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스케치 핸드북 : 태블릿 드로잉 어반 스케치 핸드북
우마 켈커 지음, 허보미 옮김 / EJONG(이종문화사)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동굴 벽이나 바위 등 고정된 매체가 아니라 종이나 천과 같이 휴대가 가능한 소재에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2차원의 재현예술은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휴대할 수 있는 캔버스와 무한한 색채의 다양한 혼합 매체를 활용해 드로잉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접근성을 높이는 제2의 전환점입니다"(7).

사랑을 글로 배우는 사람처럼, 그림을 책으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어릴 적, 그렸던 그림일기 수준에서 벗어나 취미로 그림을 좀 배우고 싶었는데, 우연히 태블릿 드로잉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반 스케치'라는 신조어(?)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어반 스케치'란 "일상에서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담아내는 사람들"이라는데, 이 책의 저자는 이제 "어반 스케치는 하나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어반 스케치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며 하나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태블릿'이라는 도구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어반 스케치 핸드북 : 태블릿 드로잉>은 거의 '태블릿 예찬' 수준으로 태블릿의 기술이 어떻게 드로잉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태블릿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예술매체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블릿 드로잉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 온갖 그림 도구를 통째로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종이, 도구들, 색연필, 여분의 잉크 등을 모두 챙길 필요가 없이" 언제 어디서나 드로잉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태블릿 덕분에 스케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온갖 장소에서도 스케치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물감을 사용하다 침대에 쏟거나, 작업이 끝나면 치워야 한다는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도, 온갖 컬러를 사용하며 어디서나 언제든 드로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행복해하는 저자를 보며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수준이구나 싶습니다.



"이 책은 어반 스케치 핸드북의 다른 시리즈와는 달리 드로잉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며 설명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로 완성되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영감의 커닝페이퍼라고 할 수 있죠"(7).

