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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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인생은 개 두마리 반이 남았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리 말하는 사람에게 '왠 미친~'이라는 험한 눈길을 보내지 않을까 합니다. 이 표현은 페르낭이라는 환자가 정신과 의사 엑또르 씨와 상담하면서 자신의 수명을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개가 보통 14에서 15년을 사니까, 애완견을 키우는 그가 자신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을 개의 수명으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수명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아쉬움을, 또는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가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일상에서 표현하며 살아가는데, 이 책은 엑또르 씨가 바로 사람들이 고민하는 시간에 대해서, 즉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또는 너무 더디게 흘러서 고민스러워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나선 여행 이야기이자, 읽는 사람이 시간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하며 성찰에 이를 수 있는 여유을 가지게 해주는 치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늦추고 싶어하는 사람, 시간을 앞당기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페르낭처럼 시간에 대해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진료실에서 대하면서, 시간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같은 범주의 고민에 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엑또르 씨는 그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몇가지 방법을 알려주고 환자 자신이 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스스로 성찰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치료법을 시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가 떠난 시간 여행이란 바로 환자들에게 알려줄 만한 독특한 성찰의 방법을 찾아나서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행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직접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간에 내맡겨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훨씬 철학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삶의 많은 부분을 건드리며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게 자극하고, 뭔가를 찾게 만드는 방법들에 대한 엑또르 씨의 답변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자신의 진료실에서 시작하여 북극과 어느 항구, 중국의 산골짜기에 이르기까지의 여행은 엑또르 씨 자신이 시간과 인생에 대해서 새로운 자각을 얻어가는 시간이기도 하겠고, 이것은 또한 작가 자신의 성찰의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의 수명을 개의 수명으로 계산해보라.' 엑또르 씨의 수첩에 첫번째로 적힌, 시간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제시하는 성찰방법입니다. 자신의 수명이 개 몇마리 정도가 되는지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엽기적(?)인 면이 있는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깨닫는데 도움이 될만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는 엑또르 씨가 적은 이하 여러 방법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각인된 방법이었던 탓에 더 그리 느껴지는 면이 있겠지만, 그리 한번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남은 시간과 인생을 훨씬 더 진지하게 여기고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되었든 엑또르 씨의 첫번째 방법이 내게는 제대로 먹혀든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25가지의 방법과 번호가 없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에 적은 '무위가 아닌 초연을'까지 합친다면 엑또르 씨를 통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방법은 28가지 (24와 24-1을 따로 생각했을 때)가 됩니다. 어느 하나로 말할 수 없는 다양하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하고, 너무 도식적으로 보이는 방법도 있고, 한편으로는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방법도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양이 다양할 독자들에게 어느 순간, 어느 부분에서 마음을 확 뒤집으며 파고들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중 어느 하나는 분명 각각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숨은 힘을 지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뒤돌아보며 시간이 조금 빠르게 지나간다 싶었던 요즈음이었는데, 이 소설을 통해 만난 엑또르 씨를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있는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내 삶과 그와 연관된 많은 것들의 의미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 한편으로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던가 하는 반성에서 시작하여 어찌 마음을 추스리고 살아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엑또르 씨의 첫번째 방법이 나태해지려는 내게 신선한 자극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개 몇마리가 남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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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
허균 지음, 김탁환 엮음,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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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길동전'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무릇 학교 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사람치고 이러저러한 사설 몇 마디쯤을 덧붙이지 못할 이가 없을 것입니다.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의 발견으로 그러한 표현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내용이 가지는 시대상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과 한 영웅으로서의 대장부의 꿈을 이루는 대목까지, 많은 것들이 그러한 사설의 이야기거리로 사용될 것입니다. 누구나 춘향전이나 흥부전, 심청전 등과 함께 그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학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내용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심술궂게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면,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하던 홍길동전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예전의 국민학교- 어느 시절엔가 읽고 끝내서 기실은 깊이 되새김질하고 묵혀볼 기회가 없었던 듯 하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럴 듯한 내용들은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의 결과로 각인된 우리사회가 말하는 견해의 압축이었다는 씁쓸한(?) 진실에 다다르게 됩니다.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 착각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좀더 진실에 가까운 고백일 것 같습니다. 여러 경로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대강의 줄거리와 학교에서 반복되는 시험을 위해 암기하던 내용들에 익숙해져서 잘 안다고 생각하였지, 진실로 그 내용에 대해서 원문을 충실하게 읽고 스스로 묵혀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니 문득 손에 들린 이 책이 반가워집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찾게 된듯이 말입니다. 

