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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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풍문은 사실일까. 누군가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고, 누군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도래를 확신했다. 그 많은 소설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위로와 안식을 얻었으나 또 그만큼 현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면과 회피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우리에게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환멸을 느끼며 삶의 진실을 찾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듯하다. 우리는 왜 여기에 혹은 거기에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가면을 가리키며 걸어보라던 김연수가 자기 언어를 소진한 듯 이야기를 멈췄다가 오랜만에 소설집을 냈다. 평범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짧고도 긴 이야기를 담은 단편 8개가 바닷가 카페 문 앞에 걸린 풍경처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시에 먼저 닿은 소설가라서 해서 특별히 언어에 대한 깊이와 태도가 남다르진 않다. 다만, 외부를 관찰하기 위해 연 창문의 크기는 남달라 보인다. 적당한 거리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태도에는 대체로 연민이 묻어난다. 슬픔과 고통에도 찬란한 햇빛 한 조각을 묻혀 놓는다든가, 산산이 조각난 거울의 유리 파편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반짝이는 슬픔과 모래가 씹히듯 서걱이는 이물감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잡는다.

핍진성이 결여된 소설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진실은 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직조된 허구의 세계에 단단한 내적 구조에 균열이 생기면 독자들은 몰입의 즐거움을 잃고 창조된 세계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다. 김연수의 소설은 일관성 있게 ‘시간’의 문제를 꺼내 들고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를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괜찮으냐고. 내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매끈하다. 1972년 10월을 시간의 끝이라고 부른 연인의 이야기.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인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언이 새삼스럽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부는 ‘세컨드 윈드’가 그렇고, 「진주의 결말」에서 제시한 희망의 방향이 그러하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라는 빅토르 위고의 짧은 문장이 헛된 희망 고문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 자신을 견디고 견딜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패와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롭다’는 진부하지만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는 기형도의 고백처럼 김연수의 상실감은 대개 특별하지 않은 연인과의 이별, 오래된 기억과의 결별에서 비롯된다. 고독보다 쓸쓸함에 가까운 서사는 실존적 위기가 아니라 일상적 슬픔을 담아낸다. 익숙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는 김연수의 대중성은 딱 여기까지다.

아주 오랫동안 한 작가의 글들을 읽는 일은 기쁨이자 슬픔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순간 지루해지듯 어떤 소설가든 연타석 홈런을 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과 소설가에도 정년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절필을 선언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안주하며 자연스레 문학을 떠난다. 또 누군가는 독자들에게 외면받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장과 이야기로 새로움에 도전한다. 일관성과 변화는 양날의 검이다. 정호승과 김지하의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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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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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물이기도 하다. 통상 좌뇌는 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에 관여하고 우뇌는 창의적 사고의 뇌로 직관적 판단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피질과 변연계는 그 기능과 역할이 각각을 담당하고 있으나 그 역할과 기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 형질, 교육환경, 성장 과정이 생각과 감정 통제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과 공간마다 다른 요소가 작동하니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판단과 선택도 계속 변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따위의 영화 대사는 설 자리가 없다.

대개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타인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자아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 정성적 평가, 객관적 능력의 종합적 판단과 차이가 있다는 의미일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고 울부짖던 리어왕이 아니라도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에서 껍질을 깨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싱클레어와 같은 욕망은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기 인식의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오해와 변명에 대한 고찰이 심리학의 연구 영역일 것이다.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 이후 인간의 마음이 증명될 수 있는 과학적 진리의 영역에 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의 일관된 오류, 불합리한 선택, 비이성적 행동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끝내 우리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전 경제학에 마침표를 찍고 행동경제학의 도래를 알린 사건이 벌어졌다. 2002년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노벨 경제학을 받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경제행위를 하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듯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니 ‘영끌’했던 사람들은 ‘영털’이 되었다. 집값이 바닥을 찍어도 매수하지 않는 실수요자들은 곧 후회와 아쉬움의 술잔을 기울이리라. 그러나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각은 원래 그렇다. 디폴트 값이니 개인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는 가능하다.

한발 더 나아가 『넛지』의 저자인 리처드 탈러는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자문이었다. 현실 정치에 행동경제학이 뛰어든 사례다.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으로 인간의 속성과 경제 체제를 까발렸다. 누구나 멍청하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의 설명과 판단을 좇는 순간 망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 링에 올라와 처맞기 전까지는.”이라는 타이슨의 다소 과격한 조롱이 미래를 예측하고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은 아니었을까.

우리 머릿속에는,

* 시스템 1 : 빠르게 생각하고 직관적인 반응체계

* 시스템 2 : 느리게 생각하고 고심하면서 시스템 1을 감시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한 통제력 유지

이렇게 두 개의 시스템이 들어 있다. 대개 시스템 1은 본능에 가깝다.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생각보다 혀가 먼저 움직이고 눈이 손보다 빠른 이유다. 대개 변연계가 담당하는 영역이리라. 시스템 2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이다. 가장 마지막에 진화한 신피질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Judgement Under Uncertainty : 어림짐작과 편향Heuristics and Bias」에서 기나긴 인간의 착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선택, 가치, 틀짜기Choices, Values, and Frames」와 함께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두 편의 기념비적 논문은 숱한 논란의 출발이 되었고 경제학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촉발했다. 우리는 ‘이콘Econ : 합리적 이론의 토대에 발을 딛고 사는 허구의 존재’일까 아니면 ‘인간Human : 실제 세계에서 행동하는 비이성적 존재’일까.