친구에게 선물 받은 새 것은 아니지만 새 것 같은 테블릿으로 어번 스케치에 입문해 보자는 큰 꿈을 꾸고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충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작업실을 통째로 잃게 되니 거치대와 케이스는 필수이다 등등 친절하고 세심한 잔소리가 많은 책인데도, 이 책은 태블릿 드로잉 초보자를 위한 "친절한 설명서"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태블릿 드로잉'의 세계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줍니다. '프로크리에이트', '아트레이지'를 사용한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의도대로 이미 어반 스케치의 세계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하나로 완성되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영감의 커닝페이퍼"(22)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입문자들에게는 이 길에 들어서면, 우리가 어디까지 가볼 수 있는지 그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드로잉 어플의 반응속도나 필압의 기술력 등을 고려할 때, 확실히 지금이 태블릿 드로잉을 배울 수 있는 적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까지의 그림이나 드로잉이 그리는 사람의 '솜씨'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태블릿 드로잉은 예술가의 '솜씨'에 기술력이 더해진 예술의 세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건이라 할 만한 만남입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초보자들은 "아, 이런 작품이 가능하구나", "이런 효과가 가능하구나", "이런 그림까지 가능하구나" 하며 감탄하다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 매력에 푹 빠져 태블릿 드로잉이라는 신세계에 한 발 들여놓고 싶었는데, 일단 '프로크리에이트'와 '아트레이지' 어플은 '유료'라고 해서 깔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누가 가르쳐주면 빨리 배우는 편이긴 한데, 무엇인가를 책으로 처음 시작하는 데에는 확실히 한계를 느낍니다. 저자가 일러준 대로, 한동안 태블릿 디바이스를 가지고 놀며 도구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러스트나 포토샵을 다룰 줄 아는 분들은 기본 원리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취미를 넘어서 작품으로, 작품을 넘어서 예술로 발전하고 있는 태블릿 드로잉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엔 여행을 기록하려고 사진을 찍다 사진이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사진을 찍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것처럼, 어떤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단순한 감정이었는데, 이제는 드로잉을 위해 풍경을 관찰하는 습관을 가지게 될 것만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지 - 책 읽어드립니다, 임기응변의 지혜, 한 권으로 충분한 삼국지
나관중 지음, 장윤철 편역 / 스타북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싸우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 최선이다"(65).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 날 아침! 그 아침을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에도 별 뜻이 없었던 저는 잠이 깬 채로 한참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할 일이 없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니, 잠에서 깼지만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는 그래도 '졸업식'이라는 목표(?)가 있으니 할 일 없이 놀면서도 괜찮았던가 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왜'라는 의문 없이 늘 당연하게 맞이했던, 그 '당연'한 하루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거나 경험해본 적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삼국지>라는 첵을 볼 때마다, 그날 그 아침이 떠오릅니다. 어떤 말로도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신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딸을 지인에게 부탁해 출판사에 밀어 넣었습니다. 등떠 밀려 갔지만, 사실 그것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날이 반복될수록 이상하게 더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다시 같은 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이문열의 삼국지>로 불리던 책 10권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골방에서 나왔을 때, 아마도 마음의 근육이 조금은 단단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생을 길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처음으로 주어진 하루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새벽 버스를 타고 단과반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기분이 제법 상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삼국지>는 그렇게 인생책이 되었는데, 어디 가서 <삼국지>가 나의 인생책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줄거리를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만큼이나 전투와 등장인물이 많은 <왕좌의 게임>이라는 미드를, 영상으로도 보고 책으로도 읽는 동생을 보면서, <삼국지>도 그렇게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워낙 내용이 방대하니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스타북스가 한 권으로 내놓은 <삼국지>는 저와 같은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너무 방대한 양 때문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책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저처럼 <삼국지>를 한 번만 읽은 독자들,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숲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해 아쉬웠던 독자들이 더 반길만한 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이 말이 이 대목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아, 이 인물이 이때 등장하는구나', '아, 이 승부가 결국 이렇게 끝났었구나' 다시 확인하며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삼국지>를 읽고 나서도 늘 헷갈렸던 것은 이것이 소설인가, 역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한 권으로 충분한 스타북스의 <삼국지>를 다시 만나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삼국지>는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책입니다. "신발을 팔고 천을 짜는 일을 하고 있었으나 기개가 남다르고 인품이 고상하여 누구나 그의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영웅의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17)는 유비, "술 팔고 돼지 잡는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지만 그저 당장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지 대장부로서 이 일을 평생 할 생각은 없"(18)었던 장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의협심에서 10여 명의 못된 무리를 죽이고 그 죄를 면하려고 강호를 떠돌고 있"(19)던 관우, 모두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는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하고자 하는 대장부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용맹과 지략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싸움은 다투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천하를 어지럽히고 근심케 하는 자를 다스려 태평을 이루고자 함이니, 가장 뛰어난 고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용맹함보다는 처세나 술수와 같은 지략이 더 빛을 발하는 전투가 그려집니다. 또한 큰 뜻을 품었다고는 하나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니, 행동의 방자함과 교만한 자, 시샘하고 경계하는 자, 이에만 눈이 멀어 의는 가벼이 여기는 교활한 자, 배은망덕한 자는 스스로 품은 큰 뜻이 칼날이 되어 결국 스스로를 헤치고 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수의 기량은 지니고 있으나 사람됨은 보잘 것 없었던"(37) 여포가 끝내 영웅이 되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인자는 아니었지만 충과 의로 그 용맹함을 더욱 빛나게 한 '조자룡'이 저에게 여전히 가장 빛나는 영웅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165).

