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베이
조조 모예스 지음, 김현수 옮김 / 살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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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다가 언제나 그렇듯, 호기심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탐욕이 해내게 된다"(40).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호주의 작은 해변 '실버베이'와 그곳에 있는 '실버베이 호텔'이 그 충돌 지점입니다.

낡고 초라한 호텔이지만 실버베이를 사랑하는 이들은, "고요한 바다 위에 오직 나와 돌고래들, 그때가 최고의 순간이란걸"(67) 알고 있으며, 여기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고래 관광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그들에게 적절한 균형은 아주 미묘한 문제입니다. 고래 구경을 오는 관광객이 너무 적으면 그들의 사업이 위태로워지고, 너무 많으면 그곳 바다 생물들을 위협하게 될 터였습니다. 고래 관광 사업이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생계를 꾸려가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게 실버베이에 가장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해안의 위아래 동네 이웃들이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성공에 따른 예상치 못했던 결과물들까지 끌어안고 살아가야 했다. 교통 체증, 술 취한 휴가객들, 끝없이 이어지는 업데이트와 리노베이션의 압박. 바로 평화의 상실이었다"(40).

그런데 실버베이 호텔에 그들의 평화를 위협할 만한 한 인물이 찾아들며, 불길한 충돌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투자가들이 떠나가기 전에, 최상의 서비스와 초호화 시설을 갖춘 복합 레저 단지 부지를 확보해야 하는 '마이크'는 실버베이 호텔에 머물며 지역 탐색을 시작합니다. 문제는, '마이크'가 자신이 실버베이를 찾은 진짜 목적을 숨긴 채, 실버베이 호텔을 지키고 있는 일흔여섯의 할머니 '캐슬린'과 그녀의 조카 '라이자', 그리고 '라이자'의 딸 '해나'의 일상 속으로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버렸다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에 빠졌구나."

그 말이 그냥 그렇게 무심코 튀어나왔다.

나는 멍해져서 소파에 기대앉아 다시 한번 말했다.

"맙소사. 사랑에 빠진 거였어"(292).

<실버베이>는 환경과 개발의 가치가 충돌하고, 자신의 현재를 감추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있는 여자가 충돌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무슨 일로 실버베이에 왔는지 말하지 못했던 '마이크'와 그리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그리고 자기 가족 얘기조차 과거의 이야기는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하는 '라이자'. 그들의 닫아 건 입을 열게 만든 건, 바로 돌고래였습니다. 돌고래와 사랑에 빠지게 된 마이크는 고수익보다 바다 생물에게 어떠한 위협도 주지 않는 개발을 원하게 되었고, 자신의 과거로부터 그토록 도망치기 원했던 '라이자'는 "돌고래의 방문을 받는 삶의 축복'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과거의 공포와 마주해보기로 합니다. 마이크와 라이자가 서로의 그물에 걸려들기 전에, 그들의 삶의 그물에 먼저 걸려든 것은 '(돌)고래'였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 원초적인 감정이 마이크와 라이자 안에 숨어 있던 수치심과 죄책감과 탐욕을 치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그 얘기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당신이 말해줘요"(352).

<실버베이>는 고래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남자는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쌓아올린 성을 허물어뜨리고, 여자는 자신이 온 힘을 다해 피해왔던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이고, 사랑의 다른 말은 희생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지요. <실버베이>는 영화 <콘스탄틴>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에 처했던 '콘스탄틴'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악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비밀이 바로 '희생'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말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과, 가져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이겨내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어쩌면 인간은 그런 힘을 지켜내기 위해 <실버베이>와 같은 이야기 안에 그것을 감춰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희생이 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는 것입니다.

