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4
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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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꼭 바르고 곧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때로 센바람이 불어오면 갈대처럼 휘어질 줄도 알아야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들 앞에서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일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방편을 삶의 중심에 놓고 매번 그리 산다면 그것 또한 지혜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각인된다면 사회생활에서 '왕따'가 되기 십상일테니 말입니다. 결국 세상살이에서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중용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대쪽같이 한평생을 살아내서 존경을 받는 위인들도 있지만, 결국 평범한 이들에게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삶의 중심은 유지하되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들여본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우화들은 평범한 이들에게 삶속에 담긴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고, 지혜롭게 사는 방식을 짧지만 강렬하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을 마냥 선하게만, 정직하게만 살라고 하지 않고, 때로는 다른 이의 어려움 앞에 냉정하게 돌아서라고 하기도 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결국 화를 초래하는 근원이 될수도 있다고 하고, 본래 고약한 성품을 바로잡기 어려울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하는 등 현실적인 삶속에서의 진실, 또는 지혜를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솝 우화>에 대해서라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몇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새에게 접시에 담은 음식을 대접하였다가 황새로부터 목이 긴 병에 담긴 음식을 대접받는 것으로 대갚음 -사전에는 되갚음이라는 말은 없답니다^^- 을 당한 여우 -어렸을 때 이 장면을 보면서 황새는 어렵겠지만 꾀많은 여우가 왜 병을 뒤집어 나발을 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내기를 하는 북풍과 해님, 시골쥐와 도시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그물에 걸린 사자를 구한 생쥐 등등. 그래서 우화집이라면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그런 책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굳이 이리 읽노라니 어른인 내게도 얻을 만한 이야기들이 보입니다. 선악을 떠나서 인간 본성을 이리도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겠다는 감탄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다시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아이들이 자랄때 꽤 길게 각색되었던 동화들이었다는 기억인데, 단 몇줄로 서술된 원문을 보면서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뼈대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 살을 붙인 각색자들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감탄사도 발하게 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세상사의 이면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도 보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볍게 나눌 수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거리도 건져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개된 우화들이 세상사의 핵심을 간결하게 풀어서 깨닫게 해주는 것이, 어렵게 읽어내던 책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안겨주기도 하고, 머릿속에 많은 지혜를 더해 주는 듯도 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곁에 두고 짬을 내어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링컨 대통령은 항상 <유클리드 기하학>과 <이솝 우화집>을 끼고 살았다고 하니 아마도 이러한 즐거움과 이 속에 담긴 삶에 대한 지혜와 통찰을 벌써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솝 우화>와 무관하게 이 책 자체에 대한 한두가지 불편함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원문 아래 덧붙여진 해설(?)에 대한 것인데, 본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해석과 이해의 여지를 없애버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생뚱맞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작품해설을 보면 이 책의 원본-펭귄 판 핸드포드 번역-에 해당되는 책자체의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어차피 그러한 번역본들도 다른 원본을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몇가지 판본을 사용하더라도 세계문학전집에 어울리는 편집의 묘를 살렸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번역상의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면입니다. 새 문학전집을 펴내면서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읽는 도중 곳곳에서 느껴지는 문체의 부자연스러움이나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들의 낯섦이 읽는 묘미를 많이 감소시킨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암여우가 암사자를 비웃었습니다. 새끼를 한 마리밖에 낳지 못한다고 말이지요. 암사자가 대꾸하였습니다. "한 마리지만, 사자란 말일세." -p28, 양보다 질 

 개가 토끼를 숲에서 쫓았습니다. 익숙한 사냥개였지만 재빠른 발에 뒤지고 말았지요. 염소지기가 개를 비웃었습니다. "저렇게 조그만 것이 너보다 빠르구나!" 개는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얼 잡으려고 달리는 것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리는 것은 전혀 다르지요." -p147,  큰 차이 

 임종을 앞둔 농부가 자기 아들들이 훌륭한 농사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아들들을 불러놓고 말했지요. "애들아, 나는 곧 이승을 뜬다. 너희들은 내가 포도밭에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줄 모든 것이 거기 있다." 아들들은 포도밭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땅 구석구석을 팠습니다. 감추어둔 보물은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깊은 골을 판 포도 넝쿨은 굉장한 수확을 올렸습니다. -p197, 귀중한 발견 

