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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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텔레스크린이라는 도구를 통해 당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이 소설이 말하는 현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당원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하든지 텔레스크린을 통해 누군가가 들여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입밖에 내는 소리까지도 이 기구가 감지해 낸다는 사실은, 결국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을 온전히 지배하고 생각과 행동을 억압하고 있는 빅브라더의 존재 방식을 아주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며 빅브라더의 방식으로 순응하는 것에 더하여, 주어진 현실에 맞게 과거의 역사적 사실마저도 철저하게 왜곡하고, 그러한 철저한 왜곡이 현실이라고 강요되는 모습은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그러한 강요와 억압과 감시가 의외로 효율적으로 -다른 이면을 들춰보면 분면 표면적인 효율이겠지만- 현실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빅브라더를 등에 업은 권력자들은 반역을 꿈꾸는 주인공 윈스턴과 같은 이들을 고문과 회유, 감금과 폭력을 통해서  철저하게 몰자아에 이르게 만들고, 결국은 그러한 과정의 끝에 만들어진 빅브라더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품게 된 훌륭한 지지자를 성공적으로 세상에서 제거해 버림으로써, 또 다른 반역의 싹을 지능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며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저자는 빅브라더라는 전체주의적 존재에 대해 한 인간이 소심한 몸부림으로 저항해 보지만 결국 거대한 힘과 권력과 체제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버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의미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실패와 잔혹한 전체주의의 성공적인 모습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또 다른 소설 <동물농장>을 통해서 힐난했던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의 부패와 악영향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서의 경고라고 할 수도 있겠고, 미래의 세계에 대한 나름의 암시나 상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소설이 1940년대에 쓰인 당시 현실에 대한 경고나 미래에 대한 단순한 공상이 아닌, 1984년이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중인 현대문명에 대한 기막힌 예언을 담은 통찰력있는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전으로 많은 이들의 손에 오르내리고 있고, 현대의 발달된 IT와 통신 기술은 저자가 말하는 텔레스크린과 비교되며 우리의 현실을 옥조이곤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빅브라더의 나라는 아니지만, 각종 정보통신기기의 발달과 사용과정에서, 어찌보면 이 소설이 형상화한 당원이라는 인물들보다 더 자발적으로, 우리만의 빅브라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을 읽으며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이 소설이 현대의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비록 명확한 실체가 없고 존재감이 없긴 하지만 현대문명이 이루어가고 있는 시스템이나 가치체계로서의 빅브라더에 대한 경고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발적으로 정보통신 기기에 취해 사는 많은 이들은 윈스턴과 같은 별생각없이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불편함보다는 안락을 느끼는 당원이고, 법으로 또는 기술적인 기구의 진보를 통해 한없는 편리함을 제공하는 이들은 오브라이언과 같은 적극적으로 빅브라더를 형상화해 가는 권력의 중심부에 근접해 있는 이들이고, 그리 만들어지고 있는 실체를 모르는 빅브라더는 지금 우리의 삶과 생각과 감정까지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금더 시간이 지나면, 윈스턴과 같이 반역을 꿈꾸더라도 결국은 덫에 걸린 쥐마냥 옴짝달싹 못하고 자발적으로 문명의 이기에 투항해 버리고 그 안에 안주하게 되는 그런 운명의 한 부분을 무심코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한번쯤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빅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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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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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의 성대한 결혼식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마저,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마들렌 성당의 돌계단을 내려가는 신랑 조루주는 자신의 신부가 아닌, 정부 드 마렐 부인과의 은밀한 관계 뒤에 보곤하던 거울 앞에서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세와 성공의 단맛을 알기 시작한 후부터 그에게는 진실이나 정직, 충실함이나 품격 따위의 말들은 그저 출세를 위해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만 꺼내서 자신을 꾸미는데 사용하는 카멜레온의 피부빛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오로지 용납되는 삶의 신조는 '오로지 모든 것은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듯 한데, 이리 표현해 놓고도 너무 밋밋한 진부함이 느껴질 뿐입니다.  

