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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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남자 어른이 좋은 사람인가가 그렇게 중요해?"(89)

여기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누군가 "선과 악은 너와 나 사이가 아니라, 내 안을 관통한다"는 것과 비슷한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 무리 가운데 선을 그어 좋은 사람은 이쪽에, 나쁜 사람은 저쪽에 서도록 나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은, 누구나 그 사람 안에 좋은 사람의 요소와 나쁜 사람의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의 기준은 내 안을 관통합니다. 운이 좋으면 좋은 사람이 발현될 것이지만, 운이 나쁘면 나쁜 사람의 성정이 나를 집에 삼킬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단순히 사람들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로 가르기 시작할 때, '슬림 할아버지'에 대해 "사람들은 교활하다고 떠들어대기만 하지, 할아버지의 인내심이나 의지력이나 결단력 같은 건" 얘기를 안 하는 것과 같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287). 그러니까 나쁜 사람으로 낙인 찍혀 사는 사람도 어쩌면 우리가 그의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사람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이 소년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 어쩌면 그것 자체가 제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여기'와 '거기'에서의 의미.  '여기'는, 그때 할아버지가 있었던 보고 로드 교도소 제2구역 D9번 방이다. 그리고 '거기'는 할아버지의 머리와 가슴 안에서 팽창하며 무한하게 열리는 우주다(12).

많은 사람이 주체적인 삶을 꿈꾸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환경을 바라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를 갈망하지만,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발악처럼 요즘은 성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선택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지 눈감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던 엘리는 절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환경에 내던져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을 수도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망가진 가족, 범죄로 얼룩진 잔혹한 일상, 혼란과 절망으로 뒤범벅된 '여기'에서 엘리는 좋은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다들 내 인생의 남자 어른들을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로 평가하려고 한다. 나는 세세한 일들로 그들을 평가한다. 추억들로.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른 횟수로(88).

상담학에서는 아무리 큰 혼란과 절망과 우울에 처한 사람도 '의미 타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던 엘리를 지켜보며, 누가 이 소년에게 '의미 있는 타자'가 되어줄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우주를 삼킨 소년>이 주는 가장 가슴 찡한 교훈 중 하나는, 심지어 '망가져' 버린 사람에게서도 의미 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던 엘리가 바로 모두에게 의미 있는 타자가 되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타자는 누구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했던 저와 같은 독자는, 스스로 타인에게 의미 있는 타자가 되어줌으로써 자신 또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주를 삼킨 소년>은 세세한 순간들, 사소해보이는 대화들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포착해내는 즐거움이 있는 책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한 인생을, 이렇게 작고 사소한 순간들까지 세세하게 주목해볼 수 있다면, 죄 없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을지 모르며,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도 누군가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주를 삼킨 소년>과 같은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들었습니다. 잔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 있는 작가로 성장한 어린 '트렌트 돌턴'에게 뜨거운 감동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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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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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34-35).

'삶'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처음 혐오감을 느꼈던 때를 기억합니다. 이제 막 열 일곱살이 되던 해였고,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친구로 인해 '죽음'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동갑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아들이 뇌출혈로 또다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우리 가족에게 등을 돌리는 것 같은 때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는 '사춘기'의 시작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문제 하나에 울고 웃으며 오로지 시험 점수, 내신 성적, 대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구는 친구들의 모습에 실증이 났고, 그래서 그들의 관심사, 그들의 대화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부도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버지의 사업만 망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까지 망하게 만든 것 같았고, 비루한 내 삶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실존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 같고, 내게 실존주의란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세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패배로 결정난 싸움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절대 멈출 수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비춰졌고,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운명에 대한 깊은 애도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중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던 작품은 까뮈의 <이방인>, 그리고 사르트르의 <구토>였고,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이야기는 '시지포스 신화'였습니다.

이 중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는 줄거리도 모르면서, <구토>라는 강렬한 제목에 이끌렸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살기 위해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숨만 쉬는 나'라는 어느 노랫말처럼, 어떤 의욕도 느끼지 못하는 시간 속의 고통, 초라한 내 삶에 대한 거북함, 목표와 꿈을 강요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구토>라는 한 단어로 모두 설명되는 것 같아,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나고, 나는 여기에 있다"(132).