 책을 손에 들면서 너무도 익숙하게 된 줄거리와 주제에 대한 각인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끝을 짐작하게 방해해 버리는데, 그러한 도식적인 책읽기를 벗어나 어떻게 내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리 뾰족한 묘안이 생기질 않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초등학생인 아이를 위해 고르던 우리 고전 목록에 올라있던 책이었다는 생각에, 지금으로 치면 아이들 동화책과 다름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더해져,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어른도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해를 뒤로 물리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가다보니, 우선은 내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세밀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를 돋웁니다. 그리고 지은이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읽노라면, 내가 배웠던-앞에서 각인된 지식이라고 말했던- 내용들이 어떤 연유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안목(?)과 이해가 또렷이 생기게 되고, 의외로 그러한 지식의 되살아남이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 2'에서 검사 강철중이 거대한 악과 연계된 유착속에서 준법을 가장하여 자신의 의지를 꺽으려고 달려드는 정관계의 회유와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홍길동전의 그 유명한 대사인 '..... (다만 평생 서러운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니,).....'를 인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듯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담겨있던 적서의 엄격한 구별이라는 사회구조적인 차별과 그 안에서 생겨나는 모순과 아픔에 대한 이의제기가 아마도 지은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덧붙여 탐관오리들에 대한 응징이나 해인사 보물 탈취 등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했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따끔한 일침과 고발도 지은이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던 주제일 것 같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각인된 지식들과 겹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다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지은이가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 낸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 특별한 태몽이라는 하늘의 선택에 의해서 태어난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며, 사람이 부릴 수 있는 능력 이상을 지닌 인물로서 그려진 영웅이라는 점이나 그가 기존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부정하면서도 그 울타리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통해서 기존의 질서안에서 자신의 한을 푼 것으로 만족한 것, 조선이라는 공간과는 떨어진 율도국에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향의 체제도 기존의 자신에게 모순과 차별을 안겨주었던 사회제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 등은 홍길동전이 지닌 시대적인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내용과 별개로 민음사판 '홍길동전'을 통해서 맛볼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는 좀더 유려한 표현과 세밀한 묘사를 담은 완판 36장본과 단순하고 간결한 문체가 좀더 힘을 느끼게 만드는 경판 24장본이 함께 실려 있어서, 판본에 따른 이야기의 고유한 색감과 내용상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판 36장본의 영인본이 실려있어 활자본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홍길동전은 본래 필사본으로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다가 인기를 얻게되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서 활자본(이 책에 실린 경판과 완판)으로 새겨졌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용의 축약이 생겼다고 하니,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비단 홍길동전이 지닌 사회상에 대한 비판의식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판본과 그 차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면, 또다른 우리 고전에 대한 사랑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도 가져봅니다-참고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재미있다 우리고전 시리즈'의 홍길동전은 필사본 중 하나을 원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교육과정을 통해서 배운 홍길동전에 담긴 주제의식을 넘어서, 지은이가 홍길동이라는 인물과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통해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비전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현 우리 시대상에 비추어 우리사회가 가진 모순과 억압 등을 고민하고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는 보다 진일보한 어른스런(?) 고전 읽기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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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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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 아마도 책을 읽거나 연극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들이 서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주제어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다른 많은 이해와 해석들이 있겠지만, 나무 한그루가 서있는 황량한 언덕의 시골길에서 삶의 무료함 -또는 무의미함, 불합리함 등-에 목을 매다는 것도 생각하고 그 곳을 멀리 떠나는 것도 생각하지만,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말 한마디로 삶의 다른 가능성들이 모두 부정되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기다림'이라는 단어 또는 의미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머물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가 누구를 기다린다'고 말을 할때면,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고, 그러한 기다림에 딸린 확연한 의미에 대한 자각도 어느정도 명확할 것입니다. 누구를 기다리고 왜 기다리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명확함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기다림의 대부분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기한도 정해져 있기 나름이고, 막연한 기다림이라면 그러한 막연함의 이유에 대한 나름의 설명도 자신의 삶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야기 속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고도를 기다림'과 우리의 '기다림' 사이에는 서로 어울리지 못할 괴리감이 생성되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괴리감은 너무도 당연히 '저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이고, 저들의 기다림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라는 의문에 이르게 됩니다. 

