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 - 엄마가 준 상처로부터 따뜻하게 나를 일으키는 감정 수업
이남옥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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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시작,

엄마를 찾아갑니다

심리학 도서를 왜 읽느냐고 물어보면, 항상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재단해버리기 쉬운데,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나를 '이해'하는 기쁨을 넘어, 내 안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경험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참 고맙고 놀라운 책입니다.

최근 위기청소년을 전문적으로 상담하는 곳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 뒤에는 대부분 '불안'한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의 '불안'이 자녀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게 된 것이지요.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엄마의 중요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심리적 자원이 엄마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원인 모를 심리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나의 엄마'를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인 모를 분노와 두려움, 체념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더 이상 몰아세우지 않고, 온전하게 나 자신을 찾아서 내가 맺는 관계들이 평온하고 굳건해지는 방향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엄마'를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엄마와의 상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꺠닫고, 엄마와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와 깊이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13).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애착'의 관점에서 엄마와 나와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저는 불안정 애착 중, '양가적 저항 애착'에 가까워 보입니다. '양가적 저향 애착'은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이 아이가 필요할 때가 아니라, 엄마가 내킬 때 줄 때 발생합니다. 엄마의 마음이 내킬 때, 엄마의 상황이 될 때 사랑을 주면, 자녀의 마음에 결핍이 생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크게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2남 2녀 중 둘째로 자란 저에게는 차별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엄마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늘 오빠를 향해 있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마다 제가 장남의 역할을 할 때가 많지만, 그럴 때에도 저에 대한 고마운 마음보다는 늘 오빠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커서 칭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결혼 후에도 오빠는 여전히 퍼주어야 하는 자식이지만, 저에게는 무엇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십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무엇을 해줄 때 기뻐하시면서, 저에게는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는 모습을 볼 때, 한번씩 서러움이 폭발하곤 합니다.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부모님의 차별이 자녀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차별은 '모두에게'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미분화된 과한 사랑이 사랑을 덜 받은 것보다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146)라는 설명을 오래 곱씹어 보았습니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적인 오빠를 보며, 엄마의 차별적인 사랑이 어쩌면 오빠 인생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그것도 안타까워지더라고요.

엄마가 저를 미워하거나 방치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양가적 저항 애착'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2남 2녀를 키우며 살아온 엄마에게 저는 무엇을 졸라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우선순위에서 제가 꼴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뗴를 써도 소용 없다고 일찌감치 단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나를 새롭게 이해하는 엄마와의 대화" 편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을 바꾸어 보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 없었구나. 난 참 사랑을 못 받았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부모는 나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었구나"(130)라는 부정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억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부모와의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볼 것을 권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늘 서러운 기억만 곱씹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노트를 펴고 부모님과의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열심히 생각을 해보니, 엄마가 저에게 첫 성경책을 선물하시며 "사랑하는 큰딸에게"라고 써주셨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아빠가 퇴근하시면서 저에게만 예쁜 머리핀을 사다주셨던 기억도, 상장을 받아왔을 때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자랑을 하셨던 날도 기억났습니다.

나에게 주는

특별한 예언

그리고 이렇게 따뜻한 기억을 적어내려가다 알았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저는 부모님께 무엇을 잘 요구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늘 부모님이 알아서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제 욕구를 표현하는 일에 참 서툴다는 것도요. 엄마는 지금도 오빠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나르십니다. 저는 그런 엄마에게 한번씩 외식을 시켜드리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이제는 저도 한번씩 무엇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해봐야겠습니다.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부모가 싶어 놓은 말이 아닌, 나를 위한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150)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엄마, 아빠가 준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좋은 것들도 숨어 있다고 알려주며 그것을 발견해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내 안에 있는 책임감의 뿌리, 시를 좋아하는 마음, 식물을 키우는 습관, 예절, 까다롭지 않은 식성,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 그리고 평생 그리지 않아도 되는 짙은 눈썹, 숱이 많은 머리 등등 좋은 것을 많이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은 자녀를 사랑으로 지켜보면서 한 인간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게끔 지원해주는 엄마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연약하고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울음을 토해내던 사람들에게 부와 명예는 얼마나 무력하던지요"(59).