돌이켜 보면, 나를 가장 아찔하게 했던 것은,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며 이게 나구나 하는 인식, 그리고 지금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그 낯설고 서늘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씩 그렇게 도대체 지금 나를 나라고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섬뜩해지곤 했습니다. "나는 토하고 싶었다. 자, 이렇게 된 일이다. 그 이후로 구토는 날 떠나지 않고, 날 꽉 붙잡고 있다"(53).

<구토>를 읽으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것을 나는 아주 천천히 길게, 길게 늘여나간다 …"(234). 존재한다는 느낌, 내가 존재하는 게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모든 것이 무상적이다. 이 공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간혹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되는데, 그러면 속이 뒤집어지고, 저번 저녁에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그랬듯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구토다"(306).

'삶'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혐오를 느꼈을 때, 나의 가장 큰 바람은 완전한 무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나라고 느끼는 이 의식이 완전한 '무'로 흩어져버리는 것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적이고, 그래서 그 무의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완전한 무상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지독한 아이러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무상하여 괴로운 것을, 무상하겠다고 발버둥친 꼴이었습니다.

<구토>를 읽었지만 읽지 않았고,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이 책에 적힌 글자들을 눈에 담았으나, 마음에 뭉근하게 풀어지는 의미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구토>의 더 깊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해설들을 의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이 책이 유명세 만큼 널리 읽히지 못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려웠던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 더구나 창조주가 부재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 책을 이해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우리 실존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중요한 지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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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라는 선물 - 우리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이한 한 몸의 의미
폴 브랜드.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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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따른다지만 우리처럼 변덕스러운 이들에게 그분이 자신의 평판을 맡기셨으니 교회야말로 그분의 가장 위험한 모험이다"(21).

몇 해 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쪼개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오랫동안 대형 교회에 몸 담았다가 이제 막 교회 개척을 시작했던 때라 그 고통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 교회로 세워져 간다는 것, 신앙고백의 터 위에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잠 못드는 밤이 이어졌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이라는 선물>을 읽으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신 하나님의 '뜻'이 얼머나 경이롭고, 기묘하며, 감동적인 이야기인가를 깨닫고 놀라고 놀라는 중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입술을 열어 가르치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 깊은 진리의 표피에도 제대로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한센병(나병) 환자들에게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다. … 치밀한 연구 끝에 얻은 확신이었는데, 이 잔인한 병의 끔찍한 발현(손가락과 발가락의 소실, 실명, 피부 궤양, 안면 기형)이 모두 하나의 원인 곧 무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작디작은 신경세포를 마비시키기 시작해 종국에는 몸 어디에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자멸의 상황까지 치닫는다"(13-14).

<몸이라는 선물>은 평생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 살라는 소명을 받은 폴 브랜드의 의학적 지식과 경험, 그리고 기독교 대표 저술가로 유명한 필립 얀시의 영적 통찰력이 합해진 책입니다. <몸이라는 선물>은 몸의 통각을 잃어 고생하던 이들을 치료해 준 의사의 남다른 삶의 이야기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오묘한 인체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신비를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한때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졌던 필립 얀시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교회(공동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할 수 있겠습니다.

<몸이라는 선물>을 읽으며 하나님께서는 말씀(성경)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계에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새겨놓으셨고, 자연계를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도 하지만, 마치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몸이라는 선물>은 우리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복음임을 놀랍고 아름답게 일깨워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 몸에 가득 새겨놓으셨음을 발견할 때마다 온 몸과 마음과 영혼에 전율이 이는 듯했습니다. 우리 몸의 원리를 이해할수록,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원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음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몸이라는 선물>이 가르쳐주는 인체의 신비, 그리고 교회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몸에는 무언가가 더 필요한데, 그 결정적인 통합의 고리가 바로 고통"(314)이라는 사실입니다. 한센병이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인 이유는 환자가 통각을 잃었기 때문인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이 가져오는 최악의 저주는 위험을 경고하지 못해 자신의 몸을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세포 유기체가 생존하려면 머리가 꼬리가 호소하는 이야기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몸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몸은 가장 약한 부위의 고통을 느끼는데, 몸된 교회가 지체들의 고통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도 한센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몸이라는 선물>이 가르쳐주는 깊은 영적 통찰력 중 하나는, 어떤 공동체든 연합의 기초는 유사성이 아니라 다양성에서 시작되지만, 건강한 교회는 연합이 다양성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이 건강하려면 많은 지체 하나하나가 다 필요하지만, 그 각자는 전체와 맞물려야 비로소 제 기능을 다 하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합류하는 과정이 처음에는 손해처럼 보일 수 있다. 내 자율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과 재물과 재능을 바탕으로 남들과 경쟁해야 했던 옛 가치 체계를 버리고 머리이신 그분께 헌신하면, 역설적으로 내게 갑자기 해방이 찾아온다. 경쟁의식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어떻게든 자신을 입증하려고 경쟁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한 분의 청중 앞에 살아간다는 단일한 목표가 생겨난다. 나아가 몸의 다른 세포들과 협력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88).

