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안보윤 외 지음 / 북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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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쉽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기준점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들에 대하여"(너머의 세계, 안보윤, 48-49).

오랫만에 한국 단편 소설을 읽었고, 오랫만에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습니다. 오랫만에 소설을 읽으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소설은 참 정직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소란하고 요란한 세상에서 모두가 목청을 높이면서도 어쩌면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지만,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를 (말없이)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안보윤의 <너머의 세계>였습니다. 마치 요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학교와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사회적 이슈들을 예견한 듯한 이야기입니다. '연수'는 하루 두 차례 열두 곳의 무인점포를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청소 일로 받는 돈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누구와도 부딪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일에 '연수'는 만족했고, 별다른 불만이 없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과 충고를,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으며 마음이 으깨진 탓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연수'가 감당할 수 없어 도망쳤던 일은 학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일이었습니다. '연수'가 일단 휴직계를 내고 도망치듯 학교를 떠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오해로 생긴 '약간의 트러블'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 '오해'에는 지저분한 진실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한모'는 소문이 좋지 않고, 미숙하고 제멋대인 학생이었고, 그래서 이런 저런 일로 '한모'의 부모가 학교에 오는 일은 흔했습니다. '연수'는 한모 어머니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한모가 사람과 거리 조절을 못 하는 게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요. 한모는 스스럼없고 매사 적극적인 성격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기, 상대에게 너무 바짝 붙어 얘길 하거나 얼굴이나 신체를, 들이밀거나 해서 상대방이 불쾌해할 때가 있더라고요. 남학생들은 시비 건다고 느낄 수도 있고…… 실제로 한모가 남학생들과 불화가 좀 있는 편이잖아요.

- 그런 행돌은 그러니까, 여학생들이나 여선생에게는 저기…… 너무 달라붙거나 몸을 흔들거나 하면 상대가 성적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요, 어머님.

- 우리 애가 성추행이라도 한다는 거예요?(53-54)

'한모'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연수'는 '한모' 어머니가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는 대로 이리저리 허정댔습니다. '연수'는 산발을 한 채 쓰러져 '한모' 어머니가 쏟아내는 폭언과 욕설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고, '한모' 어머니는 보름 동안 매일같이 학교에 찾아와, 아들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파렴치한 선생이 자신의 아들을 성범죄자로 몰고 있다고 아무 곳에서나 울고 소리쳤습니다.'한모' 어머니는 '한모'가 저질러왔던 모든 문제들이 '연수'에게서 비롯됐다는 듯이 오로지 '연수'만을 표적으로 삼았고, 사람들은 그저 학교가 조용해지기만을 바랐으므로 '연수'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너머의 세계>를 읽으며 과연 우리 사회에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모'의 문제행동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교사 '연수'도, 아들을 성범죄자로 몰고 있다고 악을 쓰는 '한모 어머니'의 심정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비난의 돌을 집어 던지기 전에, "손쉽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기준점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해 보입니다.

안보윤 작가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문제와 교묘하게 얽히고, 많은 경우 같은 문제가 더 진화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어요"(89). 내가 "원하는" 진실 안에 갇혀버리면, 정의의 이름으로 으깨진 삶을 다시 한 번 더 으깨버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무서움 같습니다. 모든 게 다 괴롭고 피로해 견딜 수가 없는 '연수'와 같이 이 모든 것이 피로하기 그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김병운, 154) 기억하며, 누군가에게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하는 사람이기를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은 SNS 등에 가려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한 실체이고, 사실에 가려져 외면받고 있는 우리 삶의 진실이 여기 있습니다.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사실은 채워지지 않은 허기를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그래서 더 비참하고 불안하고 어리석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진짜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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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미꽃체 손글씨 노트 - 손글씨를 인쇄된 폰트처럼, 개정증보판
최현미 지음 / 시원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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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 강의 1위, 미꽃체

미꽃체 덕분에 손글씨 쓰기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습니다. 미꽃체라는 손글씨를 처음 봤을 때, 이것은 손글씨가 아니라, 예술작품이라는 극찬도 아깝지 않을 만큼 경이롭고, 미꽃체를 알게 된 뒤, 시간만 나면 이면지에 미꽃체를 흉내내보곤 했는데, <NEW 미꽃체 손글씨 노트>가 새로이 발간된 것을 보고(개정증보판)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미꽃체 손글씨 노트와 함께 바로 달려가서 펜부터 준비했습니다. 미꽃체가 첫 번째로 추천하는 펜은 '피그마 마이크론 05'였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 문구점에는 제품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급했는데 미꽃체에서 추천하는 플레티넘 프레피 만년필, 라미 만년필, 컨버터, 모두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미꽃체가 추천하는 펜은 온라인으로 주문하기로 하고, 일단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 0.4'를 사들고 왔습니다.