이 책을 읽으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나는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고 생각해 움츠려 있던 마음이 조금은 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 하듯 따뜻한 애정 표현은 안 하셨지만, 그보다는 늘 존중해주셨다는 것도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상담은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이라"(160)고 말합니다. 상담은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가해자도, 절대적인 피해자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며"(27), 내 안에 숨어 있는 은혜를 일깨워 스스로를 '은혜받은 자'로 인식하게 하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상처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덕분에 마음이 힘을 얻었고요. 우리 안에는 부정적인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공존합니다. 부정적인 기억이 더 많다고 해도 내가 행복한 기억에게 먹이를 더 많이 주면, 작은 행복이 더 크고 강한 상처를 이길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상처를 대면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분도 있겠지만, 따뜻하게 잘 읽히는 책입니다. 나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기 원하는 본들에게 추천합니다.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내 몸처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많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고, 그럴 만한 힘을 가진 강력한 존재입니다"(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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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 - 예수님이 왕이신 가정의 비밀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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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서야 제가 얼마나 준비 없이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저는 참 문제가 많은 남편과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고 인정하기 싫었습니다"(7).

'위기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소위 '문제아'들을 만날 때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믿는 분'들이라 교회가 싫고, 예수님이 싫고, 부모가 더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을 볼 때마다, '아, 그 가정은 내가 아버지이고 남편인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상관이 없구나. 내가 어머니이고 아내인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별개인가 보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 복음 외에는 이 병든 가정, 상처난 관계를 치유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은 왜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가정을 회복시키고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과의 24시간 동행하는 영성일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유기성 목사님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이 가정이고 부부사이"(9)라고 단언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490번이나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수의 곱이므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숫자적으로만 계산해서 490번이라 할지라도 "490번씩이나 계속 용서할 인간관계"는 바로 "부부 관계"라는 것입니다(113-114). 이 말씀을 가만 곱씹어 보면, 나의 민낯, 신앙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정이야말로 '십자가' 없이는 제대로 세워질 수 없겠구나 하는 사실이 날카롭게 깨달아집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가정을 살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십자가와 만나면 고백하게 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우리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위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하는 고백이 왜 우리 가정을 살릴까요?

내 주관, 내 소원, 내 고집이,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고, 누구보다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의 교훈과 훈계"가 아니라, 자신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열심을 내기 때문에 오히여 자녀를 망치기 쉽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남편을 변화시키고 하기 때문에 남편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오히려 너무 노력해서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입니다. "왜 주님이 우리 가정에는 역사하시지 않는지 궁금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20-21).

그러니 우리 가정이 십자가에서 살아나려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 변화시켜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주님, 저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저를 통해서 역사하세요"라고 말입니다.

 

 

                             

"싸우기까지 할 정도로 무던히 노력했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비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31).

<십자가로 살아난 가정>의 두 번째 회복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고집대로 가정 문제가 풀리지 않을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충분히 머무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니까 주님이 우리 가정 안에 새로워지는 역사를 이루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주님의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렇게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질 때, 주님이 밀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말하기도 하고 행동하기도 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그때가서야 주님 앞에 울고불고 떼를 쓰며 왜 가정을 변화시켜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는 우리 모습이 그려져 뜨끔했습니다. "행복을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입니다"(37).

<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이 제개 준 가장 큰 충격은 우리가 "너무 노력을 해서" 가정이 불화하고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잘해보자고 열심을 낸 것 때문에 오히려 삶 전체가 뒤틀리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더 이상 인간적인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각오해야 합니다"(101)라고 권면합니다. 노력할수록 지치기만 하고, 원망만 더 생기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는 십자가 복음이 주는 평안과 자유함을 다시 한번 뜨겁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내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한 몸이니, 내 생각과 열심과 계획을 다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사는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가족을 변화시켜고 노력하지 말고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101).