<몸이라는 선물>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지으신 놀라운 비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체의 경이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법을 인간의 몸에서 배울 수 있도록 중요한 영적 통찰력을 제공해줍니다. '몸'으로 부대끼는 사랑의 신비, 피로 씻기는 원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드러낼 수 있는지를 신비롭고 아름답게 들려줍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특히 인체를 설계하는 일에 얼마나 고도의 창의력을 발휘하셨는지를 알게 해주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몸, 하나님의 형상을 담는 그릇인 우리 '몸'을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시편 139:14).

의학적 통찰과 영적 깨달음이 이토록 절묘하게 만나는 책을 또 만나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만이 세상 가운데 들려줄 수 있는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몸이라는 선물>은 그 어떤 교회론보다 더 탁월하게 교회의 비밀을 깨닫게 해줍니다. 특히, 교회론을 공부하는 분들,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가진 분들에게 강력하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평생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 부름받은 한 크리스천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아주 감동적인 다큐로 다가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영적 진리들에 생명을 불어넣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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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
알리스터 맥그래스 엮음,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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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고, 3일 후에 다시 사셨다. 이는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죽는다(워치만 니, 297).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믿음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또 그리스도인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들려주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략 2천 년 쯤에 유대라고 좁은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는 한 남자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 가운데 태어나 인간의 죄를 속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셨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할 구세주요,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삶의 모든 근본적인 혼란과 무질서와 어두움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의 생각과 행위와 소망이 달라졌다고 고백하는 '증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모여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이 '예배'는 자신의 전 존재를 다 걸고 드리는 삶의 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예배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사고 방식, 가치 체계, 지식 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요,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는 내용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라는 자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었고, 우리의 구주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종종 이성이 마비된 사람, 바보스럽고 억지스러운 논리에 현혹된 어리석은 사람들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믿음에는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한 빛도 충분하고,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눈멀게 하는 어둠도 충분하다"는 블레즈 파스칼의 말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믿고 싶다고 해서 순순히 믿어지는 내용도 아니며, 또 많은 이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고 사라질 내용도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믿음보다 더 핵심적인 단어는 없다. 얼마나 핵심적인지, 흔히 기독교 자체를 기독교 '신앙'이라고 일컬을 정도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우리 시대에 널리 오해되어 왔다. 사실 하도 오해되어서, 지적 사고를 포기하고('믿음 대 이성') 불확실한 일을 할 때는 생각도 근거도 없이 운에 맡겨야 하는 것('믿음의 도약')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주저하는 이가 많을 정도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본인부터 우리 시대의 많은 이에 이르기까지 사려 깊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49)

솔직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제 자신도 어떻게 내가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이 믿음에 나의 모든 것을 걸게 되었는지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이 믿는 바가 정말로 진리인가에 의구심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책,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 그 신앙의 내용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며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들이 믿고 받아들여야 할 '믿음'의 의미와 치열하게 씨름해온 기독교 신앙의 길고도 지속적인 '역사'의 물줄기를 '개념' 중심적으로 살펴봅니다. 개념 중심적이라는 것은 교리 중심적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교리 자체가 체계적으로 개념을 규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이면서 논쟁적이기도 합니다. 개념을 규정하는 데 치열한 싸움이 있어 왔고, 기독교 신앙의 역사는 그 개념이 계속 위협받는 속에서 발전하며 지켜져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논쟁을 참고하지 않고는 기독교 신앙을 공부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논쟁 속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중요한 기독교 저자들의 사상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줍니다.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는 믿음, 하나님, 예수, 구원, 교회, 기독교의 소망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여섯 주제를 다루며, 우리가 하나님, 즉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고백하게 되었는지, 계시의 빛에 의해 믿음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믿음을 위협하는 쟁점은 무엇이었으며, 또 어떤 쟁점들이 논쟁이 되고 있는지, 신앙인들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은 무엇이며, 그 믿음을 근간으로 어떻게 같은 믿음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신학적이지만 어렵지 않고, 일명 '벽돌책'이라고 할 만큼 두껍지만 지루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앙하는 내용의 그 깊이를 더해주며, '이단', '사이비'를 가늠할 수 있는 신앙의 핵심적이면서도 큰 기준점을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 없는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우려로,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책을) 덮어 놓고 믿지 말고, 열어 놓고 믿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제대로 잘 읽어내기 위해서는 "나는 해가 떴다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이는 내가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해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45)라고 한 루이스의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 자체가 신앙인들에게 일면 바로 그 '해'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역사를 이루어주신 것처럼, 그 하나님께 대한 열망으로 우리도 열심을 내어 이 책을 정독해보자고 믿음의 공동체에 권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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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기 드 모파상 지음, 이형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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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사랑은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여러 번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입씨름이,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을 듯 계속되었다(137).