 자신의 옛 전우이자 신문사 <라비 프랑세즈>의 정치부장인 포레스티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매달 눈앞에 닥친 궁핍을 해결하고 그때 그때의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며, 세상을 향해 반항과 분노의 눈길을 보내곤 하던 평범한 철도 사무실의 직원에 불과했던 주인공...... 하지만 자신의 친구의 손길에 이끌려 시작한 신문사 생활에서 깨닫기 시작한 성공에 이르기 위한 비열함과 모함, 협잡 등은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해 가고, 그 정도가 심해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그의 성공도, 지위도 위로만 솟구쳐 오르기를 반복합니다. 자신의 친구의 주검을 앞에 두고서도 출세를 위한 계단이라고 생각되는 친구의 부인을 유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또한 자신도 뻔뻔하게 정부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유혹했던 자신의 부인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쓰임이 다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과감히 이미 인지하고 있던 그녀의 외도를 적발하여 매장시켜버리기를 마다하지 않고, 또 다른 출세의 계단이라 생각한 신문사 사장의 부인을 유혹하여 은밀한 관계를 맺었으면서도 더 높고 원대한(?) 결정적인 출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자 아무렇지 않게 그 딸을 유혹해서 납치하여 신부로 맞이하기 위한 적극적인 협잡을 마다하지 않고, 그리고 그러한 야망을 이룬 결혼식 에서는 그 신부를 곁에 두고서 자신의 정부의 모습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맺은 모든 관계들을 송두리째 성공과 출세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그리 활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분명 일반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분노 또는 구역질마저 느끼게 만드는,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씁쓸함 또는 허탈함을 느끼게 만드는데도, 작가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징벌이나 어려움을 내리지 않고, 그가 원한대로 성공가도를 씽씽 달리게 만들면서 그의 작품을 마무리합니다. 철저하게 징벌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뻔뻔하게 사는 그의 모습을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묘사하면서, 결국 우리가 매일매일 대하는 인생은 자신의 작품속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과 다르지 않은, 그렇고 그런 것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 합니다. 또한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도, 아닌 듯하지만 작품속 인물들과 똑같은 속물근성이 숨어있어 자신의 것을 이기적으로 먼저 챙기고 남모르게 모함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남이 그러면 비방을 하거나 모욕을 가하는 그런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조롱섞인 힐난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느끼던 주인공에 대한 마음속 힐난과 씁쓸함은 어느새 내 마음을 파고 들어 스스로에게 의심스런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당신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인공만큼이나 뒤틀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떤 비열한 짓거리도 마다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그런 욕망과 비열함이 당신의 본성 속 어딘가에도 숨죽이고 숨어 있으리라는 누구라도 쉽게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아니하고 마음속을 들여다 볼 듯이 확대경을 코앞에 들이대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인공 벨아미, 조루주 뒤루아처럼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 정직과 성실함을 모두 뒤로하고 결국은 성공과 출세라는 욕망을 향해 지금도 앞을 향해 달리고 있는 당신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니냐는......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처벌이나 실패가 아닌 성공과 출세를 누리는 모습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눈길은 매우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가십과 괴소문들도 결국 이 소설 속 요지경과 다를바 없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 우리가 어릴 적에 배웠던 것들을 삶속에서 진실로 실천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과 사회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터이니..... 결국 소설 속의 벨아미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어디선가 -내 안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배회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한 스스로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인간 존재를 생각하면 소설에서 느꼈던 씁쓸함과 허탈함이 오롯이 되살아 나는 것을 어이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인생은 다 그런 것이다라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그 뒤에 묻어나는 아쉬움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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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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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었을 때는, 경제적인 호황기를 만나 많은 수입을 올리고 멋진 집과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었던 남자, 아이들에게 멋들어진 아빠였고 자신의 아내에게는 믿음직스러운 남편이었던 한 세일즈맨,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가득했던 삶을 살았던 세일즈맨 윌리..... 