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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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강력해서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상대방의 관심과 무관하게 쏟아내는 자기 고백은 감정의 배설에 가깝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귀에 대고 들어야 하는 친구의 연애사 혹은 친정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욕망이 비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관계 양상과 성향에 따라 이야기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주변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주변에 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일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개인차의 비극이다. 4가지 유형의 혈액형으로 80억 명을 분류하는 오류보다 조금 나은 방법이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 테스트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관계의 기본은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눈이 아니라 귀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놀랍게도 이사야 벌린은 인류를 단 2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를 소환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은 흑백 논리의 전형이다. 당신은 여우인가, 고슴도치인가. 마치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 전짓불의 공포에 짓눌린 박준과 같은 질문이다. 질문자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느 편인지에 대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질문을 가장한 억압과 강제는 박준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론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를 둘 중 하나로 분류하고 이를 논증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슴도치 혹은 여우로 나눌 수 없다. 마치 붉게 물든 석양의 하늘처럼 모든 인간은 농도의 차이만 확인할 수 있는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 있다.

일원론자인 고슴도치형은 지식인과 예술가 성향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을 고슴도치형이라 한다. 여우형은 다원론자로 푸슈킨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로 모순되더라도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거대한 서평을 이렇게 다채로운 해석과 분석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사야 벌린은 작가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꼼꼼하게 살핀다. 그래서 결론은? 톨스토이는 고슴도치인가, 여우인가. 그게 중요한가?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로 삶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해서 핍진성이 부족한 소설이 주는 재미와 장르 소설이 가진 허구와 상상의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인간과 생의 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비평과 해석의 필요하기도 하다. 가벼운 분량이지만 결코 만만찮은 톨스토이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톨스토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가 읽는 모든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읽고 쓰는 행위는 저마다 다른 의미다.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 독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뜬 사람 등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자기 삶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모든 읽기는 쓰기를 위한 전제이고, 모든 쓰기는 읽기가 바탕이 된 자기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 타인과 세상의 소리를 경청할 수 없고 자신의 망막에 투영된 세계가 전부라고 믿을 수도 있다. 쉼 없는 의심과 질문이 자기 성찰과 내일의 변화를 위한 성장을 이끈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거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말의 무게는 때때로 감정에 휘둘린다. 논리적 근거보다 중요한 게 태도이며, 합리적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는 게 인간이 지닌 한계라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톨스토이는 고슴도치 같은 여우가 여우 같은 고슴도치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게 아닐까.

톨스토이의 현실 감각은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통렬해서, 뛰어난 두뇌로 세상을 잘게 쪼개 얻어낸 단위들에서 재조립해낸 어떤 도덕적 이상과도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데 평생 동안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지독히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자기 증오에 시달렸고, 박식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심했으며, 냉정하면서도 넘치도록 열정적이었고, 남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비하가 심했으며, 심한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초연했고, 가족과 헌신적인 추종자들에서 사랑받고 온 문명 세계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거의 언제나 홀로였던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초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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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더 갤러리 101 2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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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 정리한 이진숙의 101 두 번째 책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에는 34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다. 산업혁명과 공화정이 자리를 잡는 혼돈의 카오스를 기억하는 일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는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었고 야만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 폭풍 전야 같은 시대가 아니었을까. 예술은 언제나 대중들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시대의 부름에 호응하기도 하고 부와 권력에 기생하기도 했으며 예술가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중의 관심과 호응, 찬사와 인정이 없었다면 대개의 예술은 존재 가치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개인의 발견과 ‘좋은 삶’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시대의 미술은 신분 사회가 무너지고 개인을 바라보는 안목과 태도 자체에 균열이 시작되었음을 예감했다. 그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림에 대한 서로 다른 논쟁, 이전 시대 예술에 대한 저항, 화가의 개성과 성취를 드러내려는 노력, 시대를 반영하려는 열망이 혼재되어 풍성하고 다양한 그림이 쏟아진다. 바르비종, 인상주의, 아르누보,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등 형식 실험이 이어지고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은 그 시기를 단축하며 무지개처럼 고유한 빛깔을 드러내는 화가들이 등장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좋은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 인해 근대는 더욱 더 자기 삶에 대한 성찰하고 시대를 인식하는 개인이 탄생한다. 근대사회는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individual의 시대였다. 시민혁명과 초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성은 개인의 고독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자유롭지만 고독한 존재의 탄생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불안이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정해야 하는 막막한 개인들의 좌충우돌이 시작됐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부여받았으나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찾는 대신 각자도생과 생존 전략에 급급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힘들다. 그대도 우리는 ‘좋은 삶’을 위해 고민하며 주변을 살피고(사회), 과거를 돌아보며(역사), 삶의 태도와 방법을(철학) 묻는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위로를 받고(예술), 밥벌이의 지겨움을 호소하며(경제), 현실 밖의 세상에서 머문다.(문학)

