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을까? - 부모와의 애착으로 바라본 하나님
김미선 지음 / 두란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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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미지에

각자 부모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우리 교회의 한 청년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일수록 하나님께 구하지 못합니다. 염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어째서 유독 구하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임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해 나누며, 청년이 기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이 부모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이미지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을까?>는 내 마음속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부모와의 애착이 그 사람의 정체성, 타인과의 유대감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애착 이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나 형제, 선생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감정이 쌓여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첫 애착 대상이었던 주 양육자와의 관계 경험 가운데 반복되었던 정서적 느낌이 하나님의 이미지에 담겨 있다"(122)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모와의 경험에 따라 하나님의 이미지가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의 이미지는 심리적 잠재로 남아 개인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129-130)는 것입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과제는 이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인간관계에 변화가 없어 고민한다면 그동안 외면해 온 '내 마음속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 교리나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gut feeling)에 자리한 하나님과 마주해야 한다"(11).

 

                       

"하나님의 이미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떤 상징도 하나님의 이미지와 연결되지 않았다(37).

이 책은 총 다섯 명이 청년들이 집단상담에 참여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마주하며 그것이 각자의 마음 안에 어떤 하나님을 만들어냈는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나홀로', '유인정', '블랙혹', '주사랑', '길수정'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다섯 명의 청년들은, 애착 이론에서 각각 회피형(무시형), 집착형(불안형), 혼란형(두려움형), 안정형, 획득된 안정형으로 분류되는 유형의 모델입니다. 소설 형식이지만, 독자들도 직접 이 집단상담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생생합니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애착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블랙홀'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청년이 그린 하나님의 이미지입니다. '블랙홀'은 애착 이론에서 '혼란형(두려움형)'을 설명해주는 모델입니다. 블랙홀은 도화지 위에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그려보라는 요구 앞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잘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가 애써 떠올린 하나님의 이미지는 '나를 안고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만일 이 책을 읽지 않고, 누군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이렇게 표현한

그림을 봤다면,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 형체조차 그리지 못한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부모와 감정적 교류를 나눠 보지 못한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일이 어려웠을 것이다"(40)라는 설명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블랙홀의 그림은 하나님과의 따뜻한 교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보호에 대한 갈망, 자신의 정서적 허기를 투사한 '소망'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부모와의 관계성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이미지 안에 투영되어 있는 부모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면, 어쩌면 이런 절망에 감싸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부모와의 관계성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을까?>는 오히려 '진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부모와의 부정적 경험이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한다는 것"(166), 그리고 "부모와의 불안정한 애착이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의 전환점이 될 수"(14) 있음을 확신합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청년들을 어떻게 도와할지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회피형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어렵다"(135)는 것과, 혼란형의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보다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맹종하려고 한다"(147)는 것, 그리고 "인생의 행복을 제시하며 지나친 친절을 베풀면서 다가오는 이단에 쉽게 빠지는 이유"(148) 등을 배울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중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됩니다.

부모와 분리된

온전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실제로 목회현장에서 보면,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깊은 친구들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을까?>는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닌, '진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내 안에 하나님의 이미지가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합니다. 오랫동안, 어째서 우리는 예배 가운데 있고, 말씀(진리)을 들으면서도,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을까?>와 같은 책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성령의 조명하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안에 어떤 상처가 영적인 걸림돌이 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은 치유로 나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에 서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주는 '진리'가 있고, 무엇보다 가장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공감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토록 허기지게 찾아헤매던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발견할 수 있고, 내 마음을 알아주고 만져주며 지혜로운 조언을 해줄 최고의 상담사(보혜사 성령님)가 계시니, 애착 이론에서 말하는 '획득형 안전형'을 누릴 수 있는 요소들을 우리는 이미 완벽하게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책은 특별히 교회의 모든 청년들에게 우선적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섯 청년들과 함께 집단상담에 참여하며, '너는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맹목 영역', 그리고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숨겨진 영역',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미지 영역'을 좁혀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무의식의 상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건강하고 자유로운 관계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도움은 충분히 받을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내가 '안정형'의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도 큰 유익이 되리라 믿습니다. '나'와 '너'를 이해하기 위하여, 청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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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 차이를 품되 구별되어 세상을 섬기다
팀 켈러.존 이나주 외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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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언제나 길을 찾는다(66).