 좁은 길을 걸어가다가 헤라클레스는 사과처럼 생긴 것이 땅 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부수려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까보다 곱쟁이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욱 세게 밟고 또 몽둥이로 쳤습니다. 그것은 더욱 커져서 온통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를 내던지고 놀란 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테나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만하면 됐어요." 하고 아테나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싸움과 말다툼의 정신입니다. 도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처음 모양으로 있지요. 그러나 더불어 싸우면 그건 한없이 불어나요." -p 199, 바늘이 몽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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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스토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1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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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름지기 어떤 책이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면 읽어낸 이에게 저자가 자신의 책을 통해 무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한 부분 -실제 내용이든, 아니면 단촐한 느낌이라도-을 남겨 조그마한 경의라도 표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다 읽고 나서도 그냥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지지 않는 책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르 끌레지오의 <조서>가 그랬고, 아득한 학생 시절에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리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이 그랬던 기억입니다. 분명 읽었는데, 때로는 열심히 밑줄을 그어보기도 하였는데, 머릿속에는 그저 몇가지 단어만 맴돌뿐, 하얀 백지장 위에 아무것도 쓸말을 찾지 못하였던 책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삶의 순간순간에 나타나곤 하면서 무언가 강렬함을 또는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회상을 가지게 만들던 책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그런 종류의 책을 이리 만나서, 앞에 놓아두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기억되는 독일의 통일 후에, 흡수당한 동독의 한 작은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 책소개를 보면서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갈등과 감동과 스릴을 기대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통일의 과정에서 생겨난 혼란과 갈등 그리고 그것들을 헤쳐나가는 멋진 사람들 또는 낙오자들.....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식의 이야기들과 그런 식의 스토리의 전개를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는 내가 생각하던 그런 익숙한 것들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단순해서...... 아니면, 역설적으로 너무 복잡스러워서...... 아마도 둘다라고 해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형식은 너무 단순하지만 서로 얽힌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저자 나름의 의도 등은 평범하게 다가선 독자에게는 너무도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게 느껴집니다. 책속의 사람들, 그리고 책을 쓴 이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리 우둔한 독자를 만난 저자의 운없음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9편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통일을 맞이한 후의 동독의 한 작은 도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위조여권을 만들어 이탈리아로 몰래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새 화폐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 변화된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고, 가정이 무너진 사람들, 든든한 직장에서 밀려나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사회의 한 구석을 배회하는 사람들.... 소설 속에서 누군가는 죽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외로움에 눈물을 쏟기도 하는데, 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또 서로 이리저리 얽혀서 서로의 삶의 부분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한데 저자는 그러한 삶들을 29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 둘 그려나가지만,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 듯 하여 조바심을 가지고 읽어보더라도 결국은 서로가 무심하게 덧붙여진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곤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얽혀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관계를 이루며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결국 개개의 이야기들은 거기에 언급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나 생각일 뿐, 좀 더 그럴듯하게 이웃에게 전달되거나 다른 이야기와 어울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일관성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파편화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통일 후에 이 작은 작은 도시에 경제와 문화, 각종 법률과 제도 등의 급속한 변화가 생기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의 조류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을 법 한데도, 소설속의 이야기들은 그리 격렬하게 흐르지 못하고, 등장하는 인물 각 개인의 삶과 경험에 한정되어 이야기될 뿐입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러한 변화라는 것이 결국은 모습은 다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의 삶의 연속이었을 뿐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책소개에 보면 귄터 그라스는 저자를 '새로 등장한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그리고 <슈피겔>은 이 소설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새로운 스타일의 통일소설'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을 마저 다 읽기 전까지는 '새로운 이야기꾼'이라거나 '새로운 스타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리 말한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가 격동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러한 변화를 겪어냈을 사람들에 대한 너무나도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낸 이 소설이, 한편으로는 우리 삶이 가지고 있는 모습에 대한 너무나도 섬뜩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저자가 말하려는 것들에 대해서는 하얀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고, 책 제목을 단순하다고 속인(?)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려면 4차원(?) 독자가 되든지,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물방울 속에서 세상을 보는' 법이라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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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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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이 읽고 좋다고 떠들고, 연말을 맞아서 여기저기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며 떠들썩 한 가운데 앞자리에 이름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서도 꿈쩍하지 않던 마음이 어느 날인가 동하였습니다. 이전에 저자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고, 자신의 글속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슬며시 잡아끄는 매력을 느꼈던 적이 있지만, 결국 투병생활을 접고 고인이 되어버린 저자를 생각하면서 왠지 손이 쉽게 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카페의 올해의 좋은 책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고서는 문득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뒤로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아는 사람과 서로 좋은 책을 교환하자는 약속을 하고서는 결국 이 책을 내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환할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에서..... 