한 권으로 다시 읽은 <삼국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어려울 때마다, 어려울수록 박장대소를 호탕하게 터트리는 '조조'의 모습입니다. 그 많은 실패와 실수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이 여기에 있었던가 싶습니다. 오히려 세를 넓히고 권세를 다질수록 그 웃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울 지경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삼국지>가 가르려주는 가장 중요한 인생교훈이 있다면,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암투와 배신이 비일비재한 전쟁터 속에서는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이 승패를 가릅니다. 지형을 읽고 병법을 펼치는 것보다, 이간질과 음모가 난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삼국지>는 사람을 얻으려는 자는 인재를 알아보고 대우할 줄 아는 자이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고 뛰어난 지략을 갖추지도 못한 유비가 지금처럼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영웅호걸들이 앞다투어 그에게로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탁월한 리더일수록 사람을 얻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기보다 경쟁적으로 생각하기 쉬울 테니까요. 진짜 탁월한 리더는 사람을 얻는 리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삼국지>를 다시 읽고 보니, 가장 뛰어난 처세는 '겸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갈공명이 아무리 빼어난 지략가라고 해도 결국, '천운은, 누구의 편인가'가 운명을 갈랐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결국 그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며칠 밤, <삼국지>를 아껴 읽으며 즐거웠습니다. 많이 압축되어 있지만, <삼국지>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권이라고는 하지만 이도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두껍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 이 한 권으로 시작하는 것도 지혜일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귀하가 왜 거기 있는가.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귀하는 거기 있습니다.

귀하는 인류 존속의 열쇠입니다(61).

우린 언제부터인가 '이상'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말하기를 즐겨했었는데, 그때 우리의 꿈들은 단순한 소망으로 가득찬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에게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물어 보면, 진학상담 선생님보다 더 현실적인 말투로 자기의 '가능성'을 단정해버리곤 합니다. 졸지에 철없는 어른이 된 것아 머쓱했지요. 대학가 주변에서 살았던 시절, 버스를 타면 청춘들이 쏟아내는 뜨거운 이상과 낭만, 분노를 말없이 듣고 있다 덩달아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화의 주제들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현실에 더 잘 적응하게 된 것인지, 길들여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꿈은 더 이상 하늘 위에 떠있지 않습니다.

<멸망의 정원>은 평범한 한 일본 남자의 우울한 현실과 꿈 속 세상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쓰다 망가지면 버리는 물건처럼 직원이 늘 교체되는 회사에서 매일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고, 노동기준법에 위반하는 야근에 시달리고 있는 '스즈가미 세이치'는 식욕도 없고, 몸도 피곤하고,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마음이 맞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은, 어쩐지 미덥지 못한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악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게 결혼생활의 현실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본 한 여인에게 순간 사랑을 느낀 '스즈가미 세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그 여인을 따라 전차에서 내렸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앞에 오히려 꿈 속 같은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세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동이 먹고 싶다고 생각하며 골목을 돌면 우동 가게가 나타나는. '스즈가미 세이치'가 그 낯선 동화 속 세상에서 적응해갔던 과정을 뒤짚어 보면서, 아, 이 불행했던 남자가 꿈꾸었던 세상, 그가 원했던 행복이 이런 것이었구나 생각하니 괜히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다정한 이웃, 맛있는 탄탄면과 티크재 테이블, 별이 총총한 하늘,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것, 친절한 마음들, 그리고 사랑. 그것이 무엇이든 그 세상은 그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스즈가미 세이치'는 곧 거부할 수 없는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외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가 지구에 들러붙어 있는데, 그 '미지의 존재'는 해파리 모양이고, 그 중심부에 핵이 있고, 핵 부근에 한 인간이 있는데, 그가 바로 '스즈가미 세이치'라는 것입니다. '미지의 존재'에게 납치를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주 해파리 속에서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꿈의 세계, 즉 일종의 꿈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가 그가 깨어나 그 핵을 파괴해주길 바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가 꿈꾸듯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지구는 '푸니'라 불리는 괴생물체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푸니'라는 괴생명체가 '미지의 존재'가 발산하는 에너지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은, 핵 바로 옆에 있는 '스즈가미 세이치'가 '미지의 존재'를 소멸시킬 열쇠, 동시에 인류를 존속시킬 열쇠라고 믿습니다.