위기청소년사역에 뜻을 모은 우리 공동체는, 청소년전문상담센터에서 실시하는 특별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학교에서 소위 문제 학생으로 낙인 찍한 아이들을 위한 특별교육이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 2시간 안에 '제대로 돌봄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도울 수 있는가'였습니다. 복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도, 아이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고전적이지만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세족식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특별히 종의 자세를 취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발을 씻기기에 앞서 발뒷꿈치를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이마를 완전히 땅에 닿게 하고 엎드렸습니다. 흡연, 학교 폭력 등의 이유로 특별 교육을 받으러 온 아이들은, 몹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들이 발을 씻기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섬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눈물을 삼키는 아이들은 세족식이 끝난 후, 섬김이들을 향해 큰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 학생들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어른들의 변화였습니다. 침을 뱉고, 꽁초를 버리고, 욕설을 내뱉는 아이들을 향해 혀를 차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어른들이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도 사랑이 필요하다고요.

이 책의 중심 질문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적 확신을 유지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13)

이 책의 던지는 질문은, 간결한 해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겸손, 인내, 관용', '겸손, 소망, 사랑, 용기', '존중, 겸손, 신뢰성, 사랑'과 같은 답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이 던지는 질문은, 해답보다 그 목표한 지점에 이르는 '과정'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일종의 처방을 나열하기보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19). 신학자, 목회자, 모험가, 기업가, 작가, 송라이터, 스토리텔레, 번역자, 다리 놓는 사람, 의료인, 화해자, 평화를 이루는 자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적 확신을 유지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들려줍니다.

이 책은, 구원(진리)은 배타적이지만 공동체를 형성함은 포용적이어야 하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거꾸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회개를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자기 신념'을 '좋은 믿음'으로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물으며, 그 출발선(부르심)에 우리를 다시 데려다 세워 놓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에 참여하되,

숨 막히는 불안이 아니라

확신에 찬 소망을 가지고 참여하라는 부름이다(22).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은 저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다가옵니다. 소금이 제 맛을 내려면 기꺼이 자기를 녹여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나아가, "소금을 거름으로 보는 시각"(112)을 더하고 요청합니다. "소금을 거름으로 보는 이런 이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것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곳으로 가서 새생명이 자라도록 도우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적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113).

그런데 이 부르심이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합니다. 다원주의의 현실 속에서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지 이미 조금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일은, 내가 기꺼이 내민 손을 미워하고, 거부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야 가능한 일임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제게 이 책은 움츠러들지 말고, 확신에 찬 소망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담을 허물고 차이를 뛰어넘는 예수님을 따라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일은 위험해보입니다. 그것을 실행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주님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이었나를 깨달으며 놀라고 또 놀라고 맙니다. 교회는 거룩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완전히 뒤집어 엎고, 죄는 나와 너 사이가 아니라 내 속을 관통하고 있다는 겸손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용기가 필요해보입니다. 그리고 참 용기는 참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웠습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눅 19:7, 새번역).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을 때

사람들은 불평하며 위협적으로 굴었지만

예수님은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사도 요한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요 4:9),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죽으셨다(눅 23:43).

우리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에 힘입어

차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기를 힘쓴다.

