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크리스마스 캐럴 - 1843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찰스 디킨스 지음, 황금진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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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있게 한 그분도 크리스마스 때는 아이였으니,

크리스마스만큼 아이로 돌아가기에 안성맞춤인 때도 없었다(121).

너무나 유명한 동화인데, 내 안에 이 작품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 이 작품의 제목은 <스크루지 영감>이 아니었습니다. 왜, 어떻게 해서 이 작품의 이름을 저는 <스크루지 영감>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심술 궃고 욕심 많은 스크루지 아저씨가 크리스마스에 무서운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본 후,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며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이 이야기의 제목은 <크리스마스 캐럴>이었습니다.

또 하나, 이 작품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좋은 이야기였을 뿐, 동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단순히 권선징악적 교훈을 주는 작품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을 상징하는 문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디킨스"(188)의 작품으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 자체를 바꿔놓았다"(184)는 평을 듣는 소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 해설'에 의하면, "영미의 청교도적 사회 속에서 이교도 문화라며 짓눌렸던 축제 문화를 복권시킨 소설이라 평가하기도 한다"(184)고 그 역사적 의미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문학적, 역사적 가치 이외에도, 한 해를 마무리 짓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며, 잘 살아 왔는지, 잘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보기에 좋은 문학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책이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세대를 초월하여, 문화를 초월하여, 정말이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하는 작품말입니다.

이 남자의 시신은 어둡고 텅 빈 집에 누워 있었다.

남자건 여자건 어린아이건 저 사람이 이런저런 일로 내게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가 건넨 친절한 말 한다마디를 떠올리며 나도 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겠다고

말해줄 사람 하나 없이 저렇게 누워 있었다(148-149).

성경에 보면, 전도서 7장 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으니 살아있을 때 이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다"고 하지요. 어떤 시간관리 전문가는 자기 인생을 잘 설계하는 방법은 자신이 죽을 날을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전하는 교훈도 그것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더 잘 살 수 있다는 교훈말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스크루지라는 심술 궃고 욕심 많은 영감도 한 때는 순수한 어린이였고, 푸른 꿈을 지닌 청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탐욕으로 길들여진 후에는, 베풀기보다 움켜쥐기를 택하게 되었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다 보니, "곰팡내 나는 구닥다리 사무실이나 먼지 풀풀 날리는 집 안에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운 기회를 놓치고"(120)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매년 돌아오듯,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매년 주어졌지만, 사랑을 나누는 일을 헛짓거리로 여기다 보니, 그 모든 기회를 날려버리고 누구 하나 울어주고 슬퍼해주는 사람 없는 쓸쓸하고도 고약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크루지를 평할 때 늘 따라붙는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기릴 줄 아는 이가 있다면

단연 스크루지라는 것이었다(179).

초상집,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지혜를 얻은 스크루지 아저씨는 자신에게 아직 삶을 돌이킬 기회가 있음에 기뻐하며, 나누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지요.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이 삶의 가장 큰 기쁨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죄인을 찾아 이 땅에 오셨으며, 그 자격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선물로 내주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참 사랑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베풀고 나누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스크루지 아저씨처럼 이 비밀을 깨닫고 우리가 이 전의 삶에서 돌이켜, 사랑을 실천하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기적임을 묵상해봅니다.