믿음은 오히려 노력하지 않고,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완전히 맡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말씀을 살아내는 순종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은 복음이 '나'를 구언해주신 그 은혜의 원리가 우리 가정 가운데도 그대로 작동될 수 있으며,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이 책의 에필로그를 쓰신 박리부가 사모님은 "이 책의 제목은 십자가를 만나고, 그 복음으로 가정이 살아난 가정들의 문패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행복이요, 복음의 위대함이요, 가정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멋진 고백이 모든 믿는 가정들에 고백되어지면 좋겠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이 다 지나기 전에, 모든 믿음의 가정이 이 책을 함께 읽고 기도할 수 있다면,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귀에게 통쾌한 한방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너진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든 교회에 뜨겁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해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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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과의 대화
이시형.박상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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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 한 송이에도 전 우주의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비를 맞고 뜨거운 자외선과 구름이 지나가고 바람에 흔들리며, 밤에는 차가운 이슬이 내리고……. 하찮은 꽃 한 송이도 이렇듯 전 우주가 참여한 위대한 존재입니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우주적 존재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34).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독자들에게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빠르게, 더 쉽게, 더 깊이 와닿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제가 사명을 찾아갔던 과정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의미치료'와 참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는 한마디로 '어느 때건' 모든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삶이 의미는 무엇인가>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일깨우는 바는 이것입니다. 모든 의미를 잃고 내 인생은 끝장났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지독한 역경, 그 힘겨운 시련 속에서 오히려는 내 삶의 의미가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속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창조주의 손길로 빚어진 나에게도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 내게 생명이 있는 한 살면서 나만이 실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답은 나의 고난, 내가 경험한 바로 그 시련 속에 내 삶의 의미, 나의 사명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삶의 의미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151)라고 말하는 의미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너는 꿈이 뭐니?", "무엇이 되고 싶니?"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꿈을 꾸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그 꿈이 좌절되는 순간을 고난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삶의 아이러니는 바로 나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바로 그 역설을 다시 깨닫고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의미치료'가 가진 믿음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발견되어 실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 물음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가도록 돕습니다.

1.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나?

2. 나의 일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디 있는가?

3. 그 누군가, 무언가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의미치료의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독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돕는 상담가가 되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울수록 역경에 처할수록 행복은 참으로 하찮은 일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풍요로워지면 당연 심리에 빠져 감사를 모르는 저절의 품성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아, 내가 고난 가운데 더 많은 감사를 배웠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귀뚜라미 소리에 잠을 잊은 채 밤을 지새는" 섬세한 감성이 오히려 시련을 견디는 강력한 힘이 되어준다(57)는 사실도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슴 뭉클했던 이야기는 '실험실에서 자란 보리' 이야기였습니다(260-261).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사방 30센티미터의 나무통에 보리를 한 톨 심었는데, 보리 몇 알이 겨우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통을 깨고 보리의 뿌리 길이를 재봤더니 서울과 부산을 열네 번이나 오갈 수 있을 만큼 길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리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 보리는 기어코 열매를 맺으려고 잔뿌리를 구석구석 내려서 수분과 영향분을 최대한 흡수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어진 여견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죠. 그런데 누가 그 보리를 보고 "야, 너는 왜 이렇게 형편없냐?"는 소리를 할 수 있겠어요?"(261).

이 이야기를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전도자라도 된 듯,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 실험실의 보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위대함이란 많은 열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 삶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알기를 원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향해서도 함부로 '비루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상미 선생님이 계속 강조하는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 말이 주는 깊은 울림이 내가 가진 강함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 16:6)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절망에서 건져올려주는 책입니다. 특별히 꿈이 부서져버려 고통스러운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때가 바로 진정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라는 사실에 눈 뜨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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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낙심하는가? - 어떤 상황에도 은혜는 가까이 있다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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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 "내 영혼아, 대체 어쩌자로 낙심하느냐?" 하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즉 남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기만 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라는 것입니다. "왜 이러느냐?" 하고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에서부터 기도가 사작되기 때문입니다"(19-20).