<실버베이>를 읽으며, 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조조 모예스는 감동적인 로맨스로 유명한 작가라고 합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조조 모예스와의 만남은 <실버베이>가 처음입니다. <실버베이>는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조조 모예스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더 특별한 것, 더 특별한 것을 원하다가, 정말 중요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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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 - 인생 단 하나의 희망,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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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여기 당신이 살아가야 할 방식이 있다"로 시작하지 않고 "여기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당신을 위해 이루신 일이 있다"로 시작한다(34).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를 읽으며, 기도 노트를 다시 작성했습니다. 당뇨 때문에 일주일에 3일 이상을 투석하며 신장 이식을 기다리는 오빠, 코로나19 이후로 매달 월세가 공포가 된 성도들, 공항장애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는 청년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제자, 보증을 잘못 서서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된 성도, 이들의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그들을 위한 간구가 달라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문제 가운데로, 그들의 절망 가운데로, 그들의 낙심 가운데로 침략해 들어가기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대반전이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재창조해주시기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현재 속으로 침투해들어가기를 간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마음 안에 숨어 있던 낙망도 떠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위로하면서도 그들에게 '절대 희망'을 말하지 못했던 나약함은 이제 없습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일도 더는 없습니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를 읽은 후로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단지 미래의 위로가 아니라, 완전한 희망, 절대 희망이니까 말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메시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 속에 들여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나라는 아직 이 땅에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실재한다. 이미 와 있는 그것을 몰라서 누리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빈곤해진다"(66).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권'의 개념 안에 가둬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현재 가운데로 침투하여 어떻게 실제 인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이보다 더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있을까요?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할 때, 우주를 재창조할 만큼 강력한 그 미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어떤 대반적의 역사를 이루어놓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해냅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로 떨어져, 우리의 심장이 그 하나님의 불에 붙게 하는 것, 이것이 팀 켈러 목사님의 최고 강점이지요.

바울의 놀라운 자아상을 보라. …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이며 또한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자아상을 잘 모른다. … 그는 자체적으로 여전히 버림받아 마땅한 흠 많은 죄인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받으며 풍성한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한 그가 어떻게 죽음을 담대히 비웃고, 자신을 죽을 수 있는 왕들에게 직언하며, 역사를 바꾸어 놓은 운동을 이끌 수 있었을까?(60-61)

저는 제가 개척했던 교회에서 쫓겨난 목회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개척에 대한 꿈과 소명을 주셨지만, 여자 혼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꼈던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동역자를 구했고, 부교역자로 대형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사역하며 교제했던 동역자 부부와 뜻을 합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두가 놀랄 만큼 빠르게 성장했지만, 몇 년이 못가, 그 목회자 부부에 의해 교회에서 내쳐지고 말았습니다. 제게는 몇 가지 죄목도 덧입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교회를 개척할 기회를 주셨을 때, 도저히 그 자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목회자로서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이 시기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새예배당까지 선물로 주시며 교회 개척의 사명을 회복해주셨지만, 예수님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약한 나, 결함이 많은 나, 못난 나, 부족한 나의 모습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나는 죽었다는 고백은 절절하게 터져나왔지만,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는 고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에서 만난 한 문장 앞에서 꼬꾸라졌습니다. "그분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연약함을 통해 구원하신다"(119).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나를 사용하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제 심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슬픔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슬픔을 통해서 오는 기쁨"(303)이었습니다. 패한 듯 보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것, 약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약함을 통해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다시 붙잡습니다! 빈털터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음을 진정으로 노래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바울의 놀라운 자아상이 그리스도께 '산 소망'을 둔 결과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같습니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그동안 팀 켈러 목사님이 전하여 온 '복음'의 진수, '복음'의 핵심이 하나로 녹아져 있는 책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하룻밤 사이에 제자들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뀐 것처럼,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하룻밤 사이에 우리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힘을 가진 책입니다. 우리의 삶 더 큰 이야기, 우주적 이야기, 영원한 이야기의 영광스러운 일부라는 것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의 일독의 권합니다. 세상의 탁자를 뒤엎으시며, 어둠의 세력에 맞서 위대한 침투 작전에 동참하라고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 전율하게 될 것입니다! 왜 이 책의 제목이 부활을 <입다>인지 그 비밀을 풀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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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통독 - 하나님을 알아가는 90일 성경읽기
이상준 지음 / 두란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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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 언어를 네 입에 떠줘도 안 먹겠다고 하고 네 마음에 깨우쳐줘도 어렵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 이상준, <보라 통독>, 두란노, 138