한때 희망을 가슴에 가득 안고 꿈꾸는 사람이었던 주인공 윌리는, 이제 예순이 넘은 나이든 노인의 모습으로 힘겹게 자신의 세일즈 가방을 들고 무대에 등장합니다. 수십, 수백, 아니 하루 종일을 자동차로 달려가도 그의 세일즈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이 고군분투하는 늙은 세일즈맨으로, 회사에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고, 그때 그때 올리는 실적에 따른 커미션과 부족한 부분은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성공한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남편으로, 그리고 다 자랐지만 가정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무능력자와 건달인 두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그는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과거의 화려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과 성공을 눈앞에 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큰 아들 비프에 대한 회상, 고향을 떠나 큰 성공을 거두어 그에게 자랑과 희망과 꿈의 실체가 되었던 형 벤의 환영이, 앞뒤가 꽉 막혀버린 늙은 세일즈맨으로서의 자신의 현실과 교차되며 그에게 닥친 삶의 곤궁함과 위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좋은 호시절이 지나고, 불황이 찾아오고 나이가 들면서 회사에서 냉정히 버림받는 윌리, 그리고 그 여파로 사회와 가정에서 마저 건강한 관계가 무너져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분명 지금 현실속에서 우리가 겪는 직장과 사회와 가정사의 이면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결국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자살을 감행하고, 쓸쓸하게 마감되는 그의 장례식의 모습속에는 한 사회의 조직원으로서 한때를 치열하게 살았지만, 한발짝, 두발짝 중심에서 밀려나 소외되고 버림받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겹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윌리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충격적이라거나 비인간적이라거나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그냥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밀어내는 사람들도 밀려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그러한 세상사의 이치에, 사람들사이의 애정이나 존경보다는 물질의 가치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에 대해 묵언의 동의를 하고 자신의 삶을 그 안에 기꺼이 던지고 살아왔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속에서 그러한 동의를 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몰락 과정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는 윌리의 모습을 보면서 단지 그런 모습이 물질만능시대의 힘없는 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스스로에게 많은 불편감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한 세일즈맨의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단순히 이 시대가 우리에게 지우는 짐에 대한 두려움이나 무기력함만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시절의 외도로 전도유망하던 아들의 장래를 결정적으로 망쳐버렸던 사건, 비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서지 못했던 나약함, 윌리의 기억속에 남겨진 호시절에 물질적인 풍요 이상의 것에 대한 성찰을 가지지 못했던 영혼이 마취된 삶의 모습 등에서, 단지 이 작품을 물질만능시대에 소외당하는 인간에 대한, 허망한 꿈을 좇아 헤매다가 스러진 한 소시민에 대한 비극이라고 단정할 수 만은 없는, 차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더 진지하고 영리하게 삶을 꾸리지 못한 한 인간, 한 소시민으로서의 윌리, 그리고 지금 현실속에서의 삶의 안일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나태함에 대한 작가의 예리하고 냉철한 지적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작품 속에 교묘하게 섞인 듯한, 삶에 대한 찬양과 죽음에 대한 진혼곡의 울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윌리처럼 현실에 취해서 자신을 세상이 가는대로 흘러가게 만들었을 때, 영혼을 돌보지 못하고 물질의 유혹에 자신의 영혼을 모두 넘겨 버렸을 때, 결국 우리의 삶 역시 그의 마지막처럼 죽음으로 스스로 돌진하여 퇴장당할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조금 더 지혜롭게 생각하고 조금 더 진지하게 삶을 설계하고 가꾼다면, 죽음이 유혹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삶을 향해 더 멋지게 돌진할 만한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결국 한 사람의 의지보다 시대의 조류가 더 매섭게 느껴지기에, 많은 윌리와 같은 이들에게는 이 작품이 이 시대를 사는 소시민들의 죽음에 이르는 진혼곡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그 이면을 생각하고 느끼고자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삶에 대한 또다른 예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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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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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찾다가 '너무 지루하다' 며 이 책에 별점 두개를 준 분의 글이 눈에 띄였습니다. '너무 지루하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평가입니다. 