이 세계(상념의 세계)는 너무나 기묘해서,

당신이 희망을 품으면 계속 이어지고

당신이 절망하면, 즉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핵이 파괴되고 세계가 종말을 맞습니다(339).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의 세계에서 자신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요? 우울하지만 현실인 세계와 행복하지만 가상인 세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세상에서 사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시즈가미 세이치'가 핵을 파괴한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멋진 환상의 세계는 소멸할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도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상념의 세계이니 어려울 것 없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미지의 존재'에게 '스즈가미 세이치'가 선택된 것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이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희망하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면, 어느 그림책 세상보다 더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스즈가미 세이치'의 상념의 세계를 누가 쉽게 허황되다 치부할 수 있을까요? '스즈가미 세이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 강요된 것은, 더이상 희망을 품지 말라는 것, 즉 모두를 위해 스스로 희망을 파괴하고 절망하라는 가혹한 요구였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인류 멸명과 맞바꿔서 그림책 속의 시민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곧 죽더라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환상의 행복 같은 것보다는 현실을 택하겠습니다(84-85).

<멸망의 정원>은 가상의 세계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 '스즈가미 세이치'와 대결하는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지구에 들러붙은 환영을 파괴하라'는 작전명을 가진 '돌입자'들입니다. 이 '돌입자'들은 '푸니' 내성진단에서 저항치가 최고치인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저항치가 최고라는 것은, 파괴적인 현실이지만 현실에 적응을 잘 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희망을 빼앗기지 않는 힘이 남보다 강하다는 것일까요? 혹시 더 현실적이라는 것과 더 희망적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일까요? 현실에 뿌리를 내린 희망이야 말로 참된 희망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진실이란?

신념이란?

<멸망의 정원>이 현실세계와 상념의 세계라는 대비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세계관은 무엇일까요? 현실을 부정한 채, 가상의 세계에 빠져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 아니면, 집단을 위해 희망을 거세당하는 개인의 불행? 아니면, 모두의 희망을 집어삼키면서도 결국 만들어지고 있는 건 파괴적인 세계라는 우울한 현실 인식?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보입니다. 불행에 진정으로 저항하는 것은 외면이 아니라, 희생적인 참여라는 것입니다.

<멸망의 정원>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지옥의 혼돈과 천상의 질서가 충돌하는 모습을 통해,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은 신념의 충돌임을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세계를 구할 각오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자신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 지구를 배반하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도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은 시소를 타듯 늘 이 선택 위에서 흔들리고 있지만, <멸망의 정원>이 보여주는 분명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옥의 혼돈에 빠져 있다면, 그것을 외면한 채로는 그 위에 나 혼자만의 천상의 질서를 절대로 건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지옥 같은 현실을 겪었느냐 안 겪었느냐가 스즈가미 씨와 노나쓰 씨의 차이겠죠"(337).

재미있게 잘 읽히면서도, 묵직한 주제들을 던져주는 책입니다. <멸망의 정원>이라는 책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음미해보게 되는데, <멸망의 정원>이 상징하는 바가 파괴적인 현실의 혼돈일 수 있겠지만, '돌입자'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환상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정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적 세계관 강의 - 시간을 관통하는 통찰의 힘
최용준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어떤 세계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습니까?

위의 사진(그림 3. 다양한 해석들)은 저자가 영국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서 본 광고라고 합니다. 이 사진은 같은 사람의 머리를 보면서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단순히 '헤어스타일'일 뿐이지만, 어떤 사람은 '군인'으로 이해하며, 누군가에게는 '생존자'(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국인이라면 이 사람을 '스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요.