대체로 ‘기억하는 자아 : 삶의 점수를 기록하고 선택하는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 : 실제로 살아가는 자아’를 압도한다.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숱한 오류가 시스템 1과 시스템 2, 즉 이콘과 휴먼의 충돌과 어색한 화해 때문이라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대개 기억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의 간극 때문이다. 매 순간 선택의 순간이 온다. 어림짐작과 편향은 일상이 되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되고 성향과 성격을 좌우한다. 이 책은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자유 의지를 회의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당신의 판단, 당신의 결정, 당신의 선택은 과연 괜찮으냐고.

지식 생산자 사이에 유통되는 논문이 아니라 대중적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에 해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부록에 해당하는 짧은 논문 두 편의 해설에 해당하는 본문 670쪽은 너무 방대해 보인다. 하지만 충분한 사례와 설명, 관련 논문과 저작들이 고루 소개되어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경제학의 프레임을 뒤엎은 심리학자의 실험과 설명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의 방향과 깊이를 바로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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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이라는 칼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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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은 사물주의자이다.”라는 송승환의 평가는 적확하다. 『사무원』, 『소』 등의 시집을 읽으면서 김기택에게 매료된 건 건조한 시선과 상상력 때문이다. 사람을 빗겨 간 자리에 사물이 놓인 게 아니라 사물이 존재의 그림자가 되어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다. 즉물적 태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삶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이 배어 있는 사물들. 그렇게 무심한 듯 사물을 통해 생의 단면을 벤 시들이 좋았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고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장인 정신에 공감했다.

낫과 칼은 만듦새와 모양새가 다른 듯 같지만, 같은 듯 다르다.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채 누군가를 안고 싶은 외로운 낫은 잘 벼린 칼날, 군더더기 없는 직선과 같을 수 없다. 김기택은 매번 그렇게 사물을 통해 내 안에, 아니 우리에게 잠재된 날것의 욕망과 감정을 끌어낸다. 거역할 수 없는 사물의 몸짓으로.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아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읽는 김기택의 시는 세월을 담았다. 동시대 시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만큼 쓸쓸한 일이 있을까. 소설가 조세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이청준, 박경리, 최인훈이 떠날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인 오규원, 조태일이 떠나듯 노년과 죽음에 다가선 시인들의 시는 세월을 담아낸다. 명랑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사유가 부딪히던 자리에 부드럽고 느린 시선이 머문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로 받아들여야 할 뿐, 오호의 감정이나 비평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 혹은 생활 감각에 대한 시적 사유는 나이와 무관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당연히 이전과 다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 거리낌 없이 나이브한 말과 행동은 미성숙의 지표다. 그러나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지나간 모든 것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그간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도 아기 앞에서 입 벌리고 헤벌쭉 웃지 않았을까. 그렇게 멍때리는 순간보다 더 나은 일이 없다는 듯.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 아닌가.

아기 앞에서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

유아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아기가 다칠 것 같다

내 눈빛에서 튀어 나가는 이빨과 발톱을

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

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

표정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입 벌리고 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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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말할 시간 창비만화도서관 5
구정인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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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만화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장편 단행본을 그래픽 노블이라 부른다. 내용과 형식이 어떻든 명명법은 그 실체를 규정한다. 뭐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대상은 다르게 인식된다. 수준 낮은 심심풀이용 만화가 예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처럼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색다른 형식으로 조망하는 만화는 순수 문학과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구정인의 『비밀을 말할 시간』을 읽은 후에 《종이의 집》에서 열연한 배우 이치아르 이투뇨를 따라《인터머시》를 보게 됐다. 그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를 연상시킨 드라마 《트롤리》를 클릭한 건 연이은 우연일까.