요즘 '포스트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세상은 '코로나'를 기준으로,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코로나 이전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 크게 달라질 환경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더 심각한 위기와 어려움을 맞이할 것이라는 전망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마치 '불안'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온 땅을 떠돌아다는 것만 같습니다.

실체 없이 다가오는 이 불안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현대인들에게 꽤 중요한 문제입니다. 상담센터에서 일하는 분을 통해 모든 관계의 어려움 안에는 '불안'이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심한 현대인들에게 '낙심'은 그저 상심한 마음 정도가 아니라, '정신 신경증적 질환'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낙심을 방치하면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낙심 때문에 겪게 되는 불안증을 내버려 두면 신앙까지 흔들리게' 되는 경우도 의외로 높다고 합니다(16). 조정민 목사님은 <왜 낙심하는가?>라는 주제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왜 낙심하는가?>를 읽으며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부분은, 나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조정민 목사님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5)라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낙심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일어줍니다. 불안에 떠는 내 영혼을 향해 "내 영혼아, 왜 불안해하니?", "내 영혼아, 너 왜 낙심하고 있어?" 이렇게 말을 걸어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저도 제 영혼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걱정이 될 때마다, "내 영혼아, 너 왜 걱정하니?"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도 불안하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시면 불안하지 않겠니?"라고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대부분과 불안과 낙심의 실체는 거짓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안으로 우리를 속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할 때, 우리는 낙심한 이유를 찾을 수 있고, 낙심한 이유를 찾아내면 내 영혼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일이 더 쉬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대화하기 시작하며 그동안 내가 누구에게,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심한 영혼에게 말을 거는 작업은, 내 영혼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를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만 우리 소망을 둘 때, 낙심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임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93-94).

<왜 낙심하는가?>는 말씀의 위력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결국, 말씀 안에서 우리 인생이, 우리의 고난이 해석되어질 때, 모든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시선이 옮겨지고, 그렇게 시선이 달라질 때, 우리의 태도가 역전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결국 <왜 낙심하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가의 싸움이며, 내 마음속에 누구를 초청할지를 결단하는 싸움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인들에게 낙심의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굿뉴스(good news)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천국에는 우리가 거할 곳이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굿뉴스(gospel, 복음)로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이 얼마나 무시하며 조롱하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167).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부분은 사도 바울의 전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만큼 낙심에 빠질 만한 이유가 많았던 사역자도 없었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낙심에 빠져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복음의 전진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가 가진 복음의 소망이 그를 단단히 붙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을 비워내고 대신 성령님을 나타냄으로써 낙심을 이겨낸 바울(183)처럼 나도 전진하리라 다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과거의 후회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더 이상 과거지향적인 태도가 아니라 미래지행적인 태도로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과거가 현재를 끌어당기는 삶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끊임없이 이끌어 가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107-108).

조정민 목사님은 <왜 낙심하는가?>에서 회개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회개란 과거의 후회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회개의 정의를 다시 묵상하며, 과도하게 낙심하여 주저 앉아 있는 것또한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무기력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더 이상 다른 세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왜 낙심하는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것, 영원한 것, 하늘의 것을 바라보도록 도와줍니다. 우리에게는 왜 낙심할 이유가 없는가를 말입니다.

지금 세상은 더욱,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들 때문에 낙심에 빠지기 쉬운 환경입니다. <왜 낙심하는가?>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굳게 붙들 수 있는지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여 주저 앉아 있을 존재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도우며 소망의 이유를 전해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처럼 소란하고 불안한 때에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복음으로 무장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총 7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설교가 끝날 때마다 성도들이 가진 문제에 대해 신앙상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설교만큼이나 이 Q&A도 상당히 유익했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복음, 영원한 소망을 담은 책입니다. 모든 교회가 흩어져서 이 책을 읽고, 만나서 깨달은 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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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꿈을 그리다 - 반 고흐의 예술과 영성
라영환 지음 / 피톤치드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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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늘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성경과 세상, 성직자와 화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지만 반 고흐는 이 둘을 하나로 연결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다"(77).