<보라 통독>은 말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고 지키기 어렵다면, 그것은 신의 언어가 내 영혼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언어가 다른데 어떻게 소통이 되겠느냐고 일침합니다. 또한 말씀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라는데 내가 말씀을 지키려니 어려운 법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고 성경을, 그리고 율법을 오해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던가요. 도대체 이런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보라 통독>은 시종일관 이것은 '사랑'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문제는 곧 언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보라 통독>은 온 우주에 가득한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통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며, 또 말씀이신 그분이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아예 사람이 되어 내 곁으로 오셨으며, 이제는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직접 오셔서 저자 직강으로 깨우쳐주고 계시니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은 이제 여기에 <보라 통독>까지 더하여 <말씀>을 직접 읽어주고 깨우쳐주고 계시니 우리는 더 이상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모든 다양한 계시적 채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깨우쳐 주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사귐'입니다. <보라 통독>은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로망이라고 말합니다.

<보라 통독>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열심'만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안타까워합니다. <보라 통독>은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과 놀라운 사랑에 빠지려면, 반드시 '신의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라 통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신의 언어'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애정 어린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라.

신의 언어를 습득하라.

그리고 그분과 같은 언어로 대화하라.

- 이상준, <보라 통독>, 두란노, 139

<보라 통독>은 90일 간 성경을 1독 할 수 있도록 이끌며, <말씀>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을 읽어주는 성경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라 통독>과 함께 <성경>을 읽는 재미도 있었지만, 솔직히 <보라 통독> 자체를 읽는 재미도 컸습니다. 성경 통독 가이드북 중에 가장 재미 있게 읽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90일 간 <보라 통독>과 함께 <성경> 통독을 하는 것이 어려운 분들은, <보라 통독>만이라도 통독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재미있고 놀라운 책인지 <보라 통독>만으로도 그 매력을 알아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보면, 악한 영들이 온갖 매체를 활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메시지를 뿌려대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헤매고 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향한 맹공격을 퍼붓고 있는 형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다음세대들을 악하고 더러운 메시지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요? 안 듣고, 안 보게, 귀와 눈을 닫고 세상을 살아가게 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보라 통독>과 함께 <성경>을 통독하며, 악하고 더럽고 폭력적인 메시지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려면, 아이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일에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더 강렬하게 깨닫습니다. 진리를 가득 채워 거짓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의 언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의 언어'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오직 한 길, 우리 자녀 세대를 지킬 수 있는 오직 한 길은 '신의 언어'를 습득하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보라 통독>과 함께 자녀들과 매일 <말씀>을 먹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말씀>은 가졌지만, '신의 언어'를 잃어버린 죽은 신앙생활, 병든 신앙생활을 회개하며, <보라 통독>을 가이드 삼아 우리의 심령을 <말씀>으로 배부르게 하는 일들이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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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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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가룟 유다야"(63).

<유다>는 유다의 이야기이자 유대인의 이야기이며, 배신자의 이야기이자 희생자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자 민족의 이야기이며, 집의 이야기이자 땅의 이야기이며, 구원의 이야기이자 전쟁의 이야기이며, 동거의 이야기이자 독립의 이야기이며, 현재의 이야기이자 과거의 이야기이요 과거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절망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제목인 <유다>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가룟'인 유다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유대 민족 전체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다'라고 쓰고 '배신자'라고 읽지요.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와 동의어이면서, 유대인이라는 말과도 동의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기독교인 대중의 상상 속에서, 유대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각인된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가룟 유다였다"(284). 모든 나라와 모든 세대를 아울러 교활하고, 역겨운, 혐오스러운 인물로 여겨지는 배신자 <유다>는 전체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세대의 배신자로 낙인 찍힌 유다여, 그대는 누구를 배신자라 부르는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103).