 .... 그래서 나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으로 제목을 정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 비가 되고 싶다'를 제목으로 추천한 독자처럼 나의 독자들과 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난 이 책이 오롯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한다. - p10-11, 프롤로그 

 장애와 암투병, 이 두가지 만으로도 저자의 삶은 우리에게 특별한 모습으로 각인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저자도 자신의 글에 그런 생각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글에서 묻어나는 향기는 그러한 특별한 모습에서 풍기는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차라리 그러한 특별한 모습속에 담겨 있는 평범함들, 그리고 솔직함, 사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긍정과 희망의 끈을 버리지 않고 삶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서 즐거워 하는 모습 등.....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희노애락을 고스란히 자신의 글에 녹여내어 그러한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과 진솔함이 저자의 글속에 담긴 향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p128

 저자는 '오늘이라는 가능성'이라는 글에서 자신에게 있었던 유방 종양의 검진을 위해 겪었던 기다림과 고통, 외로움 등을 이야기하며, 조직 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물론 2001년 12월호 샘터에 실었던 글의 내용이지만, 실제는 악성종양으로 판정되어 지난한 치료과정을 시작하던 당시 자신이 암에 걸리고 다른사람들의 동정의 대상이 된 것에 대해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그리 시작했던 암투병에서 돌아오면서는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독자들과 삶의 더 많은 기쁨을 누리려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라, 그냥 장영희가 좋다. 촌스럽고 분위기 없으면 어떤가. 부르기 좋고 친근감 주고, 무엇보다 이젠 장영희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말한다. "이름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을." 맞다. 향기 없는 이름이 아니라 향기 없는 사람이 문제다. p187

 아마도 저자는 스스로의 향기를 '부르기 좋고, 친근감 주고, 무엇보다도 장영희'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자신의 삶 자체라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향기가 무엇이고 어떤 향기를 뿜어낼 것인가를 의식하지 않고, 어려움을 헤치고 당당하게 나서서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격려하며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들과 친근하게,그리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 결과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단지 이름에 향기없음을 서러워하는 가식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히 다루고 정성껏 살아가고자 하였던 모습 말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것이다, 라고. ..... 그래서 그런지 돌이켜 보면 내 삶은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모조리 다 깨어나 마구 뒤섞인 혼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흑백을 가리듯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가리기는 참 힘들다.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살아왔다. .........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 말은 어쩌면 그 학생보다는 나를 향해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p232, 235, 에필로그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싸움터, 병원으로 돌아와 있다는 저자는 살금살금 조심조심 삶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는데, 큰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걸어서 다시 나쁜 운명이 깨어난 모양이라고 말하며 치료 과정에서의 고통을 되새기지만, 또한 새봄을 맞고, 이전처럼 병을 훌훌 털어내고 의연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삶의 기쁨을 나누고자하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몸으로 살아 내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p121

 저자가 자신이 기다리던 새봄에 고인이 되어 이젠 독자들 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순간, 저자가 더 이상 '살아갈 기적'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줄 수 없게 된 순간부터 아마도 저자가 말한 살아온 기적과 살아갈 기적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저자의 바람대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고백하며,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의 향기를 삶속에 간직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의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장영희라는 사람의 이야기였지만, 이제부터는 나와 우리들이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 이야기를 멋지게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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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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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 p229-230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학교 기숙사를 나와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홀든 콜필드가 동생 피비를 만나기 위해 몰래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동생 피비의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건지 말해보라'는 질문에 대답한 내용입니다. 온종일 넓은 호밀밭의 절벽 옆에 서 있다가 조심성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전에 주인공은 '모든 것을 그리 다 싫어하지 않는다면 뭘 좋아하는지 한 가지만 말해보라'는 동생의 질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 방학 시작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부모님이 있는 집에 바로 들어가지도, 그런다고 남은 시간을 기숙사에 조용히 남아있지도 못한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해보기도 하고, 옛 학교의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술집에서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해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그리 절벽에서 추락하고 있는 자신을 붙잡아 주는 손길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세상과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부조리함에 온몸으로 맞서는 듯이 보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 물러서서 보면 한편으로는 절제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모습과 의미없이 반항하며 사소한 것에 얽매여 큰 것을 포용하지 못하는 협소함-한편으로는 순수함이라고 할수도- 등이 겹치며 세상을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어린 영혼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을 주인공과 같은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겪는 혼돈의 시간이고 삶의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한 모습은 주인공이 원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절벽이 옆에 있음에도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알고는 있지만, 아직 몸과 마음이 그러한 생각을 따라 갈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해야 하지 않을는지..... 