단 한가지 단서를 먼저 달아준다면 말입니다. 추리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보다는 좀더 실용적인 내용들을 더 좋아하는 성향인 연유로 마지막의 결말을 기대하며 차분히 읽어나가기 보다는 읽으면서 무언가 내용에 서로 연결되는 실마리가 있는 책들에 익숙해진 이유가 크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1권을 마치고 2권 중간정도까지 읽으면서는,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건지 모르겠고, 주인공을 따라 암호를 푸는 듯이 또는 목적없이 좌충우돌하며 실타래가 꼬이듯이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읽는 내내 그냥 덮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시시때때로 의식의 표면에 새기곤 하였습니다. 분명 앞에 언급한 분의 평가처럼 '지루해서였겠지요.....'  작가의 다양하고 기발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과 지명,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분명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지고 이해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대목까지 이 책은 분명 상당히 따분하고 지루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내용을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지금, 이 책을 '너무 지루했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면모가 이 속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대부인 단첼로트 대부가 죽고나서, 자신과 단첼로트 대부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글을 가지고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나는 과정과 부흐하임에서 그 글로 인해서 위험인물로 찍히고 결국은 지하묘지로까지 추방되는 과정과 지하에서 겪는 여러가지 모험과 위험과 고통 등은 결국 주인공이 그림자 제왕 (호문콜로스)를 만나 그 글의 작가에게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부흐하임의 권력분포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기까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 이후로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오름'을 느끼게 만드는 숨가쁘게 진행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금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라면 처음부터 펼쳐지는 작가의 상상의 세계에 푹빠질 수도 있겠고, 좀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내내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장까지 읽어낼 만한 여유와 인내만 가지고 있다면 작가가 선사하는 반전과 희열 속에서 '오름'의 한줄기 빛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루해서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한가지 단서입니다.

 작가의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책들이 도시인 지상의 부흐하임, 그리고 도시의 밑에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깊고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지하묘지, 그 지하묘지를 휘젓고 다니는 책사냥꾼들, 그림자 제왕과 갖가지 괴물들과 생물체들, 한 작가의 책을 평생 읽고 외워내는 외눈박이 부흐링 족, 살아있는 책이나 거인족, 그리고 지하세계의 여러 기묘한 장소나 장치들은 책을 다읽고 나서, 다시금 음미하게 되는 지금에야 더 깊은 맛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낯설고 기묘했던 것들과 존재들이 책장을 덮고 난 지금 이리 더 친숙하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책읽는 사람들에게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것은 '오름'에 대한 것일 듯 합니다. 저자가 이 책속에서 말하는 '오름'이란 것이 책을 쓰는 이들이나 그 책을 읽는 이들이나 책을 통해서 찾고자 또는 얻고자 하는 그 무엇이 될 테니 말입니다. '당신에게 '오름'을 선사한 책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이해하고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오름'을 선사해 주는 책을 찾아 나선 많은 책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읽기 속에 담긴 선명한 판타지를 하나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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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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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이야기의 처음을 선문답처럼 들리는 이러한 구절로 시작한 것은 이 글속에 분명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담겨 있기 때문일 듯 합니다. 저자가 500여 페이지가 되는 두툼한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문제 의식은 바로 구원에 이르기 위한 험난한 여정 또는 우리 삶에서 구원을 대면한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이나 난해함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면도날의 칼날을 넘어선다는 것, 그리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 등은 어쩌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 이상의 영역, 곧 신의 영역이고 믿음이 필요한 종교의 영역이라고 해야할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그러한 거창한 주제를 조금 더 우리 삶에 가깝게 끌어 내려본다면 아마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대신해도 될 듯 합니다. 