우리 국민 대다수는 노동자다. 노동절을 여전히 근로자의 날로 불러야 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노조는 어떤 의미일까. 사회적 계층 이익에 부합하지 못하는 투표 행위만큼 아이러니한 극소수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발언에 호응하는 국민(?)을 등에 업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리벤지 포르노보다 천박한 빈곤 포르노를 시전한다. 유아 성폭력, 리벤지 포르노를 넘어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자극적 기사와 언론의 태도가 뒤섞여 현실에서 정의와 공정은 발 디딜 곳이 없다. 부화뇌동하는 포퓰리즘은 비판과 성찰을 망각한 지 오래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합리적인 태도를 기대하는 건 무리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을 촉구한다. 느리게 변해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곳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구정인은 비밀을 말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비밀이 비밀이 아닌 세상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가해가 반복되는 현실은 정치적 이념과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일까. 세월호, 이태원 참사는 정치와 무관한 사고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일, 우리는 그것을 사고라고 부른다. 다만, 의도하지 않았어도 사고를 방지할 책무, 최선을 다해 그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아랫것들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가 당당하다. 정치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덧씌우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공동체의 편견과 차별이 만들어낸 혐오의 피해는 언제나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몫이다. 『올해의 미숙』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정원의 『뒤늦은 답장』도 넓은 의미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동성애를 다룬 만화로 분류하기 어렵다. 곳곳에서 십자가를 흔들며 고막이 터질 듯 확성기로 소음 폭력을 가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만큼 동성애 반대 구호와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표현에서 ‘여성’의 자리에 대체될 말은 끝이 없다.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단지 노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단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매일매일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가히 블록버스터급 거침없는 혐오 발언과 권력 남용, 기득권 보호, 부자 감세, 노조 파괴 등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불공정과 불평등과 비민주로 가득하다. 그래픽 노블은 이렇게 참혹한 현실을 생생한 그림과 침묵의 시간을 통해 ‘보여준다.’ 말하지 않아도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정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만화는 미디어 시대에 부합하는 매체다. 텍스트의 종언을 논해야 할 만큼 읽지 않는 시대다. 보다 다양한 주제와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작업들이 계속되길 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 것처럼, 비밀을 말할 시간을 놓치거나 답장이 늦어지면 비극과 고통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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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타자윤리학
김연숙 지음 / 인간사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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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통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선, 빛, 능동성, 형상, 완전성 등에 긍정적 시선을 보냈다. 반대 항에 놓인 감성, 악, 어둠, 수동성, 질료, 불완전성 등은 지양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패러다임도 주체/객체, 이성/감성, 정신/물질의 이분법은 지속된다. 고대의 존재론적 이분법이나 최근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이분법은 이성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플라톤에게 감성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몸은 영혼의 감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이성에 의한 조정과 통제의 대상으로 평가했다. 현대인은 이러한 사유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기술 중심의 교육체계는 물론 인문, 사회 분야도 ‘과학’을 붙여야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신 중심 사회에서 이성 중심 사회로의 이동은 인류를 이성적 존재로 거듭나게 했으며 야만에서 문명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숱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윤리학에 치명적 약점을 초래했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반기를 든다.

“감성의 주체를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감성의 윤리학, 타인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타자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김연숙의 평가는 이 시대의 윤리학을 다시 점검하게 한다.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무식해서 용감한 누구 말마따나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 대개 윤리학은 비대칭을 전제되기 때문이다. 타자의 불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있어 인간의 몸과 감성 측면에 주목한 레비나스는 몸적 존재로서 타인의 호소와 요청에 노출된 존재론적 자아의 윤리에 대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연숙은 사르트르의 적대적 타인관을 비판하며 “도덕성(la conscience morale)은 이성적인 의지나 이성적인 자유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고 이웃을 환대하는 태도, 이웃의 삶을 나의 삶보다 더 중시하면서 이웃을 환대(hospitalité)하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자유를 자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 du l'autre)에 정향되어져야만 한다.”라고 정리한다. 타자의 타자성에 정향되지 않는 도덕적 자유는 심하게 말하면 현대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에 해당한다. 기울어진 저울에 균형점은 수학적 평균일 수 없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윤리학은 정치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공동체가 유지되는 도덕 규범조차 뿌리채 흔든다. 아니, 타자윤리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타자는 타인과 다르다.

타자―

(외재성)

환경적 물질의 세계

대상화 가능, 자기화의 영역―향유의 관계

타인

열망과 초월의 대상―형이상학적‧윤리적 관계.

자아 안으로 동일시할 수 없는 무한성을 내포함

열망과 초월의 대상이지만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남

기후, 환경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며 인구 80억 시대를 열었다. 주기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 팬데믹과 그 후유증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위협으로 작용한다. 정치인들의 부작위는 범죄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침묵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실정법을 위반하는 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구체적인 호명, 수많은 비명과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무능이야말로 이 시대의 패륜이다.

욕구와 고통은 완화될 수 없고 만족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열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욕구를 인간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자아 혹은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다. 가족 이기주의 너머에 놓인 불행을 외면하는 자아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초월’이라고 했다. 형이상학적 타자성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월에로의 이행,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에로 향해가는 움직임, 이행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초월의 운동이야말로 형이상학적 관계, 윤리적 관계라고 말한다. 너와 나의 배타적 친밀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 도덕적 책임은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이 같은 점에서 레비나스는 “제대로 질서 잡힌 정의는 타자와 더불어 시작한다(la justice bien ordonnée commence par autrui)”라 말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넘어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동양 윤리와 닿는 면이 많다.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레비나스 선집’(전6권)이 나오기 17년 전인 2001년에 출간된 책이다. 연구자의 꼼꼼한 해설과 원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대 철학적 사유, 서양 철학과의 비교 등 공시적, 통시적 측면에서 레비나의 사상과 타자윤리학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간과한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모든 철학적 사유와 사회학의 논의가 그러하듯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언제나 그것이 궁금하다.

타자윤리에서 열망은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존재의 타자를 대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젖히고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초월은 자아의 열림, 개시,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주고 타자를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문,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초월적 열망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충만한 관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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