더스토리에서 새롭게 펴낸 이 책은 "1843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으로 세상에 다시 나왔습니다. 이 책이 귀하여 좋아하는 밑줄도 긋지 않고 조심조심 읽었습니다. 소장가치도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스크루지 영감님을 알고는 있으나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세대를 이어 간직해야 할 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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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5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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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제3 수도회에 소속된 거룩한 베드로 페티나미오 형제가 시에나의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성도들을 데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발을 들어 그의 발자국을 땅바닥에 남겨 놓았다. 모든 성인들이 자기 발을 주님의 발자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에 성 프란체스코가 와서 그의 발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에 놓았을 때 정확하게 들어맞았다"(44).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8장 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교인은 많은데 '제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성도와 제자의 개념을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한 제자 운동이 실패했다고 평가했고, 그러자 어떤 이는 예수 제자 운동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너무도 고결하고 숭고하여 아직 시도되지 못했을 뿐 실패한 것으로 판명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와중에 누구보다 가장 충성스럽게, 가장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랐던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시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잘 본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 프란체스코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문과,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와 똑같은 5가지 상처를 그의 몸에 지니고 있어 고통 받았다는 것,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며 가난한 이웃을 제 몸처럼 돌보고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의 정신을 본받은 수도회가 설립되었다는 민중의 전승이나,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였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은 성 프란체스코가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죽고 1세기 후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한 수도사에 의해 기록"(17)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작은 꽃들"로 번역된 '피오레티'(영어로는 앤솔로지)는 "명문집"을 뜻하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은 성 프란체스코를 가까이에 있었던 가장 친한 제자들에 의해 전달된 전통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행적과 기이한 영적 능력과 체험, 거룩한 오상(십자가의 다섯 가지 상처)이 새겨지게 된 경위, 그의 제자들의 행적과 가르침 등을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이 현대의 독자들에게 던지는 충격과 도전은 우리가 얼마나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삶을 허비하고 있는가, 영적으로 얼마나 아둔해져 있는가, 그러느라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는 이 성자는 삶의 모든 목표, 모든 즐거움을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연합에 두었으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 얼마나 겸손한지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를 늘 잊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모욕과 멸시, 고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기뻐하여 감히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 자기는 그보다 더 나은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하나님께 불손한 말을 쏟아놓으며, 정말 작은 경건에도 자신을 과시하고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깊은 명상과 고요한 생활, 하나님과의 친밀하고도 사랑이 넘치는 영적 교통을 기뻐한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은 "옷도 없고, 칼도 접시도 없으며, 그릇도, 집도, 식탁과 요리사도 없이" 구걸하여 얻은 빵 몇 조각이 전부일지라도, "이것들은 인간의 수고로 준비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마련"된 것으로 여기며, '거룩한 가난(청빈)이라는 매우 고귀한 보물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따르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63). 그러나 이 책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십자가를 따르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귀족 출신의 한 영리한 젊은이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왔다. 그는 며칠 동안 관습을 따른 후에, 마귀의 사주에 의해 그가 입고 있는 의복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가 조잡한 부대 자루를 입고 있다고 느꼈다. 소매는 그의 신경에 거슬리고, 두건도 싫었으며, 그 의복의 길고 거친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짐이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수도회를 싫어하게 되어 결국 모든 의복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98).

성 프란체스코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권면했던 것은 거룩한 교회를 존중하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 세상의 역경과 흥망에 인내를 가지며, 천사와 같은 순결을 지니고, 하나님과 사람들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 평안과 조화 가운데 거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과 온유로 대하고, 거룩한 청빈을 사랑하며, 거룩한 기도와 하나님을 찬양함에 전심을 다하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소망을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먹이시는 선한 목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었습니다(93). 오늘날 진정으로 이러한 목적으로, 이러한 목표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몇 명이나 찾아볼 수 있을까요?

마귀의 사주로 수도회의 의복을 싫어하게 된 젊은이는 그 의복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제단 앞을 지나가다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무수한 성자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옷을 입고 행진하는 환상이었습니다. 성자들이 입고 있던 찬한하고 아름다운 의복들은 지상에거 인내로써 거친 의복을 입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입혀주신 옷이었습니다. 이 환상을 본 젊은이는 더욱 더 영원한 축복을 위하여 지상에서의 회개와 남루한 의복의 모든 고통을 사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18절)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글로벌 펜데믹으로 전세계의 일상이 멈춰진 시기에, 고요한 생활 가운데 묵상하며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누군가는 이들의 믿음과 생활을 '극단적'이라고 표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무엇을 잊고 있는지, 얼마나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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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목회 - 새로운 시대 앞에 선 교회의 전망
톰 레이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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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

우주왕복선 폭발,

9.11 테러의 재난은

사람들을 교회로 몰려들게 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의 재난은

교회가 문을 닫게 만들었다.

이 재난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에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 코로나 이후 목회 中에서

2021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글로벌 팬데믹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는 폐쇄되고, 대면 예배는 금지되었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더 상황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교회의 이미지까지 급격히 실추되면서, 소리 없이 교인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의 리더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코로나 이후 목회>가 먼저 외치는 것은 교회들을 향한 경종입니다. 코로나 이전으로, 오로지 '정상'으로, "오로지 옛 방식과 옛 프로그램, 옛 활동들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61) 있는 교회들에게 이 책은 말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더 이상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코로나 이후, 새로운 시대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교회에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건물'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이는 교회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 책이 그것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할 것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교회 시설은 바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29)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에 오고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활력과 건강의 증거라고 착각하며, 교인들이 바깥세상보다 교회 건물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일깨웁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내려진 교회 폐쇄 조치는, 그동안 많은 교회들의 초점이 내부로 향해 있었고, 교회가 스스로를 돌보는 데 시간과 인력과 활동, 돈을 집중하고 있었음을 보게 해주었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그 결과, 교인들은 교회 사명에 핵심적이지 않은 많은 일들로 지쳐가고, 교회는 배타적인 사교 모임으로 전락했고,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과 자원, 시설이 사실상 모두 교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지상명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말입니다(104).

