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하나님 - 속 좁은 종교를 떠나 드넓은 하나님 품으로 달려가다
짐 팔머 지음, 정성묵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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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회안에, 신자들 안에 갇힌 하나님. 속좁은 종교에 대한 비판과 드넓은 하나님 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이 책의 내용들을 보며, 많은 것들을 인정하지만, 또한 마음 한켠의 불편함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내게도 저자가 비판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식과 위선의 껍데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고백에 이르게 합니다. 내 안에, 내가 다니는 교회안에, 그리고 크게는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애착과 고집이 교회밖의 사람들이나 교회에 나왔지만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여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교회와 신앙인들 안에 갇혀 계신다는 생각을 충분히 갖게 만들수 있었을 테니까요. 적어도 교회나 그 안의 신자들이 자신들 안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새로운 신자들이나 피전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다 보면 결과는 황소보다 자신이 크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배가 터져버린 개구리 이야기와 비슷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그런 착각에 빠져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 품안의 교회, 그리고 그 품안의 세상. 교회라는 공동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건물이나 천막 등의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데 있을듯 합니다. 그런다면 교회가 하나님을 품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교회를 품에 안으신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교회가 하나님의 한 영역 -물론 가장 소중한 영역-이라면 거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영역이 있는 거고,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은 바로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았을 하나님의 사역과 영역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 1절은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교회와 교회밖의 세상 모든 것에, 그리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이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시고, 이 세상에 존재할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서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열심으로 봉사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불신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미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는건데, 저자가 비판하듯이 교회와 신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되돌아 보아야겠습니다. 정직하게 돌아보고 나면, 지은이가 말한 타이어 판매인에게도, 동성애자에게도, 사창가의 소녀에게도, 힙합을 즐기는 이에게도, 그리고 십일조를 내지 않고 있는 정비공에게도, 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때로 그들과 더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도 하시는 분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까요.

  나를 포함한 모두의 하나님.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 내리는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고, 우리 교회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하나님이시며, 아직 믿지않는 모든 이와 천지만물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그들 모두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신다는 사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으셨고, 나를 찾으신 것처럼 그들 모두를 찾아나설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저자의 가슴 아픈 비판에 나같은 신자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며 스스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당신들의 모습속에서 바리새인과 레위인의 모습을 보았소'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뒤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답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깨어있는 모습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은 시작이고 삶속에 온전히 나타나기까지는 성숙-행하지 못함에 대한 핑계같지만-의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또는 저자가 말한대로 내가 뭐를 하려고 하는 그것마저 내려놓고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과정-훈련(?)-이 필요하기도 하겠지요.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 그리고 믿음의 경주자들. 문득 저자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던  하나의 이유를 더 발견하였습니다. 저자가 말한  주인공 대부분은 아직 신앙의 경주를 마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안에서의 -교회안에서가 아니라-  열매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 가운데 생긴 일종의 거부감을 형성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부감은, 저자가 말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삶의 태도 또는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인도의 손길을 불신하는 잘못된 자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아직은 온전히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성화된 모습의 성도의 모습에 다다르지 못했을지라도 -이러한 모습은 나도 마찬가지지요^^- 세상에 예수님의 마음을 밝히는 작은 예수들이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믿음의 경주자들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격려하는 자세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경주자는 상급을 바라고 앞만보고 경주하듯이, 나도 그리고 그들도 그런 경주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투덜거리는 중에도, 하나님은 어디선가 낮고 천하고 무시당하는 곳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나라를 일구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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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케이도 은혜
맥스 루케이도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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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은 채 그냥 하루 이틀을 흘려 보낼 때도 있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

 틈만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샘으로 가는 게 어떤가? 