유대 땅은 '사이 땅', '트라이앵글 지역'이라고도 불립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 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유대 땅을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국가를 원했고, 독립을 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땅은 학살과 추방과 증오와 혐오와 보복과 죽음이 가득한 땅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피를 강처럼 흐르게 했어요. 한 세대를 전부 희생시켰어요. 아랍인들 수십만 명을 자기들 집에서 내쫓았어요. 히틀러를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온 배를 항구에서 곧장 전쟁터로 보냈어요. 이 모든 일이 여기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지 보세요"(274).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둘 중에 하나만 살아남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두 민족이 피 흘리는 전쟁으로 빠르게 전력 질주하기 전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이 있었답니다. 이 책에서는 그를 '아브라바넬'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는 보편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지요. 그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상대방을 오해하던 것만 풀면 사랑할 수 있다는 꿈을 꾼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두 공동체가 살아갈 충분한 공간이 있으며, 그렇게 나란히 또는 하나 안에 다른 국가라는 틀 없이 공존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혼합된 공동체. 아니면 다른 하나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는 두 공동체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거예요"(278).

그러나 유대인도 사랑하고 아랍인도 사랑한다는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인 친구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신자였으니까요.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했지만, 예수와 같은 꿈을 꾸지 않는 그의 제자들이 배신자 <유다>(가룟 유다와 유대 민족 전체)를 증오했듯이, 유대인의 원수를 사랑한 '아브라바넬'은 수치스럽게 추방당하고 미움 받고 비방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이 책의 저자 '아모스 오즈'도 "줄곧 '두 국가 해결책'을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애썼"으나,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주장했기에 이스라엘 안팎에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하니, '아브라바넬'은 작가 자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 유대인들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 하나와 아랍인들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 하나가 생겼을 뿐이에요. 이제부터 아랍인들은 날마다 패배자가 당하는 재앙을 살아야 하고 유대인들은 밤마다 보복을 당할까 봐 떨며 살아야 해요"(278).

<유다>는 고장 난 기계식 인형처럼 쉴 새 없이 연설하고 연설하는 노인(발드), 모든 남성을 혐오하며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여인(아탈리야),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슈무엘), 이 세 사람의 기이한 동거를 통해, 시온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의와 복수의 전쟁을 선택한 그 땅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자신을 잃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그곳에는 과부와 장애인만 남았습니다. 남성을 혐오하는 과부와 아들을 잃고 비탄에 젖은 노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아랍인'도' 사랑한 죄로 '아브라바넬'을 추방한 자들은 그 대가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은총(아브라바넬)이 죽었고, 자비(발드의 아들이며, 이탈리야의 남편이었던 미카)가 살해되었으니, 이제 집(세상)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무덤처럼 절망과 슬픔,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 '배신자 아브라바넬'의 유령이 떠돌고 있을 뿐이죠. <유다> 전체에 '아브라바넬'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 안에 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인정할 수 없고 변화가 생기는 것을 죽을 만큼 무서워하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사람들 눈에 언제나 배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요"(374).

기독교인에게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에게 유다는 누구일까요? <유다>는 유대인들조차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부끄러워하고, 부인했던 유다의 유령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지난 여든 세대 동안 증오심과 혐오감을 강물처럼 흐르게 했던 그 유다에 관한 기억을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진짜 배신자인지 다시 묻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이렇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진짜 배신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나 권력을 탐내고, 종교 권력으로 피 흘리는 자가 되었던 그의 다른 제자들인가, 예수가 죽었을 때 함께 죽었던 유일한 제자 유다인가? 가룟 유다에 관한 저자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유다>는 가룟 유다를 이렇게 재해석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독교인, 한 순간도 예수를 떠나지 않고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기독교인, 끝까지 예수가 온 예루살렘 앞에서 그리고 온 세계 앞에서 틀림없이 일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리라 믿었던 기독교인,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가 떠난 이후에 더 살려고 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죽었을 때 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유일한 사람,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이 다섯 대륙에 사는 수억 명의 사람들의 눈에는 수천 년에 걸쳐 가장 전형적인 유대인이라고 간주되었다. 가장 혐오하고 가장 경멸하는 사람, 배신의 화신이며 유대교의 화신이고 유대교와 배반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보여 주는 화신이었다"(284-285).

어떤 영화에서였는지, 한 유대인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여, 다음 번엔 다른 민족을 택하소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에 지쳤다고 호소합니다. <유다>에서는 이런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천 년에 한 번은 우리의 죽음이 의미가 있을지도"(268). 그러나 <유다>의 저자 아모스 오즈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과 아랍인이 상대방을 오해했던 것만 풀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형제니까요! 그러나 <유다>는 조용한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회복의 이름으로, 피를 물처럼 흘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는 듯 합니다. 서정시를 쓰는 것은 여전히 야만이라고요. 복수에 목마른 채로 새로운 시 한 편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일은, 헛일이라고 말입니다.