 마지막에 집을 떠나 서부로 떠나겠다는 우스운(?) 주인공의 생각을 멋지게 막아서는 것은 주인공의 어머니나 아버지, 옛 선생님이나 친구, 여자 친구 샐리나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제인과 같은 이들이 아닌 주인공이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칭찬하는 동생 피비입니다.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만나고자 했던 동생 피비는 주인공 앞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숨을 몰아쉬며 함께 떠날거라고 나타납니다. 그런 동생 앞에서 쩔쩔매며 -아마도 어른들이 그리 했다면 주인공은 더 반항했겠지요- 결국은 동생을 달래기 위해 함께 동물원에 가고 동생에게 회전목마를 태우는 동안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주인공 앞에 그리 영리하게 막아선 피비의 모습에서는 주인공이 말한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주인공 자신도 그것이 절벽인지 몰랐겠지만, 아마 한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절벽으로 완전히 추락해 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을 붙들어 준 것은 바로 동생 피비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겪은 후의 주인공은, 마지막 그의 독백으로 미루어 보건데, 호밀밭에서 뛰어노니는 아이들보다는 이제는 그들을 지켜보는 파수꾼의 모습을 더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 이젠 몸과 마음을 다스릴만한 영혼의 성숙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서 삶에서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의미를 곰곰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p32 

 많은 사람들, 특히 이 병원에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이번 9월부터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를 연신 물어대고 있다. 정말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이 있을까?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 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야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p278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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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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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가정 관리사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근검 절약을 통해서 자신의 아파트까지 소유하게 된 20대 후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평범한 행복은 카니발 시즌, 한 파티에서 만난 남자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괴텐이라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범죄자였고, 카타리나 블룸은 괴텐이 아파트까지 쫒아온 경찰을 감쪽같이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게 돕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불법으로 의심되었고, 괴텐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친 경찰은 카타리나 블룸과 괴텐과의 관계, 그리고 그녀의 불법성을 조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신문 -차이퉁-은 그녀를 괴텐-범죄자-의 약혼자로 몰아붙이면서 그녀를 옥죄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대대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기자들은 주변인들을 취재하여 모은 자료들은 기사화하면서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을 '얼음처럼 차갑고 계산적이다'라든가, 주인공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교묘하게 인용하며 범죄자의 약혼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느니, 무책임한 주변인들의 발언에 비중을 두어 그럴 듯하게 처리하는 등의 적극적인 해석과 왜곡을 통해 평범한 한 여성을 '살인범의 정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그리고 '음탕한 공산주의자' 등으로 매도해 갑니다. 그러한 기사는 또한 여과 없이 읽는 이들에게 카타리나 블룸의 부정적인 모습을 각인시키고, 결국에는 주인공이 집단적인 이지메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언론의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여 진화하고 어떻게 한 인간을 짓밟고 무너뜨려버리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첫 도입부는 '그러한 폭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며, 그러한 살인사건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묻고 있고,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좀더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의 이유 또는 과정에 대한 주인공의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한 신문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몇몇 기자에 의해 철저하게 자신의 명예를 짓밟힌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국가도 사회도 그리고 그녀의 이웃도 그러한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을 때, 주인공이 한 기자를 총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자수하면서 아무 후회의 감정이 없었노라고,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 -괴텐-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진술했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사건과 함께 일어난 동일 신문의 기자 살해사건을 해당 신문뿐 아니라 여타 다른 신문들은 일방적으로 '자기 직업의 희생자'라고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미화할 뿐 그러한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어떤 반성이나 부끄러움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죽임당한 기자가 속한 신문집단에 의해 카타리나 블룸의 평범한 삶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에 덧붙여 살해당한 기자의 마지막 순간의 부적절한 행동-불룸의 아파트에 가서 노골적으로 치근대었던 행동-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집단이 말하는 자신들의 직업의 고귀함에 봉사한 결과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 또는 사건의 전말을 찾아헤매다 사소(?)하게 실수한 부분-언론의 입장에서 오보에 대해 언론이 변명하는 식으로 말한다면-에 대한 복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 그 기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매장시켰던 피해자의 아파트에 가서 아주 상스럽게 치근덕거리다가 결정적으로 죽임당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기자는 기사를 통해서만 주인공의 명예를 짓밟은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마저 주인공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짓밟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언론권력의 뒤에 숨어 사는 자들의 허위와 가식까지도 이야기하고 싶어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사회도 그러한 폭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매우 비극적인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깝게는 서민들과 친근했던 한 대통령의 죽음과 연관해서 언론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대통령을 끊임없이 빨갱이로 몰아가던 언론의 행태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큰 사건이 터질때면 매번 피의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 권리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고, 어느 새 우리는 우리가 편한 쪽의 논리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는 크게 또는 아주 작게 우리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내가 언론이라는 권력에 속해 있지는 않더라도, 아무런 의식없이 언론이 던져주는 기사에 대한 단순한 동조자가 되는 순간, 언론과 똑같은 뻔뻔한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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