19세기 말 예술가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 고독과 불안이라는 낯선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어나는 순간 삶의 길이 정해져 있던 시대는 행복했을까. 아니 자유에 매겨진 세금처럼 지불해야 하는 대가치고는 ‘개인’이 감당해야할 책임이 너무 크다. 사회적 계층 구조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도 개인의 몫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이니 너의 선택일 뿐이라는 말도 무책임하고, 성공하지 못한 삶은 오직 너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억울하다. 불과 200여 년 동안 인류는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매우 더딘 속도로 적응하거나 낙오하거나 과거로 회귀하며 파편화된 개인들의 시대가 펼쳐졌다.

벨 에포크 시대의 에곤 실레는 비극적 죽음으로 예술가로서의 삶을 완성했다. 그러나 영원한 아이가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에곤 실레를 떠나보내고 전쟁터로 떠나 스물 셋의 나이에 죽음을 맞은 발리의 극적인 삶이 더 예술을 닮았다. 현실 자체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기 시작한 것도 근대 이후가 아닐까 싶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다. 유파와 시대를 넘나들며 예술을 주도했던 화가들과 나름의 빛깔과 향기로 빛나는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는 동안 세기말의 우울, 격변기의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계가 사라진 시대의 막막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테 바브리엘 로세티의 <페르세포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일리야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쇠라, 세잔, 뭉크, 고흐, 딕스, 말레비치, 몬드리안... 그림으로 살펴보는 인류의 역사는 빅히스토리처럼 문학과 사회는 물론 철학, 문화,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 오늘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진숙은 그 씨줄과 날줄을 정교하게 직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데는 단편적인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사유의 힘이야말로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지름길이다. 저자의 노고와 성실함이 빚어낸 그림 이야기는 매우 훌륭한 책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개인’의 등장은 곧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의 등장을 의미했다. 개인은 스스로 존재 의미를 찾아 욕망의 시험대 위에 오르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세상에 부유하다 파멸한다. 그 과정에서 로댕식의 ‘욕망’, 뭉크식의 ‘불안’ 그리고 브루벨식의 ‘절망’을 주제로 한 예술이 탄생했다. - 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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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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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선수 김가영과 평론가 김나영은 자매일까?” 이런 말 같잖은 농담을 던져도 술자리라면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물론 농담은 맥락이니 뜬금포를 쏘아 올려 시베리아 벌판이 되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허용적 분위기에서 이완된 사람들은 주변에 실존 인물 다영이와 라영이를 호출하고 대한이와 민국이 형제를 등장시킨다. 믿기 어려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가 이어지기도 한다. 다음날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농담 혹은 웃음들. 술과 농담은 아마 뗄 수 없는 친구가 아닐까 싶다. 잠시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위로하는게 민족의 특성이라는 말은 믿지 않지만 유쾌한 만남을 위해 농담은 생각보다 긴장을 이완시키고 관계를 진전시키기도 한다. 물론, 귀갓길의 허무와 숙취는 각자의 몫이다.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술과 농담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해가 저물 때만 술을 마시는 건 아니다. 이 책에도 숱한 낮술과 새벽의 혼술이 등장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특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술과 농담 이야기에 옷깃을 여밀 필요는 없다. 에세이는 대체로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글 자체의 여운이 관건이다. 편혜영과 조해진과 이장욱의 소설을 읽었으니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고, 건조한 문체로 뛰어난 농담을 선보인 한유주의 소설을 읽어싶어졌다. ‘연애와 술’, ‘농담자 그림자’ 대신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 ‘술과 농담’을 집어 든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가끔은 의미보다 재미를 찾는 독서가 위로를 건넨다. 술과 농담을 주제로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의 글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같은 에세이다. 유일한 평론가의 글이 재미없고 유일한 남자 소설가의 글이 너무 진지한 점을 제외하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재밌는 에세이다. 술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술취한 원숭이』, 『양주 이야기』, 『알코올과 작가들』, 『어느 애주가의 고백』도 권할 만하다.