-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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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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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죽는다는 걸 알면 우린 마지막 몇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아무것도 몰랐던 애니는 결혼식을 하면서 보냈다(11).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천국의 실재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고민을 갖게 된 것은 몇 년 전, 영혼의 단짝이었던 강아지를 잃고부터입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재회'니까요. 그때부터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생하게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는 그동안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과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나를 놀랍게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풍성함이 얼마나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삶에 빛을 가져다주는지도요!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저자 미치 앨봄의 신작 소설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인생책으로 꼽고 있기에, 미치 앨봄의 신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급'의 감동과 전율을 다시 느끼며, 또다른 인생책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신부 '애니'가 불의의 사고로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젋었기에 인생의 끝도, 천국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애니! 그녀 앞에 느닷없이 펼쳐진 천국은, 천국이라지만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사랑하는 '파울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단꿈에 젖어 이제 막 결혼한 신부에게, 신랑이 없는 천국이라니요!

천국에 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애니를 보니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기억은 안은 채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대신 애니는 그 기억을 안은 채, 천국에서 다섯 사람을 만납니다. 다들 천국에 오면 지상에서 관계있던 다섯 사람을 만나는데, 애니는 그 다섯 사람을 만나게 된 이유를 차례로 알아가며 진정한 '천국'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구원이 일어나는 거란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바른 일을 할 문을 열어주지(210).

 

천국이 그녀에게 준 선물은 인생 전체가 실수투성이었던 애니가 자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처음 만난 다섯 인연을 통해 그들의 천국과 애니의 천국이 교차하며, 애니 삶에 숨어 있던 의미들이 상처를 뚫고, 눈물을 뚫고, 마움을 뚫고, 후회를 뚫고, 실수를 뚫고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내가 저지른 최악의 짓거리'가 누군가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구원이었다는 것을, 천국이 말해준 것이지요.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일부이거나 또는 전부가 되어 이어져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렇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된 우주 속에서는 '해 놓은 일 없는 하찮은 존재' 같은 인생은 없다는 것을, 천국이 말해주니까요.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는 독서치유 프로그램에서 필독서로 읽힐 만한 책입니다. 이보다 더 치유력이 강한 소설을 찾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고통으로 얼룩진 생이었다고 해도, 후회만 남는다 해도, 비루한 삶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 하다고, 천국이 약속해주니까요. 한줄 평을 하라면 '살림'(출판사)에서 만든 '살리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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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저스틴 테일러 지음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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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수의 마지막 날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는 지상에서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인물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한 주간 동안에 말하고 행한 것에 대하여 증인들의 설명을 읽게 될 것이다"(16).

기독교의 예배와 기도가 다른 신들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찾은 답은 기독교 신앙은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지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찾고 찾아보라고, 그리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진리로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앎이 수반된 예배를 돕는 것"(26)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역사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시는 '예수'라는 한 인물의 마지막 일주일 간의 삶을 재구성합니다. 그의 그 마지막 일주일이 '모든 것', 정말이지 '모든 것'을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종료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예수가 행하고 말한 것 가운데, 무엇이 그의 죽음을 촉발하였는지 그 긴박했던 순간들을 긴장감 있게 추적합니다. 보통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교회력으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기점으로 많이 이야기되어지고 집중하여 묵상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고난주난이 아닌 날에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집중해서 따라가보는 재미도 신선했고, 무엇보다 한 사건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교차하여 들으며 비교해볼 수 있는 것도 무척 유익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이 각각 어떻게 조금씩 다르게 증언하고 있는지 이 책만큼 사실감 있게 보여주는 책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원수의 승리로 보였던 그 비극적인 순간이 사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원수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도 조롱했지만,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못했으리라"는 심오한 아이러니(192)를 스스로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전율했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어쩌면 역사상 가장 많이 연구되고, 가장 큰 주목을 받아온 날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알고 있었던 성경 지식들도 다시 확인하고, 또 묵상 가운데 새롭게 환기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위한 많은 자료가 있지만, 이 책만큼 탁월한 자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예수의 생애 끝에서 몸에 걸친 의복이 그의 세속적 소유의 전부였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그의 삶은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는 자손을 남기지 않았고, 다른 소유나 재물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자기를 대단하게 만드는 면에서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삶, 사역, 메시지, 죽음, 그리고 부활은 문자 그대로 세상 역사의 길을 바꾸었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는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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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 - 하나님의 선은 어떻게 인간 공동체에 구현되는가
천종호 지음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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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당신의 외아들과 인류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가정하자. 치사율이 높은 병인데, 한 사람분의 약밖에 없다. 한 사람의 치료제만 손에 들고 있는 당신, 외동아들과 아인슈타인이 서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12장. 정당한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中에서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은 이에 대해 우리가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외동아들에게 투약한다면 이것은 정의관에서 공동체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인슈타인에게 투약한다고 하면, 정의관 중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동전을 던져 제비를 뽑아 투약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가치가 동등하므로 누구에게 투약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되고, 이는 정의관 중 자유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169).