글씨도 성장할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악필로 고생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좌절하기 전에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악필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교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미꽃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연습하고 또 연습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꽃체'가 탐나고 예쁜 손글씨이긴 하나, 처음 접했을 때는 넘기 어려운 산처럼 보였습니다. 인쇄된 폰트처럼 반듯하게 쓸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꽃체 연습 문장에서도 이야기하듯이 목표를 낮추지 않고 계획을 높여보기로 했습니다. 미꽃체를 '완벽하게' 마스터 하지는 못하더라도, 따라 쓰다 보면 비슷하게 흉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지루하고 더뎌도 기초부터 탄탄하게!

미꽃체를 연습하며,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는 중입니다. 성격이 급한 탓인지 자꾸만 옛습관으로 돌아가는 글씨를 보며 좌절을 거듭하는 중이기도 하고요. '미꽃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격과 비율이 일정하도록 연습하는 것입니다. 손이 그것을 기억하도록 차분하게 써보고, 또 써보는 (지루한 연습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NEW 미꽃체 손글씨 노트>는 이러한 과정이 지루하지 않도록, 생활 속에서 많이 쓰는 유용한 생활 글귀와 인생 명언, 명문장을 써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어설프더라도, 미꽃체를 일주일 정도 연습하니 흘려쓰는 버릇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직은 간격과 비율을 손이 기억하진 못하지만, 머리가 기억하고 있으니 글씨체가 (나름) 반듯해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펜에 따라 글씨가 더 예뻐 보일 수 있으니 연습 중에는 펜을 신중하게 고르는 일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미꽃체를 연습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달라지는 내 손글씨를 보는 즐거움이 있답니다. 어릴 때, 아버지는 글씨가 그 사람의 마음이라고 또박또박 크고 반듯하게 쓰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어서 연습해서 반듯해진 제 손글씨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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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기행 2 -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개정증보판 삼국지 기행 2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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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얻는 것이 최선의 상책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공략하는 방법을 상수로 삼고,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하수로 삼습니다. 심리전이 가장 좋은 전략이고, 군사를 투입하여 싸우는 것이 가장 나쁜 전략입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키실 것입니다"(309).

우리 아버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셨고, 늦은 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수박을 먹을 때나, 등산을 할 때나,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때도 그랬지만, 특히 우리 4남매를 훈육하실 때 아버지는 회초리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삼국지'였습니다. 오빠와 다투는 문제로 가장 많이 야단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형제우애'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면 늘 유비와 관우와 장비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비와 같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지요. 그리고 4남매 중에 둘째로 태어나 위로 치이고, 아래로 치이기 일쑤였던 저에게 '삼국지'는 결국 힘 있고 힘이 센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 다시 말해 마음을 얻는 자가 이긴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책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해설에 의하면, 그 마음을 얻는 비결이 바로 '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환호했던 이야기는 만두를 먹을 때마다 기억나는 인물, 바로 제갈량의 지혜였는데, 제갈량의 '칠종칠금'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니 바람이 빠지는 기분이 들긴 합니다.)

<삼국지 기행>은 '삼국지' 이야기를 들으며, 그 역사적 현장과 유적을 함께 둘러보는 여행입니다. 마치 성지순례를 떠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와 함께 꼭 이 책을 들고 삼국지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현장, 그 풍경 속에서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다른지, 그 현장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간직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 아버지에게 이 책을 선물하니, 아버지는 이렇게 책으로 떠나는 여행도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다며 좋아하십니다.

<삼국지 기행>을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는 사실은, 우리는 그동안 역사는 어떻게 해석되고, 기억되는가만 보았는지, '역사'는 어떻게 도구화되고, 유통되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또다른 의미와 또다른 차원에서 역사에 무지했다는 반성이 생깁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삼국지'(또는 '삼국지연의')를 읽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삼국지를 제대로 읽기 원한다면, 꼭 이 책을 참조하라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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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기행 1 -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개정증보판 삼국지 기행 1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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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지만,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이야기를 섞어 내었다(9).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차이를 이제야 명백하게 알게 된 것이 이 책, <삼국지 기행>을 통해 경험한 가장 큰 충격입니다.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지만,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닌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삼국지'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라고 합니다. '삼국지'는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관련 유적이 있고, 문화 기행이 가능한지 의아했고, 역사인듯, 역사 아닌, 역사 같은 '삼국지'의 정체가 비로소 분명하게 깨달아지니 눈앞에 환해지는 기분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흉노의 선우인 모돈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무제 때까지 조공을 바친 치욕은 조조가 오환을 공격할 때 참수시켰고, 몽골의 칭기즈칸에 멸망한 패배는 몽골 출신의 최고 무장인 여포를 배신자와 패륜아로 낙인 찍어 복수하였다. 또한 한족우월주의에 입각한 소수민족 통치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하여 제갈량의 칠종칠금 고사를 만들었다. 이처럼 소설에서의 복수와 포용을 통해 '땅에는 사방의 경계가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는 중화중심주의 천하관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20-21).