<성경적 세계관 강의>가 이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23).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모든 사람은 저마다 '세계관'이라고 하는 하나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있나요? <성경적 세계관 강의>는 이 질문이 더 없이 중요한 인생 질문이라고 단언합니다. 내가 어떤 세계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내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두 가지 '론'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세계관"과, "모든 생물은 적자 생존과 자연도태의 법칙에 의해 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이 그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 강의>는 어떤 세계관에 따라 사느냐에 따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비슷한 인생일지 몰라도, 그 내용과 종착지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삶이라는 동일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방향'은 전혀 다르다는 것, '방향'이 다를 때 도착지점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세계관이 왜 옳은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대표하는 많은 지성인들이 왜 '성경적 세계관'으로 사는지에 대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경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이 세상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 강의>는 어떤 면에서 '성경적 세계관'이 탁월한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주의 본성은 무엇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적 세계관'이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지를 잘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미 성경적 세계관이 탁월하다는 관점으로 집필된 책이니, 이 책의 주장이 편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실재는 무엇인가?, 무엇이 본질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죽은 이후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무엇을 아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 책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나, 독서토론 교재로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청년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물음 앞에, 성경적 세계관으로 살아야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모를 사람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복음으로 살지 못하는 경우를 볼 때입니다. 이 책을 통해 성경적 세계관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세계기독교고전 36
앨버트 심프슨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약성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첫 번째 상징은 비둘기로서, … 구약성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첫 번째 상징도 비둘기이다. … 둥지를 품어 새끼를 돌보는 어미 비둘기의 모습. 그런데 그런 모습에 비해 이 그림은 얼마나 이상한 배경인가! 혼돈, 황량함, 소용돌이치는 물, 타오르는 화염, 심연, 별빛 하나 없는 흑암, 폐허와 죽음과 황량함이 지배하는 상태! 영원한 사랑과 평화의 어미 비둘기가 둥지를 짓기 시작한 배경은 바로 이런 장면이었다"(13).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성령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묵상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하나님의 영이 창세기 첫 페이지에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모습을 이보다 더 강렬하고 웅장하게 묘사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책이 성령에 관한 많은 책들 가운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인 앨버트 심프슨 목사는 당시에 '앤드류 머레이', '드와이트 L. 무디'와 같은 저명 인물이었다는 데,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이름과 저술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성령을 내보내셨고, 따라서 성령의 거치는 더 이상 하늘이 아니라 신자의 마음속이며 교회의 가슴속이다. 그분의 집은 이제 이 세상, 죄 많고 고통당하는 인간들 속이다. 그리고 그 비둘기는 둥지를 짓고 새기를 품어 키우고 있다. 언젠가 하늘로 솟아올라 하나님의 빛 안에서 노래할 새끼들을 말이다"(15).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 때문에 성령에 관한 교리가 다소 지루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쉬운데, 그런 선입견을 첫 장부터 완전히 박살내버립니다.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령님'은 구약에서보다 신약에서 더 왕성하고 활발하게 활동하신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나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구약의 성령 하나님은 특정 인물 안에 임재하여 활동하시다가, 신약에 와서야 새언약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여 활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성령 하나님의 활동이 신약뿐 아니라, 구약까지 성경 전체에 얼마나 가득하게 나타나고 계시는가를 매혹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이 이처럼 성령님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거룩한 능력을 받는 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투자하신다. 하나님은 능력을 사용하시는 일에 대경제학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보물을 낭비하면, 즉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버려 두거나 하나님께서 그처럼 큰 대가를 치르고 주신 강력한 위탁물을 게으르게 무시하면 하나님은 매우 슬퍼신다"(321-322).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본문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성령님이 활동하시는 모습을 읽어냅니다. 예를 들면, '잠언에 나타난 성령'과 같은 주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였는데, 잠언이 얼마나 성령님으로 가득한가를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성령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기에도 좋고, 주석서처럼 활용하기에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도전이 되었던 메시지는 '므나의 비유'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성령님을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한다'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지만, 성령님은 우리가 많은 책무와 일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며, 우리는 '성령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주는 강력한 도전이 가슴에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르게 번역하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네게 임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너의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관리할 수 있는 관념적인 능력이 아니다.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357).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성령님께서 얼마나 실제적이시며 활발하고 다양하게 활동하는 분이신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던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 속에는 '성령 하나님을 힘써 알자'는 요청도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성령,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제목처럼 성령님의 능력(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에 관한 메시지가 부족한 것이 다소 아쉽지만, 우리가 얼마나 성령님께 의존되어 있는 존재인지, 무엇보다 얼마나 간절히 성령 받기를 바라야 하는지를 강력하게 알려 줍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다는 이 약속을 간절히 붙들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이 땅의 교회들을 깨우시고 바로 세우셔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시켜 주실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이 책 안에 담긴 보석 같은 메시지가 모든 교회에 다시 선포되어지기를 바라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