 - 맥스 루케이도

 도시 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빌딩숲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다보면, 정말로 머리위에 파란 하늘이 있다는 기억없이 며칠이 후딱 지나가버리곤 하였던 듯 합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 살 때는 분명 이러지 않았는데, 아직도 파란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얀 구름을 쳐다보며, 골똘히 소년의 상념에 잠겼던 그 시절이 어제같이 기억에 생생하기만 한데..... 위의 구절은 저자가 책의 처음을 시작하며,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샘으로 함께 가자는 초대의 글입니다. 하늘이 항상 우리의 머리위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마음의 여유와 시간을 갖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푹 빠져 지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늘 허덕이거나 불평을 늘어놓으며 사는 우리에게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저자가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샘물에 푹 젖어보자'고

 책의 내용은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짧은 단상과 은혜로움을 표현하는 사진이나 그림 등의 이미지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단상들은 우리의 삶에 스며든 '놀라운 은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끝없는 은혜', 그리고 매순간 손길을 놓지 않으시는 '매일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만으로도 결코 가볍지 않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은혜의 손길이, 겸손하고 부드럽게, 하지만 한없는 울림을 담은 채 저자의 손끝을 통해 마음속에 울려퍼지곤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고 넓고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속에 사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디게 우리는 그 은혜의 순간들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지, 저자의 섬세한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오는 속삭임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그분의 독생자를 포기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단 하나만 만드셨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내셨다', '그 분은 우리의 죄때문에 십자가 위에 계신다', '천국은 당신의 마음을 안다', '예수님은 모두 이해하시는 분, 그런 분이니 맘 놓고 다가가도 좋다', ' 하나님은 적절한 순간에 우리에게 티켓을 건네신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실패 하나까지도 십자가 앞에 내놓으라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라는 법이 없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예수님께 달려가라. 그분이 우리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신다',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은 열린 문 뿐이다', '당신이 그 안에 몸을 담그면, 당신은 자비 안에 흠뻑 빠진다', '자랑하고 싶다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자랑하라', '하나님이 매일 당신의 집 앞까지 바구니를 손수 배달하신다', '일터가 집이든 시장이든 하나님께는 당신의 일이 중요하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 안에서는 하루하루가 중요하고 모든 사람이 귀중하다', '많이 가지고 있을 때는 기분이 좋고, 가진 것이 적을 때는 우울하다면 당신은 감옥 안에 있다', '당신의 할 일은 기도와 감사이다', '우리는 짐을 가져왔고, 그분은 우리에게 쉼을 주셨다', '우리가 친절하면 그리스도도 친절한 셈이다', '우리 자신을 비우면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그릇이 생기는 셈이다', '하나님은 작은 씨앗에 깃들고, 작은 행위에 힘을 실어 주신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들을 따라 다니신다'.......'우리의 삶은 매순간 은혜의 연속이다' 저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치고 전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이 많은 이야기 하나하나가 묵묵히 읽고 묵상하는 내내, 내 영혼의 굳은 껍질들을 자극하고 묵은 때를 씻어내곤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이 말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순간의 기쁨과 위로를 어떤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전쟁영화를 보면, 군인들이 지뢰를 밟고 죽어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튀고, 땅이 울리고, 몸이 '붕' 떴다가 땅으로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폭발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주변 모습이 필름을 통해 전해지곤 하지요. 전장에서 그러한 지뢰의 폭발음을 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군인은 없을겝니다. 문득 '우리의 삶은 매순간 은혜의 연속이다'라는 글을 보며, 그런 지뢰밭-은혜라는 지뢰가 묻힌 지뢰밭-을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뢰밭에서 우리는 매번 곁에서 요란하게 지뢰가 터지곤 하지만 그것이 터진줄도 모르고 지나쳐 버립니다. 너무도 단단해진 세상살이의 두터운 껍질과 굳은 살 때문이지요. 내 영혼의 깊은 구석에까지 위로와 환희의 자국을 남길만한 폭발이건만 나의 영혼과 육체에는 아무런 느낌도 흔적도 남질 않았습니다. 가끔씩은 미세한 먼지가 날린 듯 하기도 하지만...... 매순간이 은혜의 연속이라고 한 저자의 말처럼, 내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뢰밭속에 있습니다. 매순간 그 지뢰를 밟고서 영혼을 뒤흔드는 그 분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품고서 말입니다. 이제는 내 영혼이 더 예민한 센서를 가져야할 때인듯 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습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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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할아버지의 방주 이야기
톰 둘리 지음, 빌 루니 그림, 정연희 옮김 / 꿈을이루는사람들(DCTY)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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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키우면서 서너차례 아이들 손에 이 이야기를 담은 책을 들려준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나 교회의 학습서, 어린이용 신앙서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그림책이나 이야기책에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는, 신앙적인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함빡 머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노하셔서 홍수를 일으키고, 노아와 가족 그리고 선택된 동물들은 방주에 피신해서 살아남았다는 것과 무지개를 통한 희망의 메시지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노아의 방주에 대한 그림책과 이야기 책들을 보았던 기억때문인지 몰라도 처음 이 책을 대하게 되었을 때는 마음속에 큰 기대보다는, 이전에 보았던 이야기 수준에서 크게 다르지 않겠지 하는 시큰둥한(?) 반응이 우선이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물론 그림은 조금 다르겠지만..... 