 

"당신 교회의 주소는 우연이 아니다"(70).

많은 교회가 코로나 이후, 집중하고 있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온라인 예배'일 것입니다. 임시방편으로 생각하는 교회도 있고,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방식을 고수하는 교회도 있고,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며 더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교회도 있을 테지만, <코로나 이후 목회>는 교회가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선교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디지털 목회와 대면 목회, 모두 섬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코로나 이후 목회>가 더 강조하고 있는데, 디지털 목회에 대한 준비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목회적인 변화는 교회 시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설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지역 사회를 향해 교회 시설의 문을 열어야 할 때다"(36). <코로나 이후 목회>는 교회의 초점을 내부에서 외부로 옮기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목회의 기회가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현재 교회는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시급한데, 미국에서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지역 사회와 연결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 시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역 주민들이 교회에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어떤 교회는 교회 안에 지역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생일 파티방'을 만들고, 교인들이 자원하여 파티를 섬겨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교회 내에 '무료 빨래방'을 만들어 빨래방 이용자들을 위한 아이 돌봄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각 교회가 지역 주민의 필요를 조사한 뒤, 맞춤으로 지역 사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목회>는 이렇게 교회 시설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때, 교회가 교인들만이 특권을 누리는 그들만의 장소가 아니라, 지역 사회 '안'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책의 진단대로, 코로나 글로벌 팬데믹은 교회 시설을 더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사용할 기회의 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기도했다. … 그들은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다"(56).

<코로나 이후 목회>는 코로나 이후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정답 같은 전략을 가르쳐주는 책은 아닙니다. 그 세계는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이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부록>으로 '나눔을 위한 질문들'을 제공하는데, 이에 답하는 과정 가운데 코로나 이후 목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 교회 목회자들이 화상을 통해서라도 만나 토론을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 목회>는 그저 막연한 불안감 속에 기도하기 보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여 교회의 주인되시는 성령께서 무엇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지 구하며 기도하도록 돕습니다. 성령께서 이 책을 통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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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
이동원 지음 / 두란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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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천국뿐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도 다루고 있는가?"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며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다시 읽어주는 책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그동안 <천로역정>에 제기되었던 두 가지 비판을 언급합니다. 한 가지는, <천로역정>이 죽어서 갈 천국에만 몰두한 채 이 세상에서의 크리스천의 책임을 등한히 한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자기 혼자 구원 받기 위해 처자식 다 버리고 귀를 막은 채 '영생 영생' 하면서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6)에 대한 비판입니다. 순례자가 천국 가는 일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가족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는 이에 대해 답하는 책입니다. <천로역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천로역정>을 꼼꼼하게 읽지 않은 데서 초래된 오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천로역정> 2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독자들도 많은데, <천로역정> 2편을 읽는다면 쉽게 해소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단 일 인치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25).

화란(네덜란드)의 수상이었고, 기독교 사상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입니다.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 중요성을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왜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야 하는지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권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림을 뜻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몰두하던 삶에서 돌이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두 가지 속성, 즉 바로 지금 여기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궁극적인 미래,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 균형 있게 강조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교회는 죽어서 가는 천국에 몰두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지금 여기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다 보니 교회가 영원한 천국에 대한 강조를 잃어버리고 있음을 우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천로역정>은 다시금 저 천국을 향해 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지도록 힘쓰는 순례자(크리스천)의 사명을 일깨우기 알맞은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사역을 하면서 주님 앞에 가는 그 길을 준비해야 할까요?"(44)