위대한 조상이 있느냐는 한유주의 질문에 아버지가 “한니발”이라 답한다. 로마 한씨냐고 묻자 카르타고 한씨 아니겠냐고 답하는 부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러웠다. 때로는 관계를 망치지만 대개 농담은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개그 코드가 맞는 연인이나 부부는 성격 차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코드가 맞는 부모 자식 사이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듯싶다. 발베니 21년산을 단 한 번 단 한 잔 마신 적이 있는데 그대로 죽고 싶었다는 한유주는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라고 눙친다. 한유주와 발베니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동주, 과일주, 인삼주도 아니고 한유주라니 이름부터 술을 부르지 않는가.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는 이장욱의 마무리는 사람들에게 술이 주는 의미와 숱한 에피소드, 알콜 의존과 중독, 질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을 들여다보게 한다. 술 한 잔 마시지 않는 사람과 모든 음식이 안주인 사람 모두에게 술과 농담은 생각보다 가깝고 어렵다. 술이 농담을 부르기도 하고 농담이 술로 이어지기도 한다. 술이 없으면 농담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 없는 술자리도 많다. 둘 사이가 어찌됐든 각자의 삶에 술과 농담은 무엇인지 낄낄거리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편혜영의 말대로 “술이 불어넣은 준 용기와 허세, 객기와 수줍음, 그대 발생한 우정”을 기억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말 없는 술잔, 농담 없는 술자리에 오가는 훨씬 더 깊은 대화도 있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광고처럼 술에게 먹히지만 않는다면, 아니 때로는 떡이 된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었고, 그조차 망설여지는 무심함과 못난 마음이 더 커지는 시간도 흘러갈 뿐이다.

어떤 무심함은 세월이 흘러서, 라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서운함이나 아픔에 눈멀게 하는, 늘 너무 비대한 못난 마음 때문에 결국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 조해진,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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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의 순간들 더 갤러리 101 1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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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에 내재 돼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감수성은 저절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원석에 감춰진 보석처럼 갈고 닦아야 빛이 난다. 예술사, 즉 예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방법이 작품을 이해하는 초석이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감각적 행위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겪는 역사적 경험과 철학이 스며들어 인류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권했으나 어느 시대에도 기존 방식을 답습하라고 권한 예술가가 있었을까. 때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재현하려 노력했고 때로는 보편적 미의 원칙을 거부하며 이성보다는 감성과 비합리적 세계를 추구하기도 했다. 예술은 현실 너머 세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인간의 문제를 넘어설 수는 없지 않은가.

신의 세계를 갈망했던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가 열렸다. 그림자와 원근법으로 무장하며 인본주의humanism는 지금-여기의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 신과 귀족을 넘어 신흥 부르주아, 광대까지 제3신분으로 대상이 확대되며 미술은 민중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그림이 미술관에 박제된 건 근대 이후의 일이지만 보편성을 획득하며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된 건 이중 혁명 시대의 열매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태동하며 근대사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를 이중혁명의 시대라고 명명한 건 에릭 홉스봄이다. 그가 지적한 대로 이중 혁명을 거쳐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의 틀은 겨우 200년여 년 동안 확립됐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현대인은 고대와 중세, 근대라는 시간을 통과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미래는 뭐라 부를지 알 수 없으나 미술사의 한 시기가 아니라 사적 발전 과정으로서 오늘이 궁금하다. 아니,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지가 우려될 뿐이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출간한 ‘라루스 미술사-이해와 인식’ 7권(중세미술~현대미술)이 번역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다. 서가 한쪽에 꽂혀 있는 이 라루스 백과사전이 내겐 마중물이 됐다. 본격적으로 예술에 관심과 재미를 갖게 된 건 그림 자체가 지닌 미적 요소보다 도상학에 반영된 시대 정신과 인문학적 지식이었다. 물론 화가의 일생, 세속적 욕망, 정치적 목적이 혼재된 배경지식만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 감응하는 인간의 본능이 필요조건이라면 미술사에 대한 이해와 인문학적 소양은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미술 읽어주는 여자’를 자처한 한젬마부터 이주헌의 저작들, 최근의 인기 도슨트의 책까지 미술 대중화에 힘쓴 혹은 상업적 이용에 활용한 사람들의 공과를 논할 생각은 없다. 각자 나름의 자리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역할을 해왔을 테니까. 그래서 감상이 곁들여진 주관적 그림 해설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미학과 철학, 역사 공부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림을 이해하는 비법 같은 건 애초에 없다. 특강 몇 번으로 예술에 다가가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르네상스부터 낭만주의까지)은 화가와 관객과의 거리 조절에 성공했다. 내 말만 들으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림을 이렇게 봐야 한다는 가르치지 않는다. 달콤한 감상과 현란한 수식으로 상찬하지도 않고 개인적 소회를 버무려 현실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 그림의 탄생 배경과 시대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할 뿐이다. 글쓴이의 감상은 절제되어 있어 차분하고 지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그렇게 깊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바탕을 둔 적확한 해설이 탁월하다. 호들갑스럽지 않으면서도 애정 어린 텍스트가 그림 앞으로 한발 다가서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 책에는 33명의 화가를 소개한다. 전부 101명을 기획해서, 라파엘 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 다룬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에는 67명까지 소개했다. 이 시리즈를 찬찬히 읽고 나면 어떤 전시를 둘러봐도 기본적인 소양과 미술사에 대한 이해로는 충분해 보인다. 저자는 단순히 그림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 역사, 철학, 사회와 상호작용까지 들여다본다.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사이 사이의 관계를 매끄럽게 연결하고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책은 현란한 말솜씨와 다른 텍스트의 깊이를 담보해야 하는 일이다.