 전쟁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전우가 눈앞에서 싸늘한 주검이 된 경험을 하면서, 삶에서 썩어 문드러질 고기덩어리 이상의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청년 래리.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방황과 고행(?) 등은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한 영혼이 구원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현실적으로 매력적인 직장을 뿌리치고, 약혼자와의 결혼까지 뒤로 미루고, 시카고에서의 가족과 친근한 이들과의 교류마저도 무심하게 뒤로한 채, 그는 낯설은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으로 독일과 중국 및 기타 동양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고, 인도에서의 수행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고단한 여정을 꾸려 갑니다. 그러한 여정 가운데 그의 삶은 때로는 도서관에서 공부로 때로는 뒷골목의 술집이나 식당에서의 체험으로, 때로는 고단한 탄광 생활이나 농장에서의 노동으로, 그리고 때로는 수도사들과의 공동체 생활이나 인도 수행자들 속에서의 수행으로 채워집니다. 비록 저자 자신이 화자로 나서서 들려주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바로 래리의 이러한 삶의 목적 또는 의미를 깨닫기 위한 고단한 여정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래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일을 하면서 자신이 깨닫은 것들을 실천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가 찾던 것의 어렴풋한 그림자나마 얻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가 말하는 미래의 삶에 대한 계획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그러한 구도자로서의 삶은 계속되어야하는 진행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듯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가 말하는 주제를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구도자들의 삶이나 여정이라고 규정하는 것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생각한다면, 즉 우리 각자가 고행이나 수행에 참여하거나 어떤 종교의식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자기 나름의 구원에 이르기 위한 -삶의 의미를 찾거나 만들어 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일상의 삶속에 투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각사람 개개인이 나름대로 면도날을 넘어서기 위한 지난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주인공인 래리에게만 집중되었던 독자들의 시선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 속의 다른 인물들에게까지 이를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엇은 끈질기게 상류사회를 동경하고 사교계에 남아있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으로 그 자신이 넘고자한 면도날을 보여 주었고, 소피는 자신에게 닥친 삶의 불행을 술과 마약 그리고 남자들로 채우다가 결국은 면도날에 베여 넘어진 경우이겠고, 래리의 약혼자였던 이사벨은 결국 자신을 사랑한 그레이와 결혼하기는 하였지만 옛사랑의 그림자를 다 지우지 못하고 현실과 욕망사이를 오가며 면도날 위에서 중심을 잡고자 곡예를 펼치고 있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 본다면 인간 개개인에게는 나름대로 넘어서야 할 면도날의 의미가 다 제각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는 차치하고서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이야기의 형식이 저자가 화자가 되어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들려주는 형식이기에 주제의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긴장감보다는 차분함이 또 때로는 그러한 차분함이 과하다 못해 느슨함으로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분명 주인공인 래리가 화자가 되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면도날을 넘어서기 위한 내면의 갈등이나 좌절, 그리고 때로 느꼈을 환희나 감동 등에 대해서 훨씬 더 생생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저자는 그가 스스로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으로 담담하게 주인공들에게 있었던 이야기들과 그가 전해 들었던 내용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면도날을 넘어선다는 것,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에 대한 주인공의 생생한 이야기보다는 어렴풋하게 다가오는 그림자만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의미가 비록 저자가 그러한 주제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자신만의 결론으로 뭐라 우길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문제이기에, 여러 인물들이 그 자신의 삶을 통해 내보이는 각자의 삶에 대한 사랑과 좌절을 보면서 독자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의미를 묻고 숙고해 볼 것을 권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살던 시대와 공간이 분명 많은 차이가 있기에, 특히나 바쁜 현대인에게는 더더욱이나 사치스럽게 느껴질수 있는 래리와 다른 주인공들의  '삶에 의미에 대한 고민'과 '자신의 삶에 대한 몸부림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역설적으로는 가장 필요한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의 자양분이지 않을는지..... 책장을 덮으며 한번쯤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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