 작가 베케트도 고도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물음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속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고도가 누구일까'라는 물음에는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 듯이 보이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삶에 그들이 매번 그 장소에 돌아와서 서성거리고 있어야 할 이유와 의미가 되는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독자나 관객에게는 그들 나름의 '고도'에 대해서 한번쯤 되묻고 생각하게 만들것 같습니다. 두 주인공 보다는 더 의미있는 곳에서 의미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나 관객이더라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고도'만큼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기다림의 대상이 자신의 삶을 점령하고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조금더 나아간다면 기다리는 시간에 담긴 무료함과 공허함, 무의미함 등을 공허한 말과 의미없는 행동으로 메꾸며 시간을 흘러보내는 두 주인공의 삶보다는 더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독자의 의식 한구석에 '정말로 내 삶이 저들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의 싹을 키우고, 결국에는 '그럼 갈까?' (블라디미르), '가자' (에스트라공)라고 하면서도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결말처럼, 조금 달라 보였지만 동일한 삶의 공간을 오가며 갈곳을 몰라하는 주인공들처럼 우리의 삶의 모습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까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의 신화>에서,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가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되풀이하여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모습을 통해서,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삶 또는 노동이라는 신들의 가혹한 형벌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인간 삶의 부조리함과 그에 대한 반항,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긍정..... <시지프의 신화>에 담긴 목소리를 이 책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부조리'라는 용어로 연결된 두 책에 대한 해설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삶은 시지프의 삶보다 더 하찮고, 무의미하게 해체된 인간, 신에게 반항하는 위대한 존재가 아닌 신이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한 삶속에 갇혀 있지만, 기다림을 멈추지 않고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들을 채워가는 두 주인공의 삶의 시간 속에는 시지프의 모습이 담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시지프처럼 위대하고 용감해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과 훨씬 닮은, 아니 우리보다 훨씬 더 공허함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삶에 가득한 공허함과 부조리함에 대한 지적이자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각을 위한 일깨움은 아닐는지..... 내일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여전히 그 황량한 언덕의 시골길에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시지프는 여전히 산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여전한 모습으로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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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뜰에도 상사화가 피고 진다 - 세상 바깥에 은둔한 한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한 소식’
김양수 글.그림 / 바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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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나 소설가가 글로 자신을 밝히는 사람들이라면, 화가는 붓끝에서 그려지는 갖가지 그림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내비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데 화가인 저자가 자신의 전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을 곁들인 시집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소설가니 시인이니 화가니 하는 구분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나눈 범주일 뿐이니 큰 의미를 두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화가를 업으로 하는 저자가 글을 담아 책을 내고, 그 글 옆에 그림들을 곁들여 뭔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면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림만으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의 끈들을 다 전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하지만, 이내 책속에 담긴 그림들을 보면서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한 불경한 생각이 부끄러워집니다. 저자가 긴긴 시간을 도심의 바쁜 삶과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외딴 시골 마을에 들어가 자연과 그림을 벗삼아 소일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약간의 힌트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것이 온전히 다는 아니겠지만, 세상의 한켠에 비켜선 삶 가운데서 스스로 길어올린 자신에 대한 탐구와 참된 자신에 대한 묵상이 세상사람들과의 소통으로 발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저자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일상적인 방법으로 소통하고 싶어했다는, 그래서 자신의 삶이 녹아난 글을 바탕삼고, 자신의 그림을 삽화 삼아 세상사람들과 소통을 시도했다는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떨어진 감은 / 나비들의 몫이고  

 달려 있는 감은 / 까치들의 몫이고 

 생의 한 길가에 선 / 나는 누구의 몫인가. 

 자연과 한발 가까이에 다가선 삶 가운데서 느끼는 고요함 또는 고독, 혼자서 자연을 대면하고 홀로 자신을 찾아 헤메는 외로움, 하지만 주저앉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열정..... 저자의 글 속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 있되 무조건 세상의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자연속에 담긴 것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고자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습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자에게는 비와 햇살, 개구리와 나비, 들판에서 일하는 촌부와 아낙, 풍경소리와 보름달, 삭풍과 안개, 그리고 봄날과 가을 풍경 등 일년 사시사철 순간순간 부딪히게 되는 사물과 자연의  풍경들이 단순히 지나치는 의미없는 이름들이 아닙니다. 온전히 자연의 일부가 된 저자와 소통하려고 하는 동등한 주체이자 아둔한 마음을 깨우치는 스승이고,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벗이자, 함께 껴안고 살아가는 가족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책 곳곳에 담긴 그림이 예쁘기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아무런 가식없이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 저자의 진솔한 글들이 마음에 와닿는, 바쁜 삶속에서 잊어버린 참된 '나 자신'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마음속에 새기게 만드는 글과 그림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 만물에 자신의 자리와 몫이 있듯이 '생의 한 길가에 선' 나의 자리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의 몫'일까요? 저자의 마음에서처럼, 내 삶의 구석구석을 품고 있는 '내 속뜰에도 여전히 상사화는 피고 지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와 같은 이들의 격려를 자양분 삼아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 사이를 어찌할바 몰라 헤메고 있는 시간들 속에서도 여전히 내 삶은 그리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는 듯 합니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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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마타사부로 / 은하철도의 밤 지만지 고전선집 231
미야자와 겐지 지음, 심종숙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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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와 겐지..... 낯선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책의 저자에 대한 기억과 어렸을 적에 손꼽아 기다리며 보곤 했던 TV 프로그램 <은하철도 999>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 어디선가 읽었던, 부유하였던 자신의 태생과는 동떨어져 자신의 철학과 신념에 충실하려 했던 작가의 치열했던 삶과 그의 대표작 <은하철도의 밤>이 어린 시절 재미있게 보았던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내용을 접하며, 그의 동화들을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대하면서의 감정은 반가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기다렸던 뭔가를 드디어 마주 대하게 되었다는 그런 반가움..... 그리고 이 책이 동화이기는 하지만, 요즈음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니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니 하는 기획들이 많은지라 어른이 동화를 읽는다는 것이 그리 흠이 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이들 책을 자신이 먼저 골라 읽어보거나 아이들과 함께 읽고 나누는 부모들도 많은 시대이기에 어른이 동화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좋은 부모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허영심(?)까지 끼어들었습니다. 결국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계기는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아이들에게 새로이 권할만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부모로서의 기대-어렸을 적에 <은하철도 999>를 보며 느꼈던 그런 감정들을 아이들에게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숨겨져 있기도 했습니다.