실제 사실의 순서를 바꾸고, 사건의 일부를 다른 사건으로 꾸미고, 동시대에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끼워 맞추거나, 사실이 아닌 이야기도 아주 감동적인 사실처럼 지어냈는데, 소설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실제 역사보다 더 실제 역사처럼 받아들여지고, 날조된 역사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고 유통하는 그들의 방식이 뻔뻔스럽다 못해 무섭기까지 합니다. 과장과 확대와 창작을 통해 재창조된 역사는 민중들에게 재미는 물론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주면서, 동시에 권력자들에게는 민중을 통합하는 강력한 통치 도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삼국지>는 그저 재밌게 보아 넘길 책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삼국지 기행>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꼼꼼한 비교를 통하여, 실제 역사의 무엇을, 어떻게, 왜 재창조하였는지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삼국지 기행>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인기도 많은, 삼국지 영웅들(조조, 유비, 관우, 여포 등)의 '본' 모습을 폭노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이미지가, 어떤 이유로 덧 입혀졌는지를 듣게 될 때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 공부라고 여겼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역사'와 '이야기'가 얼마나 강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 기행>은 다시 읽는 삼국지가 아니라, 새롭게 읽는 삼국지, 바로 읽는 삼국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삼국지 기행>을 읽기 전에는 '삼국지'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해설서보다 '삼국지'를 탁월하게 해설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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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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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17).

<맡겨진 소녀>는 여름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지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일요일, 차에 소녀를 태우고 왔던 아빠는 친절한 설명도 없이,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언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낯선 곳에 아이를 맡기고는 떠나버립니다. 아이를 맡기며 아빠가 (아마도 아내의 먼 친척) 아저씨에게 한 말은, 애들 먹이는 게 골치라고, 이 아이도 먹을 건 엄청나게 축 낼 거라고, 그러니 일을 시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낯선 세상 안에 던져져 마땅히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 아이와 함께, 제 유년 시절의 기억도 소환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한창 공사 중이었고, 제법 가까운 곳에 살며 왕래가 잦었던 친척 아주머니는 번잡한 엄마를 위해 우리 4남매 중 한 아이를 데려가 며칠 맡아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했던 건, 엄마가 (고민도 없이) 둘째인 저를 보내리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몇 날이나 그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말 없이 지냈고, 친구도 없이 지냈고, 학교가 끝나고 오면, 바깥으로 난 그 집 담벼락에 기대어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기억만 또렷합니다.

부모에게 따뜻한 돌봄을 받던, 그렇지 못하던 상관 없이, 아이가 낯선 집, 낯선 이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공포의 순간이,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새겨져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25).

그런데 <맡겨진 소녀>는 이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애정 어린 보살핌을 경험합니다. 자기 집과는 다르게 여유가 있는 곳, 생각할 시간이 있는 곳,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르는 그곳에서, 아이는 겪어본 적이 없는 이 기분과 감정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합니다. 아이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이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맡겨진 소녀>는 새로운 말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날 밤 침대에 오줌을 싸도, 잘못이라고 야단하지 않고 모른 척 실수를 덮어주는 아주머니와, 매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기록을 확인해주는 아저씨와 있을 때면, 살가운 표현이나 다정한 말 없이도 편안했으니까요. 그리고 검은 바다가 요란하게 파도를 출렁이는 바닷가를 따라 걷던 밤,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았나 싶었을 때, 아이는 아저씨의 목말을 타며 평안을 느끼고, 차가운 우물에 삼켜졌을 때, 아이는 아주머니가 정리해준 침대에 누워 아주머니가 가져다주는 레몬과 정향과 꿀을 넣은 따뜻한 음료와 아스피린을 통해 온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맡겨진 소녀>의 평생에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물에서 건져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73).

<맡겨진 소녀>가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상처를 애써 위로하려 들기 않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위로의 말들이 오히려 가시가 됩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아주머니가 속삭인다.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 집에 맡기지 않을 텐데"(34).

"그게 두 사람이 널 만나기 위해서 굴려야 했던 바윗돌이었나 보지"(64).

그래서일까요, 아이가 "아빠"라고 짧게 내뱉으며 이야기가 끝날 때, 아무도 쉽게 책을 덮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맡겨진 소녀>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예의'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옮긴이는 이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102)이라고 정리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성급하게, 그리고 함부러 남의 아픔을 위로하려 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위로의 말이라 착각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쉽게 입에 올렸던 나를 반성합니다.

이 책을 추천할 적당할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의 예리하고 독특한 느낌을 전할 말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클레어 키건'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읽어보고 싶다는 것과, 앞으로 그녀의 작품을 발견할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추천의 말을 대신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 작가는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고, 이 책이 초역이라고 하니, 일단은 이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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