이 책은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천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햇던 순례자들이 저 천국을 향해 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썼던 사역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 13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13가지 사역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하나님 나라와 13가지 사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의 빛으로 십자가 앞에 나오게 하는 전도 사역, 순종의 벽돌로 세워지는 교회 사역, 같은 믿음, 같은 신앙의 가치관으로 세워가는 가정 사역, 전신갑주를 입고 말씀과 기도로 싸우는 영적 전쟁 사역, 믿음의 기도로 일어나는 치유 사역,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손 대접 사역,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품은 사회 섬김 사역, 영의 양식으로 자녀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어린이 사역, 사역하는 시니어에 초점을 맞춘 노인 사역, 약자를 향한 돌봄 장애인 사역, 순례 여정의 승리를 위한 중보기도 사역, 그리스도께 올바르게 인도하는 성경 해석 사역,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하는 호스피스 사역이 그 13가지 사역입니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모두가 힘들고 어렵다고 호소하는 이 때에, 교회를 개척하며 예배당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중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 나라의 13가지 사역 중 영적 전쟁 사역이었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마귀'로 번역된 단어는 원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dia(사이에: between)+bolos(던지다)의 합성어로 관계(사이)를 파괴한다(나눈다)는 뜻이며, '참소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마귀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93). 우리의 싸움은 "관계를 파괴하는 자"와의 싸움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천국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하나님 나라의 13가지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은 우리의 교회가 '일' 중심, '사역'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던 독자라면 그에 대한 이 책의 답변을 들으며 새로운 눈으로 <천로역정>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는 비대면 예배로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있는 교회들이 우리 교회가 집중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어도 좋을 책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 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고민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변화의 시작은 변하지 않아야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를 아는 데서 출발한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저 천국을 소망하며 걸어가지만, 오늘 여기에 권능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순례자들에게 이 책을 지팡이 삼으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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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엘리트를 위한 서양미술사 - 미술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다
기무라 다이지 지음, 황소연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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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적어도 짧은 노래 한 곡을 듣고,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강렬한 그림 한 편을 감상하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몇 마디 분별력 있는 말을 해야 한다."

<파우스트>를 쓴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말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강렬한 그림 한 편을 감상한다는 것을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림, 미술이라는 것이 단순한 인간의 유희가 아니라, 그 안에 우리가 살아가는 온갖 이야기, 시대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추구하는 바(종교), 우리가 찾아가는 바(철학), 우리가 생각하는 바(사상), 우리가 살아가는 바(문화와 풍습), 우리가 활동하는 바(경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책, (비즈니스 엘리트를 위한) <서양미술사>의 저자 가무라 다이지는 그런 의미에서 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예술"이라고 말합니다(11). 단순한 자기 감상으로 그저 그림을 보는 것은 "전혀 모르는 외국영화를 자막 없이 보는 행위와 흡사하다"고 일갈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을 넘어,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춘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지금)을 살아가야 합니다. 정답이 없는 인생 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 길을 잃고 헤매이며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울 때, 앞이 캄캄하여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때, 우리 앞서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이 무엇을, 어떤 이야기를, 어떤 길을 새로이 남기고 갔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그래서 꼭 필요할지도,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사는 글로벌 리더의 '공동 언어'다"(9).

이 책의 저자 가무라 다이지는 우리가 <서양미술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가르쳐줍니다. 미술사는 글로벌 세계의 공동 언어이며, 그러니 글로벌 리더들이 꼭 갖추어야 할 교양이라는 점입니다. 미술을 통해 이야기가 가능하며, 미술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만나 소통을 하거나, 어떤 일을 같이 하려 한다면, 그 사람의 역사, 그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서양미술사>를 읽고 공부하는 일은 누군가의 역사이자, 한 민족의 역사이자,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은 알몸일까?"(21).

<서양미술사>는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도교, 르네상스와 회화의 시대, 프랑스 고전주의, 로코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산업혁명과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연대기별로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합니다. 미술 자체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시대에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시대로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보다 미술사는 곧 역사라는 것, 그리고 미술을 이끄는 거대 물결은 인간의 가치관과 경제 상황이라는 점이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미술이야말로 그 시대 권력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로벌 리더들의 교양 지식을 위해 집필된 <서양미술사>는 그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미술을 통해 말하여지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기본적인 소양, 즉 교양을 갖출 수 있도록 말입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읽으며 서양미술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집콕생활을 하며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은 분들은, 이 책 한 권으로 미술사 여행을 떠나는 좋은 기회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이 책을 계속 옆에 두고, 괴테의 말처럼 "날마다 강렬한 그림 한 편을 감상하듯" 그렇게 다시 잘게 쪼개어 읽어보려 합니다. 그래야 이 책에 담긴 지식, 이야기들이 오롯이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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