 <바람의 마타사부로>와 <은하철도의 밤>. 이 책에 실린 두편의 동화입니다. <바람의 마타사부로>는 9월 첫째날 바람과 함께 골짜기 계곡 물가의 작은 학교에 아버지를 따라 전학왔다가 아버지가 돌아가게 되면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아이와의 12일간의 생활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학교 아이들은 다카다 사부로가 처음 나타난 날이 니햐쿠토카(입춘에서 210일째로 이 날 전후로 태풍이 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였고, 또한 이름도 비슷하여 다카다를 마타사부로라고 부릅니다. 만난 첫날부터 아이가 떠난 12일까지 함께 어울려 놀았던 일과 그러던 중에 바람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중심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경이 되는 마을과 지역에서 마타사부로라는 이름의 의미와 지역적인 특색, 9월이면 태풍이 자주 불어와서 큰 피해를 남기고는 한다는 등의 향토색 짙은 예비지식이 없다면, 작가가 이 동화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온전한 의미를 알기는 어려울 것같다는 한계를 지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문화와 지역적 특성과 시간적 차이 (20세기초와 21세기에 접어들었다는...) 만큼의 괴리감이 이 동화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은하철도의 밤>은 바다에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와 생활하고 있는 조반니가 은하수를 쳐다보는 중에 상상하는 -또는 꿈을 꾸는- 형식의 동화입니다. 은하수를 관통하는 은하열차를 타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 캄파넬라와 여행하며 겪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작가의 여러가지 철학이나 신념이 담겨있는 부분인지라 이 또한 작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이 동화를 읽으며 잡은 하나의 실타래는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하나 꿰어맞춘 다음과 같은 깨달음입니다. 여행의 끝에서 캄파넬라가 사라져버려 슬픔에 담긴 조반니는 '저 꼭 잘 살아갈게요. 반드시 진정한 행복을 찾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하며 현실로 돌아오는데, 실제 현실속에서는 친구 캄파넬라가 은하수가 비추이는 강물에 빠져 정말로 사라져 버리고, 그러한 친구를 뒤로하고 조반니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은하 여행중에 만난 등대지기의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떤 괴로운 일이라도 그것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생긴 일이라면 고갯길의 오르막도 내리막도 모두 행복으로 다가가는 한 발자국이니까요.'라는 말처럼, 친구가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러한 사건을 뒤로하고 아버지가 돌아오실거라는 소식을 가지고 집으로 달려가는 조반니의 달음질 속에 작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 그런 의미를 담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혹(?)스러움..... 나름대로 이리저리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정말로 작가가 이 동화들을 통해서 하려고 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혼돈스러움이 남습니다. 아마도 앞에서 말했듯이, 문화와 지역색, 그리고 시대의 차이로 인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은하철도의 밤에서 작가의 상상속에서 태어난 은하에 대한 이야기 또한 작가보다 좀더 많은 은하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앎으로 인한 작가의 상상력이나 감성과의 차이와 작가의 철학이나 신념에 대한 이해의 부족 등이 이 동화를 편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즈음의 여러 동화들은 아이들이 눈높이에서 세상의 여러가지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비해, 이 책속의 두 동화는 작가의 눈높이에서 자신의 생각과 신념, 철학 등을 동화를 읽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전달하고자 한 경향이 짙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눈높이의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좋은 동화를 읽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풀이마냥 괜한 딴지 걸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뜨끔한 생각이 든다는.....^^  여하튼 여러 이유로 인해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은 동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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