하지만 책을 펼쳐서 읽다보니 저자가 이야기하는 노아의 방주는, 아이들이 그냥 듣기 좋게 들려주는 이야기로서의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었던 대로의 노아의 방주, 즉 창조주 하나님으로 시작된 역사가 사람들의 지독한 죄악으로 인해 물로 심판을 받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노아를 통해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고 선택받은 사람들과 동물들을 남기신 창조주의 섭리로서의 방주이야기를, 또한 그 안에 담긴 신앙적인 의미들까지 명쾌하게 들려주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 자체보다 더 세밀하게 하나님이 의도와 계획과 도우심을 저자 나름의 탁월한 식견으로 풀이하여 설명하고, 또한 이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 대한 기발한 생각도 들려줍니다. 예를 들면 동물들은 방주내의 공간과 홍수 이후의 번식을 고려했을때 아마도 어린 새끼들이 주로 방주로 피신하였을 것이라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치며 동의하게 만드는 부분이었으니까요.^^ 또한 방주의 모양에 대한 설명과 방주는 배가 아니라 물에 떠 있는 커다란 상자모양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 그리고  방주의 크기를 컨테이너와 비교하여 공간의 충분함을 설명한 부분은 저자가 확고한 신앙적인 믿음을 전하고자하는 의지이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설과 이야기로서의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서의 노아의 방주를 이야기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제일 중요한 사실인 방주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와 연결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의미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진처럼 세밀하지만, 또한 그림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정성들여서 그려진 삽화에 대한 칭찬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이 책을 보며 - 신앙인이 아니라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된 이 이야기가 조금은 거부감을 가지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아마 이전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신앙적으로 표현된 아이들 책으로서의 노아의 방주는 없었을 듯 하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것중 제일 멋진 노아의 방주이야기였으니까요.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읽는 부모들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목과 기쁨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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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지?
데이비드 비벨 지음, 김인경 옮김 / 황금여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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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의 발전과 과학 문명의 발전이 어우러진 현대 사회에서는 고통(고난)이라는 것이 적어도 유쾌하게 취급되지는 않는, 즉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통증이 적은, 또는 통증이 없는 것들을 더 나은 것, 우수한 것으로 선호하는 듯 하고, 정상적인 과정으로 겪게되는 통증 -예를 들면 아이를 낳을 때의 진통-도 이제는 아이를 낳는 이들에게 유쾌하지 못한 경험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생기는 듯 합니다. 또한 재미와 쾌락이 우선시 되는 여러 문화적인 것들이 그러한 경향을 더 자극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단 육체적인 어려움이나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의 고통들도 이제는 치료하거나 피해야 할 어떤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로 취급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서도 그러한 느낌이 묻어납니다. 하나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면 시련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시련을 내게 주시지 않아야 된다는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책은 신앙인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시련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았습니다. 제일 크게는 목회자인 저자 자신이 원인모를 유전병으로  큰아들을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둘째 아들마저 동일한 질병의 위험을 겪으며 그와 그의 가정에 닥쳤던 시련과 고통의 순간 그리고 그 긴 터널을 지나며 새로이 깨닫고 알게 된 그러한 고통속에 하나님이 담아 놓으신 의미와 이유들을 이야기 하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속에서의 신앙과 방황, 괴리된 삶, 우울 그리고 회복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고통이나 시련들에 대해서,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다 잘 되려고 그러는거야'나 '주님만 바라보면 만사가 형통할거야'라는 식의 진실이지만 공허한 권면들의 실체를 인정하며, 또한 그리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에 애통해하는 모습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그러한 상태에서 취할 자세는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었나요?'라는 식의 질문이 아니라 그러한 순간에도 함께 하시며 '네 마음을 다 이해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있단다.'라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겸손히 묻는 자세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욥이 그에게 닥친 고난속에서 보였던 모습은 아마도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의 하나의 모범이 될 수도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왜 제가 이래야 하느냐고 따지기도 하지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아니하며, 믿음의 끈을 놓지도 않습니다. 저자는 그러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함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또렷하게 배울 수 있게되고, 신앙의 성숙을 이끌게 되며, 온전하게 살아있는 신앙을 이룰 수 있게 함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부단히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바는, 고난이나 시련이라는 것이 부질없는, 쓸데없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신앙의 발전과 성숙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으며, 무언가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섭리가 함께 한다는 믿음의 눈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난을 무조건적으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설익은 이해로 이리 표현하는 감이 있기에 다시 몇번을 더 읽고서 숙고하여야 할 부분이 있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고통을 대면하게 될때 신앙인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저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성품을 믿으면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 그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 그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 만큼 강하시다.