예술은 비극 속에서 피어나는 꽃일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린 예술가는 '루벤스' 한 사람 정도입니다.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은 작품에 더욱 강렬한 지문을 남기기 마련이라, 작품만큼이나 우리는 예술가들의 생을 이야기하기 좋아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예술가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스스로 귀를 자른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천재, 비극적인 죽음과 같은 것"(17)이니까요. 그가 남긴 작품보다 "광기 어린 천재로서의 반 고흐의 신화"에 더 매혹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책은 우리가 간직한 바로 그 반 고흐의 신화에 반기를 드는 책입니다. 화가인 그가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과 우리가 보는 그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보고 싶은 반 고흐와 반 고흐 자신이 보여 주고 싶었던 반 고흐 사이의 괴리를 좁히려는 시도"(17)라고 밝힙니다.

반 고흐가 되어 반 고흐를 보기 원하는 이 책은, 먼저 '반 고흐 해석의 난점들'을 다시 탐색합니다.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반 고흐는 과연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흥분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알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고갱의 증언 때문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저자의 추론을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반 고흐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작품에 대해 얼마나 큰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모든 사람들이 빈센트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가 느꼈을 고독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어. 빈센트가 내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네게 알리고 싶어. … 그 겨울 이후 나는 혼자 있어도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빈센트가 말한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는 삶',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아"(95).

형 빈센트 반 고흐가 죽고, 6개월 뒤 그의 동생 테오도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그 속에서 태오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93-95). 그렇게 편지를 읽다가 진정한 반 고흐를 발견한 요한나 덕분에 반 고흐의 작품과 삶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고요. 요한나가 발견한 '진정한 반 고흐의 삶'은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반 고흐는 단지 안락한 삶보다 자신의 열정을 불사를 일, 삶의 의미를 찾기 원했고,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안락함보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을 택했던 반 고흐는 "탄광촌에서 대접받는 목회자로 살기보다는 광부들과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147)했으나, 그가 속한 복음교회는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성직자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맙니다.

성직자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광부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처럼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성직자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된 후, 고흐가 발견하게 된 새로운 소명은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가난한 자를 섬기고자 했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부러진 나무조차 아름다울 수 있음"(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여주었던 고흐에게, 그림은 소외된 자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복음이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의무를 일깨우는 일종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세상이 읽기 원했던 고흐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깊고 참된 사랑이 있어야 해.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며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힘이자 신비한 힘으로 감옥을 열게 되는 거지.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아. 그러나 사랑이 부활하는 곳에 인생도 부활하지"(182).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한 사람, 불쾌한 사람,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 그래 좋아.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것이 내 바람이야"(180).

<반 고흐, 꿈을 그리다>는 고흐 자신의 소명의 빛 아래서 그의 삶과 예술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성직자를 꿈꾸었을 때도,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했을 때도, 고흐가 꿈꾸었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는 것!

미치광이 천재 예술가가 아니라, 소명의 빛을 따라 울며 씨를 뿌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고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따라간 진정한 예수의 제자였다는 것이 제 삶에 작은 진동을 일으킵니다. 이제 제게 고흐는 "병들고 임신한 데다 배고픈 여자"가 한 겨울에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그 여인을 외면할 수 없어 기꺼이 자신의 가족(아내)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크리스천, 이름 없는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삶을 너무도 사랑하느 화가로 기억될 것입니다. 교회가 그의 순수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 덕분에 한 사람의 성직자를 잃었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화가를 얻었다는 것이, 제게는 더 큰 비극이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신비요, 인생의 아이러니로 다가옵니다. 

반 고흐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모습말고, 반 고흐가 보여주기를 원했던 모습으로 반 고흐를 다시 만나보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들이 고흐에게 등을 돌렸을 때보다,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지금을 고흐는 더 슬프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항상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이웃이 되어 그를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고흐를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이 순간, 비로소 그를 위로할 수 있었고, 다시 그에게 위로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 고흐, 꿈을 그리다>, 누구보다 먼저 교회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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