책상 밑에 숨겨 뒤고 읽었던 그 옛날의 로맨스 시리즈처럼,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세트를 읽을 때는 부모님(?) 몰래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세트는 "작가의 표현력이나 작품성, 예술성은 철저히 외면받은 채, 사회의 풍속과 통념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붙태워지거나 사회적 스탠들에 휘말린 작품들"(출판사 서평 중에서)을 골라 담은 위험한 시리즈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불태워지거나 외설 재판에 휘말릴 만큼 금기시 되었던 이 작품들은, 바로 그 금기시 되었다는 이유로 사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기도 합니다. "음란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수록", "엄청난 해적판을 양산하여 널리 회자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스캔들에 휘말린 여섯 작품 중, 첫 책으로 골라든 책은 바로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입니다. 우리에게는 <목걸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졌으며, 세계 3대 단편소설 작가로 그 명성이 자자한 모빠상이 들려주는 광기와 정염으로 얼룩진 다양한 사랑 이야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지겹도록 넘쳐나는 것이 사랑 이야기라지만, <단편집>으로 엮어서 들려줄 만큼 '불같이 타오르는 광기 어린 욕정'에 대해 들려줄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많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작품을 담은 이 세트 중에서 그나마 그가 가장 덜 선정적이고, 덜 파격적이며, 가장 건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진실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벼락 맞은 가슴처럼 사랑이라는 격렬한 감정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검게 타버려 초토화된 심장을 가졌을 때? 기력과 영혼을 다 바쳐 한 사람에게 충실했을 때? 그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때? 누군가 모빠상에게 진실한 사랑은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여러 번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면,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에서 찾은 모빠상의 대답은 "진실한 사랑은 다 한 번밖에 할 수 없다"일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에서 불같이 타오르는 광기 어린 욕정은 그 사람을 다 태우지 않고는 꺼지는 법이 없으며, 그렇게 타버린 사람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술꾼과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마셔본 자가 마시듯,

사랑해본 사람이 사랑하는 법입니다(138).

사랑을 글로 배우던 시절, 한때 사랑만이 유일한 삶의 동기라고 느껴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습관처럼, 본능처럼, 경험해보지도 못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목말라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지고 싶은 욕망은 늘 그 감정에 예민해지게 만들었고, 쉽게 전율했으나,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욕구로 현실은 삭박했고, 공허했습니다. 그러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지요. 광증을 유발할 정도의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은, 운이 없었다기 보다 어쩌면 내가 사랑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것 봐, 언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남자가 아니고 사랑 그 자체야.

그리고 그날 밤에도, 언니의 진정한 연인은 달빛이었어!(20)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그 욕정은 우리를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랑이면 행복하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지옥불과 같은 격렬한 감정에 삼켜진 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머리카락이라던지, 죽어버린 연인의 시체라든지, 그 집착이 극단적이고 광적일수록 그 사랑은 영웅적으로 변하며, 나중에는 그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 그 자체에 매달리며 스스로 뛰어든 지옥불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에서는 심장에 흥건히 넘치는 초월적 행복감을 맛보게 해주는 사랑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업습니다. 오히려 닿아서는 안 되는 어떤 물건에 접촉한 듯한 혐오감이 느껴지는데, 그 때문에 더욱 그런 감정에 한 번도 휘말려 보지 못한 채 나이 들어버린 삶이 더없이 진부하고 삭막하고 초라하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딱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진실할수록 우리는 '숭고'와 '광기' 사이를 위험하게 오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숭고'와 '광기'는 모두 나의 희생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때로는 그 광기가 나는 물론 상대방까지 삼켜버린다 해도). 나의 행복을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이기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인지,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인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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