 - 그는 당신의 한계를 존중할 만큼 친절하시다.

 - 그는 당신의 의심을 용서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 그는 당신의 두려움을 가라앉히실 만큼 사랑하신다.

 - 그는 두려움을 가질 정도로 나약한 당신의 신앙을 받아 들이실 만큼 자비로우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을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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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당신에게 윙크할 때
스콰이어 러쉬넬 지음, 이수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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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윙크하시는 하나님". 제목을 보면서 경건한 문체의 성경 읽기와 설교 형식에 익숙해진 내겐 어쩐지 불편함이 먼저 느껴진 것이 사실입니다. '윙크'라는 단어가 현실에서는 '추파로서의 눈을 깜빡거림'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서 이겠지요.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승리하시는 하나님', '보살피시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 등의 개념에 익숙해진 내가 하나님이 윙크한다는 개념을 쉽게 형성하기가 어려운 부분이었겠지요.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고 표현한 단어의 차이라고, 하나님을 현대적인 의미로 느끼고 해석한 저자의 표현방법이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말입니다.

 "윙크하시는 하나님" 이걸 좀더 성경식의 순화(?)된 표현으로 말한다면 아마 '보살피시는 하나님'정도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가 '하나님의 윙크 (gidwink)'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일상중의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위안의 메시지'를 말하는 거니까, 결국 우리의 삶 구석구석 -그것이 꼭 예배나 찬양, 기도의 자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에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위로와 간섭의 순간들을 하나님이 각자에게 윙크하시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 의미는 곧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시지 않게 하시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우리 삶속에 선하게 간섭하시는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저자는 자신과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있었던 신비한 우연과 그 속에서 각자가 발견했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들을 담은 23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윙크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각각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연찮은 사건이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고, 참 대단한 우연의 일치네 하면서 웃어넘길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그 안에서 겸손히 자신의 노력을 내려놓고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웃어 넘겨버릴 그러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정말 필요한 순간 필요한 곳에 세밀하게 자신의 사랑과 관심과 보살핌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의 손길이 담긴 사건이 됩니다.

 저자가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진정으로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이 윙크하고 계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등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물론 그 윙크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이의 섬세함과 겸허함에 따라 그것이 우연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위로의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 마음이 섬세하지 못해서 느끼지도 못하rh 넘어간 순간들 속에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사랑이 숨겨져 있었다는 일깨움을 저자는 읽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듯 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자신의 과거을 돌이켜 보고,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윙크를 찾아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 앞에는 기뻐할 일만 남았겠지요. 내 삶의 미래에도 하나님의 윙크가 계속 이어질 테니까요. 그렇게 나와 소통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신앙의 다른 차원, 즉 확신과 평안 가운데 삶의 발걸음을 씩씩하게 내 딛는 감사와 찬양이 함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지요.

 내 삶속에 펼쳐지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윙크를 찾으면서 살 수 있기를.... 그리고 삶속의 수많은 우연들도 하나님의 계획속에 일어나는 사랑과 간섭의 표현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소중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늦으시는 법이 없단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추실 때는 있지만 말이야."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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