<유다>는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과제처럼 보이는 많은 질문을 남겨놓지요. 유대인과 아랍인이 우정을 쌓을 수 있을까요? 아무도 쫓아내지 않고 부당한 일은 전혀 저지르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요? 왜 종교는 우리를 구하러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쏟게 만들까요? 사랑하기 위해 죄로 물든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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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통과한 용기 - 길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
러셀 무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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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에게서 우리는 승리를 통한 용기가 아닌 십자가를 통한 용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33).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를 읽으며 '믿음의 다른 이름이 용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왜 우리에게 익숙한 믿음이라는 개념 대신 용기라는 개념을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에 대해, 그리고 용기가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그 두려움에 맞서 결국 승리를 쟁취해 내는 것을 용기 혹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두려움의 한복판에서 다시 일어서 길을 찾는 것인데, 그 용기는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지고 무너지는 십자가를 통과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러셀 무어 목사님은 우리가 알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여 이것을 탁월하게 설명해줍니다. 이 책의 표현대로 하면, 그 용기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담대함하고 당당한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야에서 헤매던' 낙심과 비관과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더 잘 설명되어집니다. "엘리야의 용기는 불의 힘으로 아합을 제합하는 상황보다 오히려 아합에게 쫓길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36).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가장 갈망하는 사역자의 모습은 아마도 갈멜산에 선 엘리야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세상 한복판에서 거짓된 우상의 세력에 맞서며, 확실한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강함을 원했습니다. 그런 '선지자적'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증명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엘리야를 광야로 보내셔서 엘리야의 마음속에 있는 바알을 제거하실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자기 이야기의 중심에서 끌어내고 계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과 나를 위해서도 해주시는 일이다"(281). 승리에 대한 우리의 바람 속에는 '하나님의 선지자적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었구나' 하는 것이 벼락처럼 깨달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극도로 열심' 싸우는 것보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더 큰 용기, 더 큰 믿음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용기를 드러내야 할 순간은, 절대 다수인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기 위해 갈멜산에 서야 할 때가 아니라, 외로움과 낙심과 피로가 극에 달해 몰락 직전까지 약해져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던 광야에서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선다'는 것은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거나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로 적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더 큰 힘과 지혜로 세상의 지혜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이끌려갈 때 찾아온다(요 21:18).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설 용기를 어떻게 얻게 되는지 분명히 알려 준다. 일어설 용기는 곧 십자가에 달릴 용기에서 시작된다"(37).

"우리는 성경이 밝혀 주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것은 따분해하고, 영원의 관점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열을 올린다. 왜일까? 세상이 인정해주는 종류의 힘에 열광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82).

우리는 보통 고난의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의 영광도 있다고 설교해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한 후' 맛볼 빛나는 영광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러셀 무어 목사님은 십자가야말로 빛나는 영광 자체라고 선포합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를 통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회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함께'하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에 사역자로서 저는 사역을 할 때마다 '팀'이 조직되기를 원했고, 한 성령 안에서 한 뜻을 품은 팀을 갈망해왔습니다. 그런데 러셀 무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 칠천 명'의 무리 속에 엘리야를 두지 않으신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무리에 맞선 '외톨이'로 두신 것처럼, 저에게도 그것을 명하신다면 기꺼이 외로워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깨달아졌을 때,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던 갈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용기라고 착각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용기를 갈망하는 것은,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보호본능의 작동 가운데, 삶의 중심이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에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모든 두려움과 의심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나의 이야기에서 빠져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끝을 알지 못해도 기꺼이 광야 속으로 들어갈 용기, 일어설 용기, 무너질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용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세상 가운데로 흩어질 때매대, "한주간도 승리합시다"라는 인사를 많이 했었는데,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우리가 많은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승리에 대해 오해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 깊은 통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읽고 치워두는 책이 아니라, 꼭 곱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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