혹시 주변에서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혹은 예술 전반에 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난해하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부담스럽다. 대개 그림 에세이들은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있고, 해설서들은 단편적 지식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진숙의 글은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적절한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고 있다. 적당한 거리두기는 코로나 시대의 방역지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인 권리를 줌으로써 두 번째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위고는 말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탐구해온 ‘인간다움’의 여정이 중요한 한 순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문학,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열렬히 탐구한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주제는 ‘인간’이었다. -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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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하여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인생의 다른 이름
베벌리 클락 지음, 서미나 옮김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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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좌절과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매일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뗄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인생은 마치 제로섬 게임 같아서 어느 쪽에 몰입하면 다른 부분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양손에 떡을 움켜쥐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 어렵다. 잃어야 얻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삶의 지혜를 몰라서 지옥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능력이 있고,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실제가 달라 온몸과 마음으로 겪어보지 않는 감정은 혼란스럽다. 거울에 비치는 사물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남의 일같이 보이던 실패와 상실은 어느새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익숙함은 실패한 사랑의 주연이 되기 쉽다. 실패를 통해 시행착오의 교훈을 얻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대개 인간은 귀인이론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과관계가 없는 대상이나 원인을 지목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고 상황을 외면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정신승리를 택한다. 상처는 쉽게 아물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우리에겐 리셋 버튼이 없다. 초기화 기능 없는 인간에게 실패와 상실은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라는 데, 베벌리 클락은 “상실과 실패의 순간에 우리는 존재의 본질과 마주한다. 이 경험으로 진정 중요한 것에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틸리히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다면 삶의 표면만 건드린 채, 인간의 피상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의 표현은 시적인 느낌마저 든다.”라고 어깨를 다독인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철학적 위로는 달콤한 감정적 격려, 대책 없는 희망, 무기력한 긍정과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패의 본질과 의미뿐만 아니라 실패의 속성과 과정을 살핀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두 번째 기회를 얻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흔히 말하는 회복 탄력성은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 쉽다. 사회 안전망이 견고한 사회에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야 하지 않겠는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공동체의 울타리는 개인이 가진 의지 혹은 신념의 단단한 버팀목이다.

현실적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대체 불가한 성별(여성혐오), 나이(노인 빈곤), 학력(임금 격차), 종교(대체 군복무), 출신(지역 차별) 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빈부 격차(육아, 출산, 수월성 교육, 입시 제도, 사교육비, 대학 서열)는 개인의 노력이나 열정과 무관하지 않은가. 모든 게 다 노무현 탓이라던 한 시대의 비극적 유행어를 뒤집어보면 모든 게 다 정치 탓이라는 은유가 성립한다. 우리는 ‘기득권’을 재해석하는 놀라운 리더를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했다. 여기에 동참하며 호응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밥그릇을 빼앗는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다. 무지는 참담한 현실을 초래하고 무의식적 분노와 감정적 혐오가 불러올 파장은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 공동체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베벌리 클락의 초점은 주로 개인에게 맞춰져 있으나 여성, 죽음, 불안의 문제는 철저하게 삶의 조건들, 즉 공동체의 태도와 환경에 기인한다. 성공에 대한 욕망,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우선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중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좋을 삶을 실현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좋은 삶은 철저한 경쟁과 승자독식 자본주의다. 시장에게 자유를 허하라는 말에 동조하는 90퍼센트 가난한 국민들의 태도가 놀라운 건 무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10퍼센트가 될 수 있다는 욕망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가학적 시장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이미 시장이 정치를 지배한 지 오래지만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없는 한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자의 조언은 이념과 무관하지 않은가.

좋은 삶의 대척점에 놓인 경고는 ‘삶의 모든 영역에 시장원리가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이 오로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진다. 저자는 좋은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다. 타인과 세계와 연결된 삶을 위해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실이 생긴다. 삶을 쉽게 통과할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는 이 책의 미덕은 멈출 때 삶이 공간이 생기고, 지금-여기에서 열정을 다하며, 걷는 행위를 통해 다르게 사는 법을 익히라는 충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상실이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과 동행이라는 조언이다.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 좋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가 새로운 관점의 출발이다. 실패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감정적 태도를 버려야 다른 삶, 보다 좋은 삶을 위한 고민이 시작되리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에서 아무도 실패와 상실을 피하지는 못한다. 우주는 우연과 변화, 성과 쇠, 성장과 부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인간은 이것의 일부다. 삶은 필연적으로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오르막과 내리막,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담고 있다. -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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