웰스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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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말에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험을 받을 때 우리가 하는 행동에 감동을 받으십니다. '말'이 앞서던 생활에서 돌이켜 이제 '행동'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이킴이라는 커다란 주제하에 씌여진 저자의 글들은 짧지만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읽는 이를 권면하는 편지글(?) 형식으로 씌여진 내용 -저자가 직접 편지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각 글의 첫머리에 그려진 봉투 그림으로 인해 추측한 것입니다 -을 따라가다보면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씩 배울 수가 있습니다. 저자가 들려주는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의 의미는 우선 마음을 정하여 결단하고, 그분의 길을 인내하며 경주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그분이 주실 것들을 기대하며 나는 멈추지 않겠습니다 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우리의 반석되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나는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결심과 함께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바탕위에서 생활할 때 겪게 되는 시험속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시험과 거부로 인한 상처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신앙의 걸림이 되는 이들조차도 사랑으로 감싸겠다는, 나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겠습니다 라고 결심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의미는 외로울 때도, 좌절할 때도, 낙담할 때도, 오해를 받을 때도, 광야에서도 꿋꿋하게 그분의 때를 기다리며 순종하고 섬기며, 하나님께로 마음을 정하고 전심을 다하는 것이고, 모든 일에 절제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계획을 치우고 균형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내 안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음을 신뢰하고 좁고 험한 길이라도 기꺼이 나아가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원대한 비젼과 비범한 목적을 가지고 담대히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리 다양하게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은 내 삶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많은 권면의 글 속에 담긴 내용은 하나님은 나의 편이고 나를 위해서 일하시므로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위협하는 자보다 더 크시고, 나의 연약함을 대신하실 강함을 지니셨고, 부끄러운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며, 매번 실족하여 넘어지더라도 다시 돌이키는 자의 손을 잡아주시는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임을 인정하고 범사에 그분의 능력을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가  바탕에 깔려 있음을 저자는 자신의 글들을 통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수많은 크고 작은 일탈과 돌아옴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신실함이 어느샌가 교만함의 다른 표현이 되고, 일탈이 또 어느샌가 영혼의 몸부림이 되어 신실함으로 돌이키는 채찍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궤적이 쌓여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열매를 맺을 수 있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의 첫자리를 하나님의 자리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자세의 문제로 귀결될 듯 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더라도 이런 자세가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은 허수아비처럼 신앙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테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내려보는 결론은 내 삶의 첫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겠습니다는 고백이 앞서고 그 후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사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킨 이의 모습일 겝니다.... '매일 크고 작은 실패를 겪지만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러한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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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가는 부자청년 - 21세기 크리스천 자기계발시리즈 1
조성의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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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로되,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여 가니라 (막10:21-22)

 근심하여 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마가복음의 바로 뒷단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며 놀라는 제자들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시고, 다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리나.'고 말씀하십니다.

 '돈과 믿음', 물질과 신앙과의 문제는 크리스챤이라고 한다면 한번쯤은 고민하고 또한 깊은 갈등을 겪기도 했을 문제입니다. 그런 갈등과 고민의 반영이 청빈론과 청부론에 대한 여러 주장들로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또한 현재 진행중이기도 하구요. 앞에서 이야기된 성경의 본문은 아마도 청빈론의 근거로 더 많이 사용될 듯 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는 부분만 떡하니 떼어 내어서 되뇌인다면 다른 어떤 청부론적인 주장들이라도 공허하게 들릴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 성경의 본문을 이리 단편적으로 떼어낸다면 청부론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말씀들이 또한 무수히 많습니다. 아마도 이 두 주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과 혼란은 "부"라는 부분에 촛점을 맞추고 진행된데서 오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돈'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대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관점이 성경적일 듯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청빈이나 청부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의 말씀을 삶속에서 소유하고 사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결핍의 사고와 풍요의 사고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합니다. 즉 자신을 의지하느냐,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의지하느냐의 순종과 믿음의 관점에서의 접근법입니다.

 '내 창고나 내 품안에 쌓아 놓지 않고, 내손에서 사라지면 없어져 버린다.'는 지극히 당연하게 보이는 사고 방식을 저자는 결핍의 사고라고 부르고, 이는 크리스챤이라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빗어내려는 불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권유하는데 그 근저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의 자녀된 이들이라는 상속자로서의 크리스챤의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러한 풍요로운 삶의 방법이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 한 줌의 씨를 뿌려 열매를 얻듯 움켜진 손을 펴서 베푸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께 받을 것을 기대하며 살며, 씨를 뿌리되 많이 뿌리는 것 등 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말씀에 대한 순종, 신뢰와 믿음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청빈이나 부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듯이 소유의 많고 적음 자체가 기독적인가의 판단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그보다는 자신의 소유가 얼마나 깨끗한가, 그리고 자신의 소유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그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는 태도와 일맥상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것들로 파고 들어가면 저자가 말한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삶이, 죄를 사함받고 천지를 창조하신 부요하신 하나님의 상속자된 자로서의 크리스챤의 위상을 자각하는 삶이 진정으로 부자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한 자각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해서 내 것을 포기할 줄 알고, 하나님의 몫을 하나님께 감사히 드릴 줄도 알고, 그가 주실 것을 묵묵히 기대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의 대부분이 결국은 마음의 첫자리를 누가 또는 무엇이 차지하고 있느냐는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것으로 귀결되는 듯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로서는 할 수 있다는 바늘귀를 통과하는 부자도 그 마음의 첫자리에 하나님이 항상 계셔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과 야곱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먼저 배웠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았고 감사할 줄 알았던 하나님을 마음에 소유한 진정한 부자의 삶을 살았고, 그러한 가운데 풍요로운 하나님의 물질이 주어진 삶을 누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노력하고, 하나님 안에서 땀 흘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고백할 수 있었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의 모습이 바로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가 아닐까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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