이 책은 현직 판사의 시선으로 우리 삶과 법 집행의 영역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해보는 책입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에피소드 중심이 아님에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잘 읽힌다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학부 교양수업에서 다루어질 만한 개념적 지식들이 쏙쏙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인데도 (심지어 법과 관련된 내용들이) 재미있게 잘 읽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또 하나 유익했던 것은, 이 책을 읽고 나니 각종 매체를 통해 보도 되는 사회 문제의 '숨은 쟁점'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개인으로 조각조각 나면서 모두가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의 문제가 '좋은 삶'의 문제라면, 정의의 문제는 '옳은 삶', 드워킨의 표현대로라면 '잘 살기'의 문제일 것이다"(105).

선과 정의, 법의 문제는 결국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선과 정의, 그리고 법은 당연하게 '공동체'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는 선과 정의와 법은 '공동체를 위한 선'(1부), '공동체를 위한 정의'(2부), '공동체를 위한 법'(3부)입니다.

천종호 판사님은 선과 정의, 법의 관점에서 잘 산다는 것과 좋은 삶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6). 선이 좋은 삶의 문제라면, 정의의 문제는 옳은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의의 문제, 다시 말해 옳은 삶이란, 인간이 인간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대우받는 삶"(115)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문제는 정당한 자기 몫, 즉 '분배'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인간 삶의 문제라는 것이 한 없이 복잡하면서도 또 생각보다 단순한 원리 속에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깨달아졌습니다.

다시 말해, 선과 정의가 인간다운 삶을 떠받치는 초석이요, 법은 그것을 수호하고 지켜주는 안전장치라고 할 때, 어쩌면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충격적인 시사점은 이것이 아닐까요? "왜 법학에서는 정의와 선에 관한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가?" 천종호 판사님은 법학에서 선과 정의에 관한 논의가 사라져 버렸다고 폭로합니다. "우리 법학계에서는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고, 법 실무계에서도 선과 정의의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특히 헌법 재판에서도 선과 정의를 둘러싼 논의보다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우선되고 있다"(11).

"도덕성의 회복은 선의 회복이고, 선의 회복은 정의로운 신의 귀환이다"(269).

기독교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기독교 변증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가 철학, 윤리학, 정치학, 법학에서 사라질 때, 인간의 삶이 어떤 혼돈에 빠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왜 선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왜 어디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는지, 왜 도덕 윤리가 아니라 도덕 논리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랑의 책무가 정의가 아니라 호의나 자선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며, 그럴 때 어떤 문제가 발생되는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이 책은 진짜 '잘 사는 것'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법(말씀)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 해주며, 우리의 책무가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흔히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데, 왜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는지의 문제도 깊이 숙고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공동체'에 발을 붙이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공동체를 무시한 채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할 수는 없다. 정의는 사랑의 최소한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한이다. 우리 삶은 정의를 무시한 채 사랑으로 비약할 수 없다. 각자에게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희생과 용서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120-121).

좋은 삶, 잘 사는 삶, 품위 있는 삶을 위해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교양수업이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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